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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난민이 되다 ㅣ 탐 철학 소설 43
황은덕 지음 / 탐 / 2022년 6월
평점 :
아무리 청소년용이라도 그렇지. 한나 아렌트를 다룬 책이 왜 이렇게 술술 넘어가지. 너무 재밌잖아. 내 수준이 딱 청소년급이라 그런가. 요런 생각을 하며 책 한 권을 후르르 읽으면서 내용의 알참에도 감탄해버린 소설, 황은덕 소설가의 ‘한나 아렌트, 난민이 되다’를 지금 막 다 읽었네요.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은산의 미래중학교 2학년 교실에 예멘 출신의 라일라가 전학을 온다. 라일라는 예멘에 내전이 일어나고 반전 활동가인 아빠가 생명의 위협을 받자 한국으로 온 난민 아이다. 미래중학교에 오기 전 라일라는 500명의 예멘인과 함께 제주도로 입국했고, 난민을 반대하는 한국인들의 시위를 목격하기도 했다.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고 임시적이나마 안정을 찾아가던 중 아빠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게 된다. 절망에 빠진 엄마와 라일라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제주를 떠나 이슬람 성원이 있는 은산으로 온다.
엄마는 식당에 취업하고 라일라도 학교에서 우정, 민지 등 호의적인 아이들의 도움으로 학교생활에 적응해 가던 중 ‘난민 불인정 결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심사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1년의 체류 기간이 끝나는 날 예멘으로 추방당하게 되고, 아빠가 반전 활동가였으므로 가족인 라일라와 엄마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라일라의 사정을 알게 된 우정과 민지 등 봉사부원들은 라일라의 사정을 반 친구들에게 알리기로 한다. ‘우리가 라일라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가볍게 던진 말이 단톡방과 학급 회의의 토론, 국민청원과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 구경만 하던 아이들까지 대거 참여하는 연극 공연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새로운 사유와 실천과 공감의 장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사유는 18년간 난민으로 살아야 했던 한나 아렌트의 철학을 기반으로 진행하게 된다.
아이들은 연극공연을 위해 대본을 쓰고, 배역을 정하고, 대사를 고르고, 연기 연습을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아렌트의 삶과 사상에 대해 알아간다. 연극은 한나 아렌트나 한나의 역을 맡은 라일라의 난민 문제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난민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한국 현실에서 일어나는 숱한 차별의 문제 역시 아렌트가 주장한 사유에 의해 그 본질을 드러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인권이 무엇인지, 왜 스스로 사유하는 인간, 행동하는 인간, 주체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 깨달음을 얻는다. 또한 라일라 역시 아렌트의 사상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자신의 권리를 찾아 나가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이상, 줄거리였습니다.
줄거리를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한나 아렌트, 난민이 되다’는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의 사상을 청소년들이 이해하기 쉽게 소설 형식으로 풀어쓴 철학서입니다. 아니. 아렌트의 철학을 녹여 넣은 청소년소설이라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요. 아니나 다를까, 뒷표지 날개를 보니 이 책이 ‘탐 철학소설시리즈’의 하나로 나왔네요. 저자는 『한국어 수업』, 『우리들, 킴』 등을 낸 소설가이자 번역서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등을 펴낸 번역가인 황은덕 작가입니다. 현재 부산대학교에서 강의하며 입양인, 이민자, 난민, 전쟁 생존자 등의 삶을 조명하는 소설과 연구 논문을 쓰고 있네요.
청소년 대상 소설이지만 읽다 보면 밑줄을 긋고 싶은 데가 군데군데 나옵니다.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 복수성, (정치)행위, 권리들을 가질 권리, 전체주의 등의 개념을 아주 쉽고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딴소리 잠깐 하자면, 예전에 문화기획사 다닐 때 역사 스토리텔링을 해야 했는데 무조건 무조건 저는 어린이용 책들을 주문해서 참고했습니다. 어른용꺼 보면서 참고하면 일 시작하기도 전에 뻗어버리....) 공부는 늘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완성이 되는 법. 라일라와 아이들이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고 소통하고 공감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읽어나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주변을 슬며시 돌아보게 됩니다. 사상과 철학은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서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아렌트의 사상을 받아들인 아이들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다 보면 그들과 한편이 돼버리거든요.
그래 그런지 아래 문장이 어찌나 세게 눈에 와 박히는지 눈에 기스 가는 줄 알았지 뭡니까. 단어 몇 개만 바꾸면 이건 바로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한치 어긋나지 않으니 말입니다
‘독일인들이 히틀러에게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한나, 결국 우리 같은 유대인들이 궁지에 몰릴 거야.’
뭔 뜻인지 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