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지음, 박상규 옮김 / 시각과언어 / 199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앙드레 바쟁은 우리로 치면 씨네 21 정도의 잡지인 프랑스 영화잡지 '까이에 뒤 시네마'에서 주로 글을 쓴 영화평론가이다. 그는 40살의 나이로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저널에 글을 기고한 저널리스트이다. 따라서 그의 글들은 저널에 실리는 짧은 글들이 대부분이요, 영화이론서 같은 것은 단 한 권도 집필하지 않았다.

 

물론 오손 웰즈나 장 르노아르 등의 몇몇 감독들에 대한 작가론은 예외적으로 단행본으로 나왔지만 그 글들 역시 처음부터 단행본으로 쓰여졌다기보다는 저널 글들이 모이면서 단행본을 기획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앙드레 바쟁은 영화이론에만 영향을 미친 필자가 아니라 누벨바그 영화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이론에서는 리얼리즘 계열을 대표하는 영화이론가로 종종 언급되지만, 그것은 협소하게 바라본 관점이고, 앙드레 바쟁은 영화미학과 영화와 사회의 관계, 장르와 작가 등의 많은 영역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라 보는 것이 옳다.

 

프랑스에서는 전체 4권으로 편집되어 출간된 '영화란 무엇인가' 역시 각 시기 시의적으로 쓰여진 짧은 글들을 모은 것이고,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영화란 무엇인가'는 4권을 줄여 1권으로 출간된 것을 번역한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40년대부터 50년대에 쓰여진 글들 모음이다. 저널에 쓰여진 짧은 글들을 모아서 낸 책들이 대부분 한 권의 책으로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고, '영화란 무엇인가' 역시 그런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이곳에 묶여진 주제비평, 작가비평, 작품비평들은 모두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색을 하고 있는 글들이란 점에서 한 권의 책으로서의 일관성을 획득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오히려 '영화입문서'들보다 훨씬 '영화'에 대한 질문과 진지한 고찰들을 담고 있다.

 

한국에 번역된 영화관련서들 중 필독해야할 고전들이 빈약한데 '영화란 무엇인가'는 그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명저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정도 전에 쓰여진 글이지만 그가 던진 질문들은 지금 이곳에서 여전히 유효한 지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 메모(괄호 안은 나의 주석)
 

1.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1945)

 

(이 글은 중요한 글이지만 많은 학생들이 오독하고 있는 글이기도 하다. 즉 바쟁이 표현주의 영화보다 리얼리즘 영화 옹호한 영화평론가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에서 영화의 본질이 리얼리즘에 있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은 오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은 더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조형예술에 대한 정신분석을 해본다면 시체의 방부보존 관습이 조형예술 발생의 기본요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회화와 조각의 기원에는 미이라 콤플렉스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을 것이다. 즉 시간의 흐름에 대한 방어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14)

 

(회화와 조형 예술의 심리학적 관점에서의 시간의 영속성에 대한 욕구. )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의심할 것도 없이 과학적이고 그래서 말하자면 벌써 기계적이라고 할 최초의 방식의 발명이었는 바, 즉 투시화법이 그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실 - 카메라 옵스큐라)(15)

 

(유사성의 역사를 기술적 관점에서 개괄)

 

예술상의 리얼리즘 논쟁은 이러한 오해로부터 나온다. 즉 미학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혼동, 이 세계의 구체적이면서도 또한 본질적인 의미를 표현하려는 욕구에 다름아닌 진정한 리얼리즘과 형체의 착각으로 만족하는 눈속임의 사이비 리얼리즘과의 혼동으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투시화법은 서양화의 원죄였었다.(17)

 

(바쟁은 미학적인 것을 본질적 리얼리즘으로 심리적인 욕구를 위한 눈속임을 사이비 리얼리즘이라 하며 심지어 투시화법을 서양화의 원죄라고까지 기술한다. 바쟁을 단순히 표현주의(현실을 왜곡시키는 작가의 의식을 반영하는 독일표현주의 작품들)를 비판하고,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리얼리즘 작품들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위의 문장이 모순적으로 들릴 것이다. 르네상스(투시화법)를 비판하고 바로크를 옹호하는 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제대로 독해하기 위해서는 아래의 부분들을 더 읽어야 한다.)

 

사진은 바로크 예술이 의도한 바를 완성함으로써 조형예술을 그 유사성의 집념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사진과 영화는 리얼리즘에의 집념을 결정적으로, 그리고 그 본질 자체에 있어서 만족시키는 발견물이었기 때문이다. 바로크 회화로부터 사진으로의 이행에 있어 본질적인 현상은 모방의 단순한 물리적 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배제한 기계적인 재현이라는 것에 의해 우리의 착각에의 욕구가 완전히 만족되어진다고 하는, 하나의 심리적 사실에 있는 것이다.(18)

 

(사진의 발명에 의해 유사성의 콤플렉스에서 해방된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리얼리즘에의 집념을... 그 본질 자체에 있어서 만족시키는 발견물'의 등장을 지적한 곳이다. 그 본질 자체에서 현실과 유사하다고 말하는 것은 기계장치와 필름의 화학물질의 반응에 의해, 즉 인간의 손의 개입 없이 사물을 모사하는 발명품의 등장을 언급한 부분. 이것이 종종 바쟁을 오해하게 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본질 자체에 있어서의 유사성이란 도상(icon)의 측면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지표(index)의 측면을 말한 것이다. 즉 기계장치에 의함 모사에 의해 유사성에 대한 심리적 욕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측면을 말한 것이지, 현실을 어떻게 재현하고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측면, 기호의 다른 측면인 도상과 상징(symbol)의 측면에서의 리얼리즘을 말한 것이 아니란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주의 영화들과 리얼리즘 영화들 모두 지표로서는 동일한 리얼리즘의 산물인 것이다. 바쟁의 사진적 존재론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관점이 현실을 그대로 모사해낸 작품에 대한 옹호로 오독되는 것은 이 부분으로부터 나온다. 바쟁이 옹호하는 리얼리즘 영화는 현실의 본질을 잘 표현해내는 리얼리즘 영화이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거나, 현실처럼 착각하게 하는 영화가 아니란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러시아의 몽타주 영화들, 가령 전함포템킨과 같은 영화를 위대한 영화로 옹호하는 것이다. 앙드레 바쟁이 단순히 딥 포커스와 롱 테이크로 이루어진 작품들을 옹호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형식주의에 빠진 오독이다.)

 

(아래는 사진의 지표로서의 객관성에 대한 부분)

 

회화와 비교되는 사진의 독창선은 그것의 본질적 객관성에 있다. 엄밀한 결정론에 따라서 외부세계의 상이 인간의 창조적 간섭없이 자동적으로 형성되어지는 것은 이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직 사진에서만이 우리는 인간의 부재를 향유할 수가 있는 것이다. (19) 사진은 자연의 창조물을 그것과는 다른 창조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연의 창조물 속에 덧붙여 그 일부가 되는 것이다.(23)

 

초현실주의에게는 미학적 목표가 우리의 정신에 대한 영상의 기계적인 효과와 분리될 수 없음이 이런 까닭에서이다. 상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논리적인 구별은 초현실주의가 출현한 이래 사라져가는 경향이 있다. 모든 영상은 사물로 느껴지고 모든 사물은 영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진이 자연과 같은 성질을 지닌 영상, 즉 진정한 환각을 실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23) 인상파의 리얼리즘은 그 과학성을 구실로 하여 마치 실물인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눈속임 화법과는 정면으로 대립적인 위치에 섰다. 세잔느와 더물어 형체가 다시금 캔버스를 점유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회화는 어떤 경우에도 투시화법의 착각적인 기하학에 따르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23)

 

(바쟁은 초현실주의 회화와 인상파를 예로 들어 사진 등장 이후 시각예술이 심리적 유사성 욕구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언급하며, 더 나아가 사진으로부터 회화가 초현실주의로 나아갔다고까지 말한다. 그것은 사진 자체에 존재하는 지표로서의 리얼리즘이 '환각'을 일으키는 현상, 사물과 영상이 구분되지 않는 관계, 영상의 기계적 효과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언급이로까지 나아간다. 이 부분 역시 그의 관점이 현실을 투시도법을 이용하듯 그대로 모사하는 것을 옹호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아래는 마지막 문장)

 

영화는 일종의 언어이기도 하다.(24)

 

(영화를 언어로 보고자 하는 노력은 기호학과 구조주의 영향을 받아 5,60년대 이후 활발하게 연구된다. 영화를 마치 언어기호처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노력으로까지 나아가는데 그 대표적인 이론가로 크리스티앙 메츠가 있다. 크리스티앙 메츠의 지루하기 짝이 없고, 가끔은 멍청하게 느껴지기 까지 하는 방대한 노력은, 하지만 영화언어와 영화분석에 상당한 부분 진보를 가져왔다. 영화를 인상비평하지 않고 정교하게 텍스트 분석하려는 태도를 갖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

 

2. 완전영화의 신화(1946년)

 

(기술과 상상력의 관계에 대한 많은 함축된 의미를 가진 중요한 글이다. 좀 더 나아간다면 최근의 디지털 영화에 대한 논의에도 고민할 점을 주는 글.)

 

영화는 관념론적 현상이다. 더구나 영화는 과학적 정신의 도움을 거의 받은 바 없다.(25) 영화의 발견을 그것을 가능케 한 기술적인 발견들로부터 출발하여 설명하는 것은 확실히 그릇된 일이다. 산업상의 발견은 그런 관념을 실제로 적용하는 길을 열어줄 수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26) 영화의 발명에 이르는 결정적인 단계들은 모두가 그같은 기술적 필요조건이 충족되기 이전에 벌써 도달되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27) 그 선구자들은 오히려 예언자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케 된다. 그들의 상상력은 영화라고 하는 관념을 현실의 완전하고도 총체적인 재현과 동일시하여 음과 색채와 입체성에 의한 외부세계의 완전한 복원을 단숨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29)

 

영화의 발명을 이끌어가 가능케 한 신화는 사진으로부터 축음기에 이르기까지 19세기에 나타난, 현실의 기계적인 재현기술 일체를 막연하게나마 지배해온 어떤 신화의 완성된 모습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신화로서, 세계를 그 자체의 이미지로, 예술가에 의한 해석의 자유라는 가설이라든가 시간의 불가역성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짐을 지지 않는 이미지로 재창조할 수가 있다고 하는 신화인 것이다.(31)

 

영화가 탄생한 것은 그와 같은 사람들이 빠져든 집념들의 집약, 즉 하나의 신화, 완전영화의 신화의 결과였다. 이렇게 저 옛날 이카루스의 신화는 순연히 이념적인 플라톤적 세계로부터 내려오기 위해 내연기관의 발명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허나 그 내연기관은 인간이 최초로 새에 관해 생각한 때부터 모든 인간의 정신 속에 존재했던 것이다. 영화라는 신화의 화신들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신화, 현대세계를 특징짓고 있는 기계예술의 출현을 촉진한 저 신화와는 먼 관계밖에는 지니지를 못했다. (33) 요컨대 영화는 아직도 발명되지 않은 것이다. (32)

 

(여기서 주목해볼 점은 영화의 탄생은 기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완벽한 모사, 다시 말해 바이오기술에 의한 인간복제에로까지 향하는 인간의 상상력과 욕망에 의해 영화는 영화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탄생했었고, 반대로 지금까지 영화는 아직도 발명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영화는 지금도 완전영화를 향해 진보하고 있다는 관점이다. 이것은 기술발전과 산업(자본)의 결과로 영화가 탄생하고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영화가 진보하고 있다는 관점인 것이다.

 

이것은 여러가지 지점에서 논쟁적인 면을 담고 있는 부분인데, 일단 먼저 짚어야 할 지점은 여기서 완전영화의 신화 역시 도상이나 상징, 스타일의 측면이 아니라 지표로서의 측면, 기술적으로 완벽한 혈실 모사가 가능한 완전영화에 대한 신화가 영화의 진보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가령 3차원에 대한 환영을 위한 입체영화, 시각 전부를 이미지로 하기 위한 아이맥스 등등은 그런 완전영화의 신화를 위한 시도들이겠다.

 

그렇다면 최근의 경향, 디지털영화로의 변화, 한편으로는 모바일과 같은 작은 화면을 통한 관람문화, 인터넷을 통한 영화배급 등은 바쟁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것일까. 이런 시도들 역시 단순히 산업과 기술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완전영화의 신화로 나아가기 위한 진보의 과정일까? 바쟁이 살아있다면 디지털영화를 진보로 볼까? 퇴행으로 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글들에 대한 메모 이후 다시 짚어보겠다.)

 

3. 영화와 탐혐(1953)

 

(이 글은 기록영화(다큐)에 대한 것이다. 바쟁은 극영화에서도 다큐적인 요소, 그러니까 현실의 모호성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현실의 본질을 표현하려는 태도에 대한 옹호를 보여주는 바, 이 글을 통해 그가 옹호하는 리얼리즘 영화가 어떤 것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또 조금 확대시켜 해석해본다면 최근의 리얼리티 TV에 대한 비판의 한 지점을 줄 수도 있다.)

 

장대한 여행영화의 걸작들의 특성이란, 이를테면 세월이 지나도 낡았다고 할 수 없는 시적 진실성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여행영화들은) 서양정신이 멀리 떨어진 문명을 둘러싸고 그것을 해석하고자 하는 이른바 이국정취(exotisme)라는 특수한 형태를 띠었다.(36)

 

(이국정취물이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스펙터큐러한 요소와 센세이셔널한 요소를 점점 더 뻔뻔스럽게 추구하려 하는 경향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야만인들과 맹수들로 들끓는 아프리카의 신화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37)

 

제2차세계대전 이래, 기록적인 신실성으로의 분명한 회귀를 우리는 보게된다.(37) 그들 영화에서는 거의 항상 과학적이거나 민속학적이고자 하는 현대적인 탐험의 성격이 우선 느껴진다. 그들(원주민들)을 엑조틱한 동물의 한 변종으로서 다루기를 그치고 이와는 반대로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좀 더 잘 기록하고자 노력한다.(38)

 

(아래는 <돌아오지 않는 모험>이란 다큐에 대한 비판. 이 다큐는 스콧 선장의 모험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같은 배와 같은 조건을 만들고 그의 모험을 그대로 재연한 다큐.)

 

이 영화가 실패한 진정한 원인은 거기(모랄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상의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에 놓여 있다. 그 아나크로니즘은 두 가지 원인이 있는 것이다. 첫째는, 보통 사람들이 신문에 실린 르포르타주나 라디오 또는 텔레비전이나 영화 등을 통해 극지탐험에 대해 지니고 있는 과학적 지식이다. 보통의 일반관객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비해 이 영화는 그저 중등교육을 받은 자에게 초등교육 단계의 과학지식을 제공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스콧 당시의 영국에 관계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인 1940년대 관객에 맞춰 변화시켰어야 했는데) 왜냐하면 관객이 무의식적으로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자기 시대(현대)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1)

 

두번째의, 그리고 특히 중요한 원인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의 객관적인 르포르타주 영화의 보급이다. 전쟁은 우리가 기록영화에 기대하고 있는 바를 결정적으로 수정해놓았다. 스펙터큘러하고 낭만적인 온갖 매력을 지닌 엑조티즘은 거기서 사실을 위한, 사실의 적나라한 관계의 기호, 취향에 자리를 내주었다. 남극점에서의 스콧과 그이ㅡ 4인의 동료들의 사진 한 장, 뒤에 그들의 짐꾸러미 속에서 발견된 그 한 장의 사진, 이것만이 찰즈 프랜드의 천연색영화보다 훨씬 감동적이다.

 

(여기서 기록영화의 두 가지 지점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 것은 기록영화(극영화도 포함해야 할 것)가 그것이 다루고 있는 시대가 아니라 동시대 관객과 만나 어떤 의미를 만드는가의 지점이고, 둘째 것은 영화를 만드는 관점, 태도의 문제인데, 체험의 현실성, 즉 르포르타주 영화의 현장성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가지는 힘, 우연성, 현장의 위험과 생생함, 역동성 같은 것들이 사라진 뻔한 설명과 계몽의 태도는 감동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두번째 지점은 단순히 기록영화에서 현실에 뛰어들어 영화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극영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바쟁은 언급하는데 이후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을 옹호하면서 현장의 비전문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시나리오에 쓰여지지 않은 촬영중의 우연을 반영하는 것을 옹호하는 태도로까지 이어진다. 어찌보면 이것은 최근의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 각광을 받는 요소와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정해진 각본 없이 리얼 그 자체로 우연성에 의지한다? 바쟁이 옹호하는 영화와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후 네오리얼리즘에 대해서 언급할 때 다시 하기로...)

 

(아래는 <콘티키호 표류기>라는 위험천만한 영화. 그러니까 실제로 짜여진 각본에 의해 찍힌 것이 아니라 거의 카메라 작동을 하지 못하고 실제로 죽음을 무릎쓰고 찍혀진 영화. 그래서 프레임도 엉망이고 포커스도 거의 나간 기록영화에 대한 부분이다.)

 

이 영화를 만드는 일이 영화 자체가 전혀 불완전하게밖엔 이야기하지 않는 행위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를 만드는 일 자체가 모험의 한 국면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위험 그 자체를 담은 사진이기 때문이다. (45) 잘 조직된 르포르타주의 과실도 없고 빈틈도 없는 이야기보다도 폭풍을 만났다가 구조된 이같은 표류기쪽이 얼마나 더 감동적인가! 기록의 결여 부분이란 모험의 소극적인 각인, 그 조상에다가 기재한 것에 다름아닌 것이다. (47)

 

(바쟁의 이러한 언급 중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로서의 영화에 대한 언급이다. 이것은 최근의 한국영화 '영화는 영화다'의 한 측면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영화다'에서 소지섭은 강지환에게 가짜로 싸우지 말고 진짜로 싸우자고 한다. 영화 스텝들은 영화적 관습으로 데꾸빠주하기 위해 절치부심하지만 소지섭은 영화는 가짜라며 진짜로 싸우자고 하는데, 영화감독은 그것이 가지는 긴박감과 현실감이 있는 것을 알고 허락하며 그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모습에 짜릿해한다. 어쩌면 이 때 소지섭과 영화감독은 바쟁이 옹호한 관점의 영화, 즉 현실 그 자체로서의 영화의 본질을 찾고자 한 것일지도... 가령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연인은 현실세계에서 사귀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 안에서 사귀는 것이지만 소지섭은 현실과 영화를 착각하고 영화 속에서 현실의 그 자신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실재 삶 속의 죽음을 그곳에서 맞이하려 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내용과 형식을 따로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영화를 현실처럼 현실을 영화처럼 대하는 소지섭의 태도로 영화를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글에서 드러난다.)

 

4. 침묵의 세계(1956년)

 

( 이 글은 <침묵의 세계>란 해저 다큐에 대한 글을 통해 기록영화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분석을 한 글이다.)

 

이 영화가 지닌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우선 자연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요, 따라서 이런 영화를 비평한다는 것은 신을 비평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러한 해저 기록영화의 매혹적인 흥미가 다만 그것들이 발견한 것의 신기한 특색과, 그리고 형체와 풍부함으로부터만 나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49)

 

마침내 우리의 상상력보다도 훨씬 강력한 과학이 인간에게 그의 잠재적인 물고기의 능력을 계시하는 데서, 비행하는 인간이라라고 하는 예로부터의 신화를 실현시키게 되었다. (49)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은 영화비평의 영역이 아니란 점. 자연다큐에서 중요한 것은 카메라의 시점에 의해 우리가 물고기나 새의 시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의 시각혁명이란 점이다.)

 

(반면 루이 말의 <잃어버린 대륙>은 여러 대의 카메라로 미리 데쿠파주(촬영계획)을 세워서 촬영했는데) 그것은 너무 고의적으로 시적인 면을 지니게 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장면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내용에 대한 비평인 것이요, 형식에 대하여는 그것은 완전히 정당한 일이다. 실제로 소재를 재구성하는 일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건 하에서 허용될 수 있다. 첫째로 관객을 속이려고 하지를 않는다고 하는 경우, 둘째로 사건의 성질이 그것을 재구성하는 일과 모순되지를 않을 경우인 것이다. (53)

 

요컨대 한 마리의 물고기에 지나지 않는 상어에게서 상처를 입은 포유동물들의 고통에, 인간이 굳은 연대감을 갖게 되어감을 사람들이 조금씩 느낄 때 거기에는 하나의 숭고한 순간이 존재한다. 결국 이런 종류의 기록영화가 지니고 있는 문제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기술상의 문제와 도덕상의 문제로 귀착한다. 실제로 좀더 잘 관찰하기 위해 트릭을 쓰는 것과 그러나 이와 동시에 관객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55)

 

(형식의 측면에서 현실을 잘 표현하기 위해 그리고 도덕적으로 옳다면 기술적 트릭을 써도 좋다는 관점. 이것 역시 그의 리얼리즘이 현실의 본질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가령 <영화는 영화다>의 예를 든다면 소지섭의 영화에 대한 태도가 삶의 내용에 대한 것만으로 영화가 삶의 내용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즉 형식의 측면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소지섭이 만약 영화가 보여주는 갱들의 세계가 현실의 본질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 현실의 본질을 보여주고자 했던 점은 앙드레 바쟁 적이다.)

 

5. 윌로씨의 휴가

 

(프랑스감독 쟈끄 따띠의 <윌로씨의 휴가>에 대한 비평이다. 소리의 리얼리즘에 대해. 그리고 새로운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할 점이 있는 글.)

 

프랑스 영화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재능있는 배우들이 아니고 희극의 양식, 그 구상인 것이라고 함을 알만하다.(58)

 

(한국영화의 위기 논쟁. 한국영화의 위기는 스크린쿼터에 의한 것도 산업적인 것도 배우들의 문제도 배급의 문제도 아닌 영화에 대한 양식, 그 구상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모든 위대한 희극영화처럼 타티는 우리를 웃기기 전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타티에 의해 창출된 인물은 확실히 우스꽝스럽기는 하지만 그 우스꽝스러움은 거의 부차적인 것이요, 어느 경우이건 늘 그 세계(타티가 창조한 세계)와의 연관을 지니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그 인물 자체에는 가장 희극적인 개그가 결여되어 있을 수가 있다. 왜냐하면 윌로 씨는 그가 통과한 후에 오랫동안 계속해서 혼란(무질서)의 형이상학적인 화신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다. (윌로씨)의 독자성이 일종의 미완성에 있다고 하는 것이 단번에 보인다. 그는 수줍음을 존재론적인 원리의 높이에까지 올려놓고 있다. 대소동이 일어난 집안의 천사! (61) 이 영화에서 시간은 소재인 것은 결코 아니고 이 영화의 거의 목적 자체인 것이 아닌가 한다.(62) 그리고 이미지보다는 한층 더 사운드트랙쪽이 이 영화에 시간적인 두터움을 주고 있다. 타티의 재치있는 온갖 익살은 선명성에 의해 선명성을 파괴하는 점에 있다. 대화에도 불가해한 것이라고는 없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말의 교환이요, 그 무의미성은 그 정확성 자체의 의해 드러나는 것이다. (64) 이 세계의 음의 공허성이 생겨나고 있다. 아마도 말의 육체적인 양상, 그 해부학적인 구조가 이만치 무정하게 가차없이 폭로되어진 일은 아직껏 없었을 것이다. 음을 제거하려는 노력에 의해 결국 마지막에는 그러한 단어에 의미를 돌려주고 만다. 그런 다음 다시, 타티가 완전히 가짜의 소리를 은근히 몰래 끌어들인다. (65) 정적으로부터 오는 환멸. 모든 위대한 희극영화와 마찬가지로 <윌로 씨의 휴가>의 희극성은 엄격한 관찰의 결과인 것이다. (66)

 

(<윌로씨의 휴가>를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간략히 추가언급한다. <윌로씨의 휴가>에서 현장음은 특정한 소리만 들리고 다른 모든 음향은 소거해보린다. 가령 바닷가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들 바람소리, 파도소리, 상가의 문을 여닫는 소리 등등을 제거하고 폭죽소리만 들리거나, 대화는 웅얼거리는 소음으로만 들리거나 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 소리에 의해 타티와 휴가철 바닷가의 풍경은 미니멀하게 표현되는데, 그에 의한 반복적인 시간은, 현실에 대한 재구성을 하게 되고, 휴가철 바닷가에 나온 사람들의 일상적인 시간을 파괴한다. )

 

6. 금지된 몽타주(1953년, 1957년)

 

(앞서도 언급했듯이 바쟁은 편집(몽타주)을 지양하고 딥 포커스와 롱 테이크만을 옹호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들을 비판했지만 러시아 몽타주영화들을 옹호했다. 이 글을 통해 몽타주를 통해 공간의 리얼리즘을 파괴하는 경우, 그래도 좋은 경우를 몇 가지 언급한다.)

 

몽타주는 영화의 본질이라고 아주 자주 되풀이해 말해지고 있지만 그 몽타주는 이같은 영화의 경우에는 문학적인, 특히 반영화적인 방법이 되고 있다. 이번엔 순수한 상태에서 본 영화적 특질은 몽타주와는 반대로 공간의 단일성에 대한 전적인 사진적 존중 속에서 발견되어지게 된다. (77)

 

(여기서 바쟁은 영상이 순전히 필요에 의해서 편집(가령 훈련되지 않은 개의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해 몽타주(편집)하는 영화는 비영화적이지만, 공상적 꿈에 대한 기록영화인 장 꼭도의 <시인의 피>는 영화적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현실을 현실처럼 보여주지만 비영화적인 것과 공상을 현실처럼 보여주지만 영화적인 것을 대립시키고 있다.)

 

(역설은) 이 영화의 소재는 진짜이구나 하고 말할 수 있음과 동시에, 허나 이건 영화다라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상상력이 현실의 경험을 초원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지만, 역으로 상상의 세계는 스크린 상에서는 현실의 공간적 밀도를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 (79)

 

(문장이 조금 헛갈리지만 어떤 이야기인고 하면 공상영화에서도 현실을 다룬 영화에서도 리얼리티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영화적 현실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을 다룬 영화에서도 오히려 그 현실을 파괴한 뒤 영화적 현실성을 획득해야 하고, 공상의 기록영화에서도 그 공상의 영화적 세계는 현실적으로 느껴져야 하는 동시에 그것은 영화적 세계란 것이다. 이는 그의 리얼리티의 개념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이런 경우 몽타주가 금지된다.) 한 사건의 본질이 행위의 둘, 혹은 그 이상의 요인의 동시적 제시를 필요로 할 때는 몽타주는 금지된다.(82) 사건의 단일성은, 그것의 파괴가 현실적 사건을 단순한 가공적 표현으로 변형시켜버릴 때에는 반드시 존중되지 않으면 안된다. (83)

 

(가령 이런 얘기다. 마술사가 마술을 할 때 몽타주한다면 관객은 컷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느껴 마술을 불신할 거란 것.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채플린은 사자우리에서 사자의 공격을 받을 때 실제로 사자우리로 들어갔는데 만약 한 프레임에 채플린과 사자가 동시에 나오는 장면이 없다면 관객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데꾸빠주되더라도 공간적 단일성을 가지고 각각의 분할된 쇼트들이 통일되기 위한 요소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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