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



충격적이면서도 강렬한 소설이었다.

이벤트에 당첨돼서 우연히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을 먼저 읽게 되었다. 그 소설로 한강작가를 알게됐다.

소년이 온다’와는 다른 의미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늘 ‘즐거운, 재밌는’소설만 읽던 내게는 참 낯선 소설이었다.


채식주의자는 3개의 이야기를 엮어 만든 연작소설이다.

소설의 발화점이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소재라고 할 수 있는 영혜를 중심으로 한 세 사람의 진술이 세가지 이야기가 된다.

워낙 유명해진 책이라 모두들 알테지만 이 소설은 ‘영혜’라는 인물이 어떤 꿈을 꾸고나서

육식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식물화 돼가는 모습을 그린다.


첫 장인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인 ‘나’의 시점으로, 둘째장인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의 형부인 ‘나’의 시점으로,

마지막 장인 ‘나무 불꽃’는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세 사람의 시점으로 영혜의 모습을 바라보는만큼 인물마다의 성격과 성향에 따라

영혜의 기행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무난한 듯 흘러가던 이야기가 조금 틀어지나 싶더니 전혀 예상도, 이해도 못할 방향으로 내달려 큰 충격을 줬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가치관과 세계관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참 불편하면서도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다 3장에 가서야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애잔함이 들면서 아연해졌다.

1장 채식주의자에서 '이게 뭘까' 하는 감상이 들었다면 2장에서는 경악하고 분노하다가 

3장에서 인혜의 진술을 듣고서야 조금씩 이해가 가면서 복잡미묘한 기분이 든다.

자매인 두 여자가, 아버지에게 뺨을 맞으며 커온 자매들이 서로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는 아니었을까.

두 사람이 모두 안타깝고 가엾게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언니인 인혜가 나는 좀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P.169


어린시절부터, 그녀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공통적으로 갖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알았으며, 성실은 천성과 같았다. 딸로서, 언니나 누나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가게를 꾸리는 생활인으로서,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P.166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최선을 다했던, 삶을 지키고 영위하고자 늘 참고, 버티던 그녀이기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조차 끝까지 동생을 그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돌보려는 모습이 너무도 그녀다우면서도 애달프게 다가왔다.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이었지만 여운이 참 길다.



◆◆◆





P.48
나는 아내가 ‘죄송해요, 아버지. 하지만 못 먹겠어요’라고 대답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죄송하지 않은듯한 말투로 담담히 말했다.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P.53
그날 저녁 우리집에선 잔치가 벌어졌어. 시장 골목의 알 만한 아저씨들이 다 모였어.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그릇을 다 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P.60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


P.75
많은 것들이 그의 안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인가. 또는 제법 도덕적인 인간인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강한 인간인가. 확고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질문들의 답을 그는 더 이상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P.83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P.158
영혜는 그녀보다 네살 어렸다. 터울이 제법 져서인지, 그녀들은 자매간에 흔히 볼 수 있는 티격태격하는 갈등 없이 자랐다. 손이 거칠던 아버지에게 차례로 뺨을 맞던 어린시절부터 영혜는 그녀에게 무한히 보살펴야 할, 흡사 모성애와 같은 책임감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P.166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P.186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아무도 없는 병실을 살피며 영혜는 말했다.


P.192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결국 산 반대편 길고 내려가 집이 있는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타고 그들은 저물녘의 낯선 길을 달렸다. 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저녁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 저녁, 영혜의 말대로 그들이 영영 집을 떠났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P.197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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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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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는 뭐 이런 재앙 같은 아파트가 있나 하면서 ‘개떡’같은 사람들만 모여있구나 싶었는데

중반쯤부터는 미워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헷갈리게 되더니 책을 덮고나니 도대체 싫어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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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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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베라는 남자』가 노인의 이야기라면, 『할.미.전』은 일곱살 짜리 꼬맹이의 이야기.

막 나가는 이상한 할머니와 어른스럽지만 재수없는 손녀로 시작했던 이야기는 막 나갔던걸 조금 미안해하는,

멋지지만 이상한 할머니와 여전히 되바라졌지만 사랑스러운 손녀의 이야기로 끝난다.


여기서 엘사의 할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누가 나한테 똥을 던졌어!’라는 관용표현을 말 그대로 실현해내는 인물이다.

병원탈출, 동물원 담치기, 경찰한테 똥 던지기, 교장한테 지구본 던지기 등등 모두가 인정하는 특이한 할머니이다.

그러나 엘사에게만큼은 ‘슈퍼 히어로’에 비유할 정도로 둘도 없는 할머니가 된다.


다음으로 이야기의 주인공인 엘사는 빨간펜을 들고 다니며 맞춤법을 지적하고 순순히 수긍하는일 없이 꼭 말에 토를 다는,

해리포터와 슈퍼 히어로를 좋아하는 일곱살짜리 여자애다. 할머니와 엘사는 깰락말락나라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절친 사이.

그러다 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게 되면서 제목 그대로 할머니가 ‘미안하다’는 전하는 편지를 남기고

손녀인 엘사가 보물찾기하듯 그 편지들을 찾아 전달하면서 할머니와 주변사람들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소설 중간중간 뜬금없이 할머니가 엘사에게 들려주는 ‘깰락말락나라’의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책을 다 읽고나면 할머니가 들려주는 동화가 그저 동화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동화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동화가 되는 소설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꿈과 희망이 가득한 이야기 같지만 전혀...

유쾌하면서도 슬프면서도 짠하면서도 웃긴 희로애락이 담긴 이야기였다.

사실 초반에는 좀 혼란스럽고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건가 싶었다.

‘오베라는 남자’가 더 좋았다고 실망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푹 빠지게 됐다.


엘사, 할머니, 엄마, 아빠, 예오리, 알프, 브릿마리, 켄트, 마우드, 레나르트,

까만 치마를 입고 다니는 여자,무슨 증후군을 앓는 아이, 아이 엄마 등등. 참 여러 인물이 나오는데

그 모든 인물들의 성격과 특징이 분명하고 독특한게 ‘오베’에서부터 이어져온 매력인 것 같다.

작가가 인물 한명 한명의 에피소드나 행동들로 그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능력이 참 뛰어난 것 같다.

더불어 프레드릭 배크만 특유의 능글거리는(?) 유머가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빵터지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초반에는 뭐 이런 재앙 같은 아파트가 있나 하면서 ‘개떡’같은 사람들만 모여있구나 싶었는데

중반쯤부터는 미워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헷갈리게 되더니 책을 덮고나니 도대체 싫어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개떡 같은 부분도 있고 ‘안 개떡’인 쪽도 있다는 할머니의 말이 소설 그 자체로 증명된 셈이다.

끝없이 악인인 사람도 절대적으로 선하며 완벽한 사람도 없다는 것,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

사람은 원래 이런 저런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사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오베라는 남자’에서부터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인 것 같다.

 이 다음 소설인 ‘브릿마리’의 이야기도 참 궁금하다. 어서 번역출간 되기를!



◆◆◆





P.17

“호들갑 좀 그만 떨어. 그러니까 꼭 네 엄마 같다. 라이터 있니?”

“저 일곱 살이에요!”

“언제까지 그걸 핑계라고 댈래?”

“아마도 여덟 살이 될 때까지요?”


P.31

하지만 엘사는 그게 또 다른 버전의 진실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할머니는 거짓말을 그렇게 부른다. ‘또 다른 버전의 진실’이라고.


P.41

엄마와 할머니가 말다툼을 시작할 때마다 엘사는 볼륨을 높이고 두 사람이 무성영화에 출연한 배우라고 상상한다. 엘사는 배경음악을 직접 선택하면 살기 쉬워진다는 걸 아주 어렸을 때 터득한 아이다.


 P.46

할머니는 예오리를 절대 ‘예오리’라고 부르지 않고 늘 ‘찐따’라고 부른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노발대발하지만 엘사는 할머니가 왜 그러는지 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할머니는 엘사의 편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다. 손주의 부모다 이혼해서 각자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고 반쪽짜리 동생이 생긴다는 소식을 느닷없이 알리면 할머니는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P.99

하지만 잠시 후에 교장선생님이 남자아이와 엘사에게 서로 악수하고 사과하라고 하자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면서 물었다. “엘사는 도대체 뭣 때문에 사과해야 되는 거요?” 교장선생님은 엘사가 남자애를 ‘도발’했으니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남자애는 ‘감정 조절’에 문제가 있는 아이라고 했다. 바로 그때 할머니가 지구본을 집어서 교장선생님에게 던지려고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엄마가 할머니의 팔을 붙잡는 바람에 지구본이 컴퓨터에 부딪쳐서 모니터가 박살 났다. “당신이 날 도발했잖아!” 할머니는 엄마에게 잡혀 복도로 끌려 나가면서 교장선생님에게 고함을 질렀다. “나는 감정 조절을 못 하는 사람이라고!”


P.204

모두가 괴물과 워스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그 주정뱅이처럼 그들도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P.251

엘사는 괴물이 편지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 얘기하는 이유가, 어리다는 이유로 남들이 어린아이 앞에서 쉬쉬하면 걔가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알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P.262

엘사도 알다시피 그런 소시를 하는 사람은 위선자다. 엘사는 군인도 싫어하고 전쟁도 싫어하지만 울프하트가 끝없는 전쟁에서 그림자들과 맞서 싸우지 않았다면 깰랄말락나라가 모조리 잿빛 죽음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 거다. 엘사는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할 때가 많다. 싸워도 되는 때와 싸우면 안 되는 때에 대해서. “너한텐 잣대만 있고 나한텐 이중 잣대가 있으니까 내가 이긴 거야”라고 했던 할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P.326

“리세트랑 아이들 더 낳을 거예요?”

“아닐 거야.” 아빠는 누가 봐도 뻔한 질문이라는 듯 서글픈 목소리로 대답한다.

“왜요?”

“더 이상 필요 없으니까.”

“필요 이상으로 많이 낳았으니까”라고 말하려다 참은 것처럼 들린다. 어째 그런 느낌이다.

“나 때문에 아이를 그만 낳고 싶은 거예요?” 이렇게 물으면서도 아빠가 아니라고 대답해주길 바란다.

“그렇지.”

“알고 보니 내가 특이한 아이라서요?” 조그만 목소리로 묻는다.

아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엘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하지만 아우디에서 내려 문을 닫으려는 순간, 아빠가 좌석 너머로 손을 뻗어서 엘사의 손끝을 붙잡고, 엘사가 아빠의 눈을 쳐다보자 아빠도 늘 그렇듯 머뭇거리며 시선을 맞춘다. 아빠가 속삭인다.

“알고 보니 네가 완벽한 아이라서.”

그렇게 안 망설이는 아빠의 말투는 처음이다.


 P.356

엄마는 요즘 그렇게 누가 플러그라도 뽑은 것처럼 갑자기 피곤해한다. 분명 반쪽이 때문이다. 예오리 말로는 반쪽이가 앞으로 18년 동안 자기 때문에 잠을 못 이룰 테니 임신 10개월 동안 잠이 쏟아지게 만들어서 보상하려는 거라고 한다.


 P.464

다시 눈이 내리고, 엘사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예전에 개떡 같았다 하더라도 계속 좋아할 방법을 찾기로 마음먹는다. 한번 개떡 같았다고 사람들을 쳐내기 시작하면 금세 남은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될 거다.


 P.489

그러면 할머니는 어느 누구도 백 퍼센트 개떡은 아니고 어느 누구도 백 퍼센트 안 개떡은 아닌 게 인생의 묘미라고 했다. ‘안 개떡’인 쪽으로 최대한 치우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인생의 과업이다.


P.530

“나는 양면적인 사람이야. 그래서 아빠로서 빵점이라는 거 알아. 내가 좀 더 정리된 사람이라야 네가 우리랑 좀 더 오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예전부터 걱정했어. 그래서 그게 너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지. 부모들은 종종 그러는 것 같다. 이 모든 게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자기 자신을 설득하지. 부모가 다른 일로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은 기다려주지 않고 쑥쑥 커버린다는 걸 인정하려면 너무 괴롭거든……”

엘사는 아빠의 손바닥에 이마를 대고 속삭인다. “완벽한 아빠가 될 필요는 없어요, 아빠. 하지만 내 아빠라야 해요. 그리고 마침 엄마가 슈퍼 히어로라고 해서 엄마한테 부모 노릇을 더 많이 맡겨도 안 되고요.”


P.539

봉투에 엘사의 이름이 거의 정자체로 적혀 있다. 할머니는 맞춤법을 틀리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생각대로 잘 되진 않았다.

첫 문장이 이렇다. “주글 수밖에 없어서 미안해.”

그리고 그날 엘사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를 용서하기로 한다.


감사의 말(작가의 말)

P.549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을 택한 독자 여러분에게 가장 큼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상당히 미심쩍은 판단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저는 나가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아야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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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 윤동주 유고시집, 1955년 10주기 기념 증보판 소와다리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윤동주 지음 / 소와다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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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 읽었다고 그 사람에 대해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를 통해 어떤 사람일지 어렴풋이 알 수 있게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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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 윤동주 유고시집, 1955년 10주기 기념 증보판 소와다리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윤동주 지음 / 소와다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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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序 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너무도 유명한 그 시! 바로 그 시!

윤동주 시인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 그리고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한컴 타자연습의 바로 그 ‘별 헤는 밤’도 떠오른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죽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것뿐이니 결국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 한단 말.

역시 언제 들어도 멋있는 문구다.

윤동주 시인이라 하면 서시와 별 헤는 밤 밖에 몰랐는데 이 시집에는 그만큼 좋은 시들이 가득 있었다.

 

초판본이다보니 한자가 많아서 처음에 일일이 음을 달아놓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대부분 쉬운 한자들이라 그냥 읽으려면 읽을 수도 있겠지만 한자에 신경쓰다보니

읽다가 자꾸 끊겨 감상을 할 수가 없어서 음을 미리 다 써버렸다.

 

서시에서도 알수있지만 섬세한 표현과 특유의 분위기를 다른 시 곳곳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바다의 물결을 잔주름 치마에 비유한다거나 황혼이 물드는 것을 ‘하루가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긴다’고 표한한다거나

햇빛이 문틈으로 비쳐들어오는 것을 ‘햇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죽한 일자를 쓰고…지우고…’ 라고 표현한다거나

반딧불을 부서진 달조각으로 표현한 것 등등...표현이 참 예쁘다.

 

1~3장까지는 이렇게 여운이 길고 왠지 쓸쓸한 분위기였는데 4장은 또 달랐다.

전부 한글로 쓰여졌고 딱딱 떨어지는 음률이 동시 같은 느낌이었다.

앞에 시들과 대조되어 그런 분위기가 더욱 선명했는데 그게 또 왠지 더 슬펐다.

 

그리고 마지막 5장. 짧은 수필 같은 분위기의 글들이 몇 편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방황과 고뇌, 고민들…그리고 좀 더 구체적인 생각들을 엿볼 수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생애에 대해 좀 더 알고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책도 읽은김에 영화 ‘동주’도 보게되었다. 흑백인 영화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영화를 보고나니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겼던 문구들이 ‘아…이런 마음이었겠구나’하면서 이해가 갔다.

책을 읽은 분들이라면 저 영화도 한번쯤 보면 좋을 것 같다.

물론 당연 영화도 완전 사실은 아닐 것이고,  책 한 권 읽었다고 그 사람에 대해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를 통해 어떤 사람일지 어렴풋이 알 수 있게된 것 같다.

 

마무리는 밥먹고 책을 꾸벅꾸벅 졸면서 읽다가 뜨끔했던 시!

 

 

P.84

산협의 오후 – 윤동주

 

내 노래는 오히려

섧은 산울림.

 

골짜기 길에

떨어진 그림자는

너무나 슬프구나

 

오후의 명상은

아- 졸려.

 

 

◆◆◆

 

 

 

P.6

자화상(自畵像)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P.36

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길 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내가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어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P.46

사랑스런 추억 – 윤동주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이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때가 부끄러운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주어, 

  

봄은 다 가고---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P.50

쉽게 씨워진 시 – 윤동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아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P.56

참회록 –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P.66

아우의 인상화 – 윤동주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P.84

산협의 오후 – 윤동주

 

내 노래는 오히려

섧은 산울림.

 

골짜기 길에

떨어진 그림자는

너무나 슬프구나

 

오후의 명상은

아- 졸려.

 

 

P.112

가슴 1 - 윤동주 

 

소리 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뚜다려 보오. 

 

그래 봐도 

후---- 

가아는 한숨보다 못하오.

 

 

P.122

삶과 죽음 –윤동주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衛人들! 

 

 

P.175

도리켜 생각컨대 나무처럼 행복한 생물은 다시 없을 듯 하다. 굳음에는 이루 비길데 없는 바위에도 그리 탐탁치는 못할망정 자양분이 있다 하거늘 어디로 간들 생의 뿌리를 박지 못하며 어디로 간들 생활의 불평이 있을소냐, 칙칙하면 솔솔 솔바람이 불어오고, 심심하면 새가 와서 노래를 부르다 가고, 촐촐하면 한줄기 비가 오고, 밤이면 수많은 별들과 오손도손 이야기 할수 있고 – 보다 나무는 행동의 방향이란 거치장스런 과제에 봉착하지 않고 인위적으로든 우연으로서든 탄생시켜 준 자리를 지켜 무진무궁한 영양소를 흡취하고 영롱한 햇빛을 받아드려 손쉽게 생활을 영유하고 오로지 하늘만 바라보고 뻗어질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스럽지 않느냐.

이밤도 과제를 풀지 못하야 안타까운 나의 마음에 나무의 마음이 점점 옮아오는돗 하고, 행동할수 이는 자랑을 자랑치 못함에 뼈저리듯 하나 (하략)

 

P.182

나는 세계관, 인생관, 이런 좀더 큰 문제보다 바람과 구름과 햇빛과 나무와 우정, 이런것들에 더 많이 괴로워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183

내 상도 필연코 그 꼴일텐데 내눈으로 그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만일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듯 그렇게 자주 내 얼굴을 대한다고 할 것 같으면 벌서 요사하였을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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