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의 한 지하 서점에서는 토요일이면 특별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서점에서 연극하기. 이 이상한 사건은, 책에 관한 것이면서, 서점에 관한 것이면서, 그리고 지금-이곳 우리들의 삶과 문화에 관한 것입니다.
서점은 이음아트, 연극의 제목은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입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는 연대 앞 그 서점에 대한 기억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 연극은 어쩌면 ‘오늘의 91학번’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사회변혁을 도모한 386 선배 세대들과 다만 개인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신세대, 그 사이에서 뚜렷한 특징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낀 세대’들의 후일담이자 오늘의 초상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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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연회가 열린 이음아트 (사진=이명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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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과 91학번 동기인 광석, 재하, 현식은 <오늘의 책>에서 재회합니다. <오늘의 책>은 역시 같은 과 친구였던 유정이 생활의 터전으로 삼은 헌책방으로 설정돼 있습니다. 원래 <오늘의 책>은 대학시절 그들이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며 청춘을 보낸 인문사회과학 서점이었으나 재정난으로 폐점하여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요.
세 친구는 <오늘의 책> 개업을 축하하기 위해 졸업 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젊은 날 가슴으로 읽은 책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공간, 그곳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누군가는 낀 세대의 자괴감과 무력감을 드러내고, 누군가는 지난날의 질투와 죄의식을 꺼내놓습니다. 그들은 언성을 높여 감정을 까발리기도 하고, 냉소적인 모습으로 그 감정들을 도로 수습하려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작품의 공간인 ‘헌책방’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배역을 맡았는지 모릅니다. 등장인물들은 헌 책의 구절을 다시금 곱씹어보며 당대를 초월하는 책의 의미를 확인하고,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가 되 준 서점을 그리워합니다. 책은 그들이 닿지 못하는 세계의 축소판이며 세계관의 지표였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책’ 세대가 지나간 시절에 바치는 헌사이면서, 책과 서점, 그리고 어떤 문화를 향한 현재의 애정표현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책’은 사라졌으며, ‘오늘’의 ‘책’들은 점점 작아져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는 회복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회복해야 할 것에 대해 말하는 중이기도 합니다.
연극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는 생업의 공간을 연극의 무대로 선뜻 내준 이음아트 한상준 대표의 마음씀이 없었다면 입소문을 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실 대학로에는 서점이 없었습니다. 책에는 그렇듯 야박한데 문화예술의 거리라는 별칭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헌데 ‘이음아트’가 대학로에 자리를 잡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텍스트』는 서점 이상의 공간을 꿈꾸는 ‘이음아트’에서 한상준 대표와 연극을 연출한 김재엽 씨에게서 연극 바깥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김재엽 씨와는 이메일 인터뷰)
한상준 이음아트 대표 인터뷰
텍스트 이 연극은 포스트 386 세대의 현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극을 보고 느낀 소회가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한상준 등장인물들이 90년대 초반 학번이고 제가 그보다는 고학번입니다. 그 친구들의 시대적 고민 역시 우리가 겪었던 시대적 고민들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생각해요. 학생일 때, 20대일 때,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으레 하게 되는 고민들을 이 연극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극중 음악이 인상에 남아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일상적으로 접했던 노래들이 극 중에서 흘러나올 때 전율을 느꼈다고 할까요. 음악을 들으면서 ‘그런 시절을 지나왔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텍스트 실제 서점을 무대로 공연이 펼쳐집니다. 이곳에서 상연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한상준 작가이자 연출가인 김재엽 씨가 여기 손님으로 드나들었어요. 원래 작년 3월 달에 초연을 했는데 공연이 끝난 뒤에 김재엽 씨가 서점이 무대인만큼 여기서 한번 해보면 어떨까하고 제안했습니다. 연극의 메시지도 좋았고, 책 읽는 사람들을 위한 무료공연이라는 취지에서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어요.
본무대에 서기 전 여기에서 3차례에 걸쳐 시연회를 했습니다. 해보니 반응이 생각보다 좋았어요. 올해는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할 계획입니다.
텍스트 대학로에 서점을 열기로 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문화예술의 거리에 서점이 없다는 것이 항상 아쉬웠는데 어떤 사명감이 작용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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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준 이음아트 대표 (사진=최규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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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준 단지 책이 좋아서 서점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홍대 앞이나 제가 사는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장소를 물색해봤지만 대학로만큼 느낌이 좋은 곳이 없었어요. 20대, 30대 시절 약속장소로 줄곧 찾아 왔던 곳이고 문화의 공간으로 기억된 곳이었거든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장소라는 것도 이유가 됐고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서점이 없었습니다.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서점이 자리를 잡지 못할 때였죠. 특히 예술, 인문 서점으로 특화하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서점이 없다는 것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큰 이유였지, 처음부터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제가 연극에 조예가 깊어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 왔던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냥 여기서 했으면 좋겠다고, 단순하게 시작한 거예요. 그
런데 점점 많은 분들이 이 서점을 찾아오고 응원해 주시니까 격려가 돼서 여기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명감이라는 말은 오히려 이음아트를 지켜봐주시는 분들이 쓰시는 표현인 것 같아요. 대학로가 문화의 거리인데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서점 하나 없냐고 하시던 분들이 우리 서점이 잘됐으면 하는 바람을 표현하면서 그렇게 인식이 된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신 덕분이죠.
텍스트 온라인 서점의 공세 속에서 오프라인 서점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음아트가 귀감이 될 만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요. 일종의 문화 메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을 것 같은데 서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있다면.
한상준 단순히 책만 사고파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지역에 걸맞은 사랑방이 될 수 있다면 서점이 존속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지역을 찾는 사람들이 문화 사랑방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지역민이나 서점 모두에 좋은 생존 도구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텍스트 독서를 위한 자리를 따로 마련해 놓은 것이 인상적인데요. 서점을 열기로 결정하셨을 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런 공간을 이용할지 염려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한상준 그런 염려는 없었습니다. 종로에 있는 한 대형 서점도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도록 의자 등을 갖춰놓고 있어요. 앉아서 편안하게 책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평범한 발상일지는 몰라도 바람직한 거죠.
텍스트 대형서점은 여유가 있으니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작은 서점이니만큼 수익도 생각해야 할 듯한데.
한상준 그건 작은 서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유가 있어서라기보다 이용하는 고객들의 편의를 생각해서 배려해야 할 부분인 것이죠. 의자나 테이블을 없애고 책으로 그 자리를 채울 수도 있겠지만 우선 서점을 찾는 손님들이 편하게 책을 보셔야 저도 편하거든요.
텍스트 이해를 떠나 그렇게 고객 중심으로 운영하다보면 어려움이 많을 것 같은데.
한상준 사실 어려움이 없진 않습니다. 마음가짐과 경영이 일치해야 하니까요. 돈 주고 사보기를 꺼리는 양서들, 특히 인문학 서적을 만드는 소규모 출판사 얘기를 들으면서 이곳과 사정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양서 자체로는 생존을 보장할 수 없으니 팔릴 만한 책을 만들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좋은 책 만들고 하는 식으로 운영한다더군요.
그러니 마음가짐과 경영은 차원이 다를 수밖에요. 개인적으로는 제가 좋아하는 책이나 양서를 다양하게 갖춰서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도록 편하게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좋아하는 책 위주로 작성하는 책 목록은 베스트셀러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남들이 본 책만 보는 쏠림 현상을 보일 때면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 서점을 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제 성향인 것 같아요. 저를 힘들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면서 삶의 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제 성향인거죠. 사람들이 찾는 걸 쫓아가면 그리 어렵진 않을 텐데 그걸 마다하고 좋아하는 것만 하다보니까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어요. 어쩔 수 없죠.
텍스트 베스트셀러와는 다른 책 목록이라 하셨는데 주로 취급하는 분야는 무엇인가요. 그런 분야의 서적들을 취급하는 이유가 있다면.
한상준 베스트셀러가 없진 않습니다. 손님들이 찾으시니 준비해놔야죠. 보통 각종 매체의 신간 리뷰 등을 보면서 놓치는 책은 없는지 확인해보는데 리뷰만 보고 책을 주문하면 열 권 중에 한 권 정도는 실망하는 경우가 꼭 생깁니다. 그래서 책을 주문할 때는 제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소개하고 싶은 책들은 메모해 놓았다가 서점에 들여놓는 거죠. 특색이라면 대학로가 연극동네인 만큼 이곳에 들르는 연극인들을 생각해서 깊이 있는 연극 관련 서적들을 구비해놓는 것입니다. 연극하시는 분들이 자료삼아 볼 수 있으니까요.
사진 관련 서적은 제 관심 분야라서 많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을 인문학에 포함시켜놓고 있습니다. 서점을 찾는 손님들이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에서 제가 권하는 책들이라 할 수 있죠.
텍스트 현 세대는 활자매체보다 영상매체에 더 밀착돼 있습니다. 책의 매력은 무엇에 있을지, 또는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한상준 인터넷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은 깊이가 없는 얕은 지식인 경우가 꽤 많죠. 그게 단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고력을 요하고 꿈을 키워준다는 측면에서 활자, 인쇄 매체보다 나은 것은 없어요. 아무리 인터넷이 정보의 바다라지만 정보의 근간은 결국 책에서 나오는 겁니다. 책에서 접하는 삶과 현실, 세계에 대한 이해는 인터넷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어려움이 없진 않겠지만 활자 매체는 지속될 겁니다.
텍스트 책이 홀대를 받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에 대한 개선방안이 있을까요?
한상준 다양한 저변 확대가 어려워 푸대접을 받는 것 같아요. 이를 테면, 한 사람이 어떤 책을 읽을 때 그것이 두 명, 세 명으로 점차 확산된다면 그것이 곧 문화의 저력이 되는 거죠. 그런데 제도나 교육체계가 이를 가로 막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죠. 책을 편하게 대하고 탐독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논술교육만 봐도 그렇지 않잖아요. 자본주의의 폐해라고 할까요.
텍스트 최근 읽으신 책이 있다면, 또는 추천할 만한 책이 있다면?
한상준 지금은 개인적인 관심으로 김용옥 선생의 『요한복음 강해』을 읽고 있습니다. 강영숙의 『리나』도 읽었는데 특이한 소설이에요. 이곳에서 ‘독자와의 대화’시간을 가졌던 작품인데 술술 읽히지 않고 이따금씩 사유하게 하는 책입니다.
○ 연출가 김재엽 인터뷰
텍스트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는 '포스트 386 세대'의 현재를 보여주고 있는 거 같습니다. 이런 작품을 기획하게 된 작의는 무엇인지요.
김재엽 대학을 졸업한지 10년이 지난, 90년대 학번들의 현재의 모습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 얘기이기도 하고요. 아직은 젊지만, 곧 기성세대의 모습을 띄게 될 우리 세대의 현재적인 모습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다시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젊기 때문에 분명히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책>은 그 고민의 첫 단추인 셈이지요.
텍스트 <오늘의 책>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셨습니다. 당시 서점이 문을 닫는 것을 보며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 그 시대의 서점은 어떤 공간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작품을 구상하는 토대가 되셨을 것 같기도 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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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출가 김재엽씨 (사진=이명옥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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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엽 문예계간지와 진보적 월간지 등을 받아볼 수 있는 중요한 담론들의 현장이었습니다. 또한 휴대폰, 호출기가 없던 시대의 중요한 만남의 공간이었지요. 서점에 붙은 메모판에 적힌 메모를 보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여전히 공동체적인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대학시절의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인문학적 내공이 높은 선배들을 만나 영향을 받았고, 실천적인 활동에 대한 고민을 모색하는 중요한 아지트였던 셈이죠. 그렇다고 서점에 가는 것이 비판적 지성만을 일깨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만이 만들어가는 대안적인 문화가 있었고, 대학가에서 사랑받는 문학작품을 발견하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책에는 문화백수들이 놀 수 있는 재미가 충분히 넘쳤고요. 학교 다니던 내내 정신적인 터전이었던 서점이 졸업할 때가 되니 문을 닫는 상황이 된 거죠. 이미 청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현실적인 자본의 힘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무기력함에 큰 상처를 받았던 거 같습니다. 그러니 작품 속에서나마 <오늘의 책>을 다시 헌책방으로 부활시켜 놓았으니까요.
텍스트 공연장소로 이음아트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재엽 대학로에 이러한 서점이 생겼다는 사실에 무척 고무되었습니다. 이음아트에서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 <오늘의 책> 공연을 하면서 무엇보다 감사했던 점은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에 대한 긴장감과 비판의식을 키워가고 있고, 또 소박하지만 자기 영역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이음아트>는 자본 없는 문화는 살아 숨 쉬지 못하는 것을 증명해주면서 낙후되어 가고 있는 대학로에 새로운 대안문화공간으로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서점을 꼭 지키고 싶습니다. <오늘의 책> 공연은 앞으로 <이음아트> 뿐만 아니라, 인문주의와 진보적 책읽기가 살아 숨 쉬는 어떠한 서점들과도 연대할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극장 연극과 헌책방을 비롯한 인문사회과학 서점과의 연대는 각 영역에서 비주류들의 연대를 통하여 문화와 자본과의 무질서한 주류적 연대에 대항하는 작은 균열을 일으킬 것입니다. 작지만 알찬 대안적인 네트워크를 꿈꾸고 있습니다.
텍스트 이 연극의 인물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속물로 변하는데요. 인물들의 특성을 설정하게 된 계기와 그것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바가 궁금합니다. 재하, 현식, 광석이라는 이름도 귀에 익습니다.
김재엽 '청춘과 낭만과 정의로움'에 인생의 목적을 두었던 대학시절을 떠올리다가 우리가 그 시절을 벌써부터 추억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은연 중에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또 그 시절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현재적인 시점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보고 싶었고, 거기에서 비롯된 인물들이 그 세 인물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분명 제 자신이 분열된 형태로 드러나 있을 테고요. 또 실제 제 주변의 친구들과 선후배들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각 인물들에 붙인 이름들도 애정이 담긴 증거겠지요.
텍스트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에서 책은 작품의 성격과 인물들의 현재를 함축하는 상징인 거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1990년대에서 현재로 오면서 변한 책의 위상이나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을 텐데요. 이 작품에서 '책'은 어떤 의미입니까.
김재엽 당시의 대학가에 존재했던 인문사회과학 서점은 공동체적인 삶의 단단한 보루였습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에 와서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 바람에 휩쓸려 대학조차 실용주의적인 자기 합리화에 끌려 다니게 되었고, 글과 삶을 일치시키려고 했던 이전 선배 세대들의 순수한 책읽기는 점차 자취를 감추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밤새워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며 밑줄을 긋고 메모를 남기고 문제의식을 토론하는 인문주의자들은 설 곳을 잃었고, 생일날 시집을 선물하면서 동지에 대한 사랑을 전했던 비판적인 지성들의 낭만조차도 자본주의적인 생존경쟁 앞에 사치스런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책'은 소박하고 순수한 인문주의적 지성과 감성의 표상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바로 삶 자체라고 볼 수 있겠죠.
텍스트 작품 속 인물들은 낀 세대의 초상입니다. 자전적인 이야기라 하셨는데 그 세대의 고충은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합니다.
김재엽 포스트 386 세대들은 세상에 대한 투쟁에 대해서도 또한 세상에 대한 적응에 대해서도 자신감이 없습니다. 80년 광주항쟁에 대한 원죄의식을 바탕으로 87년 민중항쟁의 승리감을 맛본 전설적인 386세대의 자신감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겠죠.
80년대 선배들의 눈에는 학생운동 흉내 내는 어설프고 유약한 후배들이었고, 91년 5월 투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면서 보수적인 기성세대의 눈에는 세상 좋아졌는데 데모나 하는 철없는 아이들 정도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결국 학생운동의 아성인 총학생회의 투쟁현장이 반공전시관으로 둔갑하는 철저한 몰락을 경험했고, 여전히 공동체적 이상과 개인적 현실 사이에서 자기중심을 잡지 못한 채 방황하면서 무기력해진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 이 작품의 결말은 일종의 화해라고 봐도 될까요.
김재엽 무관심에 대한 반성이 가장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세상과 싸우고 또 서로를 끔찍이 사랑했다가 그 사랑이 변질되어 상처를 주고 아파하고 스스로를 소외시켰던 우리 세대의 개인들이 서로에 대해 무관심했던 기억들을 반성하고 다시 처음처럼 만날 수 있는 용기를 회복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 속에는 다시 현시대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차분한 시선이 감지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오늘의 책> 작품 속에서 그러한 바람들이 성공적으로 표현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해결하지 못하는 고민들이 많습니다. 다만 어떤 연극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화두만이라도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