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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 청소년과 어른,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프리드리히 카를 베히터 엮음, 김경연 옮김 / 보림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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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필요에 의해서 그림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몇 권 읽었는데 그 중 '햄릿'을 소개한다. 그림책들 중 창작물도 많지만 고전을 아이들에게 쉽게 읽히기 위해 개작된 것들도 많다. '햄릿'도 그런 범주에 드는 그림책일 듯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깜짝 놀랐다. 그림책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원작인 세익스피어의 햄릿보다 베히터의 햄릿은 더 암울하고 비극적이다.
 

줄거리는 기본적으로 원작 햄릿과 (결론이 조금 다르지만) 동일하다. 등장인물은 햄릿, 크로디어스(숙부), 거트루드(어머니이자 현재는 크로디어스의 아내), 폴로니어스(재상), 오필리어(폴로니어스의 딸), 그리고 어릿광대와 곰으로 압축되어 있다. 어릿광대와 곰의 등장은 그림책이니 아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한 장치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런 이유만 있지 않다. 어릿광대와 곰은 원작 햄릿의 햄릿의 친구인 호레이쇼와 근위대원들, 그리고 연극을 공연하는 배우들 등의 여러 역할을 동시에 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하게 햄릿의 또 다른 자아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베히터의 '햄릿'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어릿광대와 곰이 햄릿의 자아를 대신하면서 세익스피어의 '햄릿'과 전혀 다른 '햄릿'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잘 알다시피 세익스피어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수다스런 캐릭터들이다. 세익스피어는 말들의 잔치고, 그 말들의 은유와 환유, 몰래 듣는 말, 오해하는 말들로 서사가 진행된다. 원작의 '햄릿' 역시 수다스런 캐릭터다. 그는 자기 심정을 다 떠벌리고 다니고, 연극을 하거나 거짓도 말하고, 고독도 독백으로 호소한다. 그런데 베히터의 '햄릿'에서 햄릿은 대사가 없다. 그는 내성적이고 고독하고 결국 복수도 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마음의 쇠사슬에 묶여 탑 안에 혼자 머물 수밖에 없는 인물이 된다. 오필리어와의 사랑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것도 모두 자기 마음 속에 가둬둘 수밖에 없는 햄릿이 됐다. 햄릿이 이런 캐릭터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또 다른 자아, 수다스런 자아인 어릿광대와 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베히터의 '햄릿'이 세익스피어의 햄릿과 가장 크게 달라진 지점이고, 세익스피어의 비극보다 훨씬 더 현대적인 비극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베히터의 햄릿에서 햄릿이 하는 말은 딱 세 마디인데, '오필리어', '쥐들이 바스락거려', '내가 찌르려던 건 다른 쥐였는데'가 전부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는 아예 나오지 않는다.)

세익스피어의 원작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사실 이 그림책은 동시대의 가족 이야기로 읽힐 수 있을 것 같고, 아마도 어린 아이가 읽으면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삼촌과의 결혼, 그리고 사랑하는 오필리어와 맺어질 수 없는 현대적인 비극으로 읽힐 것 같다. 원작을 읽은 독자라면 원작에 대한 재해석을 하면서 더 풍요로운 읽기가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원작의 1막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숙부와 어머니의 결혼식이 끝난 어느 잔치, 햄릿은 어머니가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한을 풀어놓고, 이후의 여러 막에서 햄릿은 어머니와 숙부의 결혼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는데, 이 베히터의 햄릿에서 그런 모든 장면들은 단 하나의 씬으로 압축되어있다. 숙부와 어머니의 침대 아래에 몰래 웅크리고 누워있는 모습. 아이들 그림책으로는 충격적으로 느껴지는데, 원작의 햄릿이 어머니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며 갈등하고, 호통하고, 질러대는 고통이었다면, 베히터의 햄릿의 고통은 고독하고 내면화되어 있다. 

 원작의 햄릿은 오필리어를 아버지의 복수를 실천하기 위해 이용만 하고 이미 영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오필리어는 죽어 있지만, 베히터의 햄릿은 그녀에 대한 사랑도 아버지에 대한 복수도 실천하지 못하고,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만 죽인 채로, 마음의 쇠사슬을 채워버리고 만다. 오필리어는 햄릿을 찾아가 쇠사슬을 풀어주고 '이리와, 새야, 널 날게 해줄게'라고 말한 채, 자신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광인이 된다. 햄릿의 또 다른 자아인 어릿광대와 곰은 마음의 쇠사슬에 묶인 햄릿을 그대로 둔 채, 광인이 된 오필리어를 따라가며 베히터의 '햄릿'은 끝난다. 세익스피어의 비극이 운명적인 비극이라면 베히터의 비극은 스스로 선택하는 비극이라 더 고통스럽다. 

베히터의 햄릿이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으로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현대적인 새로운 비극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림책이 이렇게 강렬할 수 있다는 것에 이 그림책의 의미를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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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지음, 박상규 옮김 / 시각과언어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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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위기? 도대체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 서평


 

 

들어가며 - 한국영화의 위기?

 

작년부터 한국영화산업의 불황이 심화되기 시작했고, 올해엔 여기저기서 한국영화의 위기와 해법에 대한 다양한 토론을 진행한다. 스크린쿼터 축소가 원인이라거나, 방송통신융합시대 극장만을 염두에 둔 배급구조가 변화되어야 한다거나, 내수시장만으로는 불가능하니 해외시장으로 나가고, 합작영화를 추구해야 한다거나 등등. 하지만 여기서 잠시 되물어보자. 언제 한국 영화가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나? 산업의 논리에서만 본다면 90년대 후반 스크린쿼터 축소 이야기가 나오면서 영화인들은 단결해 한국영화를 살리자고 외쳤고 그것은 국민을 설득시키며 일시적으로 부흥기인 것처럼 보였다. 그때 많은 영화인들은 문화다양성을 살리자, 한국영화가 죽으면 한국문화가 죽는다고 소리 높여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한 것은 할리우드 시스템을 흉내 낸 스타시스템이거나, 투자-기획-홍보-마케팅을 중심으로 한 대작영화 중심의 모색이었다. 그곳에 문화다양성이란 없었다. 한국영화는 천만 관객을 목표로 하는 대작 영화와 저예산 영화로 양분되었고 결국 제작된 영화의 10%만 수익구조를 맞추는 기형적인 구조가 됐다. (2007년 한국영화는 불황이었다 말하지만 1000만 관객을 넘기는, 그러니까 전체국민의 1/5이 관람한 영화가 두 편 - <왕의 남자>와 <괴물> - 이나 됐고, 한국영화의 투자심리는 그런 복권 당첨을 바라는 영화기획이었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90년대 후반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가 야기됐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이미 한국영화는 위기였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예견됐던 것이다. 지금 한국영화의 위기를 논하기 전에 토론해야 할 것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영화의 본질과 정체성의 문제다. 그 지점에 대한 논의 없이 한국영화의 변화는 있을 수 없다. 영화는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관객과 만날 것인가? 더구나 필름 산업이 사라지고 디지털영화로 변화하는 지금, 극장을 중심으로 한 배급과 상영구조가 다변화되고, 인터넷과 IPTV 등을 통한 배급이 논의되는 지금, 영화란 무엇인가란 본질적인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런 논의 없이 일시적인 한국영화 부흥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미봉책일 뿐이다.

 

앙드레 바쟁에 대해 알고 있는 독자들은 왜 갑자기 이 시점에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를 언급하는지 의아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나온 책이고, 그 당시에는 디지털 영화는 있지도 않았고 영화의 존재 형식은 지금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를 소개하는 이유는 지금 현 시점에 ‘영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기 위한 여러 지점들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탄생과 디지털 영화

 

영화의 탄생은 종종 기술의 발명으로 설명되곤 한다. 사진의 발명 이후 움직임의 환영을 만드는 여러 발명품들과 결합한 카메라 장치가 발명됐고,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기차역에 도착하는 사람들>이 상영된 것이 영화의 탄생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바쟁은 기술의 발명은 영화가 탄생하기 위한 하나의 물질적 조건이었을 뿐 영화 탄생의 요인은 관념에 있다고 말한다. 바쟁은 “영화의 선구자들은 오히려 예언자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케 된다. 그들의 상상력은 영화라고 하는 관념을 현실의 완전하고도 총체적인 재현과 동일시하여 음과 색채와 입체성에 의한 외부세계의 완전한 복원”을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며 영화 탄생의 원인은 상상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바쟁은 과거의 시각예술의 정신분석을 시도하며 “회화와 조각의 기원에는 미이라 콤플렉스가 놓여있다”고 말한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방어, 즉 시간의 불가역성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완벽한 이미지 재현이라는 신화에 의해 이미 창조되어있었던 것이라 말한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할 지점은 카메라에 의한 모사가 이전의 조각이나 회화 예술의 모사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이다. 바쟁은 “영화는 그 본질로부터 인간의 리얼리즘에 대한 집념을 실현”시켜 “다른 예술로 하여금 유사성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영화의 특성은 인간의 손이 개입되지 않은 모사, 기계적 모사라는 뜻이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회화와 비교되는 사진의 독창성은 그것의 본질적 객관성에 있다. 엄밀한 결정론에 따라서 외부세계의 상이 인간의 창조적 간섭 없이 자동적으로 형성되어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직 사진에서만이 우리는 인간의 부재를 향유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기호학적으로 말한다면 지표(index)로서의 유사성이지 도상(icon)으로서의 유사성이 아닌 것이다.1)   이런 관점에서 현재의 디지털 영화로의 변화는 어떻게 봐야할까? 이 지면을 통해서는 최근의 현상과 관련해 몇 가지 지점만 논의해본다.

 

첫째로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의 가장 큰 차이는 기록방식의 차이다. 필름 카메라에서는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필름의 화학물질에 반응해 눈에 보이는 입자를 기록했다. 디지털 카메라에서는 CCD(Carge Cupled Device, 빛을 전기신호로 바꾸어서 디지털형식으로 변환하는 이미지센서)가 필름의 역할을 하는데 여기에 기록되는 것은 디지털신호(0,1)로서 눈으로 그 지시대상의 형상을 볼 수 없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인데, 이 디지털 신호는 얼마든지 무한하게 변형이 가능하다. 물론 필름도 인화과정을 통해 변형 가능하지만 원본 필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에서 원본의 의미는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필름의 존재는 필름에 찍힌 사물의 존재를 본질적으로 증명하지만, 디지털 카메라의 CCD에 기록된 것은 사물의 존재를 본질적으로 증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신호의 조작으로 얼마든지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만들어 낼 수도, 존재하는 사물을 다른 존재로 변형할 수 있다. 컴퓨터로 제작하는 애니메이션이나 디지털 이펙트, 그리고 누구나 가정에서 사용하는 포토샵 등은 사소한 예에 불과하다. 이 변화는 영화의 본질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그에 따라 영화의 미학과 사회학에도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아직은 디지털 카메라로의 변화는 그 유아단계이고, 150년 필름의 역사를 모방하고 있는 수준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이후 훨씬 더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둘째로 디지털 카메라로의 변화는 카메라의 경량화와 대중화를 들 수 있다. 1950년대 16mm 카메라가 소형으로 제작되어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 영화는 한 차례 크게 변화한다. 유럽을 중심으로 시네마 베리떼라는 새로운 다큐멘터리의 경향이 등장한 것을 한 사례로 들 수 있다. 1인, 또는 2인만으로 구성된 촬영팀이 작은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들어가 자유롭게 핸드헬드로 촬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다큐멘터리의 미학과 사회적 존재방식 자체가 변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0년대 저가의 디지털 카메라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자 아마추어 영상제작자들도 저렴한 돈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었고, 그것 역시 영화미학과 사회적 작용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위의 사례들은 영화에서의 변화만을 언급한 것이지만 이후에 디지털 카메라로의 변화는 영상의 미학적, 사회적, 윤리적, 법(가령 저작권)적 측면 등 많은 지점에서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오래지 않은 미래에 인간 눈의 망막을 렌즈로 하여 기록되는 영상 역시 소통될 수도 있으며(이미 렌즈의 소형화로 안경이나 사람 몸의 일부에 렌즈와 기록장치를 부착해 촬영하는 것은 시작됐다), 존재하지 않는 사물의 3차원 이미지가 제작되고 소통되는 세계로의 변화가 올 수도 있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중국의 지아장커라는 감독이 <무용>이라는 디지털로 찍은 다큐멘터리를 한국에서 상영하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한 이야기를 언급하겠다. 관객 중 한 명이 ‘왜 디지털 카메라로 찍었는가’, 그리고 ‘당신에게 디지털 영화로의 변화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묻자 지아장커는 두 가지 측면에 대해 답했다. 첫째는 현재 중국사회의 변화되어가고 있는 현실(가령 댐 건설로 한 마을이 수몰되어 사라지는 등 과거가 사라지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는 현실)을 담기 위해서는 디지털 카메라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둘째는 디지털 카메라로 타인을 인터뷰할 때는 필름 카메라로 인터뷰할 때보다 훨씬 우연적인 삶의 진실을 포착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여기서 디지털 카메라로의 변화에 대한 한 미학적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앙드레 바쟁이 영화의 탄생지점, 칼라영화와 유성영화로의 변화지점에 대해 고민했던 사유를 통해 우리는 현재 디지털 영화로의 변화에 대해 그 본질적인 의미를 질문할 수 있다. 디지털 영화로의 변화는 단순히 HD 고화질 카메라로의 변화라거나 배급 통로의 변화 등을 통한 새로운 수익 창출 이전에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할 때인 것이다.

 

리얼리즘 영화와 리얼리티 프로그램

 

바쟁은 예술상의 리얼리즘 논쟁에 대해 “미학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혼동, 이 세계의 구체적이면서도 또한 본질적인 의미를 표현하려는 진정한 리얼리즘과 형체의 착각으로 만족하는 눈속임의 사이비 리얼리즘과의 혼동으로부터 리얼리즘 논쟁의 오해가 나온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쟁이 말하는 진정한 리얼리즘 영화란 단순히 현실처럼 보이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본질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쟁은 <콘티키호 표류기>라는 미리 준비된 각본 없이 실제로 배를 타고 표류하는 상황을 겪으며 죽음을 무릎 쓰고 찍은 영화를 언급하며 앵글도 화면도 프레임도 엉망이고 심지어 초점도 나간 장면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들은 “위험 그 자체를 담았기 때문에”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잘 조직된 르포르타주의 과실도 없고 빈틈도 없는 이야기보다도 폭풍을 만났다가 구조된 이 같은 표류기 쪽이 얼마나 더 감동적인가”라고 말한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 그 자체가 영화적인 것이다.

 

바쟁의 이러한 관점은 최근의 한국영화 <영화는 영화다>에서 이강패(소지섭)의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이강패는 장수타(강지환)에게 ‘당신이 찍고 있는 영화는 가짜다. 가짜로 싸우지 말고 진짜로 싸우자’고 말하고, 둘은 마지막 씬에서 실제로 싸운다. 영화와 현실을 착각하는 이런 태도에는 바쟁이 언급한 바의 위의 측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이강패의 태도, 그러니까 각본에 의해 짜여진 갱들의 세계는 가짜이니 실제로 싸우는 모습을 통해 진짜 갱들의 세계를 보여주자는 것. 과연 바쟁은 이강패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적어도 <영화는 영화다>란 영화 안의 감독은 지금까지 영화를 통해 보여주지 못한 생동감 있는 진짜 싸움을 보여줄 수 있음에 짜릿해 하며 ‘액션’을 외친다. 그렇다면 실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면을 찍으면 그것이 리얼리즘 영화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본이 있나 없나, 또는 진짜 싸움인가가 아닌가가 아니다. 그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는 현실의 본질적인 측면이 무엇이냐가 문제다. 그 본질을 어떤 촬영 방식으로 어떻게 각본을 짜서 보여주는가는 이후의 문제다. 그런 점에서 이강패의 문제의식은 옳았지만 그 문제의식을 실천한 태도는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최근 텔레비전을 장악하고 있는 리얼리티 프로그램들(‘1박2일’, ‘우리 결혼했어요’ 등)과의 관계에 대해 떠올릴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각본을 최소화시키고 진짜 ‘리얼’이라고 말하며 연출자와 카메라의 배우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리얼한 것인가란 질문을 해보자. 리얼리티란 ‘현실이란 환영’인데 우린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면서 ‘현실이란 환영’을 느끼는가? 이것은 복잡한 논의가 필요한 일이지만 두 가지만 언급하겠다. 가령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등장인물은 주어진 캐릭터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방송국의 연예인으로서 시청자들에게 자기 존재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의해 연기한다. 다만 그것을 리얼하게 포장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얼리티 프로그램 속의 리얼리티는 가짜 리얼리티다. 하지만 이 가짜 리얼리티는 다른 측면에서 시청자들에게 진짜란 환영을 준다. 그것은 방송국의 스타시스템이 마련한 소통의 틀 안에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그들의 행동에 따라 프로그램 안의 캐릭터와 실제 배우를 혼돈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배우의 측면에서도 그런데, 배우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동시에 연예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분열적 상황을 겪는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영상의 리얼리즘 개념 자체를 변화시키며 현실의 본질적 측면을 망각시키게 하는 효과를 가진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현실을 대체하는, 영상미디어와 현실세계가 전도된 상황은 현대 미디어사회의 위험한 속성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리얼리티가 현실의 본질적 측면을 왜곡하는 이런 점에서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은 퇴행적이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지점은 영상미디어에 의해 재현된 세계가 현실의 어떤 측면을 보여주는가이다.

 

나가며 -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와 새로운 한국영화를 위하여

 

바쟁은 프랑스 코미디 영화의 침체에 대해 “프랑스 영화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재능 있는 배우들이 아니고 희극의 양식, 그 구상인 것이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그대로 대입해 “한국영화의 위기는 스크린쿼터 축소도 아니고, 재능 있는 배우의 부재도 아니고, 테크놀로지 능력도 아니고, 투자된 자본의 크기도 아니고, 다만 영화의 양식, 그 구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장 정확한 지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옹호하며 그 영화들의 새로운 미학, 그러니까 ‘현실공간과 자연광 사용, 비전문배우 캐스팅, 현장의 우연적인 상황에 의한 리얼리티, 사건과 사건 사이 관객의 상상력 개입’ 등을 예찬했다. 하지만 이러한 리얼리즘 미학은 시대에 따라 그 나라의 역사적 상황과 문화와 세계관에 따라 변화될 것이다. 바쟁이 당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통해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본 것은 현실 사회와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치열한 관찰과 그를 통해 영화 속에 그 현실의 본질을 담아내기 위한 창조적 노력이었다.

 

한국영화의 위기는 결코 기술적, 산업적 논리에서 투자를 활성화하고 배급채널을 다양화하고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갖는 것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상업영화만이 아닌 저예산영화, 작가영화, 예술영화, 단편영화를 살리기 위해 마이너쿼터를 도입하는 것이나 전용관을 만드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시작은 영화가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케케묵은, 하지만 본질적인 질문을 통해, 현실의 어떤 측면을 영화 속 세계로 창조해낼 것인가에 대한 모색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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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호학자 퍼스는 기호의 종류로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을 분류한다. 도상은 지시대상과 형태에 있어서의 유사성에 기반한 기호, 지표는 지시대상과의 본질적인 인접성을 나타내는 기호, 상징은 지시대상과 인과적 관계가 없는 문화적, 관습적 기호를 의미한다. 바쟁이 사진의 회화와의 비교를 통한 본질적 객관성을 언급한 것은 도상의 측면이 아닌 지표의 측면, 그러니까 사진이라는 기계장치를 통한 모사가 본질적으로 지시대상과 인접해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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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시각과 미디어 동문선 문예신서 12
존 버거 지음 / 동문선 / 199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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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역사적으로 보기- 존 버거 <이미지> 서평

 

현대를 영상미디어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진부한 표현이 되어버렸다. 광고 이미지들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건물 내부와 거리 곳곳을 점령했다.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어느 곳에서나 셀프카메라를 찍고,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모바일로 영화나 텔레비전을 감상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SF영화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현실 속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그것은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시각에 충격을 주기는커녕 우리 망막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하다.

이미지는 이제 단순히 보여지는 것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나를 보는 세계, ‘보는 나’라는 주체가 ‘보여지는 나’라는 객체로 변화되는 세계, ‘이미지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현실을 구조화하는’ 세계로의 변화. 리얼리티 쇼가 현실을 대체하고, 광고 이미지가 사람들의 꿈과 행복을 대체하는 명멸하는 빛과 그림자의 환영! 이미지를 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존 버거의 책 <이미지>는 이미지가 의미를 생산하는 과정, 본다는 것의 의미를 ‘현대의 역사적 의식’을 고양시키는 관점으로 서술한 책이다. 근대 르네상스 회화와 유화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고, 현대의 광고이미지가 그 유화의 전통으로부터 무엇을 이어오고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저작이다.

 


 

존 버거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으로 글을 시작한다. “초현실주의 화가였던 르네 마그리트는 언어와 보는 것 사이에 항상 존재하는 차이를 그의 작품 <꿈의 열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들이 사물을 보는 시각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또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위의 그림 <꿈의 열쇠>에서 말 그림 밑에 ‘문’이라고 텍스트를 적어놓았고 시계 그림 밑에 ‘바람’이라고 적어놓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말 그림을 봤을 때 그것은 그저 어떤 형상이었을 뿐 그것이 달리는 말을 그린 도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또 그림 밑에 적힌 ‘문’이라는 텍스트 역시 그것이 언어기호인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형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우리가 믿고 있는 사실, 즉 현실세계와 재현된 그림과 언어기호의 관습적인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가령 텔레비전의 뉴스를 볼 때, 시청자는 찍혀진 영상과 자막, 그리고 앵커의 말이 결합된 뉴스가 그 자체로 사실이 아니라 현실의 어떤 단면을 영상과 음성과 텍스트들을 선택하고 편집한 것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게 된다. 이미지의 현실과의 유사성이 시청자의 사유를 압도하고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란 강력한 마술적 힘을 발휘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다른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보자.

필자는 청소년 미디어교육에 강사로 참여할 때 종종 이 그림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곤 한다. 이 그림을 보는 아이들의 첫 번째 반응은 “그린 사람이 세상에 불만이 많다”거나 “삐딱하게 보자는 이야기를 하는 거다” 등등이다. 조금씩 힌트를 주면 일부 아이들이 “저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에요”라고 말한다.

그것이 이미지를 보는 방법의 첫 번째다. 모든 것은 그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이미지들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각각 고유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시간에 어떤 장소에서 제작한 재현된 이미지라는 사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이 출발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그 이미지가 현실을 얼마나 잘 재현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이미지가 어떤 물질적인 토대에서 역사적으로 위치지워지며 또 그것을 보는 감상자와 만날 때 어떤 의미작용을 하는가이다. 

존 버거는 “본다는 것은 그것과 자신과의 사이에 관계가 맺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라고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역사 속의 이미지가 어떤 현실을 구성하는가이다. “특권층에 있는 소수 지배계급이 그 역할을 정당화하려는 역사를 만들기 때문에 과거의 예술은 신비화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왜 과거의 모든 예술이 이미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는가, 라는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관건이다.” 모든 예술작품과 그것을 둘러싼 담론, 그리고 현대의 매스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특권층의 소수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몇몇 위대한 예술가들은 그 권력관계에 맞서고 신비화를 거부하는 저항과 실험정신으로 살아 당대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후에 재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대부분의 주류 예술작품에 대한 것이다. 먼저 유화의 소유형식에 대한 분석을 살펴본 다음 현대의 광고 이미지에 대한 분석을 살펴보겠다.

르네상스 이후 유화의 소유형식에 대하여

크게 구분하여 유화시대는 르네상스시대 그러니까 1500년경부터 시작해 입체파가 등장하는 1900년경까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화 전통의 규범은 아직도 회화 규범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고와 영화 등 현대의 미디어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느 시대의 예술이나 그것은 그 시대의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경향을 띠고 있는데 “재산과의 교환이라는 새로운 형태에 의하여 결정되는 어떤 세계관을 유화형식이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더구나 유화 이외의 시각예술에서는 그것은 불가능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화가 전달하는 외관의 환영” 그러니까 “유화 이미지는 2차원에 속하지만 그 3차원의 환영을 출현시키는 힘은 조각보다도 더 강”한데, 유화는 대상이 색채나 촉감이나 온도를 가지며 그것이 만질 수 있는 물질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유화가 축복하였던 것은 그런 물질적인 재산을 가진, 커다란 구매력을 전제로 한 격동적인 새로운 재력의 출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각적인 초점은 구체성, 즉 감상자의 촉각에 그림이 얼마나 직접적으로 응할 수 있는가에 있다.

 


 

위의 그림은 홀바인의 <대사들>이란 그림이다. 그림의 소유자이자 주인공인 대사들의 거실과 장신구들, 그리고 그들이 입고 있는 의상 등은 그들의 소유물과 재력을 보여주며, 왼편 인물 옆의 지구본은 그들이 제국주의적인 권력을 가지고 이 세계를 소유하고 있는 계급임을 암시한다. 또한 이 그림에서 주목해 볼 것은 두 인물이 이쪽을 바라보는 태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외관상의 이미지가 타인에게 경계심과 냉정함을 더욱 강하게 느끼도록” 마치 타인들을 자신들의 세계로 축소시키려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다. 

존 버거는 이 그림 속에 존재하는 모순, 균열적인 지점을 두 가지 언급하는데 이것이 현대의 예술과 미디어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 생각된다. 그림의 가장 앞쪽 아랫부분에 형체를 알기 어려운 두개골이 광학적으로 왜곡되어 보이는 물체가 보인다. 이것은 왜 그렸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유화는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물질성을 그 가장 중요한 특질로 한다. 하지만 신흥 귀족계급과 부르주아들은 단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소유하고 싶었다. 그런데 만약 두개골을 다른 소재처럼 동일하게 그렸다면 그 형이상학적 의미는 소실되어 버릴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상징을 화면에 그려 넣은 것은 이 때문인데 그것은 유화화법과 충돌해 부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전통적인 유화인 종교화가 대부분 위선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와 동일한 모순 때문이다.” 

존 버거가 주목하는 두 번째 유화의 모순은, 유화의 세계관인 “개인주의는 최종적으로 평등성을 긍정”하는데, 그러나 그림에서 “그러한 평등성 따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표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위의 그림을 보면 “전경에 있는 어떠한 대상도 손을 뻗치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데” 동시에 격식과 위엄을 차린 딱딱하게 굳어진 어색함을 강조해야 하는 균열을 겪는다. 이것은 현대의 정치인들이 매스 미디어에 나왔을 때 그들의 태도가 보여주는 균열과 유사한 지점이다. 유화는 이런 이유 때문에 “공허한 느낌을 주며” “볼품없는 그림 같은 인상”을 주는데 역설적으로 그러한 “공허함이 그 그림의 권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생명, 광고 이미지

현대사회 속에서 광고 이미지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예술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라는 사실에 대해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존 버거는 유화언어와 비교하며 광고를 분석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현대예술과 시각 미디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시간’, ‘계급관계’, ‘행복이라는 이미지’이다.

첫째, 시간에 대하여. 광고 이미지는 항상 새롭고 현재적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순간에 속한다. 그러나 광고 이미지는 결코 현재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광고는 미래(상품을 구매할 미래시점)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보는 사람에게 변신에 대한 꿈을 갖게 한다. 다시 말한다면 “매력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광고”이다. 그렇지만 광고는 “쾌락 그 자체에 대한 찬미가 아니고”, “구매자가 그 상품을 사서 매력적으로 변하게 될 그들의 미래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유화가 그 그림의 소유자가 현실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물건을 통해 재력을 암시했다면, 광고는 그 광고의 감상자가 물건을 소유하는 것을 통해 미래에 가지게 될 재력을 암시한다.

둘째, 광고는 상품의 사용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계급관계를 암시한다. 존 버거는 이에 대해 “유화언어가 그 그림의 소유자에게 현실의 계급관계에 있어서의 우월성을 물질성으로 표현하고 있다면 광고언어는 소비자가 그 상품을 소유했을 때에 가지게 될 계급관계를 물질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때문에 광고 속 상품의 실질적인 사용가치보다 브랜드 가치가 더 중요해진다. 이 브랜드의 상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만큼 계급관계의 우월성을 가지는 것이다.

 

 

 


 

유화언어가 단순히 물질적인 부만이 아닌 정신적 가치,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광고언어 역시 그 상품을 소유했을 때 단순히 물질적인 부만 소유하고 있는 ‘졸부’가 아닌 사회적으로 권위있고 지적인 ‘상류층’의 이미지로 그려져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광고는 종종 과거의 예술작품을 인용한다. 광고 속의 예술작품(회화, 조각, 클래식음악 등)은 “비속한 물질적 관심을 초월하는 문화적인 권위, 위엄의 형태, 그리고 총명함”을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광고는 거의 상반되는 두 가지 사항, 즉 경제력과 정신력을 동시에 기술하는 것이다. 

셋째, 광고가 전파하는 것은 계급관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행복한 삶과 관계된다. 현대사회의 소비자들이 상품을 구매하게 만드는 매력은 경제력과 정신력을 가지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광고가 약속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인데, 그 행복은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하여” 판단된다. 

그렇기 때문에 광고는 “현실 생활에 대하여 최대한 불만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이는 “그 사회의 생활양식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활에 대한 불만”이고 모든 광고는 그 불만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을 야기 시키는데, 그것은 “가진 것이 없으면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공포감”이다. 이 점에서 광고는 유화로부터 달라진다. 유화는 현실 속에서 가진 자들의 권력을 전달했지만, 광고는 현실 속에 부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 이루어질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환영을 만들며, 소비자가 현재를 살 수 없도록 박탈감과 공포감을 조장하는 것이다. 심지어 광고 속에 빈번하게 사용되는 성적인 이미지, 아름다운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는, 그 상품을 구매하지 못하면 자신이 성적으로 무능한 사람이고 원만한 연애관계와 가족생활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야기 시킨다. 그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능력과 성적인 매력이 동일시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적인 행복 추구는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의 추구라 여겨진다. 그렇지만 한편에서는 광고 이미지가 제공하는 사회적 조건이 개인에게 무력감을 주는 원흉이 되고 있다. 개개인은 현실 속의 자신과 이상(백일몽) 속의 자신과의 모순 속에서 생활한다. 광고에 의해 “백일몽 속의 수동적인 노동자가 능동적인 소비자”가 된다. 노동자로서의 자신이 소비자로서의 자신을 부러워하는 분열적인 상태가 발생하고 그것은 삶 전부를 통해 지속되는 것이다. 

“광고는 자본주의 문화의 생명이다.” 현대사회에서 광고 이미지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한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입을 것인가, 어떤 차를 운전할 것인가 등등의 선택은 단순히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인 선택이 됐고 궁극적인 행복의 척도가 됐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민주주의적인 이상이 반대로 광고에 의해 모든 비민주주의적인 것을 덮어버리는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광고는 혁명조차도 자신의 개념 속에서 바꾸어 버린다.”

무엇을 할 것인가?

존 버거의 <이미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대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을 제공한다. 또한 이미지를 제작해 보여주는 역사적 관점도 제공한다.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핸드폰, 디카, 캠코더로 우리는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필자가 장애인 미디어교육에 참여했을 때의 한 사례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주류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장애인에 대한 모든 이미지들은 불쌍한 장애인을 비장애인의 시혜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상물들이 대부분이다. 장애인 미디어교육에 참여해 자기 손으로 직접 자기 삶을 카메라에 담는 장애인들의 시선은 어떤 것일까?

그 중 심유경씨의 <시선>(http://www.420.or.kr/fest/mi/mi9.htm)이란 영화를 예로 든다. 영화는 한 장애여성이 집에서 외출해 지하철를 타고 명동 거리에 나가 쇼핑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런데 거칠게 흔들리는 카메라로, 휠체어를 탄 장애여성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교통수단(지하철 리프트)과 일상적인 거리는, 지금까지 미디어를 통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세계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너무 공포스러워 이 영화 속에 재현된 현실이 내가 함께 살고 있는 현실과 같은 현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물감이 느껴진다. 이 영상이 세상과 관계맺는 방식은 주류미디어의 장애인 이미지가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을 강화시키는 것과 충돌해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실천들이 모이면 이미지를 보는 방식, 더 나아가서는 세계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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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2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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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촛불집회의 한 풍경

촛불집회의 시위군중 한쪽에서 캠코더와 노트북을 들고 시위현장을 직접 찍어 개인방송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현장의 상황을 직접 찍어서 방송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아나운서처럼 의견을 말하거나 논평하기도 한다. 그 방송을 보는 네티즌들은 방송 옆에 달린 창을 통해 댓글로 의견을 교환한다. 이 신종 미디어의 출현에 대해 한편에서는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미디어 민주주의가 가능해졌다고 말하며 상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공공에 대한 책임감을 지지 않는 천박한 미디어 민주주의라며 혀를 찬다. 이 신종 미디어의 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19세기 초반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일부 사람들은 사진을 신성모독이라 여겼다. 인간은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으며 신의 상은 어떠한 인간의 기계를 통해서도 고정될 수 없다고 말하며 이 새로운 기계(사진기)의 출현을 경계했다.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이 신종 기술과 그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사진가)의 출현에 대해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예찬했다. 

사진의 발명 이후 100년 넘게 많은 이론가들은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영화(움직이는 그림)가 처음 발명되고 그것이 극장에서 상영되기 시작하자 마찬가지의 예술 논쟁이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디지털 기술의 진보에 의한 디지털 캠코더의 대중적인 보급, 그리고 인터넷의 등장에 따른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에 대해서도 한 편에서는 전통과 역사를 부정하는 통속적 대중화를 경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뉴미디어와 기술진보의 낙관론을 펼치기도 해왔다. 

발터 벤야민은 1930년대에 이와 관련된 중요한 논의를 전개한다. 벤야민은 유물론적인 예술론과 매체미학의 선구자로 종종 언급되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문필가이다. 1980년대 그의 주요한 글들을 모아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이란 번역서가 한국에도 소개되어 꾸준히 읽히는 작가가 되었는데, 2007년 그의 선집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그 선집 중 두 번째 권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는 사진과 영화, 미디어에 대한 숙고를 담은 일련의 글들이 담겨 있다. 그 글들을 읽어나가면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신종 미디어의 출현에 대해 논의해보자.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 예술이란

벤야민의 글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아우라’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꽤 있을 것이다. 아우라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자주 언급되는 예가 있다. 옛날 옛적 어느 나라의 왕이 젊은 시절 전쟁 중 적에 쫓겨 산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곳의 한 할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을 기억하고는 궁중요리사를 불러 똑같은 음식을 만들어달라고 한다. 만약 똑같은 맛을 내지 못한다면 요리사에게 사형을 집행할 것이라고 말한다. 왕의 이야기를 들은 요리사는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 음식은 만들 수 없다고 대답한다. 왜 그랬을까? 그는 그 음식과 같은 음식은 만들 수 있고 더 맛있는 음식도 만들 수 있지만, 왕이 그 음식을 먹을 당시에 있었던 모든 것들, 그러니까 전쟁의 급박한 상황, 적에 쫓기는 두려운 감정, 밤의 산속 정경과 소리들, 음식을 만들어준 할머니의 존재 등 당시의 모든 상황은 만들어줄 수 없다고 말한다. 왕이 느낀 그 음식 맛은 단지 음식 맛만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을 때의 아우라를 동시에 맛본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중 '산딸기 오믈레트')

고흐의 작품과 그것이 모사된 복제품을 볼 때 감상자가 느끼는 감동의 차이, 또 그 작품의 가격은 천양지차다. 전문가의 감정을 통해서도 거의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복제품도 그것이 복제품인 한에는 원본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낮은 가치를 가진다. 왜 그럴까?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단 한가지만은 빠져있기 때문이다. 복제품에는 아우라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그 예술작품이 존재했던) 일회적인 현존재에서 그 작품이 존재하는 동안 처했던 역사가 이루어져 왔다.”

기술복제시대 이전의 모든 예술작품은 아우라를 가진다. “원작이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이 원작의 진품성이라는 내용을 이루며” “진품성이란 물질적 지속성과 함께 그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가치까지 포함하여 그 사물이 원천으로부터 전승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괄 개념이다.” 

반면 “복제기술은 복제를 대량화함으로써 복제 대상이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대신 대량으로 나타나게 한다. 또한 복제 기술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때그때의 개별적 상황 속에서 복제품을 쉽게 접하게 함으로써 그 복제품을 현재화한다. 이것은 전통을 엄청나게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여기서 전통을 뒤흔든다는 것, 즉 아우라가 사라지고 대신 복제품을 현재화함으로써 예술의 사회적 작용과 지각방식을 변화시키는 양태를 이해하는 것은, 현대의 예술과 미디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벤야민은 이에 대해 “예술생산에서 진품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그 효력을 잃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예술의 모든 사회적 기능 또한 변혁을 겪게 된다. 예술이 의식-제의(祭儀)가치-에 바탕을 두었는데, 이제 예술은 다른 실천-전시(展示)가치- 즉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고 말하며 예술의 정치화로 설명한다. 

여기서 왜 갑자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 이후 아우라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논하는가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기술에 의해 새로운 도구를 사용한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그것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의해 예술이 어떻게 변했고, 세계가 어떻게 변했으며, 지각방식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술복제시대 이후 예술이 작동하는 방식, 그 예술을 수용자가 감상하는 태도, 더 나아가서는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고 느끼는 지각방식 자체가 변화됐다. 이 지점, 즉 기술진보에 의해 새로운 미디어가 탄생한 사회적 조건에 대해 성찰하는 것은 “예술의 정치학에서 혁명적 요구들을 표명하는” 것이다.

영화(영상미디어)와 정치

그렇다면 새로운 기계장치가 작동하는 원리와 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연기자가 관중을 향하여 어떤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장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생생한 인격 전부를 바치면서도 그 인격의 아우라는 포기한 채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관중이 아닌 카메라(기계장치)를 향해 연기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지점이 연극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며, 현대사회를 사는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상황, 즉 핸드폰으로 셀프카메라를 찍고, 캠코더로 일상 속에서 겪은 일들을 찍어 인터넷에 UCC로 올리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그때 카메라를 바라보고 연기하는 인격은 아우라(진품성, 일회성)가 사라진 대신 대중들에게 복제되어 전시될 수 있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발생시킨다.

카메라라고 하는 기계장치를 사용해 세상을 찍고 또 그것을 편집해 대중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그림을 그려 보여주는 것과 그 본질부터 다르다. 벤야민의 비유를 들어보자. “마술사와 외과의사의 관계는 화가와 카메라맨의 관계와 같다. 화가는 주어진 대상에 자연스러운 거리를 유지하는데 반해 카메라맨은 주어진 대상의 조직에까지 깊숙이 침투한다. 화가의 영상은 하나의 전체적 영상이고, 카메라맨의 영상은 여러 개로 쪼개어져 있는 단편적 영상들로서, 이 단편적 영상들은 새로운 법칙에 의해 다시 조립된다.” 과거 예술의 총체성은 사라지고 카메라에 의해 찍혀진 영상들은 꼴라주처럼 쪼개지고 다시 조립되는 것이다.

또한 카메라 렌즈와 인간의 눈은 서로 다르다. “카메라에 의해 나타나는 것은 육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임이 분명하다. 다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의 자리에 무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이 대신 들어선다는 점에서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아이에게 캠코더를 쥐어주면 아이는 지금까지 눈으로 봐왔던 것과는 다른 무의식의 작용으로 캠코더를 들고 이 세계의 사물들을 쫓아간다. 일상 속에서 캠코더를 들고 가족과 친한 친구를 찍을 때, 또는 캠코더를 들고 거리에 나가 낯선 타인을 찍을 때, 카메라를 매개로 한 관계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순간들을 포착하게 된다. 카메라를 들고 타인과 인터뷰하는 순간 일상적으로 대화할 때와는 다른, 의식적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어색함, 부끄러움, 과장, 또는 눈물과 만나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찍혀지고 재조립된 영상이 보여지고 지각되는 과정 역시 기존의 예술을 대하는 태도와 달라진다. “역사의 전환기에 인간의 지각기관에 부과된 과제는 단순히 시각, 다시 말해 관조를 통해서는 전혀 해결될 수 없다. 그것은 촉각적 수용의 주도 하에 즉 습관을 통해 점차적으로 극복된다.” 촉각적 수용이란 마치 우리가 어떤 건물에 들어갔을 때 그 건물 안의 공기를 느끼는 방식, 즉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지각하는 방식을 말한다. 아마추어 영상제작자, 혹은 우리의 친구가 찍은 UCC를 수용하는 방식은 과거의 예술을 대하는 태도, 그러니까 관조하며 숭고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만나서 대화하고 촉감을 느끼듯이 지각하게 된다.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쓰여진지 7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예술과 미디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준다. 하지만 이 글은 논문처럼 완결된 글이 아니라 사고의 편린들이 에세이처럼 나열되어 있는 글이다. 그래서 많은 공백이 존재한다. 때로는 서로 모순적으로 문장과 문장이 충돌하는 부분들도 있다. 어쩌면 이 글의 그 공백들, 모순들은 지금 이 시대 독자들의 미디어에 대한 감수성으로 새롭게 채워져야 할 부분일 것이다.

에필로그 -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다

인터넷언론은 90년대 후반 시작해 일간신문과 공중파로 대변되는 주류언론과는 다른 대안적인 가치를 생산해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터넷언론이 아닌 개인미디어와 UCC 등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4년간 프로메테우스(http://www.prometheus.co.kr)라고 하는 인터넷언론에서 동영상기자로 활동했었는데, 인터넷언론은 분명 다른 가능성을 열어준 측면이 있긴 하지만 동시에 많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 한계는 자본과 인력 부족이라는 물질적인 조건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는 기존 언론매체가 세계와 만나는 접촉면과 다른 접촉면을 만드는 것, 그러니까 독자(시청자)가 직접 미디어의 생산자가 될 수 있는 기술적 진보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키지 못한 점이다. 인터넷 환경 안에서도 언론의 생존조건은 조회수와 광고수익이라고 하는 기본적인 자본의 논리 안에서 주류언론과의 경쟁을 피할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일부의 인터넷언론은 주류언론과의 차이점을 찾지 못했고, 다른 일부의 인터넷언론은 5년을 넘기지 못하고 폐간되곤 했다.

오히려 기술진보의 새로운 가능성은 자본의 영역에서 왔다. 포탈을 중심으로 한 인터넷환경에서의 자본은 언론이 아닌 플랫폼의 개념을 가지고 거주할 공간과 입을 옷만 마련하여 그것을 네트워크로 연결시켰다. 디지털 기술의 진보와 인터넷의 확장은 기존에 미디어 수용자이기만 했던, 학생, 빈민, 장애인 등의 사회적 약자들이 직접 캠코더와 사진기를 들고 개인미디어를 제작하는 주체일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었고, 그것이 현재 블로그, 개인방송, UCC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 많은 제작물과 새로운 제작주체의 등장은 단지 또 하나의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했다는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류의 예술과 미디어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대중은 예술작품을 대하는 일체의 전통적 태도가 새로운 모습을 하고 다시 태어나는 모태이다. 양은 질로 바뀌었다. 예술에 참여하는 대중의 수적 증가는 참여하는 방식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런 기술진보가 가지는 새로운 예술과 미디어의 존재방식에 대해 낙관적 태도를 가지는 동시에 파시즘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인류의 자기소외는 인류 스스로의 파괴를 최고의 미적 쾌락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파시즘이 행하는 정치의 심미화의 상황이다.” 

포탈은 단순히 공간만 제공하는 비어있는 곳이 아니라 전체 네트워크를 통제하고 편집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고, 자본과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속에서 자신의 공간을 대여하고 컨텐츠를 제작하는 사용자들은 포탈(자본)이 제공한 게임의 논리에서 이기기 위해, 선정적인 내용, 심미적 쾌락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 쾌락의 끝은 벤야민이 언급한 최고의 정치의 심미화, 즉 전쟁에 대한 옹호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황우석과 독도 논쟁은 그 한 예에 불과하다.

기술진보에 의한 대중들의 미디어 제작자로의 변화는 또 다른 파시즘의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 위험은 심미적인 태도, 즉 자신이 제작하는 미디어의 미적 가치에 대한 우월성에 빠지는 순간 찾아온다. 모든 영화 - 동영상, 사진 등을 포함한 복제가능한 이미지들 - 는 정치적이라는 것을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넷을 통해서건 핸드폰을 통해서건 어딘가에서 영상이 제작되고 상영될 때 가지는 정치적 의미에 대한 숙고, 그것이 아주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이미지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생산되고 소통되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정치적 함의를 가진다는 것! 그 주체적 사고를 통해 파시즘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미디어, 변화된 세계의 가능성으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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