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똘마니들 푸른사상 소설선 47
김경숙 지음 / 푸른사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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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져든다면 억장이 무너져 그 자리에서 숨이 막힐 것 같은 한 집안의 내력을 4.3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써내려간 소설이 나왔다. 김경숙 작가의 『길똘마니』이다.
인터넷 서점 소개에 따르면 김경숙 작가는 전라북도 순창에서 태어났다. 2015년 5·18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소설집으로 『아무도 없는 곳에』 『그녀들의 조선』(공저)가 있다. 『그녀들의 조선』은 내가 운영하는 출판사 나무달에서 나온 책으로, 이 책 작업을 같이하면서 알게 된 사이다.
다시 『길똘마니』로 돌아가서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해운사업을 하는 집안과 소원하게 지내던 '나'는 해미 외할아버지의 비망록을 통해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외가 집안의 지난 역사를 알게 된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민중들(무장파)과 그들을 탄압하려는 경찰 및 서북청년 패거리가 충돌하면서 숱한 사람들이 죽어간다. 소설은 그 현장의 이야기를 어린 시절을 걸똘마니로 함께 지냈던 이들, 해미와 남수, 광조와 태수, 덕배 등을 중심으로 끌고 간다.
해미와 남수는 조회장의 버려진 쌍둥이 아들이고 해미는 무장파 핵심, 남수는 해미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 대위로 들어가 있어 외견상 서로 대치하는 입장에 있다.
피는 이념보다 진한 것인가. 버렸던 자식이지만 조회장은 해미와 남수를 보호하려다 모든 재산을 잃고 산으로 들어가고, 빨갱이를 감춰주는 대가로 광조는 해미의 아내 송이와 딸 금례를 취하면서 해운회사를 차지한다. 그리고 누구보다 악랄하게 조회장을 폭행하고 무장하지도 않은 민중에게 포악한 짓을 저지른 태수는 광조를 돕는 조건으로 금례와 혼인해 아들 이강, 곧 이 소설의 화자인 '나'를 낳는다.
결국 4.3사건을 배경으로 '나'의 출생의 비밀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요약이 되는 소설인데, 자신의 비밀에 넋이 털리는 화자 못잖게 이 소설이 주는 충격은 만만찮다. 온갖 미디어에서 이제는 식상하리만치 들어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질레와 금례와 권할머니 등 무죄한 이들에 대한 죽음보다 더한 강간 폭력 앞에서 진저리를 쳤다.
여러 등장인물이 등장하지만 한 명도 그냥 등장하는 법이 없다. 이야기는 고리에 고리를 물고 이어지고, 인연은 선연과 악연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 모든 인연을 뚫고, 아니 인연을 가르고 튀어나오는 마지막 문장이 '나'의 어머니 금례가 보내온 문자다.
강아! 넌 슬픔으로 낳은 내 아들이란다!
이야기가 플롯을 뛰어넘는 소설이 이런 거구나 하는 게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저들의 내력을, 해미의 비망록을 읽는다면, 저 문자를 대하는 순간 내 눈에 고여온 눈물의 무게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몇 차례 제주에 가서 열흘씩 보름씩 있으면서 바다를 보다가 그 마을관련 책자만 몇 장 뒤지다 온 경험이 있어 이 소설을 읽고 공감된 슬픔과 회한으로 꽉 차오르던 마음에 부끄러움과 존경심과 부러움이 얹혔다. 김경숙 작가의 작업에 경의와 축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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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빛
정영선 지음 / 강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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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 작가의 '아무것도 아닌 빛'은 남녀 두 노인의 특이한 인연에 대한 이야기다. 빨치산 출신 장기수 안재석 노인과 신념의 도피자들을 품고 도와 주는 조력자 조향자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 주변에 류정일 , 동준, 박동배 등 여러 인물들이 포진해서 각자의 서사를 이어 나간다.
이 소설 '아무것도 아닌 빛'은 병치되어 흘러가는 인물들이 그려내는 기억의 지도와도 같은 소설인데, 내용을 어떻게 구성하고 인물들을 배치했는지, 어떤 내용을 누구의 시점을 사용해서 서술했는지 하는 형식적 장치가 서사 못잖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모임에서 같이 읽고 토론해 보고 싶은 마음을 적는 것으로 작가 정영선의 작가정신에 경의를 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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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그리기 - 소소한 오늘을 특별하게 만드는 일상 드로잉
심수환 지음 / 산지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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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그리고 싶은데 재능이 없어서 그림과 담 쌓고 사는 나 같은 사람에게
어마 얘는, 너 그거 완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다~
어깨를 살짝 치며 알려주는 책이 나왔다.
화가이며 미술교육 연구가인 심수환의 『일상 그리기』이다.
부제가 '소소한 오늘을 특별하게 만드는 일상 드로잉'이다.
그림을 짝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아이들이 처음 글을 배울 때처럼 그림에 접근하라고 말한다. 글을 배우기 시작할 때 한 자씩 글자를 배우듯, 가까운 주변 물체들을 하나씩 그리고, 다음으로 사람 그리는 것을 순서대로 배우면 누구나 일정 수준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조그만 수첩 하나에 펜 한 자루를 가지고 내 곁에 있는 화분이나 꽃 한 송이, 심지어는 식탁에 놓인 숟가락 하나만 그려도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화가들이 커다란 화폭에 풍경이나 사람을 그리고 온갖 기교를 더하여 채색을 하는 것에 비하여 그야말로 가볍게 내게 익숙한 물체 하나만 그리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상 그리기는 그림이라기보다는 이야기에 가깝다. 어떤 이들은 일기 쓰는 것과 같다고 한다. 왜냐하면 겨우 숟가락 하나만 그리고도 그 속에 숟가락에 담긴 사연이나 숟가락과 나의 관계에서 생긴 이야기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수환 화가가 이 책을 쓴 의도가 담긴 말이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던 대목이기도 하다.
"자세히 본다는 것은 그저 관념적으로만 알던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생전 처음 보듯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렇게 들여다보면 전에 못 봤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저절로 감탄하며 신기해하게 된다. 이 사랑스러운 존재 같으니라고…. 우리는 얼마나 바쁘게 살며 이 세상을 관념적으로만 보아 왔는가. 지금부터 내 주위에 있는 가까운 대상들과 새롭게 관계 맺으며 사랑하는 일은 얼마나 멋진 일일까? 사랑스러운 이 세상과 함께 교감하는 나 자신도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일상 그리기를 하는 이유다."
심지어 이런 대목을 접했을 때는 '아, 진작 그림 그리기를 했어야 했던 거였어!' 하는 후회와 깨달음의 충격이 이마를 쳤다.
그는 '일상 그리기'를 통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삶에 대한 이야기! 사물에 담긴 이야기!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를 더해가는 마음공부와도 같은 일상 그리기는 문학하는 마음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소설을 쓴답시고 허리를 작살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내 주변의 사물과 사람에 대해 과연 편견 없는 맑은 눈으로 본 적이 몇번이나 있었던 걸까. 화가의 글과 그림으로 정성껏 채워진 이 책을 다 읽고 나자 저절로 반성모드가 된 건 이런 이유에서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가까이 못한 사람들
살면서 딱히 부족한 게 없는데 왠지 허전한 사람들
알 수 없는 그리움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소설이나 시를 쓰는 사람들
기타 등등의 사람들에게 이 책을 강추한다.
아, 끝으로 한마디 더!
『일상 그리기』가 산지니에서 나왔는데 책의 만듦새가 예뻐 걍 소장용으로도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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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그리기 - 소소한 오늘을 특별하게 만드는 일상 드로잉
심수환 지음 / 산지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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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입니다. 그림과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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툰드라
강석경 지음 / 강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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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와 간지, 둘 다 갖춘 강석경 선배께서 내게 신간 <툰드라>를 보내주셨다.
'툰드라'는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북극해 연안에서 남쪽으로 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방 한계선에 이르기까지의 거친 벌판을 가리킨다. 짧은 여름 동안만 지표면이 녹아 지의류, 이끼류 등의 식물이 자란다고 한다.
뜻을 찾아보니(그 전에 어감상으로도) 툰드라-제목부터 아우라가 장난 아니다. 제목에 비해 표지가 좀 약한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작가 말로는 구순의 조각가 최종태 선생 자코메티 그림으로 원본이 엄청 좋다고 한다. 또 듣고보니 더 좋아보이기도 한다(나는 팔랑귀)~~
(여기서 잠깐 새자면) 강석경 선배를 처음 만난 곳은 토지문화관에서였다. 문청시절(이 얼마나 고색창연한 말이냐)에 좋아했던 작가인지라 슬 말을 붙여보려 하다가 포기했다. 그러면 안 될 거 같았다. 집필하는 거 외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일에 열중해 있는 듯한 표정도 표정이지만, 가히 근접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바람 세찬 겨울의 언 땅을 밟고 걸어가는 듯한 그녀에게 말을 붙이면 왠지 정처없어진 사람처럼 슬프고 서운한 눈길을 돌려받을 것 같았다.
그후 사소한 친절과 사소한 배려를 주고받으며 선배와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영화도 봤다. 고민도 토로하고 앞으로 걸어야 할 길들 중 하나에 같이 눈길을 주기도 했다. 그 길을 잠시 혹은 오래 같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기를 바란다.
쌀쌀맞게 보인 인상이 실은 작가 강석경을 둘러싼 한국의 문화, 답답한 현실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면, 나는 이 글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강석경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인 <툰드라>에는 1987년작 '석양꽃'(1987)부터 2022년작 '툰드라'에 이르기까지 35년에 걸친 작품들이 묶여 있다. 작가로서 전 생애가 소설집 <툰드라> 에 담겨있는 것이다. 한국의 모든 것이 지겨워 인도로 그리스로 몽골로 늘 떠나야 했던 작가가 눈발 세찬 툰드라 벌판에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 서있는 표지는 어딘지 울컥 하게 만드는 데가 있다. 구도자들의 뒷모습에 배어있는 슬픔과 그리움의 정조 탓일까.
작가 강석경이 홀로 서서 바라보는 먼 길의 끝에서 언젠가는 만날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이 책 <툰드라>를 읽으면 나도 그것을 만나게 될까. 만나도 그것이 그것인 것을 내가 알 수는 있을까. 내게는 내 길 끝의 그것이 있을 것이고, 인간은 어쩌면 단 하나 자기에게 주어진 구도의 길만을 걸어서 그곳에 도착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같이, 그러나 따로... 툰드라의 광활한 공간처럼 구도의 길은 외로울 수밖에 없고, 알면서도 가야 하는 게 모든 구도자의 운명인 것인가. 그리고 소설.... 그리하여 소설가들이란... 하고 나는 결국 중얼거리고 만다.


작가들이란 언어에 매혹되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작가에게 언어란 모태와 같아서 뜻 모르는 지명에도 환상을 이식해 먼 길을 떠나는 듯하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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