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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0년의 낭만 ㅣ 십대의 원고지 1
이하은 지음 / 주니어태학 / 2023년 1월
평점 :

글쓰기는 흡사 10대를 지나며 앓는 유행병과도 같다.
다만, 누군가에게 알려지기는 싫지만 다른 한편으론 누군가 한 명은 꼭 읽어 주었으면 하는 그런 유혹.
돌아보니 나도 편지를 쓰며 낭만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주고 받게 된 국군 장병과의 위문 편지!
처음엔 위문의 의미로 시작했지만 계속 글을 쓰다보니 그 글쓰기가 생활의 일부였던 적이 있었다.
10대의 낭만, 색색의 편지지에 또한 색색의 펜으로 깨알같이 써내려갔던 글.
그 국군 장병과 얼굴을 마주 한 적은 없지만 꿈 많고, 고민 많은 소녀의 글을 읽고 다정한 안부로, 조용한 꾸짖음으로, 따뜻한 위로로 그렇게 군대라는 울타리를 벗어 날 때까지 주고 받은 수많은 글들이 그 때의 낭만이었고, 소녀에겐 수줍은 로멘스였다.
내가 10대 시절 이렇게 작은 로멘스를 꿈꾸는 동안 작가 이하은은 같은 10대를 살면서 같은 편지글로 세상을 뚫어 보는 시선을 담아 멋진 소설을 써내려 간 것이 놀라웠다.

이하은은 글 뿐만 아니라 책 속의 삽화까지 직접 그려낸 재능이 많은 작가다.
나는 2080년의 낭만을 읽으면서 어쩌면 작가의 재능과 새털처럼 많은 날들이 남았음에도 벌써 이만큼 성찰을 이루어낸 젊은 영혼을 동시에 질투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미래를 보면서 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에 발을 묶어놓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책 속의 주인공 펜시어 처럼 (그리고 어쩌면 나처럼...)
과거에 대한 미련이 현재를 덮치고,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든 사건으로 부터 한발 한발 전진해 나가는 펜시어의 모습이 소리없이 가슴을 파고 든다.
관찰 (사회적 이휴, 환경문제 혹은 자연 그 자체, 감정적의 변화 타인의 고통 혹은 반대)
문제의 발견 또는 인식 (심리적, 환경적, 사회적)
해결방안 모색 (회피하기, 마주하기, 수렴하기)
해결방법의 세부적 요소 (마케팅, 지인, 친구, 사회적 강자 또는 약자, 도구등)
성장 (자기성찰, 더 나은 사회로의 발전, 화합)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경험해 나가는 과정.
나는 최근 자기계발이나 심리적 위안을 주는 에세이들을 많이 읽었다.
예전엔 책과 책의 링크를 잘 발견하지 못했는데, 2080년의 낭만을 읽는 동안 책들 속에 내재 된 공통점들을 발견했다. 어쩌면 책들은 수많은 다른 방식을 통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고, 때문에 어린 작가의 통찰력과 문장력에 감탄하며, 앞으로 그녀가 써내려 갈 수많은 이야기들이 기대가 되기도 했다.
한편으론, 자기계발서 라고 나와 있는 책들보다도 나에겐 더 깊게 동기유발을 가져다 준 책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철학적으로 사고해서 떠나 보내거나 수렴하는 주인공의 모습들이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삶 (각자 삶의 이유와 의미)'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우리는 남과 비교하고 방관하고 자포자기하거나 될대로 되라는 식의 삶을 살면서 우울이라는 고통을 겪는다.
사실 우리가 비교해야 할 상대는 남이 아니라 과거의 나가 되어야 한다. 과거의 나보다 1만큼 이라도 더 나아가는 오늘을 살고 있다면 그 삶은 허투로 살아 가는게 아닐것이다. 그러나 의미가 있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싼 자연과 환경, 사회와 가족과 친구들에게 봉사하거나 사랑으로 끊임없이 보듬는 연습을 하며 살아야 한다. 그걸 깨달은 테멜다는 아마도 그래서 그날 밤 하늘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네가 직접 편지를 써보면 알겠지만, 손가락 근육을 움직여서 글자를 적는 것과 스크린을 두드려서 문자를 찍어 내는 건 정말 다르단다. 일단 길이도 확연히 다르지! 탁구 치듯이 말에 대한 대답을 단편적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 며칠 간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접어서 종이위에 올려놓는거야. 그러니까 내가 편지를 쓰는 동안 사용한 시간과 손가락 근육은 이제 네 거라고, 펜시어. 아무도 뺏어갈 수 없는 고유한 것이지!
그래, 바로 이게 편지쓰기의 낭만이야. - P15
지극히 익숙한 것들이 곁을 떠나고, 과거라는 이름으로 붙잡을 수 없는 비물질적인 존재가 되는 거. 나한테는 정말 슬픈일이거든. - P63
네가 벌렸던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 기억나? 넌 프로젝트가 고등학교에서 졸업을 위한 필수 이수 조건이기 훨씬 전부터 나름의 프로젝트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냈잖아. 간단하게 시작하면 센터 새 단장을 위한 벽화 디자인 같은 일들. 나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사회 운동을 벌일 때도 있었고, 로봇 나무 같은 걸 만들어낼 때도 있었지. 별 특이한 것들에 대해서 수학적 모델을 만들어보려고 했고, 철학 에세이는 손 가는 대로 그린 낙서처럼 막 쏟아냈고. 그 정도로 세상 모든 것을 들춰보가 다닌다면 지칠 만도 한데, 너는 네 무지를 마주하는 일이 네 생명의 원동력인 것처럼 굴었어. 모르는 걸 발견할 때마다 환희에 차서 말이야. - P88
센터에 있을 때도 기본적인 집안일은 알아서 다 했는데, 선생님은 내가 청소 로봇 관리도 제대로 못할 거라고 의심하시더라니까. 내가 청소 로봇을 망가뜨린 건 십년 전 일이고, 솔직히 말해서 옆에서 부추긴 네 탓도 반은 되는데 말이야. 넌 늘 여기에 동의하지 않지만 아무튼 선생님께 우리는 영원히 아이 같아 보이는 거겠지. - P126
내가 그동안 왜 같은 겨울이 돌아오고, 같은 봄이 지나고, 같은 여름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전혀 모르겠어. 다시 돌아오는 시절은 없는데 말이야. 그걸 불러서세울 수도, 잡을 수도 없고, 재현하려고 하면 시도하는 사람만 힘들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리워하는 거야. 좋은 날들은 떠올리는 것만이 허락돼. - P143
나는 보통 하늘에 눈을 뺏기면 주변에 있는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걸 끊임없이 상기 시켜주는 내 친구 때문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늘을 보는 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 않은가. 아직 가보지 못한 모든 공간은 오직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아름답고 빛나고 늘 벼로하하는 것들은 모두 하늘에 있다. 어떻게 고개를 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렇지만 내가 그 밤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평소와는 다른점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별이나 하늘 같은 걸 제대로 보고 있지도 못했다. 고개는 매일 그랬던 것처럼 위를 향하고 있었지만, 하늘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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