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힘을 믿는다 - 정찬 산문집
정찬 지음 / 교양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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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서

슬픔은 피동적 감정이 아닙니다. 고통과 절망을 껴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능동적 감정입니다.

 

p38 윤이상이 가장 좋아하는 악기가 첼로다. 그는 첼로 협주곡을 통해 인간이란 불가능한 꿈을 꾸는 존재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P63 어떤 사건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느끼는 것은 그 사건과 가장 깊은 관계를 맺는 행위다.

 

P64 한 시대의 끝 간 데까지 온몸을 던져 살아온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 체제의 경계 밖으로 나를 추방시켜 거슬러 오르며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내가 가닿을 수 있는 지상의 가장 멀고 높고 깊은 마을과 사람들 속을 걸었다.

 

p81 니체가 토리노의 말을 껴안고 울었던 것은 상처투성이 말이 자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류는 더 늦기 전에 토리노의 말을 간절한 마음으로 응시해야 한다.

 

p85 인간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 속의 존재다. 길 속의 존재에게 완성이란 결코 닿을 수 없는 꿈속에서 어른거리는 미지의 생명체다.

 

p105 예술가란 살아남은 자의 형벌을 가장 민감히 느끼는 사람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자 형벌이다. 빛은 어둠이 있어야 존재한다. 축복과 형벌은 빛과 어둠의 관계다. 예술가는 축복보다 형벌에 민감한 사람이다. 그 형벌을 견뎌야 한다. 견디지 못하는 자는 단언하건데 예술가가 아니다.

 

p131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는 그가 타인에게 느낀 고통의 무게였다. 예수는 타인의 고통에 한없이 예민했다. 그에게 고통은 나와 너라는 분리된 두 존재를 연결하는 신비한 생명체였다. 예수의 거룩함은 여기에 있다. 고통과 슬픔에 빠진 이에게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존재가 곁에 있음을 느낄 때 그보다 더한 위로가 어디 있을까. 타인의 불행을 응시하고 아파하고 달려와 불행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은 고통의 신비한 생명체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p135 사상의 자유는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의 자유뿐 아니라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사상의 자유까지 보장하는 것,

 

p136 역사의 관점에서 과거는 고정된 시간의 어떤 형태가 아니다. 현재의 시선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는 역동적인 생명체이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역사의 좀비가 되지 않으려면 현재의 시선에 의해 역동적인 생명체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현재의 시선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은 끊임없이 변한다. 정치는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공동체의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생명 활동이다.

 

p140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

자기희생으로 타인의 고통과 세상의 악을 끊을 수 있다고 믿는 투명한 정신의 소유자가 새로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p141 물신주의의 무서움은 타인과의 소통을 막아버리는 데에 있다. 사람들의 삶은 피륙의 실처럼 연결되어 유기체처럼 움직이는데 물신주의는 이런 생각을 끊어버린다. 타인의 삶이 자신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이익추구가 절대적 가치가 되어버린다.

 

p183 예수라는 한 인간이 그리스도가 된 것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p184 저는 공동체의 건강 상태를 가늠하는 여러 가지 척도 가운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p188 절망 속에 희망이 씨앗처럼 깃들어 있음을 절망이 희망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씨앗을 키우기 위해서는 절망에 짓눌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절망을 응시하고 절망을 껴안으며 절망을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p194 비극적 사건의 유일한 가치는 인간에게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p206 간절함은 고통에서 나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존엄성에서 비롯되는 고통입니다. 우리의 삶은 행동의 끊임없는 연결로 이루어집니다. 가장 아름다운 행동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행동일 것입니다.

 

느낀 점:

정찬의 글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사회적 구조나 환경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개인의 고통을 넘어 다수의 고통이 되었고 그 고통을 또 다른 이가 당하지 않도록 또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도록 함께 저항하며 싸우기도 했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희망의 싹을 키우기 위해 절망에 눌리지 않고 절망을 응시하고 껴안으며 넘어서려 했다.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고 함께였다. 홀로 남겨져 떠난 사람들도 주위의 사람들이 또는 후대의 사람들이 그를 지켰다. 예술가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형벌을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억울하게 혹은 참혹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대신해 그들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승화시켰다. 그 표현과 승화가 예술가 자신에게 또 참혹한 형벌이 되기도 했다. 그들의 책임이 아니었지만 어떤 사건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느끼며 그 사건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그건 예수의 정신이었다.

 

예수는 타인의 고통에 한없이 예민했다. 그에게 고통은 나와 너라는 분리된 두 존재를 연결하는 신비한 생명체였다. 예수의 거룩함은 여기에 있다. 고통과 슬픔에 빠진 이에게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존재가 곁에 있음을 느낄 때 그보다 더한 위로가 어디 있을까. 타인의 불행을 응시하고 아파하고 달려와 불행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은 고통의 신비한 생명체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세월과 역사의 현장에서 함께 저항하고 싸워온 그들에게 거룩함을 느낀다. 한국 사회가 물신주의에 빠져 헬조선이 되어가고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물신주의의 무서움은 타인과의 소통을 막고 타인의 삶이 자신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자신의 이익 추구가 절대적 가치가 되어버린다. 나도 그런 인간 중 하나였다. 세상의 고통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물신주의에 빠져 나 하나의 안위와 이익이 중요했다.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은 배제되었다. 타인에 고통에 누구보다도 둔감했다. 책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뛰어들고 촛불을 밝히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지 위해 민주주의를 외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노력했는지 보았다. 한때는 조용한 저항이 이었고 한때는 맹렬한 외침이었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제야 세상을 들여다본다. 편안하고 안락한 집안에서 오락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나 보면서 세상밖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다. 누군가 저항하다가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는 사건을 접하면 끔찍해 무서워서 안 볼래가 전부다. 굿네이버스에서 기아 홍보 영상이 나오면 또 마음이 불편해져 채널을 돌린다. 내 마음 불편하지 않게 안보고 모른 척 했다.

 

그들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것은 분명 힘든 일이다. 책을 읽으며 찾아본 장면들, 제주 4.3사건, 용산 참사, 광주 민주화 운동, 4.19 혁명, 박종철, 전태일, 김관홍, 쌍용차 파업 ... 모두 가슴 아픈 사연들이었다. 지식백과 페이지의 설명들은 그 상황을 그저 문자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었지만 그 아픈 사건들을 본다는 사실조차 힘든 과정이었다. 여전히 내가 그 현장에 없어서, 내가 저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가 먼저 떠오르곤 했다. 난 분명 실제 세상으로 뛰어나가 그들의 고통을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이제야 보지 않으려 했거나 관심이 없던 세상 밖 일들에 하나둘씩 눈을 떠가는 단계이다. 정찬의 책은 하나의 첫 통로가 되었다.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길이 열린 기분이다.

 

간절함은 고통에서 나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존엄성에서 비롯되는 고통입니다. 우리의 삶은 행동의 끊임없는 연결로 이루어집니다. 가장 아름다운 행동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행동일 것입니다.

 

나도 이제 타인의 고통에 무게를 느끼고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행동하며

더불어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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