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시대의 수지(樹脂)가 석화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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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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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
비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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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
색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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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황색·납황색·적갈색 | |
화학성분은 C40H64O4이다. 단괴상·역상(礫狀)을 나타내며 밀황색·납황색·적갈색으로 투명 또는 반투명하다. 지방광택을 가지며 패각상의 단구는 무르다. 굳기 2.0∼2.5, 비중 1.0∼1.1이다. 287℃에서 녹고 불꽃을 내고 타며 특유한 냄새가 난다. 또 알코올·에테르·벤졸로 다소 침식된다. 퇴적암 속에서 발견되며 특히 탄층(炭層)에 수반되는 경우가 많다. 발트해에서 투명하고 아름다운 것이 산출되며 오래 전부터 파이프나 장신구 등으로 귀하게 쓰이고, 특히 속에 벌레가 들어 있는 것은 값이 비싸다. 호박은 해수보다 가볍기 때문에 해안에 있는 모암(母岩)으로부터 바다에 떨어져 파도에 밀려 기슭으로 밀려와 이전에 발트해에서는 바닷속에 들어가 그물로 건져냈다고 한다.



폼페이의 날

Karl Brulloff. The Last Day of Pompeii. 1830-1833.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Petersburg, Russia.
구이차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
1483. 3. 6 피렌체~1540. 5. 22. 피렌체 근처 산타마프게리타아몬티치.
피렌체의 정치가·외교관·역사가.
그가 쓴 〈이탈리아사 Storia d’Italia〉는 당대의 역사를 다룬 매우 중요한 저서이다.
로렌초 데 메디치 지배 때 피렌체의 저명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498~1505년에 피렌체·페라라·파도바 등지에서 로마법을 공부했으며, 그뒤 피렌체에서 법률 실무에 종사했다. 1508년 알라만노 살비아티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했으며 같은 해 자신의 가족 회고록과 1378~1509년의 〈피렌체사 Storie fiorentine〉를 쓰기 시작했다. 〈피렌체사〉는 1494년 이후의 이탈리아 공화제 연구에 중요한 사료이고 구이차르디니의 역사 분석·서술 재능을 보여주는 저서이다. 그가 1511년 피렌체 대사가 되어 아라곤의 페르난도 국왕에게 파견되어 있었을 때, 1494년부터 계속 망명생활을 해온 메디치 가문은 당시 스페인 군대의 압력을 받고 있던 피렌체로 돌아와 권력을 회복했다. 1514년에 피렌체로 돌아온 구이차르디니는 다시 법률실무에 종사했으며 오토 디 발리아라는 치안위원회의 위원이 되었고 1515년에는 시뇨리아(최고행정관) 정부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13년 교황 레오 10세로 즉위한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1516년에 구이차르디니를 모데나 총독으로 임명했고, 이듬해에는 레조 총독까지 겸하게 했다. 그는 1534년까지 계속 교황을 위해 일했다.
새로 교황령이 된 이 지역들은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고 내부에서도 혼란이 있었지만 그는 그곳을 통치하는 데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엄격하고 때로는 가혹하기조차 한 그의 정책은 질서회복에는 효과적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에 대한 인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레오 교황과 동맹관계에 있던 신성 로마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사이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레조는 교황령의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1521년 7월 구이차르디니는 교황군의 전권대리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종종 자신의 직무와 관련되는 당시의 정치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형태로 많은 비망록과 논문을 썼는데, 1521~25년에 쓴 〈피렌체 정부론 Dialogo del reggimento di Firenze〉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책에서 그는 피렌체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베네치아식의 귀족정치체제라고 주장했다. 교황군의 전권대리로서 그는 용기와 결단력을 발휘하여 1521년 12월 파르마가 프랑스에게 함락당하는 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같은 달 교황 레오 10세가 죽고 아드리아누스 6세가 즉위한 뒤 모데나와 레조 총독직을 박탈당했으나 1522년말 다시 복직되었다. 1523년 아드리아누스 6세가 죽자 그는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두 도시를 원래 그곳을 지배했던 페라라 공작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비록 페라라 공작과의 싸움에서 레조는 빼앗겼지만 모데나를 지킬 수 있었다.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은 클레멘스 7세로 즉위한 뒤 구이차르디니의 공적을 인정해 그를 1524년 교황령의 최북단 도시 로마냐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파비아 전투 뒤 카를 5세의 군대가 남하하려 하던 위험한 상황에서 구이차르디니는 교황에게 많은 조언을 했으며, 1526년 1월에는 교황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로마에 갔다. 그는 카를 5세에 대항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를 주장하며 교황 자문회의에서 뛰어난 역할을 했다. 1526년 5월에 이루어진 코냐크 동맹은 어느 정도 그가 노력한 결과였으며 그해 6월 교황군의 지휘관으로 동맹군에 참여했다. 그러나 부르봉 공작이 이끄는 황제군이 피렌체와 로마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하자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태어난 도시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
클레멘스 교황의 정책 결과 피렌체가 위기에 처하자 메디치 정권에 대한 반대의 소리가 높아졌다. 우르비노 공작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 가까이에 도착하고 메디치가 그를 마중하러 도시를 떠나자(1527. 4. 26) 피렌체에 반란이 일어났다. 도시 방어를 돕기 위해 그곳에 막 도착한 구이차르디니는 처벌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반란자들의 항복을 받아내 부르봉 공작군의 공격으로부터 시(市) 행정부 건물을 보호할 수 있었다. 며칠 뒤 부르봉 공작군은 로마를 장악했고 피렌체에서는 메디치가가 축출되고 공화정부가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로마에서 클레멘스 교황의 권위가 무너지게 되자 구이차르디니는 교황 전권대리로서의 자리를 지키기 어렵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그가 맺어왔던 메디치가와의 오랜 관계로 인해 공화제가 다시 들어선 피렌체에서 의심을 받게 되었다. 피렌체에서는 강경 공화파가 승리해 교황과 타협하려 했던 니콜로 카포니 장관이 물러났으며(1529. 4), 뒤이어 황제군이 들어왔다. 이 때문에 어려움에 빠진 구이차르디니는 1529년 9월 피렌체를 떠나 교황청으로 갔다. 그뒤 메디치가를 피렌체에 다시 들어서게 하려는 교황의 노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한편, 피렌체 시민을 위해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려고 애썼지만 1530년 3월 피렌체에서는 그를 반역자로 선고했다. 1528~30년 구이차르디니는 피렌체의 역사에 관한 2번째 저서를 집필하기 시작해 그의 정치관과 사회관을 가장 간결하고 다채롭게 표현한 격언과 성찰(省察)의 묶음인 〈회상록 Ricordi〉을 펴냈다. 그의 정치사상은 친구인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지만 때로는 더 급진적이다. 그는 오랫동안 교황을 위해 일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교회를 비판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논의'에 관한 고찰 Considerazioni intorno ai 'Discorse' del Machiavelli〉에서 로마역사를 과학적인 정치의 한 전형으로 본 마키아벨리의 의견에는 반대했다. 구이차르니나는 피렌체에서 공화정부가 무너진 뒤 교황 대표자격으로 돌아와 공화당원 추방에 앞장섰다. 1531년 클레멘스 교황은 그를 볼로냐 총독에 임명했으나 1534년 파울루스 3세가 즉위하면서 총독직에서 물러났다.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공작의 법률 고문으로 활동하는 한편, 자신이 교황의 참모로 있었던 시기의 이탈리아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뒤 몇 년 동안 수정을 거친 이 책은 1494~1534년 사이의 이탈리아 역사를 다룬 그의 더 큰 야심작 〈이탈리아사〉의 줄기를 이루었다. 그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1536년으로 추측되는데 죽을 때까지 계속 수정했다. 그는 책에 기술한 많은 사건들과 직접 관련이 있었던 정치가였고 사료를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데 있어 앞선 인문주의자들을 본받으면서도 또한 그들을 능가한 역사가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사〉는 격동과 침략의 시기인 16세기초 근대 이탈리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역사책이 되고 있다.
1537년 알레산드로가 살해당한 뒤 구이차르디니는 코시모 공작이 그 뒤를 이을 수 있도록 도왔는데, 아마도 공작의 권력이 지나치다고 생각해 이것을 제한시키고자 하는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새 통치자 아래서도 여전히 고위직책을 맡기는 했으나 자신의 희망과 개인적 야망이 만족되지 않자 말년에는 산타마가리타아몬티치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자신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사〉의 완성에 몰두했다.
카보숑컷 [cabochon cut]
구형(球形)이나 타원체의 산 모양으로 연마한 것을 말한다. 스타루비 ·묘안석 또는 오팔과 같이 특수한 색채효과를 지닌 보석이라도 그 효과를 내기 위해서 실시된다. 비취나 터키석과 같은 불투명 또는 반투명한 보석이나 장식석에 널리 응용된다.
드가 - 콩코드 광장

Edgar Degas. Place de la Concorde. 1876. Oil on canvas. Collection of Margarete Scharf, Berlin. Now in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고갱 - 두 자매

Paul Gauguin. Piti Teina. (Two Sisters). 1892. Oil on canvas. Collection of Otto Krebs, Holzdorf. Now in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반 고흐 - 밤의 하얀집

Vincent van Gogh. The White House at Night (La maison blanche au nuit). 1890. Oil on canvas. Collection of Otto Krebs, Holzdorf. Now in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코레지오 - 성가족

Correggio. Madonna and Child with St. John. c.1515. Oil on wood. Museo del Prado, Madrid, Spain.
보티첼리 - 여인의 초상

Alessandro Botticelli. Portrait of a Lady (Smeralda Brandini?). c.1470-1475. Tempera on panel.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UK.

Alessandro Botticelli. Portrait of a Woman. c.1475. Tempera on panel. Palazzo Pitti, Galleria Palatina, Florence, Italy.
뒤러 - 막시밀리언 1세의 초상

Albrecht Durer. Portrait of Maximilian I. 1519. Oil on panel.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Austria.
벨리니 - 마돈나와 아이

Jacopo Bellini. Madonna and Child. Tempera on panel.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Italy.
쿱카 [1871.9.22~1957.6.21]
체코슬로바키아의 화가로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활약했다. 주요 작품에 《예술가와 그 부인의 추상》, 《뉴턴의 위반》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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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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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tišek Kupka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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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
활동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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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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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오포티노 |
주요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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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그 부인의 추상》《뉴턴의 위반》 | |
오포티노 출생. 1888년 프라하의 미술학교에서 배우고 베네치아를 거쳐 1895년 파리로 나왔다. 1906년부터 새로운 회화의 탐구를 시작, R.들로네의 오르피즘의 영향을 받고 1912∼1913년 비대칭적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발표하는 등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1936년 파리, 1946년 체코에서 회고전이 열리기까지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살롱 데 레알리테 누벨의 리더였으며, 1958년 파리의 근대미술전에서도 회고전이 열렸다. 주요작품에 《예술가와 그 부인의 추상》《뉴턴의 위반》 등이 있다.
파에톤 [Phaethon]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태양신 헬리오스와 클리메네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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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톤이라고도 하며 그리스어로 ‘빛나는’ 또는 ‘눈부신’이라는 뜻이다. 부모에 대해서는 헬리오스의 아들인 클리메노스와 샘의 님프 가운데 하나인 메로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제우스와 이오의 아들인 에파포스에게 자신이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했다가 거짓말쟁이라는 모욕을 당한 뒤에 태양신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헬리오스를 찾아갔다. 헬리오스가 성인이 되어 찾아온 아들에게 자신이 아버지임을 인정하고 어떤 소원이든 들어 주겠다고 맹세하자, 태양 마차를 몰게 해 달라고 하였다.
헬리오스는 이른 아침마다 태양 마차를 몰고 큰바다 오케아노스 동쪽 끝에서 세상에 빛을 뿌리며 솟아 올라 낮이 끝날 무렵 오케아노스 속으로 뛰어들었다. 태양 마차를 모는 일은 제우스도 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었으나 이미 맹세를 하였기 때문에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태양 마차를 끄는 네 마리 말은 파에톤이 타자 이전보다 무게가 가볍다는 것을 느끼고는 무섭게 돌진하였다. 파에톤의 통제를 벗어난 말들이 고삐가 풀린 듯 하늘 위로 치솟아 올랐다가 지상으로 접근하는 등 제멋대로 날뛰었으므로 태양의 열기에 강과 바다가 말라 버릴 지경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인들의 피부가 검은 것은 이 때의 열기로 피가 살갗으로 몰렸기 때문이며, 리비아의 사막도 이 때 생긴 것이라고 한다.
제우스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파에톤에게 번개를 던져 죽게 하였다. 에리다누스강에 떨어진 그의 시신을 흐르는 물의 님프인 나이아스들이 주워 묘지를 만들고 비문을 새겨 주었다고 한다. 파에톤의 누이들은 그의 운명을 슬퍼하여 강가의 포플러 나무로 변하였으며, 이들이 흘린 눈물이 강에 떨어져 호박(琥珀)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케팔로스를 납치하여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도 파에톤이고, 에오스가 타고 다니던 쌍두마차의 말 이름도 파에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