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지음, 박상규 옮김 / 시각과언어 / 199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영화의 위기? 도대체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 서평


 

 

들어가며 - 한국영화의 위기?

 

작년부터 한국영화산업의 불황이 심화되기 시작했고, 올해엔 여기저기서 한국영화의 위기와 해법에 대한 다양한 토론을 진행한다. 스크린쿼터 축소가 원인이라거나, 방송통신융합시대 극장만을 염두에 둔 배급구조가 변화되어야 한다거나, 내수시장만으로는 불가능하니 해외시장으로 나가고, 합작영화를 추구해야 한다거나 등등. 하지만 여기서 잠시 되물어보자. 언제 한국 영화가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나? 산업의 논리에서만 본다면 90년대 후반 스크린쿼터 축소 이야기가 나오면서 영화인들은 단결해 한국영화를 살리자고 외쳤고 그것은 국민을 설득시키며 일시적으로 부흥기인 것처럼 보였다. 그때 많은 영화인들은 문화다양성을 살리자, 한국영화가 죽으면 한국문화가 죽는다고 소리 높여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한 것은 할리우드 시스템을 흉내 낸 스타시스템이거나, 투자-기획-홍보-마케팅을 중심으로 한 대작영화 중심의 모색이었다. 그곳에 문화다양성이란 없었다. 한국영화는 천만 관객을 목표로 하는 대작 영화와 저예산 영화로 양분되었고 결국 제작된 영화의 10%만 수익구조를 맞추는 기형적인 구조가 됐다. (2007년 한국영화는 불황이었다 말하지만 1000만 관객을 넘기는, 그러니까 전체국민의 1/5이 관람한 영화가 두 편 - <왕의 남자>와 <괴물> - 이나 됐고, 한국영화의 투자심리는 그런 복권 당첨을 바라는 영화기획이었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90년대 후반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가 야기됐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이미 한국영화는 위기였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예견됐던 것이다. 지금 한국영화의 위기를 논하기 전에 토론해야 할 것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영화의 본질과 정체성의 문제다. 그 지점에 대한 논의 없이 한국영화의 변화는 있을 수 없다. 영화는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관객과 만날 것인가? 더구나 필름 산업이 사라지고 디지털영화로 변화하는 지금, 극장을 중심으로 한 배급과 상영구조가 다변화되고, 인터넷과 IPTV 등을 통한 배급이 논의되는 지금, 영화란 무엇인가란 본질적인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런 논의 없이 일시적인 한국영화 부흥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미봉책일 뿐이다.

 

앙드레 바쟁에 대해 알고 있는 독자들은 왜 갑자기 이 시점에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를 언급하는지 의아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나온 책이고, 그 당시에는 디지털 영화는 있지도 않았고 영화의 존재 형식은 지금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를 소개하는 이유는 지금 현 시점에 ‘영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기 위한 여러 지점들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탄생과 디지털 영화

 

영화의 탄생은 종종 기술의 발명으로 설명되곤 한다. 사진의 발명 이후 움직임의 환영을 만드는 여러 발명품들과 결합한 카메라 장치가 발명됐고,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기차역에 도착하는 사람들>이 상영된 것이 영화의 탄생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바쟁은 기술의 발명은 영화가 탄생하기 위한 하나의 물질적 조건이었을 뿐 영화 탄생의 요인은 관념에 있다고 말한다. 바쟁은 “영화의 선구자들은 오히려 예언자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케 된다. 그들의 상상력은 영화라고 하는 관념을 현실의 완전하고도 총체적인 재현과 동일시하여 음과 색채와 입체성에 의한 외부세계의 완전한 복원”을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며 영화 탄생의 원인은 상상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바쟁은 과거의 시각예술의 정신분석을 시도하며 “회화와 조각의 기원에는 미이라 콤플렉스가 놓여있다”고 말한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방어, 즉 시간의 불가역성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완벽한 이미지 재현이라는 신화에 의해 이미 창조되어있었던 것이라 말한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할 지점은 카메라에 의한 모사가 이전의 조각이나 회화 예술의 모사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이다. 바쟁은 “영화는 그 본질로부터 인간의 리얼리즘에 대한 집념을 실현”시켜 “다른 예술로 하여금 유사성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영화의 특성은 인간의 손이 개입되지 않은 모사, 기계적 모사라는 뜻이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회화와 비교되는 사진의 독창성은 그것의 본질적 객관성에 있다. 엄밀한 결정론에 따라서 외부세계의 상이 인간의 창조적 간섭 없이 자동적으로 형성되어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직 사진에서만이 우리는 인간의 부재를 향유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기호학적으로 말한다면 지표(index)로서의 유사성이지 도상(icon)으로서의 유사성이 아닌 것이다.1)   이런 관점에서 현재의 디지털 영화로의 변화는 어떻게 봐야할까? 이 지면을 통해서는 최근의 현상과 관련해 몇 가지 지점만 논의해본다.

 

첫째로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의 가장 큰 차이는 기록방식의 차이다. 필름 카메라에서는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필름의 화학물질에 반응해 눈에 보이는 입자를 기록했다. 디지털 카메라에서는 CCD(Carge Cupled Device, 빛을 전기신호로 바꾸어서 디지털형식으로 변환하는 이미지센서)가 필름의 역할을 하는데 여기에 기록되는 것은 디지털신호(0,1)로서 눈으로 그 지시대상의 형상을 볼 수 없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인데, 이 디지털 신호는 얼마든지 무한하게 변형이 가능하다. 물론 필름도 인화과정을 통해 변형 가능하지만 원본 필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에서 원본의 의미는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필름의 존재는 필름에 찍힌 사물의 존재를 본질적으로 증명하지만, 디지털 카메라의 CCD에 기록된 것은 사물의 존재를 본질적으로 증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신호의 조작으로 얼마든지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만들어 낼 수도, 존재하는 사물을 다른 존재로 변형할 수 있다. 컴퓨터로 제작하는 애니메이션이나 디지털 이펙트, 그리고 누구나 가정에서 사용하는 포토샵 등은 사소한 예에 불과하다. 이 변화는 영화의 본질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그에 따라 영화의 미학과 사회학에도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아직은 디지털 카메라로의 변화는 그 유아단계이고, 150년 필름의 역사를 모방하고 있는 수준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이후 훨씬 더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둘째로 디지털 카메라로의 변화는 카메라의 경량화와 대중화를 들 수 있다. 1950년대 16mm 카메라가 소형으로 제작되어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 영화는 한 차례 크게 변화한다. 유럽을 중심으로 시네마 베리떼라는 새로운 다큐멘터리의 경향이 등장한 것을 한 사례로 들 수 있다. 1인, 또는 2인만으로 구성된 촬영팀이 작은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들어가 자유롭게 핸드헬드로 촬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다큐멘터리의 미학과 사회적 존재방식 자체가 변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0년대 저가의 디지털 카메라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자 아마추어 영상제작자들도 저렴한 돈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었고, 그것 역시 영화미학과 사회적 작용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위의 사례들은 영화에서의 변화만을 언급한 것이지만 이후에 디지털 카메라로의 변화는 영상의 미학적, 사회적, 윤리적, 법(가령 저작권)적 측면 등 많은 지점에서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오래지 않은 미래에 인간 눈의 망막을 렌즈로 하여 기록되는 영상 역시 소통될 수도 있으며(이미 렌즈의 소형화로 안경이나 사람 몸의 일부에 렌즈와 기록장치를 부착해 촬영하는 것은 시작됐다), 존재하지 않는 사물의 3차원 이미지가 제작되고 소통되는 세계로의 변화가 올 수도 있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중국의 지아장커라는 감독이 <무용>이라는 디지털로 찍은 다큐멘터리를 한국에서 상영하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한 이야기를 언급하겠다. 관객 중 한 명이 ‘왜 디지털 카메라로 찍었는가’, 그리고 ‘당신에게 디지털 영화로의 변화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묻자 지아장커는 두 가지 측면에 대해 답했다. 첫째는 현재 중국사회의 변화되어가고 있는 현실(가령 댐 건설로 한 마을이 수몰되어 사라지는 등 과거가 사라지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는 현실)을 담기 위해서는 디지털 카메라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둘째는 디지털 카메라로 타인을 인터뷰할 때는 필름 카메라로 인터뷰할 때보다 훨씬 우연적인 삶의 진실을 포착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여기서 디지털 카메라로의 변화에 대한 한 미학적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앙드레 바쟁이 영화의 탄생지점, 칼라영화와 유성영화로의 변화지점에 대해 고민했던 사유를 통해 우리는 현재 디지털 영화로의 변화에 대해 그 본질적인 의미를 질문할 수 있다. 디지털 영화로의 변화는 단순히 HD 고화질 카메라로의 변화라거나 배급 통로의 변화 등을 통한 새로운 수익 창출 이전에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할 때인 것이다.

 

리얼리즘 영화와 리얼리티 프로그램

 

바쟁은 예술상의 리얼리즘 논쟁에 대해 “미학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혼동, 이 세계의 구체적이면서도 또한 본질적인 의미를 표현하려는 진정한 리얼리즘과 형체의 착각으로 만족하는 눈속임의 사이비 리얼리즘과의 혼동으로부터 리얼리즘 논쟁의 오해가 나온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쟁이 말하는 진정한 리얼리즘 영화란 단순히 현실처럼 보이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본질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쟁은 <콘티키호 표류기>라는 미리 준비된 각본 없이 실제로 배를 타고 표류하는 상황을 겪으며 죽음을 무릎 쓰고 찍은 영화를 언급하며 앵글도 화면도 프레임도 엉망이고 심지어 초점도 나간 장면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들은 “위험 그 자체를 담았기 때문에”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잘 조직된 르포르타주의 과실도 없고 빈틈도 없는 이야기보다도 폭풍을 만났다가 구조된 이 같은 표류기 쪽이 얼마나 더 감동적인가”라고 말한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 그 자체가 영화적인 것이다.

 

바쟁의 이러한 관점은 최근의 한국영화 <영화는 영화다>에서 이강패(소지섭)의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이강패는 장수타(강지환)에게 ‘당신이 찍고 있는 영화는 가짜다. 가짜로 싸우지 말고 진짜로 싸우자’고 말하고, 둘은 마지막 씬에서 실제로 싸운다. 영화와 현실을 착각하는 이런 태도에는 바쟁이 언급한 바의 위의 측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이강패의 태도, 그러니까 각본에 의해 짜여진 갱들의 세계는 가짜이니 실제로 싸우는 모습을 통해 진짜 갱들의 세계를 보여주자는 것. 과연 바쟁은 이강패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적어도 <영화는 영화다>란 영화 안의 감독은 지금까지 영화를 통해 보여주지 못한 생동감 있는 진짜 싸움을 보여줄 수 있음에 짜릿해 하며 ‘액션’을 외친다. 그렇다면 실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면을 찍으면 그것이 리얼리즘 영화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본이 있나 없나, 또는 진짜 싸움인가가 아닌가가 아니다. 그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는 현실의 본질적인 측면이 무엇이냐가 문제다. 그 본질을 어떤 촬영 방식으로 어떻게 각본을 짜서 보여주는가는 이후의 문제다. 그런 점에서 이강패의 문제의식은 옳았지만 그 문제의식을 실천한 태도는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최근 텔레비전을 장악하고 있는 리얼리티 프로그램들(‘1박2일’, ‘우리 결혼했어요’ 등)과의 관계에 대해 떠올릴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각본을 최소화시키고 진짜 ‘리얼’이라고 말하며 연출자와 카메라의 배우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리얼한 것인가란 질문을 해보자. 리얼리티란 ‘현실이란 환영’인데 우린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면서 ‘현실이란 환영’을 느끼는가? 이것은 복잡한 논의가 필요한 일이지만 두 가지만 언급하겠다. 가령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등장인물은 주어진 캐릭터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방송국의 연예인으로서 시청자들에게 자기 존재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의해 연기한다. 다만 그것을 리얼하게 포장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얼리티 프로그램 속의 리얼리티는 가짜 리얼리티다. 하지만 이 가짜 리얼리티는 다른 측면에서 시청자들에게 진짜란 환영을 준다. 그것은 방송국의 스타시스템이 마련한 소통의 틀 안에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그들의 행동에 따라 프로그램 안의 캐릭터와 실제 배우를 혼돈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배우의 측면에서도 그런데, 배우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동시에 연예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분열적 상황을 겪는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영상의 리얼리즘 개념 자체를 변화시키며 현실의 본질적 측면을 망각시키게 하는 효과를 가진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현실을 대체하는, 영상미디어와 현실세계가 전도된 상황은 현대 미디어사회의 위험한 속성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리얼리티가 현실의 본질적 측면을 왜곡하는 이런 점에서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은 퇴행적이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지점은 영상미디어에 의해 재현된 세계가 현실의 어떤 측면을 보여주는가이다.

 

나가며 -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와 새로운 한국영화를 위하여

 

바쟁은 프랑스 코미디 영화의 침체에 대해 “프랑스 영화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재능 있는 배우들이 아니고 희극의 양식, 그 구상인 것이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그대로 대입해 “한국영화의 위기는 스크린쿼터 축소도 아니고, 재능 있는 배우의 부재도 아니고, 테크놀로지 능력도 아니고, 투자된 자본의 크기도 아니고, 다만 영화의 양식, 그 구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장 정확한 지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옹호하며 그 영화들의 새로운 미학, 그러니까 ‘현실공간과 자연광 사용, 비전문배우 캐스팅, 현장의 우연적인 상황에 의한 리얼리티, 사건과 사건 사이 관객의 상상력 개입’ 등을 예찬했다. 하지만 이러한 리얼리즘 미학은 시대에 따라 그 나라의 역사적 상황과 문화와 세계관에 따라 변화될 것이다. 바쟁이 당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통해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본 것은 현실 사회와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치열한 관찰과 그를 통해 영화 속에 그 현실의 본질을 담아내기 위한 창조적 노력이었다.

 

한국영화의 위기는 결코 기술적, 산업적 논리에서 투자를 활성화하고 배급채널을 다양화하고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갖는 것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상업영화만이 아닌 저예산영화, 작가영화, 예술영화, 단편영화를 살리기 위해 마이너쿼터를 도입하는 것이나 전용관을 만드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시작은 영화가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케케묵은, 하지만 본질적인 질문을 통해, 현실의 어떤 측면을 영화 속 세계로 창조해낼 것인가에 대한 모색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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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호학자 퍼스는 기호의 종류로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을 분류한다. 도상은 지시대상과 형태에 있어서의 유사성에 기반한 기호, 지표는 지시대상과의 본질적인 인접성을 나타내는 기호, 상징은 지시대상과 인과적 관계가 없는 문화적, 관습적 기호를 의미한다. 바쟁이 사진의 회화와의 비교를 통한 본질적 객관성을 언급한 것은 도상의 측면이 아닌 지표의 측면, 그러니까 사진이라는 기계장치를 통한 모사가 본질적으로 지시대상과 인접해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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