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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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평>


<일의 기쁨과 슬픔> 중 '잘 살겠습니다' , 장류진, 창비, 2019


 


호의의 대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회인에게 암묵적인 규칙들은 보통 눈치로 습득되거나 선배 혹은 먼저 사회인이 된 가족에게서 배우는 것들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지만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살아가려면 필수로 알아야 하는 것들이 많은데, 요즈음엔 그걸 모르는 사람들도 많아 답답해진 누군가가 예의 없는 것들이 익혀야 할 생활 매너 팁이 담긴 책도 나와 있을 정도다. <잘 살겠습니다>빛나 언니, 최소한 주인공이 생각하기에는 그런 책이 필요한 사람이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받기만 할 줄 아는 사람. 주인공에게 빛나 언니는 그렇게 보인다.

 

주인공과 빛나 언니는 같은 대기업에 다닌다. 둘은 처음엔 같은 부서에 있었고 주인공은 이력이 변변찮은 빛나 언니와 자신이 같은 부서에 있다는 사실을 불만스럽게 여겼다. 스물일곱이나 되어놓고 확정일자같은 부동산 상식도 모르고, 긴 생머리를 고수하고, 자신의 연애사실을 숨기지 않는 사람인 빛나 언니는, 짧은 머리에 우수한 이력,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여 회사에서는 사적인 인간인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열심히 일하여 원하던 전략기획팀으로 트랜스퍼한 주인공과는 많은 점에서 다른 사람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게 사람인지라, 주인공은 빛나 언니를 거북해한다. 그래서 빛나 언니가 주인공과 따로 만나 청첩장을 받고 싶다고 말하자 당황하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나가 식사를 하고, 청첩장을 주고, 곧 결혼한다는 빛나 언니에게 귀중한 결혼 팁과 옵션들을 적어놓은 엑셀 파일까지 준다. 하지만 빛나 언니는 주인공의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고, 축의금도 보내지 않는다. 당연히, 주인공은 분노한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받은 대로 돌려줘야 한다는 개념이 어디서부터 생겨났는지 생각한다면, 아마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가장 먼저 생각날 것이다(정확한 문구는 더 자세하다). 물론 당시 저 말은 법으로써,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혔을 때 무엇으로 배상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으로 내놓은 글이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손해에는 손해로 갚는다는 법에 더해 호의에는 그에 준하는 호의로 갚아야 한다는 법칙이 있다. 진실한 마음을 나누기보다는 어떤 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직장 사회에서는 선물에 담긴 마음의 크기보다 그 선물의 액수가 얼마인지가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나는 저 사람이 나에게 가진 마음의 크기가 큰지 작은지 모르고, 사실 그 마음이 클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은 그걸 모르는 빛나 언니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주고 싶어한다. 한 사람이 밥을 샀으면 후식인 커피는 다른 사람이 사야 하고, 청첩을 줄 때도 받을 때도 예의가 필요하며, 일을 하는 여자는 되도록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자잘한 법칙들을, 직장을 다니는 여자가 사람으로 살기 위해 치러야 하는 것을 빛나 언니는 치르고 있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빛나 언니에게 축의금 오만원 대신 정확한 계산을 통해 산출된 만큼의 선물을 하겠다는 주인공의 말을 듣는 그의 남편은,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자신이 빛나 언니에게 낼 축의금을 내주겠다고 하는 남자는 이 사회에 내야 하는 비용을 가장 덜 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주인공보다 연봉을 천만원가량 많이 받으며, 앞으로 십 년 뒤 이 회사에 있을지 없을지를 주인공보다는 덜 고민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받은 것들을 빚 갚듯이 토해내야 하는 여자들과 그렇지 않은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빛나 언니가 자리에 놓고 간 답례떡을 먹으며 부디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사회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역시 사람이기에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맺으며 당연히 서로가 낸 돈의 계산이 맞지 않아 억울할 수 있다. 여러 사건으로 인해 그 사람이 견딜 수 없이 미울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는 여자들은 서로를 보며 나라면 저렇게 살지 않을 텐데, 라고 생각해도 더 깊숙이는 그가, 내가, 우리가 잘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어찌됐든 우리는 어찌되었든 각자의 몸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아등바등하며 각자의 몫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므로,

 

당신이 내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든, 우리가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글은 출판사 창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의 사전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쓰여진 것임을 밝힙니다.

 

"언니가 특 에비동 시켜서 그런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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