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강재언 지음, 이규수 옮김 / 한길사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전략)이처럼 260여 년에 걸친 에도 시대 교린의 역사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라는 역사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양국 사이의 관계는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교린의 원점, 즉 신의(信義)와 성신(誠信)의 정신으로 돌아가 온갖 장애와 어려움을 극복한 양쪽의 노력이다. 
 
그 전형적인 사례는 히데요시의 '왜란'을 '교린'으로 전환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결단이다. 또한 쓰시마 번의 '야나가와 사건'을 처리한 제3대 쇼군 이에미쓰, 아라이 하쿠세키에 의한 '국휘논쟁'의 후유증을 처리한 제7대 쇼군 요시무네의 지도력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에도 시대의 조선과의 교린사는 도쿠가와 막부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래서 막부의 권위가 쇠퇴하기 시작한 19세기 전반기에 이르면 교린의 역사 또한 흔들리기 시작했다.(하략)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강재언, 2005년 한길사) 344~345쪽

전공적인 관심으로 대마도 관계 가벼운 서적을 몇권 읽어봤지만 집중을 하지 않아서인지 머리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 고작 동래부와 대마번 사이의 표면적인 외교관계만을 되뇌이는 나를 보며 어디가서 대학원생임을 떳떳하게 밝힐 수 없다.

강재언 선생은 도쿠가와 막부 이후를 다루지 않아 인용되지 않았지만 외교문서를 통해 보면 한일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일본측 외무성과 대마도의 외교권 선점 다툼으로 꽤나 복잡다양했음을 대략 알고 있다.

사실 이런 것을 볼때 우리의 역사자료라는 것이 우리의 것보다 일본의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우리는 왕에게 올리는 글과 문집정도가 남았을까. 이에 비하면 기록적 가치를 볼때 일본의 철두철미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의 선두에 선 것은 대마도주였다. 그러나 도요토미의 사망과 조선침략의 실패, 그리고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패배가 있었음에도 새오운 정권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대마도주 소가(宗家)집안을 보면 일본의 조선외교에서 대마도는 버릴래야 버릴수 없는 중요한 가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국의 외교관계에서 아라이 하쿠세키 같은 인물들이 결국은 교린이라는 벽을 넘어 우월성을 내세우며 다시 한번 도요토미가 실패한 이후를 꿈꾸게 되는 것이리라.


2007. 5. 25 이용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