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



충격적이면서도 강렬한 소설이었다.

이벤트에 당첨돼서 우연히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을 먼저 읽게 되었다. 그 소설로 한강작가를 알게됐다.

소년이 온다’와는 다른 의미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늘 ‘즐거운, 재밌는’소설만 읽던 내게는 참 낯선 소설이었다.


채식주의자는 3개의 이야기를 엮어 만든 연작소설이다.

소설의 발화점이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소재라고 할 수 있는 영혜를 중심으로 한 세 사람의 진술이 세가지 이야기가 된다.

워낙 유명해진 책이라 모두들 알테지만 이 소설은 ‘영혜’라는 인물이 어떤 꿈을 꾸고나서

육식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식물화 돼가는 모습을 그린다.


첫 장인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인 ‘나’의 시점으로, 둘째장인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의 형부인 ‘나’의 시점으로,

마지막 장인 ‘나무 불꽃’는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세 사람의 시점으로 영혜의 모습을 바라보는만큼 인물마다의 성격과 성향에 따라

영혜의 기행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무난한 듯 흘러가던 이야기가 조금 틀어지나 싶더니 전혀 예상도, 이해도 못할 방향으로 내달려 큰 충격을 줬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가치관과 세계관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참 불편하면서도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다 3장에 가서야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애잔함이 들면서 아연해졌다.

1장 채식주의자에서 '이게 뭘까' 하는 감상이 들었다면 2장에서는 경악하고 분노하다가 

3장에서 인혜의 진술을 듣고서야 조금씩 이해가 가면서 복잡미묘한 기분이 든다.

자매인 두 여자가, 아버지에게 뺨을 맞으며 커온 자매들이 서로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는 아니었을까.

두 사람이 모두 안타깝고 가엾게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언니인 인혜가 나는 좀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P.169


어린시절부터, 그녀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공통적으로 갖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알았으며, 성실은 천성과 같았다. 딸로서, 언니나 누나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가게를 꾸리는 생활인으로서,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P.166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최선을 다했던, 삶을 지키고 영위하고자 늘 참고, 버티던 그녀이기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조차 끝까지 동생을 그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돌보려는 모습이 너무도 그녀다우면서도 애달프게 다가왔다.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이었지만 여운이 참 길다.



◆◆◆





P.48
나는 아내가 ‘죄송해요, 아버지. 하지만 못 먹겠어요’라고 대답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죄송하지 않은듯한 말투로 담담히 말했다.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P.53
그날 저녁 우리집에선 잔치가 벌어졌어. 시장 골목의 알 만한 아저씨들이 다 모였어.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그릇을 다 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P.60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거울 좀 봐라, 네 얼굴이 어떤가 보란 말이다.”


P.75
많은 것들이 그의 안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인가. 또는 제법 도덕적인 인간인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강한 인간인가. 확고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질문들의 답을 그는 더 이상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P.83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P.158
영혜는 그녀보다 네살 어렸다. 터울이 제법 져서인지, 그녀들은 자매간에 흔히 볼 수 있는 티격태격하는 갈등 없이 자랐다. 손이 거칠던 아버지에게 차례로 뺨을 맞던 어린시절부터 영혜는 그녀에게 무한히 보살펴야 할, 흡사 모성애와 같은 책임감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P.166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P.186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아무도 없는 병실을 살피며 영혜는 말했다.


P.192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결국 산 반대편 길고 내려가 집이 있는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타고 그들은 저물녘의 낯선 길을 달렸다. 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저녁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 저녁, 영혜의 말대로 그들이 영영 집을 떠났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P.197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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