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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미로 - 신화.꿈.상징의 원형을 통한 삶의 탐색
제레미 테일러 지음, 이정규 옮김, 고혜경 감수 / 동연출판사 / 2009년 10월
평점 :
한번 읽기 시작한 책을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러나 이 책은 읽을수록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 속도를 내지 못하다 오랜시간동안 포기해버렸다.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내내 찜찜한 기분을 안고 있다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다시 펼쳐든 책은 여전히 기대와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래도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되자 읽는 것이 조금은 수월해졌다. 사실 내용 자체가 어려운 책은 아닌데 애초에 기대했던 바와 달랐던게 문제였다. 그러나 책 소개에 버젓이 꿈과 신화가 숨쉬는 미지로 떠나는 여행이란 문구가 적혀있는데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내 실수였다. 인간은 늘 보고 싶은 것만 본다더니 그 말이 맞다. '꿈과 신화'에서 꿈은 쏙 빼놓고 멋대로 신화라는 두 글자에만 집중하고는 평소 관심있던 그리스신화와 관련된 책이라고 철썩같이 믿어버렸으니 말이다. '신화와 꿈'이 아니라 '꿈과 신화'로 적혀있다는 걸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다.
더군다나 작가가 정의한 신화의 개념과 내가 생각한 신화의 의미가 많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치 못한 것 역시 나의 실수였다. 작가는 신화란 단어를 가장 포괄적인 개념으로 생각했고 나는 단순히 신화하면 떠오르는 대상 그대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에 둘 사이의 간격이 너무도 컸던 것이다. 그 차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꿈과 신화의 통로로 들어가기에 앞서 작가가 미리 언질을 주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도 전에 일찌감치 의욕을 상실해 버린 부분도 있었다. 작가는 신화라는 단어를 신성한 서사라고 표현하며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고 밝힌다.
P15.
인도유럽어에서 신화는 '입'과 어원이 같고, '의미있는 말'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렇게 보면 깊이 믿고 있는 신념이나 깊이 느낀 심리 영성적인 체험에 어떤 구체적인 모양을 부여하는 전동적인 이야기는 모두 신화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깊은 신념과 체험을 바탕으로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상징적인 모양을 줄 수 있는 모든 지어낸 이야기 또한 그것이 오랫동안 이름 없이 전해진 구전 전통이더라도 '신화적'이다.
바람둥이 제우스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등장해 인간을 농락하고 유치하게 싸워대는 그리스신화만을 떠올렸던 나의 무지함이
초래한 결과가 이 책에 대한 나의 잘못된 기대였음을 깨닫고 몹시 당황스러웠다.
실제로 읽어 본 결과 이 책은 그리스로마신화와는 거리가 멀다. 저자는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오랫동안 꿈 작업에 매진한 사람으로 꿈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의 다양한 심리와 가치에 주목한다. '살아있는 가장 경험많고 통찰력이 뛰어난 꿈 탐험가로' 불릴 정도로 그의 연구는 특별하다. 꿈을 분석한다는 게 언뜻 생각하기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꿈 속에 나타나는 일들은 분명 이유가 있고 저마다 뚜렷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듯 하다.
꿈은 우리 삶의 전반을 반영하며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영향을 미치는 마음 깊은 곳의 감정과 신념, 삶의유형들도 드러내 보여줍니다. 꿈은 아처럼 어주 깊은 곳에 자리잡고 서 우리가 깨어있을 떄 경험하는 것들의 바탕이 됩니다. 삶의 의미와 중요성을 의식에서 보다 잘 이해하는 데 꿈은 더할 수 없이 좋은 통로입니다.
-작가의 말(꿈 작업에서 지켜야할 것)중에서-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잠재의식 속에 자리한 경험과 생각들이 꿈을 통해 나타난다고 이야기한다. 내 경우에도 이유없이 꿈을 꾸는 경우보다 왜 이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짐작가능한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에 꿈은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인 결과물이란 생각이 든다. 저 멀리 의식의 바다를 헤엄쳐와 잠이 든 머릿속을 불시에 침투해 오는 꿈이란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를 돌아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동화와 전해내려오는 민담등 다양한 이야기 속에 나타난 양상을 분석한다. 같은 이야기더라도 각 나라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결말을 보이기도 하는데 보편적 유형으로 존재하는 등장인물이 이야기 안에 담겨진 인간의 내면과 하나의 원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마법에 걸린 개구리나 신성한 아이, 신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납치사건, 그밖에도 요카스타여왕의 이야기처럼 생소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평소에 알고 있었거나 혹은 그렇지 못한 이야기까지 많은 동화와 민담, 신화등을 통해 이 많은 이야기들이 궁극적으로 담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성한 아이를 예로 들자면 크리슈나, 무하마드, 헤르메스, 헤라클레스,아스클레피오스, 호로스 등을 들 수 있다. 이 신성한 아이들은 모두 비슷한 탄생 비화를 지니고 있는데 축복받은 탄생이라기 보다는 박해에 가까운 탄생으로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기적적으로 헤쳐나간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의 탄생도 신성한 아이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성한 아이의 원형은 꿈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신성한 아이는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수준의 의식으로 도달하는 가능성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작가가 꿈 작업을 통해 만난 한 여성의 꿈 이야기는 이러하다.
옷 서랍을 열었는데 아기가 있었고, 20년 전에 그 아기를 서랍에 넣었던 기억이 나자 놀랍고 끔찍했다고 한다. 아이를 방치한 자신이 두렵고 부끄러웠으나 아이는 무사했고 다행히도 20년 전과 거의 다름 없는 모습으로 눈을 맞추며 "목이 너무 말라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야기 자체로만 봐서는 괴기스럽고 무서운 꿈 같지만 그 안에 담겨진 의미는 꿈을 꾼 여성의 미래에 대한 꿈과 관련이 있었다. 사실 그 여성의 장래희망은 작가였으며 꿈 속에서 보았던 서랍장은 실제 그녀의 집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서랍 안에 20년 전에 쓰다만 원고를 보관해 두었음을 알게되자 그녀가 꾼 꿈이 이해가 되었다. 꿈 속에서 목이 마르다고 외친 아기는 20년 전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미는 동안 옆으로 밀쳐놓은 미완성된 소설이자 그녀의 묻어둔 꿈이었던 것이다. 현실에서 아이를 키우며 지낸 20년의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이 자립할 나이가 될 무렵 이 꿈을 꾼 것 역시 꿈 속의 아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애초에 가졌던 기대와 다르다고 실망했던 것이 무색하게 책을 읽을수록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각 나라마다 전해져오는 신화를 만나고 타인의 꿈을 엿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은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또다른 즐거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