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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초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양억관 옮김 / 이상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트릭'보다 '동기'를 중요시하는 사회파 추리소설. 그런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부이자 일본 문학의 거인으로 불리우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이기에 책을 잡은 순간부터 사건 자체의 숨겨진 비밀을 궁금해하기 보다는 그저 흘러가는대로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하고자 노력했다. 이야기가 중반으로 접어들수록 하나 둘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들간의 퍼즐을 내 나름 머릿속으로 맞춰보며 어렴풋한 이야기의 윤곽이 드러나기를 기다렸다. 트릭에 초점이 맞춰지는 (밀실 살인류와 같은) 추리소설에서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때처럼 조금이라도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답을 얻기 위해 조바심을 내는 것이, 마치 책을 읽기보다 내 추리능력을 테스트하는 것 처럼 느껴져 여유를 갖고 책을 읽기가 어렵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기에 굳이 사회파 추리소설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적 상황에 몰입하며 찬찬히 독서를 즐기고 싶은 날에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애를 써야 하는 트릭중심의 본격추리소설보다는 히가시노게이고나 미야베미유키와 같은 작가의 이야기가 끌리는 것이 사실이다. 주어진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인물의 시선에 대입해가다 보면 마침내 사건의 동기에 초점이 모아지고 결국에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사연에 도달하게 되는 이야기말이다. 제로의 초점 역시 특별한 트릭이 존재하지 않는 철저한 '이야기'중심의 이야기로 '어떻게 죽였을까' 보다는 '누가, 어째서 죽였을까'에 의문을 갖게 한다.
이야기 전면에 나서 사건을 풀어나가는 이는 사라진 겐이치의 아내 데이코다. 남편이라고는 하지만 오랜 시간 알아온 사이도 아니고 연애기간을 길게 가진 것도 아니다. 그저 우연한 기회에 돌아가신 아버지 친구에게 소개받아 소위 말하는 '중매결혼'을 한 터라 남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나이, 학력, 현재의 직업, 가족으로는 결혼한 형님이 하나 있다는 정도. 그것이 데이코가 알고 있는 겐이치란 사람의 전부였다. 서둘러 결혼이 진행되는 바람에 선을 본 후에도 딱히 데이트란 걸 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데이코는 자신뿐 아니라 대부분의 남녀가 서로에 대해 잘 모른 채 결혼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알아가게 되는 것이리라 생각해 별 불만을 품지 않는다. 남편 겐이치의 특수한 상황이라면 도쿄와 가나자와를 오가며 생활해왔다는 것이다. 일 때문에 도쿄에서 열흘을, 그 외 20일은 가나자와에서 생활해 왔지만 이는 결혼을 기점으로 도쿄에서 생활 할 수 있도록 회사의 발령을 받은 상태였다.
그런 겐이치가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가나자와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러 내려간 후 실종 된다. 아내 데이코에게는 12일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겼지만 약속된 날짜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자 겐이치를 찾기 위해 데이코는 직접 가나자와로 향한다. 남편의 후임으로 가나자와에 부임한 혼다는 데이코를 도와 행방이 묘연한 겐이치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겐이치의 형 소타로 역시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않게 행동하지만 실종기간이 길어지자 동생이 사라진 가나자와로 향한다. 이상한 점은 자신이 동생을 찾으러 가나자와에 간다는 사실을 데이코는 물론 자신의 부인에게도 숨겼다는 것이다. 가나자와에 도착한 그는 동네 세탁소를 돌며 무언가를 알아내려 하지만 별 소득을 얻지 못하고 혼다와 데이코는 소타로의 이상한 행동에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이치의 형 소타로는 살해된다. 츠루기초의 여관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청산가리가 든 위스키를 마시고 살해된 소타로.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목격된 전차에 화려한 차림을 한 정체불명의 여인이 함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혼다와 데이코는 겐이치의 실종과 소타로의 죽음이 그 여인과 무관하지 않음을 직감한다. 데이코는 남편 겐이치가 결혼 전 가나자와에서의 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무로타 부부를 만나게 되고 무로타 회사의 안내 창구에서 독특한 영어를 사용하는 여인과 마주친다. 그리고 혼다는 겐이치의 실종에 얽힌 의문을 풀어가던 중 업무차 도쿄로 떠나게 되고 데이코에게 돌아올때에는 사건의 핵심을 파헤칠 수 있을거란 확신에 찬 말을 남긴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혼다 역시 소타로와 같은 수법으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청선가리가 든 위스키를 마시고
겐이치의 실종에 가까이 다가간 소타로와 혼다가 모두 죽음을 맞은 가운데 홀로 남은 데이코가 사건의 열쇠를 쥔 인물과 살인의 이유를 찾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서서히 드러나는 겐이치의 과거와 주변인물들의 이야기는 사회파 추리소설다운 면모를 드러내고는 있으나 그 동기가 조금 약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이야기의 말미에 데이코는 범인에게 연민을 느끼며 자신 역시 그런 상황이었다면 범인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했을거라 말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 생각에 동조하기 어려웠다. 물론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해 함부로 장담하는 것은 어리석고 편협한 사고라 비난 할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범인을 동정하기에는 살인의 이유가 지극히 이기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살인이었다. 비참하게 죽어간 가족을 대신한 복수만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살인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교과서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독자가 느끼기에 범인이 처해진 상황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고자 절박한 선택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려거든 인물의 사연 즉, 범인이 그러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여주는데 조금더 시간을 할애했어야하지 않나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은 사건을 풀기 위한 두뇌 싸움을 필요로 하지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데이코가 실종된 남편을 찾으며 겪었던 일들을 풀어놓는 동안 독자는 그저 담담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눈에 보이지 않던 인물들간의 연결고리가 채워지는 것이다. 극적인 사연과 엄청난 비밀을 기대한다면 만족하기 어렵겠지만 추리소설이 지니기에 적당한 반전과 적당한 사연이 존재하는 이야기였음은 분명하다.
'OO의 내면을 생각하면 할수록 데이코의 가슴에서는 연민의 정이 솟구쳤다.
OO가 자신의 OO를 지키기 위해 살인을 범하기는 했지만, 아무도 OO의 동기만큼은 저주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 입장이었더라면 데이코 자신도 OO처럼 행동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 제로의 초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