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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만의 허기
레온 드 빈터 지음, 유혜자 옮김 / 디자인하우스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뭔가 진정으로 선한 것이 있어서 사람이 그것의 일부분이 될 수 있고,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그것 혼자만으로도 영혼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지속적이고 완벽한 희열을 영원토록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과연 있는지 나는 찾아 나서기로 했다."
책 속에서 주인공 호프만이 읽어내려가는 스피노자의 [지성의 개선에 관한 논고와 사물에 대한 진정한 자각으로 가장 잘 인도해주는 과정에 대한 논고]의 일부분.
레온 드 빈터라는 이 작가는 어찌나 잔인한지, 등장인물들을 잠시도 행복한 환상속에 놓아주지 못하고 줄기차게 그야말로 갈데까지 다 가도록 몰아가는 것이 그냥 보고있기 민망할 정도였다. 게다가 정작 그들의 그 처절한 방황은 일상 속에서는 좀처럼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사실 뭐 이렇다하게 설명하기도 가당치 않아 그저 수북이 쌓이기만 하는 문제들. 이윽고 때가되면 그 그릇이 넘쳐 더는 어떻게도 손쓸 수 없게 되는 그런 문제들 말이다.
한 인간의 삶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질서나 도덕, 애정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그 어떤 순간에 무방비상태로 받아들인 충격, 아픔, 상처 같은 것이며 그 누구도 대신 그것을 겪어주거나 제거해줄 수 없다고 단언하며, 더우기 그것이 필연적으로 시대와 역사의 산물이라고 외치고 있는 작가의 목소리.
불면증, 폭식, 기만, 무능력, 변비, 배신, 사별... 그리고 스피노자.
"난 2000년을 직접 체험하고 싶어."
마리안의 눈망을에 애정과 근심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여보."
마리안이 말했다.
"나도 함께 하겠어요."
그는 다시 책장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했다. 마리안도 자기 일에 다시 몰두해 들어갔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만 20세기를 다 산 것이 되기 때문에 난 그렇게 하고 싶은 거야, 내 말뜻 알겠소?"
마리안이 안경을 벗어 들었다.
"정말로요, 왜요?"
"이 세기는 사라져 버려야 하니까. 난 이 세기가 죽어 없어지는 꼴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그렇게 하는 것이 그것에 조금이라도 복수하는 것이 될 테니까. 죽지 않고 버텨내서 그것을 직접 묻어 주고 싶어."
그렇게 끝없이 그저 죽어버리기만 갈구했던 한 사람이 뜻하지 않은 파국을 지나며 결국은 한시적이나마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찾아내고 마는 이야기. 호프만의 허기다.
ps. 주인공이 해결되지 않는 고뇌에 빠져 허우적허우적 이것저것 먹어치우는 장면이 계속 반복되면서, 어느새 싱크대 이곳저곳을 뒤적여 안 먹고 처박아둔 과자며 우유며 군것질거리들을 마구 입으로 집어넣고 있는 나를 발견. 쩝. 그런데 책에서는 그렇게 먹어치우는 장면 뒤에는 꼭 모조리 게워내는 장면이. 으... 애써 먹은걸 뭐하러 게워낸담. 아깝게.
ps2. 여기 나오는 수많은 음식들 중에 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다름아닌 나시고렝(책에서는 나지고랭으로 번역되었음)이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즐겨먹는 따뜻한 볶음밥 나시고렝.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오래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역으로 유입된 문화인 듯. ㅠ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