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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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는 항상 독자를 의외의 이야기로 빠져들게 만드는 작가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도, 피프티 피플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책 지구에서 한아뿐은 내가 좋아한 두 권의 책보다 그 정도가 더 높다. 이번 이야기의 스케일은 무려 우주까지 확장된다.

 

농담이 아니다. 지구에서 한아뿐의 세계관에는 정말 우주의 다른 행성들이 나타난다. 그뿐이랴, 외계인도 나오고 국정원 요원도 등장하고 초록빛 광선까지 나온다. 하지만 이렇게 무한하게 확장되는 세계관의 중심은 한아. 사람들의 기억이 담긴 옷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수선 예술가이자 환경주의자 한아’. 그야말로 지구에서 하나뿐인 한아’.

 

한아는 서교동 골목에서 환생이라는 이름의 옷 수선집을 운영한다. 왜 수선집 이름이 환생이냐면, 오래된 옷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특별한 수선집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나름 평범해보인다. 하지만 한아가 듣기 좋아하는 칭찬이 너처럼 저탄소 생활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이고, 가장 심한 욕을 할 때 하는 말이 미세 플라스틱 같은 새끼라는 게 밝혀지는 장면을 읽은 독자라면 이 주인공이 생각보다 더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야기는 이런 한아에게 무신경했던 한아의 남자친구인 경민이 여행을 다녀오더니 이상해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경민이 안 먹던 가지를 먹고, 심지어 뒷모습을 보여주기 싫으니 먼저 가라는 둥 한아에게 다정해졌다. 죽을 때가 되면 이상해진다는 말이 떠오를 정도의 변화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한아는 결국 경민이 초록빛 광선을 내뿜는 광경을 본다. 한아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전화를 건 곳은국정원이었다!

 

이 뒤가 어떻게 되는지는 책에서 직접 확인하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가벼운 볼륨에 지하철에서 읽기에도 좋은 사이즈다. 한아에게 일어나는 경쾌한 일들을 짐짓 심각한 척 읽는 것도 좋고, 아니면 실실 웃으면서 읽어도 좋겠다. 어느 쪽이든 한아가 겪게 될 로맨스는 속된말로 탈우주급이니까, 독자는 그 여정을 우주여행을 하듯 편하게 즐기면 되겠다.

 

여기까지는 혹시라도 소설을 아직 안 읽은 독자를 위해 간략한 홍보글(?)을 써봤다.

만약 소설을 다 읽은 독자라면 아래를 계속 읽어주시라.

 


---------------(스포일러 포함)----------------

 


한아의 범상치 않은 로맨스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다. 우선 한아와 경민의 환경주의적인 삶의 방식이다. 이 소설에서는 요즈음 더욱 주목받는 환경에 관한 고민이 전면적으로 부각된다. 경민이 한아에게 반한 이유도 한아가 지구를 끔찍하게 아껴서였다. 무엇보다 한아는 자기 자신의 몸에 국한되지 않고 전 지구의 생명체를 자신과 같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제목인 지구에서 한아뿐이라는 제목은 이런 맥락에서 하나뿐인 지구로도 확장될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지구에게 가져야 하는 환경적인 윤리로 읽어낼 수 있다. 우리 개인이 지구에서 하나뿐인 존재이듯, 이 지구도 우주에서 하나뿐인 존재다. 우리가 저지른 많은 환경 파괴가 계속된다면 이 지구가 파괴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게 명확하다.

 

그 다음은 다양한 인물이 사회에 대해 말하는 방법이다. 한아와 경민 외에도 유리, 아폴로, 정규, 주영 등 사회를 구성하는 독특한 인물들이 스스럼없이 녹아있다. 그중에서도 말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정규다. 이 소설은 현재 사회에서 국정원이라는 조직이 가진 신뢰가 매우 낮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내보이는데, 한아의 제보를 받은 국정원 요원인 정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윗세대가 완전히 망쳐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 일단 한 사람의 신뢰를 얻자. 한국사회는 개인간의 신뢰는 물론이고 정부와 시민간의 신뢰까지도 파괴된 사회다. 정세랑 작가가 염두에 두진 않았을테지만 곧 다가오는 세월호 사건이 생각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지금 더 각별하게 읽히는 이야기다. 코로나19가 퍼지면서 보여준 정부의 대처가 그 신뢰를 조금씩 쌓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이런 사회에서는 정규도 국정원에서 계속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한아와 정규 외에도 한 인물만 더 꼽아보자면 역시 (외계인)경민이다. 나는 사실 경민을 그렇게 좋아라 할수만은 없었다. 소설을 많이 읽다보면 다들 그런 병이 생긴다. 이렇게 잘 해주는걸 봐서는 뒤에 가서 뒤통수를 치는 게 분명하다, 라고 생각하며 불안에 시달리는 병 말이다(그리고 그런 불안을 은근히 즐기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고약한 병이다). 그리고 역시나 경민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시원하게 한아의 뒤통수를 쳐버린다. 하지만 결말을 제외하고 말하자면 경민은 우리의 인식을 우주로 확장시켜주는 인물이다. 사람이 사는 데 자기 자신만을 중심에 두고 살면 탈이 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경민이라는 캐릭터는 이 소설에서 자기중심적인 개인, 인간중심적인 사람들에게 좀 더 넓은 차원에서 생각하라고, 이 지구에는 너만 있는 게 아니라고 알려주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경민과 한아의 로맨스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게 사랑이라면, 경민이 한아에게, 그리고 경민이라는 인물이 독자에게 해주는 것은 사랑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사실상 로맨스의 탈을 쓰고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건 단순한 사랑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인간들에게 우주적으로 생각해라! 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이야기다. 정세랑 작가의 스물여섯 살이 궁금하면서 동시에 작가가 우주적인 이야기를 지금 써본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도 궁금하다. 정세랑 작가의 다음 이야기가 무척 기다려지는, 경쾌하고 유쾌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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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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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일의 기쁨과 슬픔> 중 '잘 살겠습니다' , 장류진, 창비, 2019


 


호의의 대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회인에게 암묵적인 규칙들은 보통 눈치로 습득되거나 선배 혹은 먼저 사회인이 된 가족에게서 배우는 것들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지만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살아가려면 필수로 알아야 하는 것들이 많은데, 요즈음엔 그걸 모르는 사람들도 많아 답답해진 누군가가 예의 없는 것들이 익혀야 할 생활 매너 팁이 담긴 책도 나와 있을 정도다. <잘 살겠습니다>빛나 언니, 최소한 주인공이 생각하기에는 그런 책이 필요한 사람이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받기만 할 줄 아는 사람. 주인공에게 빛나 언니는 그렇게 보인다.

 

주인공과 빛나 언니는 같은 대기업에 다닌다. 둘은 처음엔 같은 부서에 있었고 주인공은 이력이 변변찮은 빛나 언니와 자신이 같은 부서에 있다는 사실을 불만스럽게 여겼다. 스물일곱이나 되어놓고 확정일자같은 부동산 상식도 모르고, 긴 생머리를 고수하고, 자신의 연애사실을 숨기지 않는 사람인 빛나 언니는, 짧은 머리에 우수한 이력,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여 회사에서는 사적인 인간인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열심히 일하여 원하던 전략기획팀으로 트랜스퍼한 주인공과는 많은 점에서 다른 사람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게 사람인지라, 주인공은 빛나 언니를 거북해한다. 그래서 빛나 언니가 주인공과 따로 만나 청첩장을 받고 싶다고 말하자 당황하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나가 식사를 하고, 청첩장을 주고, 곧 결혼한다는 빛나 언니에게 귀중한 결혼 팁과 옵션들을 적어놓은 엑셀 파일까지 준다. 하지만 빛나 언니는 주인공의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고, 축의금도 보내지 않는다. 당연히, 주인공은 분노한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받은 대로 돌려줘야 한다는 개념이 어디서부터 생겨났는지 생각한다면, 아마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가장 먼저 생각날 것이다(정확한 문구는 더 자세하다). 물론 당시 저 말은 법으로써,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혔을 때 무엇으로 배상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으로 내놓은 글이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손해에는 손해로 갚는다는 법에 더해 호의에는 그에 준하는 호의로 갚아야 한다는 법칙이 있다. 진실한 마음을 나누기보다는 어떤 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직장 사회에서는 선물에 담긴 마음의 크기보다 그 선물의 액수가 얼마인지가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나는 저 사람이 나에게 가진 마음의 크기가 큰지 작은지 모르고, 사실 그 마음이 클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은 그걸 모르는 빛나 언니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주고 싶어한다. 한 사람이 밥을 샀으면 후식인 커피는 다른 사람이 사야 하고, 청첩을 줄 때도 받을 때도 예의가 필요하며, 일을 하는 여자는 되도록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자잘한 법칙들을, 직장을 다니는 여자가 사람으로 살기 위해 치러야 하는 것을 빛나 언니는 치르고 있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빛나 언니에게 축의금 오만원 대신 정확한 계산을 통해 산출된 만큼의 선물을 하겠다는 주인공의 말을 듣는 그의 남편은,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자신이 빛나 언니에게 낼 축의금을 내주겠다고 하는 남자는 이 사회에 내야 하는 비용을 가장 덜 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주인공보다 연봉을 천만원가량 많이 받으며, 앞으로 십 년 뒤 이 회사에 있을지 없을지를 주인공보다는 덜 고민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받은 것들을 빚 갚듯이 토해내야 하는 여자들과 그렇지 않은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빛나 언니가 자리에 놓고 간 답례떡을 먹으며 부디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사회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역시 사람이기에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맺으며 당연히 서로가 낸 돈의 계산이 맞지 않아 억울할 수 있다. 여러 사건으로 인해 그 사람이 견딜 수 없이 미울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는 여자들은 서로를 보며 나라면 저렇게 살지 않을 텐데, 라고 생각해도 더 깊숙이는 그가, 내가, 우리가 잘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어찌됐든 우리는 어찌되었든 각자의 몸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아등바등하며 각자의 몫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므로,

 

당신이 내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든, 우리가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글은 출판사 창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의 사전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쓰여진 것임을 밝힙니다.

 

"언니가 특 에비동 시켜서 그런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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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같은 철저한 낙관주의자도 최악의 순간에 비관적인 생각을 지우기는 쉽지 않았다. 결혼생활은 파탄이 났고, 자살도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테크놀로지에 대한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다. 브랜드는 정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해서 역시 오래 고민해보지 않았다. 그의 관심는훨씬 더 영적인 것에 있었다. 그가 여전히 갈망했던 것은 완전한 일체(wholeness)가 주는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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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최전선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에 오감을 갈고닦아야 한다.
의식의 안테나를꼿꼿이 세워두는 것만으로도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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