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열쇠 혜원세계문학 51
A.J.크로닌 지음 / 혜원출판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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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등학교 1학년, 무던히도 신앙의 갈증이 심했던 나는 무심코 찾은 서점에서 한권의 책을 샀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소설 속의 치셤신부를 다시 만났다. '구원은 교회 밖에도 있다'는 교리를 1960년대에 들어서야 제2차바티칸공의회를 통해서야 인정했던 가톨릭인데 영국인 선교사 프랜시스 치셤 신부는 1900년대 초반을 살면서 다양한 <천국의 열쇠>를 말해주었던 것이다.

신앙의 유아시절, 이 한권의 책을 통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남들의 눈에 비치듯 결코 성공하지 못한 치셤의 일생을 보며 과연 하느님은 어디 계신지를 물으며 울었고 그의 교파와 민족, 그리고 어떠한 문명화된 겉치레를 떠난 '낮은 자리'로의 모습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어린시절 행복한 가족의 생활을 한순간 홍수로 잃어버린 치셤은 외가에 맡겨져 심한 핍박속 얼마간을 지낸다. 그러다가 폴리아줌마의 운명적인 구원으로 작은 행복을 되찾는다. 마음속으로 애틋한 감정으로 함께했던 노라와 헤어져 신학교에 들어간 치셤은 노라의 방황과 실패, 그리고 자살을 통해서 또다른 상처를 경험하며 결국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길을 선택한다. 신학교 교장이었던 맥납 신부만이 그의 운명과도 같은 실패의 삶을 이해했던 것 같다. 몇군데의 보좌신부의 생활을 통해 정통교계의 벽에 부딪친 치셤은 머나먼 지구 반대쪽의 중국의 땅에 선교사로 발을 딛게 된다.

돈으로 교세를 부풀렸던 전임자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치셤에게는 신자수가 중요하지 않았다. 의료를 베풀지만 결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지방의 토호 챠씨의 외아들을 살렸을때도 그 대가로 신앙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에 치셤은 단호히 거절했던 것이다. 그런식의 신앙이 얼마나 부실한 것인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쉽게 경험하고 있다.

흑사병이 돈 지역을 버리지 않고 그는 수녀와 친구 탈록과 함께 맞섰다. 그리고 교회를 위협하는 무력의 세력에 슬기롭게 대처하여 구해낸다. 자신을 미워하는 수녀와 극적인 화해를 나누기도 한다. 홍수로 수년에 걸친 성당을 잃었을 때 그 모습을 비아냥거리는 어린시절 친구이자 동료신부인 안셀모의 조롱에도 그는 결국 이겨냈다. 개신교 세력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그는 같은 형제로서 그들을 맞이하고는 기꺼이 선임자로서 도움을 주겠다고 악수를 청했다.

이렇게 30여년간의 중국 벽지에서의 그만의 선교는 비록 영국 포교본부의 현황표 그래프가 실망스러울지라도 지역의 주민들 속에 밀알이 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마적단의 기습을 받았고 은퇴하여 영국으로 돌아왔다. 미사에서 노자와 공자를 이야기하고, 부유한 부인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비유로 질타하는 신부, 당최 권위나 점잖음 따위는 보이지 않는 신부를 내쫓으려고 조사위원을 보내지만 그 조사를 맡은 신부조차도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단숨에 찢어버리고 성당을 떠난다. 결국 하느님께서 치셤의 편에 서주신 것이고 진정한 신앙의 삶이 어떤 것인지 치셤을 통해 보여주신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쯤에서 나는 얼마전 50여일의 대장정을 마친 새만금 간척사업반대와 평화를 위한 삼보일배 일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교회와 절의 강단이 아닌 작열하는 아스팔트 길로 기꺼이 나서서는 삼보일배하며 저 멀리 부안땅에서 서울 한복판까지 묵언의 고행을 해온 네분의 종교인들을 보며 치셤신부를 투영시켜보다. 교의를 떠나, 사소한 차이를 떠나,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대전제 하나만으로 그 먼 거리를 함께하며 때로는 서로 보듬어주고, 때로는 위로하고, 때로는 땀 닦아주며 서울까지 올라온 그들의 공동선을 위한 수행을 보면 치셤이 보여준 삶은 결코 소설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이 보기에 실패한 삶일지라도 하늘의 판단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흔한 진리를 가장 감동깊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꾸부정한 치셤이 안드레아를 데리고 낚시하러 떠나는 모습에서 끝난 마지막 소설의 장면은 이후 우리 가슴속에서 계속 이어져 쓰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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