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의 잭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게이고의 소설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지막 장을 덮은 내 머리에 떠오른 의문은 이것이었다.

히가시노게이고란 작가를 좋아하는 나는 매번 그의 신작이 나올때마다 그에게 기대하는 부분이 분명하게 있었다. 혹자는 책 한권에서 (그것도 흥미위주의 추리소설에) 뭘 그리 얻고자하냐며 비웃을지도 모른다. 허나 우스울지 몰라도 내게 있어 히가시노게이고라는 작가는 단순히 미스터리소설을 재미있게 쓰는 작가 그 이상이었다.
처음 백야행이라는 작품을 읽었을때, 그리고 다분히 개인적일지 모르지만 내가 그의 작품중 최고로 꼽는 악의를 읽었을때,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탄해 마지않는 용의자 X의 헌신을 읽었을때까지만 해도 그에 대한 나의 굳건한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최근들어 그가 내놓은 일련의 소설들로 그 믿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음을 지금까지는 부인해왔지만 말이다.

허나 그가 내놓은 신작 백은의 잭으로 나는 확인하고 말았다. 요 근래 그의 다작이 작품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다른 독자들의 비난을 더이상은 감싸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실제로 그는 독자들이 소화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내고 있었고, 나 역시 그의 작품이 이전만 못하다는 것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았던 것은 잊기 힘들만큼 강렬한 전작들이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대부분 인간 본질에 대한 그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추리소설을 비웃으려거든 히가시노게이고의 소설을 읽어보고 말하라며 소리 높여 열변을 토하던 내가.... 스스로 추리소설에 너무 큰 의미 부여를 하고 있지는 않았나 다시 생각해볼 정도였다면 책에 대한 실망이 어느정도였는지 표현이 될지 모르겠다.
물론 재미있게 읽은 사람도 많을 터인데 너무 인색한 평이 아니냐고 한대도 할말은 없다. 그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 말 밖에는...(이 작품이 다른 작가의 책이었다면 나 역시 그냥저냥 재미있게 읽었을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책이 실망스러운 이유는 다름아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

 백은의 잭의 배경이 되는 곳은 흰 눈으로 뒤덮인 스키장이다. 아무래도 배경이 이렇다보니 다른 독자들은 설원 위를 가르는 스키음과 그곳에서 펼쳐지는 숨막히는 추격전을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나의 기대는 다른 것에 있었다. 히가시노게이고의 소설에는 어김없이 추리를 뒤엎는 반전이 있을 것이고, 그 반전을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 납득하도록 만들 것인가 하는 기대가 그것이었다. 한마디로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사연'이 궁금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야기에는 독자를 몰입시키는 힘이 있었고, 그 힘에는 인물이 벌이는 범죄 행위의 타당성이 바탕이 되어있었다. 비록 범인이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인 중죄를 지었다하더라도 그 타당성이 외면하기 어려운 진실을 담고 있었기에 독자는 묵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역시 그랬다. 그의 소설을 읽을때면 도덕적 잣대를 대기 이전에 인물이 가진 사연에 동정이 먼저 갔던 것이 사실이다. 용의자X의 헌신과 방황하는 칼날에서처럼 말이다. 물론 언급한 두 작품과 백은의 잭을 비교하는 건 내용 자체로 봐서는 무리가 있다. 끔찍하게 죽은 딸의 복수를 위해 제 손으로 범인을 처단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와 스키장을 폭파하겠노라 협박하는 범인의 이야기는 분노의 차원이 다를 수 밖에 없으니까.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백은의 잭을 집필한 작가 히가시노게이고를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은 전작과는 확연히 다른 사연의 스케일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책을 쓴 사람이 정말 내가 아는 히가시노게이고가 맞나 싶었다) 작가 스스로가 이번 소설은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썼음을 밝히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그가 왜 이렇게밖에 이야기를 풀어낼 수 없었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추리력이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닌 내가 중간에 범인을 알아챌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작가가 구성에 허술했다거나 치밀하지 못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작가 스스로 쉬운 길을 택한 것이다. 독자의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는 인물들이 너무도 뻔하고 당연한데다가 별다른 복선 없이도 인물의 묘사만으로 범인이 쉽게 짐작된다. 추리소설의 묘미라고 할 수 있는 작가가 파놓은 함정자체가 별로 없다고 봐야겠다. 작가의 실수로 독자가 일찌감치 범인을 간파해낸게 아니라 애시당초 독자에게 주어진 선택의 범위가 좁았고 그에 비해 단서는 많았다고 해야할까..게다가 범인의 동기라는게 미약하기까지 해서 이해나 납득을 요하지도 않는다. 

책을 중반쯤 읽었을 무렵 지금까지 나온 인물이 전부라면 반전은 기대하지 말아야겠다 싶었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물론 진짜 범인을 막기 위한 또다른 범인의 존재는 예상에 없던 인물이었고, 그 인물로 인해 책을 읽는 내내 품었던 가장 큰 궁금증까지 한순간에 풀어지기는 했다. 이 부분에서 히가시노게이고다운 사연 엇비슷한 것이 살짝 보였으나 이 역시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에 내가 내렸던 섣부른 판단이 틀렸으면 좋았으련만 마지막까지 그대로 이어져 또 한번 나를 실망시켰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모든 것이 영화화를 위해서가 아니였을까 짐작한다. 제한된 시간 안에 영상으로 담기 위해서는 사연에 주목하기보다 영상미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작가는 설원 위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추격전에 꽤 긴 시간을 할애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스키마니아라는 자신의 장점을 소설 안에 녹이기 위해 그의 해박한 스키 지식이 동반되었고, 그 덕에 스키틑 타본 적도 없고 탈 생각조차 없었던 내가 별 어려움 없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더군다나 아무리 짜릿해보이는 영상을 봐도 스키에는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던 내게 '스키가 그렇게 재미있나' 하는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으니 어떤 면에서는 성공했다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작품으로 인해 히가시노게이고라는 작가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졌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의 작품이 예전과 다르다는 세간의 평을 보기좋게 뒤집어주길 바랐던 신작 백은의 잭은 작가의 작품 세계가 무너졌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그럼에도 다음 번에 나올 그의 새 책을 이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디 나를 경악케했던 악의를 집필했던 히가시노게이고로 돌아오길 바라는 심정으로말이다. 그만큼 히가시노게이고의 소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기에 그의 진짜 이야기에 대한 미련이 남는지도 모르겠다. 멀지 않은 미래에 나는 실망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또다시 그의 책을 집어들 것이다. 다만 그때는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겠지만...

독자들이 그에게 바라는 것은 많은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이야기임을 작가는 정녕 모르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