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월드컵의 나라들 -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월드컵이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의 나라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메소아메리카


멕시코(Mexico) '군신 메히크틀리‘


메소 아메리카의 나라. 그 수도를 멕시코 시티라 부른다. 멕시코라는 지명은 처음에는 이 도시에 붙여진 지명이었다. 1521년 스페인 귀족 코르테스가 이끄는 군대가 이 지역에 있었던 아즈텍 왕국의 도읍을 파괴하고 이 폐허에 노바이스파니아 식민지의 중심도시를 건설하였다. 이 중심도시는 용맹한 원주민 아즈텍족의 신앙이었던 군신 메히크틀리(Mexictli)의 이름을 따서 Mexico라 불렀다. 영어로 읽으면 멕시코이다.

1820년대 노바이스파니아 식민지가 본국에서 독립하여 멕시코 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이 멕시코 공화국으로 되고 수도는 멕시코 시티로 불리게 되었다.




코스타리카(Costa Rica) ‘부유한 해안’


메소아메리카의 공화국. 스페인어의 코스타 ‘해안’과 리카 ‘부유한’을 합성한 지명. 이 지명은 1502년 콜럼버스가 여기에 상륙하여 코스타델오로(Costa del Oro) '황금의 해안‘이라 이름붙인 데서 유래한다. 콜럼버스가 본 인디언은 황금을 가지고 있어서 이 지역은 황금의 산지라 생각하고 이와 같이 이름을 붙인 것이었으나 이 황금은 다른 지역의 것이었다. 황금해안이란 이름은 ’풍부함‘을 연상하게 하고 식민지로 되자 코스타리카 ’부유한 해안‘이란 지명을 낳아 카리브해 서안지방의 광역지명으로 되었다. 19세기에 이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국가가 형성되고 코스타리카로 부르고 있다.




트리니다드 토바고(Trinidad and Tobago) ‘성령강림절의 첫 번째 일요일과 토바고’


메소아메리카의 조그만 섬 나라 공화국. 중심 섬은 트리니다드 섬. 이 섬 이름의 어원은 다음과 같다. 1498년 3회째 항해에 나선 콜럼버스는 성령강림절의 첫 번째 일요일에 이 섬을 발견하였다. 이날은 스페인어로 트리니다드로 불리기 때문에 섬도 트리나다드섬이라 명명했다. 또한 이 지명이 선택된 또 하나의 이유는 섬의 지형때문이라고 한다. 콜럼버스가 섬을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세 개의 봉우리가 보여 세 개의 섬인 것 같은데, 가까이에 이르면 하나의 섬이라는 것이다. 이는 삼위일체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트리니다드 ‘삼위일체와 강령절 첫 번째 일요일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26년 트리니다드 섬은 토바고 섬 등 다섯 개의 섬과 함께 석유를 자원으로서 독립하고 공화국으로 되었다.




남아메리카



에콰도르(Ecuador) '적도‘


남미의 공화국. 15세기말 이 지방은 잉카제국령이었고 1532년 피사로의 스페인군이 잉카제국을 멸망시키고부터 300여년의 시간동안 스페인 식민지였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다른 식민지와는 격리된 상태에 있어서 독립지향이 강하였다. 1830년에 독립하여 에콰도르공화국으로 불렀다. 에콰도르는 스페인어로 적도를 의미하고 국토가 적도에 걸치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파라과이 ‘파라과이 강’


남미의 공화국. 파라과이는 1811년까지 스페인의 식민지 지방인데 파라과이천 유역지방을 중심으로 독립하여, 강 이름을 따서 파라과이공화국이라 불렀다. 파라과이 강의 어원은 인디언어 para '물, 강‘과 guay ’샘, 강’이 합쳐진 것이다.

우루과이라는 나라 이름에서도 과이(강)가 등장한다. ‘(우루)과이강 동쪽 지방’이라는 의미이다.




아르헨티나(Argentina) ‘은의 나라’ 또는 ‘라플라타강의 나라’


남미의 공화국. 1526년 이탈리인 탐험가 세바스찬 가보트가 남미 대륙을 남하하는 대하천을 답사하고 라플라타강(Rio de la Plata) '은의 강‘이라 부렸다. 이것은 그가 탐험 중에 만난 인디언이 그의 소지품과 은을 교환했다고 한데서 유래한 것인데 카보트는 이 유역에서 은이 생산된다고 추정하고 ’은의 강‘이라 불렀던 것이다(실제로는 은의 산지는 아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고 이 하천 연안의 비옥한 대초원은 스페인령 라플라타 식민지로 되고 많은 이주자를 맞이하게 된다.

1810년 식민지에 대한 스페인 본국의 착취에 반대해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1826년에는 독립국이 탄생하였다. 새로운 나라 이름에는 옛 이름 라플라타 ‘은’을 대신하여 다른 스페인어 형용사 Argentina ‘은의’를 사용하였다. 현재 이름 아르헨틴은 이것을 영어화한 것으로 직역하면 ‘은의(나라)’인데 내용적으로는 ‘라플라타 강의 나라’를 의미한다.




브라질(Brazil) '붉은 나무‘


남미의 공화국. 붉은 색 염료의 원료목인 브라질 나무에서 나온 지명. 포르투갈인이 이 나라의 한 지방에 상륙했을 때, 브라질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새빨간 붉은 색을 띠고 있던 이 나무를 보고서 브라질 ‘붉은 나무’(포르투갈어의 brassa '붉게 타오르는‘에서 온 말)로 이름 붙였다. 곧 이것이 지명으로 되어 식민지명으로 되었고 나라 이름으로 되었다.




아프리카



튀니지 - 튀니스(Tunis)시 '타니트흐신‘


아프리카 대륙 북부 튀니지 공화국의 수도. 이 도시는 기원전 수세기에 페니키아인에 의해서 건설되어 카르타고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다. ‘튀니스’의 어원은 이 도시에서 제사지내어지던 이 도시의 수호신인 페니키아의 신 타니트흐(Tanitkh)이다. 도시의 오래된 이름은 타니트라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현재의 이름 튀니스로 되었다.

국명 튀니지는 이 튀니스에서 만들어졌다. 튀니스에 라틴어의 지명 접미사 이아(-ia)를 붙여 튀니지로 되어 ‘튀니스시(를 중심으로 하는) 나라’의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1958년에 독립하였다.




코트디부아르 ‘상아 해안’


서아프리카의 공화국. 이 지명은 상아해안을 의미하고 영어로 표기하면 Coast of Ivory이다(Coast ‘해안’과 Ivory ‘상아’의 합성) 15세기경부터 포르투갈인이 내항하여 상아 교역을 했기 때문에 이 해안지방은 상아해안으로 불려졌다. 20세기 초두에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 편입되어 1960년에 공화국으로 되었다. 식민지 시절 경험 때문에 프랑스어의 국명을 정식명칭으로 되었다.




가나(Ghana) '가나 제국‘


영국 식민지 시대에 황금해안으로 불렸던 아프리카 공화국. 가나는 독립하여 4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서해안에서 번영한 강대한 흑인 제국 가나의 이름을 새로운 나라 이름으로 하였다. 고대 가나는 이 황금해안과는 떨어진 지방에 영토가 있었고 부족적으로도 관계가 없었지만 독립운동의 지도자 당쿠아가 이것을 새로운 나라의 이름으로 할 것을 강하게 제창하였기 때문에 국명으로 되었다. 고대 가나의 의미는 명확치 않다.




토고(Togo) '토고 호(湖)‘


서아프리카의 공화국. 여기에 있는 토고호에 따라 붙여진 지명이다. 토고의 어원은 밝혀져 있지 않다.




앙골라(Angola) '응골라 왕국‘


중앙 아프리카의 공화국. 1482년 포르쿠갈인 디에고 카오가 콩고강 하구 지방에 도착, 이 지방에 있었던 흑인 왕국 반투 응골라(Bantu Ngola) 즉 ‘반투족 응골라’의 응골라를 이 지방의 지명으로 하였다. 응골라는 왕의 칭호였고 그 영토를 의미하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응골라 왕국은 포르투갈과 대등한 국교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곧 식민지화되고 1559년에 포르투갈의 초대 총독이 부임한다. 지명 응골라도 포르투갈어화하여 앙골라로 되고 하구 지방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식민지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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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철학함의 민주주의

교수신문(06. 06. 16)에서 노마디즘 논쟁의 '마지막'이 될 거 같은 홍윤기 교수의 반론문을 옮겨놓는다. 물론 이정우 철학 아카데미 대표의 반론('노마디즘 논쟁 일지' 참조)에 대한 재반론이다. 어쩌다 이 논쟁을 옮겨놓게 되었는데, 이렇게 '허드렛일'이 많아질 줄은 몰랐다. 어쨌거나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다행스럽다(강조는 모두 나의 것이 아니라 필자의 것이다).

-천규석 선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이다>에 관한 <황해문화> 서평에서 내가 비판한 것에 이정우 씨가 반론하고 내가 다시 거기에 반론하라는 ‘교수신문’의 요청을 받아들였을 때 나는 내심 두 가지를 기대했었다. 그 첫 번째는 “불어 원서로 읽지도 못하는” 터에 “학문적으로 미숙한” 대학원생의 번역본만 읽고 자꾸 세간에서 들뢰즈/가타리를 오해하거나 왜곡한다고 이 대표가 불평하는데, 본인은 그 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한 번 들어보자는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지난번 글(비평, 401호)에서 이미 나는 그의 원전 또는 번역본 독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원전에 입각해서’ 근거를 밝혔다. 그런데 나에 대한 재반론에서(402호, 5면) “내용/표현, 실체/형식을 도식한 (들뢰즈/가타리의) 그림”을 잘못 이해에서 자기에게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면서 하는 얘기는 또 다시 나의 지적 호기심을 저버렸다.

 

 

 

 

‘가로줄’의 있고 없음의 차이에 대하여
-우선 지난 번 쟁점은 들뢰즈/가타리가 “매끈매끈한 공간”, “줄줄 홈패인 공간”, “숭숭 구멍난 공간”이라고 구분한 것들 사이의 차이가 이 씨의 주장대로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이렇게 되면 이것들 사이의 구분은 ‘개념적’ 구분이 아니게 된다) 아니면 나의 생각대로 ‘질적 대립’까지 함축하는 각기 다른 실체를 의미하는지 여부였다. 이번에 제시된 이 씨의 의견에 따르면, “들뢰즈/가타리에게 ‘내용의 실체와 형식’, ‘표현의 실체와 형식’은 있어도 ‘실체의 내용과 표현’, ‘형식의 내용과 표현’ 같은 것은 없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의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며”, “내용과 표현이 각각 어떤 것, 무엇인데”, 이 씨가 보기에 나는 ― 그의 뜻을 정확히 이해했다면 ― ‘그 어떤 실체’(X) 하나를 먼저 상정하고 나서 ‘그 X’의 내용과 표현, ‘그 형식’의 내용과 표현이라고 읽어 “그림의 가로를 먼저 읽고 세로를 읽어야 하는데, 그것을 거꾸로 읽어” 자신으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내가 ‘실체’를 그 어떤 독립적 존재물로 이해했다고 ― 내가 보기에 ― “상상/억측”하고 있다.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 지난 번(401호) 내가 어떻게 얘기했는지 상기해 보자. 이 씨가 잘 읽었다고 자처하는 그림을 두고 나는 “누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들뢰즈/가타리 텍스트의 이해가 문제된다면 거기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이라는 ‘표현’은, 그 누구도 아닌 들뢰즈/가타리 자신에 의해,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단정적으로 연관지어져 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들뢰즈/가타리 자신은 서로 성격이 차이나는 공간들 서로 구별되는 삶의 방식의 ‘실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고 첨언하였다.(강조는 이번에 가한 것임) 이 씨는 나의 이 문구 중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라는 구절을 따로 떼어 ‘(어떤) 실체가 있어 그 실체가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한다’고 풀어읽은 것이다.

-사실 나는 당시 원전의 도식을 옮길 때 원저자들이 본래는 긋지 않았던 가로줄을 두 줄 그어 넣어 “내용”과 “표현”의 ‘실체적’/‘형식(태)적’ 차이를 부각시키려고 의도했었다. 만약 이정우 씨가 내 그림을 유심히 보았다면 원전의 도식 하나도 제대로 베끼지 못했냐며 실소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파안대소를 했을 텐데 그렇지는 않은 것 보니 내가 그려 넣은 두 개의 가로줄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파안대소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잠깐만 참아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브라이언 마쑤미의 영역본(416쪽)도 불어 원전의 도식을 나처럼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나와 마쑤미의 이 한미합작 그림에 대해 두번 파안대소하겠다면 못 말리겠지만.)

-자 그럼, 나와 마쑤미가 가공한 위의 도식을 보면서 원전의 아래 도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이 도식에 붙은 공리Ⅲ에서 원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유목적 전쟁기계의 형식(형태)으로 표현된 것’의 ‘내용’은 ‘순회성 야금술의 형식(형태)을 가진 것’인데, 바로 이 유목적 전쟁기계의 형태는 순회성 야금술의 형태라는 내용의 “표현 형태로서”(comme la forme d'expression) 존립하고, 바로 그런 표현-내용 관계로 ‘상호연관’돼(correative)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상호연관되어 있는 내용과 표현은 (오른쪽 도식에서 따로 부각시킨 대로) 그 ‘실체’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실존 방식의 표현과 그 내용은 “상호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아마 이 점에서 이정우 씨가 공간의 차이를 정도의 차이라고 단정한 것 같은데), 바로 그 내용과 표현이 각기 자기 실체를 가진다는 것이다.(이 씨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문제는 ‘내용’과 ‘표현’이 각기 그 실체와 형식(태)에서 질적으로 차이날 정도로 통째로 개념적으로 구분되고(그래서 왼쪽의 본래 그림에는 일체 가로줄 없이 세로줄만 있다), 그에 따라 당연히 ‘실체’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공간으로 포착된다는 것이다(그래서 그 부분을 주목하라고 내가 의도적으로 가로줄을 그어 실체란과 형식(형태)란을 구분했다). 따라서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와 ― 지난번에는 생략한 구절이지만― “매끈매끈한 공간”을 “표현”으로 하는 “실체”는 ‘실체’라는 글자의 기표로서는 일치하지만 그것의 기의는 질적으로 다르다.(결국 이 씨는 ‘내’가 그은 가로선만 봤지, 그가 숭모하는 원저자들이 그은 세로선은 전혀 보지 못했고 그 의미도 몰랐다.)

실체는 그냥 질료가 아닌 “형태지어진 질료”
-그럼 그 질적으로 다른 그 기의는 무엇인가. 이 점은 들뢰즈/가타리가 유목론(nomadology)을 특징적으로 부각시키려는 개념구도와 전략적으로 연관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끈매끈한 공간으로 ‘표현’되는 것은 유목적 전쟁기계와 연관시키고, 그 ‘내용’인 숭숭 구멍난 공간(이것은 광산 갱도의 비유이다)은 대장장이와 연관시킴으로써 줄줄 홈패인 공간과 연관된 정주민의 생활양식을 질적으로 추상화시키는 추론과정을 밟아간다. 그것은 곧 ‘관념적 차원에서’ 정주민적 생활양식으로부터의 탈주선을 닦는 관념적 작업, 즉 탈영토화의 철학적 전략과 바로 연결된다. 문제는 이런 철학전략이 영토성 해체의 전략으로서의 실천적 효과가 의문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정우 씨는 왜 들뢰즈/가타리가 자신들의 그림에서 세로선만 그어 내용/표현을 엄격히 단절시키면서 그와 동시에 그 두 공간의 실체까지 구분하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두 공간의 차이가 단지 ‘정도’ 차이라는 소리만 계속 되풀이하는가. 나는 이번에 비로소 그가 들뢰즈/가타리의 실체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이 씨는 “‘실체’란 어떤 것, 무엇이 아니라 어떤 것의 질료/물질을 뜻한다. ‘형식’은 어떤 것의 구조를 뜻한다”고 얘기하는데, 실체에 대한 이런 식의 허술한 진술은 그가 과연 원전의 관건개념을 제대로 숙지했는지 의심하게 만들어 나로 하여금 失笑가 아니라 신笑를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가 숙독하라고 권한 면들 바로 앞에서(원전 55쪽; 국역본 88쪽) 들뢰즈/가타리는 “실체들(les substance)이란 형태지어진 질료들(matieres formee)에 다름 아니다”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실체란 “어떤 것”의 질료들이 아니라 ‘특정 형(식)태를 가진’ 질료들이다. 따라서 그 형태가 무엇이냐에 따라 “영토성 및 영토화 및 그것들의 정도”와 그와 대립되는 “탈영토화”와 그 정도가 관련된다. 따라서 실체가 다른 것은 단지 양적이거나 경험적 정도(degree)가 다를 뿐아니라 (탈)영토의 구획이나 질적 상태가 달라질 정도로 구별되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에서 “전쟁기계는 전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단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시비하지 않겠다.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전쟁은 전쟁기계의 조건도 목적도 아니지만, 그것의 필수적 동반물이거나 보완물”이라고(원전 520쪽; 국역본 800쪽) 규정했다는 것만 구차하게 상기시켜주겠다. 결국 나는 두 번에 걸친 원전 놀음에서 그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의 허술한 오독과 억측을 일일이 쫓아다니는 일에 더 이상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정우 씨를 비판하게 된 일차적 동기는 이렇게 원전을 두고 그와 지적 놀음을 하자는 데 있지 않았다.

“공적 사과 없으면 더 이상 논쟁 않겠다”
-나는 그가 천규석 선생의 책을 두고 “무지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라고 몰아붙이면서 철학의 공론장과 민주주의적 참여권을 오염시키는 온갖 인신공격을 가하는 것에 분노해서 이정우 비판에 나섰다. 그러나 나는 그가 최소한 유감을 표시했으면 하는 두 번째 기대를 전혀 바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반박을 꼬박꼬박 챙기면서도 그는 “설사 내가 틀렸다 해도 ‘사기극’이 무슨 말인가. 논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강조 필자)라고 역정을 낸다. 그럼 되물어보자. “설사 천규석 선생이 틀렸더라도 ‘무지’니 ‘지적 몰이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무례한 모욕인가?”

-이정우 씨가 그렇게 자신에게 돌아올 예의를 챙기는 사람이라면 한 가지 요구하겠다. 그가 먼저 철학의 공론장을 오염시킨 자신의 무례와 불손함을 공적으로 사과하라. 그런 “최소한의 예의”조차 표시하지 않는다면 나는 논쟁을 포함해 더 이상 그와 일체의 학문적, 인간적 교류를 하지 않을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번 사단이 ‘철학함의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인간적 충정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06. 0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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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노가다도 파업한다.

오늘 한 일...

출근길에 10년 넘은 자동차 수리를 맡겼더니 엔진오일 통에 금이갔다고 한다.현재 수리중.비용 ㅠㅠ

회사 왔는데 사람들이 별로 없다.직능단체 쪽 연합체육대회가 있다고 다들 그거 준비하고 나갔다.

나는 그쪽 직능 단체 소속이 아니라서 갈 이유가 없다.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는 <내가 출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곧 리뷰쓰겠지만 별 다섯이다.)를 조금 보다가...책에 나오는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전문을 읽어 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인터넷에서 <조선혁명선언> 전문을 찾아서 읽었다.인터넷 조금 보다가 신문을 읽었다

.이헌재 론스타 뇌물 수수 조사,북한 미사일 발사 가능 미,일 긴장.... 그리고 이 기사도 읽었다.

노가다도 파업한다.할만하면 해야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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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 너무 힘들어” 1000명 목숨같은 일당 포기
“평당 1천만원 시대에 수입 10년전보다 되레 줄어”
한겨레 박영률 기자
사상초유 ‘노가다 파업’ 보름째 계속

건설노동자 문강호(45·대구시 달서구 감삼동·사진)씨는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산하 대구경북지역건설노조 조합원 1천여명과 함께 지난 1일부터 보름째 파업을 벌이고 있다.

이른바 ‘노가다’(토목건축분야 건설일용노동자)들이 목숨같은 일당을 포기하고 사상초유의 대규모 파업에 나선 것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다. 경력 28년의 베테랑 형틀목수(집이나 아파트를 지을때 콘크리트를 부을 거푸집을 만드는 일)인 문씨가 받는 하루 일당은 9만~10만원. 동절기나 비올 때 등 일거리가 없는 날을 빼면 한달 평균 120만~150만원에 불과하다. 그나마 ‘쓰메끼리’(유보임금) 관행 때문에 1~2달씩 월급을 미뤄 주고 부도가 나던지 십장이 돈을 들고 튀면 받을 길이 막막해 진다. 다단계 하청도 판을 쳐 몇단계를 거치다 보면 일당이 몇만원씩 더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전국에서 한해 800명이 공사현장에서 죽어가고 2만명이 재해로 다치는 상황에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산재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공상처리되면 다행이다. 일부 업체에서는 산재책임을 시공참여계약서를 통해 인력 동원하는 십장에게 돌린다.

중3, 중1 두 아이는 커가는데 줄곧 월세집 신세다. 안주값을 아끼려 슈퍼에서 산 900원짜리 깡소주로 동료들과 힘든 노동의 피로를 씻지만 외환위기 당시 진 빚은 아직도 700만원이 남았다. 그는 “평당 1천만원이 넘는 아파트 분양금은 누가 챙기는지 한여름 지옥같은 작업장에서 검은 작업복이 저녁이면 소금땀에 하얗게 변하도록 일을 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답답해 했다.

건설노조는 물가와 다른 직종의 임금은 뛰는데 ‘건설노동자’임금은 10년 전보다 오히려 내려가는 추세라고 밝혔다. 특히 대구경북지역에선 외환위기 이후 지역 건설업체가 줄도산하고 들어온 외지 건설업체들이 외지인력들을 데려오면서 인력공급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게다가 기업체에서 정리해고된 인력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넘쳐나면서 임금까지 떨어지자 더이상 참지못한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현재 사상초유의 ‘건설 노가다 파업’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은 800~1000여명, 갈수록 참여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노조쪽은 밝혔다. 이로 인해 대구지역 아파트와 주상복합건물 공사장등 38곳의 작업이 중단됐다. 이들은 △적정임금보장 △유보임금(쓰메끼리) 근절 △불법 다단계 하도급 근절 △4대 사회보험 적용 △산업안전보건법 준수 등을 내걸었다. 협상파트너인 전문건설업체 쪽은 “불법파업을 풀어야 협상에 임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이다 파업이 장기화되자 최근에야 교섭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문씨는 “파업이 시작되자 당국은 우리를 구석으로 몰아부쳤고 언론은 외면했다”며 “하지만 파업 동안 나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배웠고 이제 아무런 성과도 없이 파업을 끝낼 순 없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대구/글·사진 박영률 기자 ylp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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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퍼온글] 귄터 그라스와의 대담

귄터 그라스와의 대담


김누리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김누리:주제를 세 가지로 나누고 이야기를 진행했으면 합니다. 첫째는 당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것이고요, 둘째는 당신이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입장을 개진한 독일 통일과 관련된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이른바 "세계화"라는 말로 집약되는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것입니다. 우선 당신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지요. 당신은 1999년 20세기의 마지막 노벨상을 수상하셨습니다. 노벨상 수상 이후 당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귄터 그라스:저는 여전히 예전과 똑같은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노벨상을 받고 나서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중엔 아주 기발한 선물도 많았어요. 특히 파이프를 세 개나 선물 받은 것이 그렇지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독일에선 모든 것이 잘 조직되어 있지 않습니까. 물론 파이프 끽연자 클럽도 있지요. 파이프 선물은 각기 다른 곳에서 왔는데요, 매번 편지가 한 통씩 동봉되어 있었어요. 첫 문장은 대체로 짧았습니다. [노벨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이런 식이지요. 편지를 읽어 보면 이 사람들이 제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요. 두 번째 문장은 조금 더 길어요. [당신이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사람으로서 요즘처럼 끽연자들에게 힘겨운 시절에도 여전히 파이프를 물고 텔레비전에 등장하실 용기를 보여 주신 데 대해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변화라는 것이 그저 이런 종류의 것이라는 겁니다. 처음 얼마간은 좀 힘들었어요. 그래서 꾀를 냈지요. 저는 직업이 여럿이지 않습니까. 글쓰기를 당분간 옆으로 밀어 두고 첫해 동안은 테라코타만, 그러니까 조각일만 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주위가 잠잠해지더군요. 그래서 요즘엔 다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김:이번 질문은 한국문학번역원에 있는 제 친구가 부탁한 겁니다. 한국에도 탁월한 재능을 지닌 작가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아직도 심심찮게 밀리언셀러가 나올 정도로 출판시장 또한 활력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여전히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가 없습니다.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해 보면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노벨상이란 것이 국가에서 주도할 목표일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국가가 무언가를 투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문학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번역을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던가, 번역작품을 해외에 알리기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던가, 그런 일들을 돕는다는 뜻에서요. 한국문학이 세계에 알려지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 문학 인프라가 시급히 마련되어야 할까요?


그라스:제가 실제로 경험한 사례를 들어 이야기해 보지요. 저의 책의 번역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저의 작품은 비교적 일찌감치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양철북』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때부터 저는 오역이나 번역하지 않고 뛰어넘은 부분 등에 대한 불평을 자주 들었습니다. 물론 저도 화가 났지요. 그래서 저는 혼자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내 책을 출판한 독일 출판사들은 내 책이 번역되면 이득을 얻는데, 그들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무엇을 했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넙치』 때부터―그러니까 70년대 중반이지요―제 책을 내는 출판사에게 그때까지는 전례가 없던 것을 강하게 요구했지요. 즉, 제 책이 완성될 때마다 출판사와 독점계약자가 여비를 부담하여 작가와 번역자들의 만남을 주선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예를 들면 『나의 세기』를 출판할 때는 한국측 번역자인 안삼환 교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임은 작가와 번역자의 관계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번역자들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한국 번역자와 중국 번역자 사이에 앉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어떤 언어로 대화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두 번역자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의견이 교환되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번역자들이나, 슬라브어나 로만어를 쓰는 번역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서로가 가지고 있던 번역상의 난점들을 상호비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와 같은 일들은 매우 유용합니다. 반드시 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독일에는 네덜란드와의 국경지대에 번역을 지원하는 기구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기구는 꼭 필요하고, 아주 중요합니다. 자기 나라의 번역작품을 출판할 출판사가 독일에 있는지 없는지도 우선적으로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예들 들면 저의 작품을 내는 슈타이들 출판사는 아이슬란드문학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할도르락스네스의 작품뿐만 아니라, 요즘의 젊은 아이슬란드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번역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고, 또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바겐바하 출판사처럼 좀더 작은 출판사는 예를 들면 이탈리아문학에 집중하고 있고, 한자 출판사는 폴란드문학에 중점을 두고 있지요. 한국문학을 독일에 소개하기 위해서는 내용상 한국에 유익하면서도 번역에 적합한 작품, 그러면서도 국경을 뛰어넘어 독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작품이 있음을 인지하도록 출판사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김:일례로 울리히 야니츠키가 실무책임을 맡고 있는 "베를린문학콜로키엄(LCB:Literarisches Colloquium Berlin)" 같은 기구도 한국 작가들에게 세계문학에 대한 안목을 넓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라스: "베를린문학콜로키엄"은 전 세계 작가들의 교류를 돕고 이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요한 기구입니다.


김:중요한 한국작가를 세계에 알리는 데도 효과적인 통로가 되겠지요. 이제 제가 특별히 개인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를 묻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의 대표작 『양철북』에 대해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저는 이 작품이야말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기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논문을 쓰면서 저는 이 작품이 지닌 엄청난 다의성 때문에 때로는 당황하고 때로는 경탄했습니다. 어떻게 문장 하나하나가 이렇게 수많은 의미를 지니고, 다채로운 빛깔을 띨 수 있을까 하고요. 해석의 가능성 또한 무궁무진합니다. 오죽하면 클라우스 바겐바하가 [해석에 적대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렸겠습니까.
 
그라스:엔첸스베르거는 이 소설이 출판됐을 때 [이제 독문학자들은 한 세기 내내 이 소설과 악전고투할 것이다]라고 예언했지요.
 
김:저는 이 소설에 우의(Allegorie)라는 개념으로 접근했습니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나름의 개념으로 해석을 시도했지요. 예를 들면 엘리엇에게서 빌려 온 객관적 상호연관(objektive Korrelate)이라든가, 비유(Bild)라든가….
 
그라스:이 작품의 해석과 관련된 책만으로도 도서관 하나를 몽땅 채울 수 있을 겁니다….
 
김:『양철북』은 그 전체가 알레고리 소설이며, 바로 이점 때문에 이해하기가 대단히 난해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독일문화나 20세기 독일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독자에게는 대단히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스카는 파괴적인 시대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이면서, 동시에 독일의 문화사 전체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라스:『양철북』은 전통이란 측면에서 보면 유럽소설의 전통, 즉 악동소설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악동소설의 주인공은 특수한 성격을 지니면서 늘 국외자적 입장에 선다는 점에서 항상 가공적인 인물(Kunstfigur)이었습니다. 돈 키호테가 그렇고, 그후엔 캔디드가 그렇습니다. 이러한 전통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알프레드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주인공 프란츠 비버코프라던가, 심지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 나오는 레오폴드 블룸도 제가 보기에는 악동적 인물입니다.


김:특수한 개성을 지닌 문제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작가가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가공적인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하시는 말씀인가요?
 
그라스:가공적인 인물로서도 그러하지만, 또한 화경(火鏡)과 같은 인물로서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인물 속에서 가능한 모든 것이 깨어지고 잘라지고 불타 버립니다. 현실의 인물들은 할 수 없는 일을 그런 국외자적 인물은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특성상 특정한 시대와 환경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때론 오목거울로, 때론 볼록거울로, 깨어지고 산산이 부서진 채로 말입니다. 도처에 이러한 계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계기들을 잡아내는 것은 가공적인 인물로서만 가능합니다. 가공적인 인물이라는 말은 늘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문학은, 특히 악동소설은 그러한 인물들을 가지고, 그러한 인물들의 쌍을 가지고 작업합니다. 물론 산초 판사는 돈 키호테의 일부이지요. 혹은 악동소설의 아주 흥미로운 변형형태로서 플로베르의 후기소설을 예로 삼더라도 역시 두 인물이 짝을 이루지요. 저는 이것을 저의 마지막 서사소설 『광야』에서 폰티와 호프탈러라는 인물을 통해 시도해 보았습니다. 폰티는 자신을 완전히 폰타네와 동일시하는 철두철미 가공적인 인물이고, 호프탈러는 요아힘 셰틀리히의 소설 『탈호퍼』에서 따온 인물로 영원한 스파이입니다. 두 인물은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쌍을 이룹니다.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처럼 말입니다. 또 샤를 드 코스터의 『틸 울렌슈피겔』도 그렇습니다. 원래 고 프랑스어로 쓰여진 이 소설에서 이 플랑드르 출신의 작가는 플랑드르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세기 초 울렌슈피겔이라는 인물을 대 스페인전쟁의 무대에 끼워 넣는데, 울렌슈피겔의 곁에도 람 괴착이라는 인물이 있어, 이 둘 또한 불가분의 한 쌍을 이루게 됩니다. 대개 한쪽은 좀더 진지한 인물이고, 다른 쪽은 희극적이고 사실적인 인물입니다. 돈 키호테가 지녔던 이상주의적인 생각들을 산초 판사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디드로의 『숙명론자 자크』도 주인­하인 관계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도 주인이 보다 고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하인이 주인보다 더 현실적이고 영리하지요.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짝짓기입니다. 하지만 물론 『양철북』의 오스카 마체라트처럼 독립적인 악동인물들도 있습니다.


김:당신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가공적인 인물이지요.


그라스:예들 들면 『개들의 시대』에 나오는 마테른과 암셀도 이러한 가공적인 인물쌍입니다.
 
김: 그러나 예외적이긴 해도 당신의 작품에서는 사뭇 강한 진정성을 지닌 현실적인 인물들도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국부마취를 당하고』나 『달팽이의 일기』의 경우 말입니다. 특히 『국부마취를 당하고』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소설입니다만, 독일에서는 의외로 혹평을 받았습니다. 특히 독일 비평계의 <교황>이라 불리며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로부터….
 
그라스: 라니츠키의 '해악적 명성'을 한국에까지 전파하지는 맙시다.(웃음)


김:그러나 이 작품은 미국에서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지요.
 
그라스:미국이란 말이 나온 김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지요. 『양철북』은 독일에서 1959년 가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후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저는 독일의 유명한 출판인이었던 쿠르트 볼프한테서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쿠르트 볼프는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젊은 에른스트 로볼트와 함께 출판사를 하나 세웠고, 처음으로 카프카의 소설을 출판한 인물입니다. 그것도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말입니다! 1920년대에 그 출판사는 현대문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작지만 유명한 출판사였습니다. 볼프는 1933년에 나치가 권력을 잡자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지요. 제가 그의 편지를 받았던 때는 그가 미국의 랜덤 하우스 판테온 북스에서 활동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저를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우리는 취리히에서 만났습니다. 한 스위스 호텔에서였지요. 저는 무척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그 유명한 출판인을 만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미국 독자들이 당신의 소설 『양철북』에 흥미를 느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책을 번역·출판할까 고심중인데요.]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양철북』이 미국독자들의 흥미를 끌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소설의 무대는 변방입니다. 단치히라는 도시도 아니고, 그 도시의 교외가 주된 무대지요. 『양철북』은 완전히 이 작은 세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대화는 사투리고, 언어는 일상 독일어로 쓰여 있습니다. 미국은 고사하고 바이에른에서라도 읽혀진다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하더군요. [더 이상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당신에게 설득당했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그는 굉장한 말을 했습니다. [모든 위대한 문학은 변방에서 나옵니다] 라고요. 이 말은 거칠지만 아주 중요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읽히는 책을 쓰기 위해서 반드시 대도시나 거창한 사건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인식, 모든 것은 어떤 곳에서도 온전히 반영될 수 있다는 인식 말입니다. 제가 만약 한국작가라면, 남한과 북한이 분단되어 있는 한국작가라면, 거기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한국은 문학을 위해 운명적으로 예정된 나라입니다!
 
김:당신은 독일에서 수많은 혁신적인 제도와 관행을 만들어 냈습니다. 예를 들면 앞서 말씀하신 번역자 모임이라든가, 작가 노조라든가 하는 것이 모두 당신의 발의에 의해 생겨난 새로운 제도요 관행입니다. 기성의 것을 뒤집는 획기적 인식이라는 면에서 특별히 저의 관심을 끈 것은 당신이 또한 전통적인 작가상을 매우 급진적으로 전복시켰다는 점입니다. 당신은 이른바 "참여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해 매우 회의적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글과 연설에서 언급하셨지요. 그러면서도 독일현대사의 정치적 굽이마다 당신만큼 적극적으로 참여한 작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라스: "참여문학"이라는 개념은 저를 화나게 합니다. 저에게 있어 "참여작가"라는 말은 "흰 백마"라는 말과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문학은 그 자체가 "참여적"입니다. 상아탑에 숨어 들어가 세상과 현실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자 하지 않는 작가조차도 나름대로 "참여(engagiert)"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방향이 다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작가도 부정을 통해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문학이란, 그것이 어쨌든 쓸모가 있는 것이라면, 언제나 세계로의 향함 혹은 세계로부터의 등돌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참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작가라는 말 앞에 참여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 저의 문학관도 여러 복수의 견해 중 하나일 뿐입니다. 참여문학에 대한 저의 생각은 50년대 중반에 아주 젊은 작가로서 47그룹에 초대되어 겪은 체험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후 저는 지속적으로 동료작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사회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계시자 연하는 작가들의 과장된 몸짓, 저는 한 번도 이런 태도를 취한 적이 없고,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태도를 거부합니다. 저는 동료작가들과, 또한 저와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진 작가들, 예컨대 그동안 정치적으로 저와 거리가 멀어진 마르틴 발저 같은 작가와도 동료로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동료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유명해질 수 있는 행운과 업적을 가진 소수의 작가들뿐 아니라, 이들만큼 유명해지진 못했지만 전체 문단에 속하는 많은 작가들이 함께 어우러져 문학의 영역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노벨상은 본질적으로 생산적이지 못합니다. 특정작가를 그가 지닌 의미 이상으로 너무도 강렬하게 부각시키니까요. 의미란 다른 많은 사안들로부터 자라나오는 것이지 애오라지 문학의 질로부터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 노벨상을 받지 못한 중요한 작가들의 명단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김:"참여문학"과 관련하여 『달팽이의 일기』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 생각납니다. [시(문학)는 타협을 모르지만, 우리는 타협에 의해 살아간다.] 문학과 현실의 관계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라스:정치적으로 보면 우리는 타협에 의해 살아갑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정신분열적인 상황 속에서 내(작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에는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 예술적 작업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나는 우연히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한 시민으로서 참여합니다. 그러나 예술가보다 시민이 우선입니다. 저는 수십 년에 걸쳐 이것을 실천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시민으로서 참여한다면 그는 다양한 의견이 지배하는 민주사회에서는 여러 이해집단과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도 또한 대개 연정으로 구성되지요. 결국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협 덕분에 살아가는 셈이지요. 그에 반해 미학적, 예술적 결단은 민주주의 이전의 것입니다. 다수결에 따라 이루어지는 예술적 결정은 무미건조한 평균적 작품을 낳을 뿐이겠지요. 문학과 현실은 근본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세계입니다.
 
김:"시민으로서의 작가"라는 작가관 또한 당신이 창출해 낸 수많은 새로운 개념 유형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작가관은 특히 작가를 "민족의 양심"이나 "진리의 고지자"로 보는 독일문학의 전통에서 보면 무척이나 독특한 것이지요.


그라스:이러한 작가관은 종전 직후 몇 년에 걸친 고민과 성찰 끝에 생겨난 것입니다. 어떻게 히틀러 같은 자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을까? 무엇이 바이마르공화국을 붕괴시켰는가? 오늘날 우리는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들로부터 이 물음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시민 세력과 독일민족주의 세력이 나치와 연정을 구성했다는 것, 파퓰리스트정당이 바이마르공화국에 반대했다는 것,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중도성향의 정당들이 공화국을 지켜 내기에는 너무나 허약했다는 등의 설명 말입니다. 이 모든 설명은 나름대로 정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치의 권력장악을 막지 못한 핵심적인 이유는 태생적으로 허약체질인 이 공화국을 지켜 내기 위해 몸을 던진 참여적인 시민들이 바이마르공화국에는 너무도 적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서 제 나름의 작가관에 이른 것입니다.
 
김:이제 좀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독일문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문학비평을 읽었는데요, 여기서 받은 인상은 독일의 문학비평이 문학적 계기에서 쓰여진 경우보다는 상당히 정치적 동기에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문예란은 치밀한 정치적 고려에서 전략적 비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여기엔 역사가 있지요. 프리드리히 지브르크에서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 칼 하인츠 보러를 거쳐 프랑크 쉬르마허에 이르는 이른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군단"이 현대 독일문학비평에 미친 영향을 상기해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들이 독일의 평단을 지배한 결과 대단히 부정적인, 즉 권력 지향적이고 보수적인 비평이 풍미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정한 문학비평"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라스:"진정한 문학비평"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로서는 앵글로색슨 계열의 문학비평을 높이 평가하는 편입니다. 제 책에 대한 비평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지요. 영미비평에서는 비평가들이 독자들에게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스스로 훼방꾼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이 책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가, 즉 우선 작품의 내용을 정확하게 정리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작가가 작품에서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핍니다. 이에 반해 독일의 비평가들은 자신들이 작가에게 소망한 것이 무엇인지를 전면에 내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그것에 맞추어 만족한다거나, 대개는 실망스럽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작가가 비평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독일에서는 이차적인 것이 일차적인 것을 앞지르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그동안 이론들도 많이 나왔지요. 문학의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미술계에서도 마찬가지지요. 화가가 새로운 그림에서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는 더 이상 관심거리라 아닙니다. 전시자가 그것을 어떻게 배치하느냐가 오히려 관심을 끌지요. 전시자, 즉 이차적인 것이 전면에 부각되어 일차적인 것이 되고, 결국 전혀 이차적이지 않은 것이 되지요.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일차적인 것의 시각에서 본 이차적인 것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런 식의 비평을 상당히 신랄하게 공격하는 글이었습니다. 독일비평계의 이러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보면 독일낭만주의, 특히 프리드리히 슐레겔로까지 소급됩니다. 하지만 슐레겔이 했던 것은, 물론 그가 매우 재능 있는 작가이긴 했지만, 그저 그런 비평이 하나의 예술형식이 될 수 있다고 우겨대는 그 순간부터 웃음거리가 되어 버립니다.


김:오늘날 독일의 문학비평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예술형식으로서의 비평이 아니라, 비평이 과장의 예술, 단순화의 예술이 되어 버렸다는 점입니다.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라는 특수한 "현상"을 본다면 이 점은 분명하지요.


그라스:라이히 라니츠키에 대해서는 덧붙일 말이 있습니다. 그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편견이 워낙 강하여, 그 편견에 따라 써대는 것입니다. 본시 그런 글과는 논쟁을 벌일 수 없는 법입니다. 저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을 언급하셨으니 생각납니다만, 『양철북』이 발표되었을 때 이 신문에는 귄터 블뢰커라는 비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소설을 혹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책은 읽었습니다. 그건 느낌으로 알 수 있지요. 그러나 그의 후임자들은 꼭 그렇다고 주장하기 힘들지요.


김:1995년 당신의 소설 『광야』가 출판되었을 때 『슈피겔』은 라이히 라니츠키가 이 소설을 찢는 장면으로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이러한 도발은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대단히 상스러운 것인데요.


그라스:아무튼 『광야』는 살아남았고, 라이히 라니츠키의 명성은 피폐해졌습니다. 라이히 라니츠키에 대해서는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그가 저의 책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책에 대해서 평한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가 공산당원이었던 시절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추종자라는 것, 그러니까 매우 편협한 문학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를 루카치의 아류라고 부릅니다. 그는 사회주의는 내던져 버렸지만, 이 편협한 문학관은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루카치에게서 볼 수 있는 문학관입니다. 루카치를 따라야 높은 수준의 작품이 된다는 것이지요. 결국 그는 하나의 아류에 불과합니다.


김:한국의 문단을 보면 개인적으로 당혹감과 실망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더 이상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쓰는 작가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도처에 사회적 <비참>이 널려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라스:그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독일의 경우도 비슷하지요.


김:그러나 한국처럼 극명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의 최근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신변잡기적인 이야기, 자전적 소재 일색입니다. 시대사 전체의 맥락을 읽는 서사적 안목을 가진 작가를 찾아보기 어렵지요.


그라스:요즘 작가들은 스물다섯이나 서른쯤 되면 자신의 탯줄을 소재로 삼아 글을 쓰지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나이가 되면, 그리고 꼭 그러길 원한다면, 자전적인 이야기를 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자전적인 것을 쓰지 않습니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아주 풍성한 삶을, 모순에 가득 찬 삶을 살았어야 합니다. 독일에서는 젊은 작가들이 너무 일찍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럼으로써 문학적 착시가 생겨나는 겁니다. 문학 작품이 반드시 자신의 이야기를 다룰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이미 책 속에 스며 있으니까요.


김:한국문단에서―또한 독일문단에서―관찰되는 이러한 현상, 즉 사적인 영역에의 집중과 정치와의 결별은 이 시대와, 그러니까 이른바 세계화의 시대와 어떤 연관성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에서는 세계화, 즉 전 세계적 차원에서 고도의 자본집중이 진행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확산되는 이러한 현실을 당신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라스:이러한 현상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편으론 적어도 서구의 의식상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소련이 붕괴한 이후로 19세기, 20세기의 이데올로기 중에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입니다. 그후 자본주의는 자신을 절대화해 왔습니다. 세계화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자기 절대화의 표현에 다름아닙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이미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는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분별도 없이 사물들이 합성되고, 노동이 파괴되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계화란 비합리적인 것이고 그 근본에 있어서는 반자본주의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사이 일군의 자본주의 이론가들도 이 점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광적인 자기 파괴의 과정이고,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만 있다면 그 자체로는 슬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과정입니다. 공산주의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는 올바른 사회적 단초를 가지고 자본주의 체제와 진지하게 경쟁을 벌일 만한 경제형태를 발전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러한 경쟁관계가 여전히 존속되었다면, 자본주의도 생존을 위해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이 사라졌습니다. 자본주의는 이제 아무런 장애도, 아무런 제동장치도 없이 활개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긴 결과가 무엇보다도 소위 세계화입니다. 이제 증권거래소에서 일어나는 일은 노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 지구를 요란하게 뒤덮고 있는 잠재적인 가치들입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인간의 문제는 도외시하지요.
 
김:문학에서 나타나는 사적인 영역, 자전적인 영역에의 집중현상도 세계화라는 새로운 현실과의 연관 속에서 살펴야 하지 않을까요?
 
그라스:물론 그렇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퇴각이지요. 이 거대한 움직임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다는 인식이 이러한 퇴각을 낳은 것입니다. 목가적인 것으로, 특수한 자아로, 자기 주술(呪術)로 퇴각하는 것―이것은 이 개관할 수 없는 거대형식이 낳은 부수적인 현상임에 틀림없습니다.
 
김:또한 시장지배가 압도적인 것이 되어 버린 현실과도 관계가 있겠지요.
 
그라스:아니 시장이란 것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나요?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적인 의미에서 시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쟁관계가 점점 더 작동하지 않으니까요. 존재하는 것은 시장을 지배하는 몇몇 콘체른(Konzern)뿐입니다.
 
김:당신은 노벨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이지만, 또한 독일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도 유명합니다. 이제 당신의 삶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묻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이 지난 50년 동안 사회민주주의자로서 일관된 정치적 입장을 견지해 온 것에 대해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8혁명기에 "신좌파의 기수"였던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나 한때 "공산당원"이었던 마르틴 발저가 이제 착실한 보수주의자로 변신한 모습과 비교해 보면 당신의 정치적 일관성은 단연 돋보입니다. 볼프강 엠머리히 교수도 당신의 일관성에 대해 놀라움을 표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제가 놀라움을 갖는 것은 당신의 이런 일관된 태도가 확신에서라기보다는 회의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그라스:또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지요.
 
김:당신은 이데올로기와 이론에 대해 언제나 회의적인 입장을 보여 왔습니다. 이러한 회의는 다른 면에서 보면 매우 신중한 태도를 가능하게 한 것이기도 하지요. 이를테면 하나의 이데올로기에서 다른 이데올로기로의 급작스런 전향 같은 것을 막아 준 셈이지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회의의 정신이야말로 당신의 일관성을 지켜 준 원천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라스:이 이야기를 하려면 잠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저는 전쟁이 끝났을 때 열일곱 살이었어요. 저는 하나의 이데올로기, 즉 나치즘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성장했지요. 이 모두가 일거에 무너졌습니다. 저는 아주 어린 나이에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요, 이것이 제 경우는 그래도 비교적 쉬웠습니다. 예술가가 되려고 했으니까요. 저는 새로운 방향을 예술의 영역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인 인식의 전환을 위해서는 충분치 못했습니다. 그후 50년대 초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프랑스에서 사르트르와 카뮈 사이에 불붙은 논쟁이 저의 관심을 사로잡았습니다. 얼마 후에 저는 어느 한편의 입장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일찌감치 카뮈의 입장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반이데올로기적 입장입니다. 그것은 특히 그의 짧은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에서 아주 분명하게 표명된 입장입니다. 즉 최후의 목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은 또다시 반이데올로기적인 것입니다. 시시포스가 굴리는 돌은 결코 산 위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 돌은 하나의 짐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속하는 무언가라는 것, 돌이 정상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태도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실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 보지요. 우리 사회는 무언가 잘못되어 있고 개혁이 필요합니다. 많은 투쟁과 타협이 있은 후에 이러한 불의(不義)한 상황을 제거할 개혁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지요. 사람들은 이 개혁 또한 새로운 불의를 낳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챕니다. 예전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에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돌은 벌써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모습입니다. 카뮈는 오랜 세월 전해져 온 옛 신화를 기막히게 새롭게 해석해 냈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시시포스를 행복한 인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합니다. 저는 저의 돌에 매우 만족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것과 바꾸지 않겠습니다.
 
김:소설 『국부마취를 당하고』에서는 [견디기의 몸짓]이라는 말을 하셨는데요. 이것도 시시포스적 맥락에서 보아야 할까요.
 
그라스:『국부마취를 당하고』에서는 세네카적 태도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스토아주의도 그와 유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두산(頭産)』과 『독일인 멸종되다』에서 이러한 입장이 더욱 두드러지지요. 여기서 저는 부분적으로는 패러디로서 시시포스를 다루었습니다.
 
김:그라스 씨, 당신은 노벨상까지 수상한 작가이면서도, 자신을  "조각가"로 소개하기를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또한 화가이고, 젊은 시절에는 심지어 재즈 음악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라스:그래요. 뒤셀도르프 미대에 다닐 때 저는 작은 재즈 밴드를 조직하여 호구지책으로 삼은 적이 있습니다. 멤버는 셋이었는데, 저는 빨래판같이 생긴 타악기를 손가락으로 연주했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막 유럽에 전파된 미국의 딕시랜드 뮤직이었어요. 이 일을 저는 매우 좋아했지요.
 
김:게다가 당신은 빼어난 요리 솜씨로도 유명합니다. 하인리히 뵐은 작가들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그라스가 요리하지 않으면 식사하지 않겠다]라는 농담을 즐겼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지요.
 
그라스:저는 요리하기를 좋아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아주 잘한다고 하더군요.
 
김:그러니까 당신은 작가면서, 조각가요, 화가요, 음악가요, 요리사이기도 합니다. 어떤 평자는 [예술적 재능의 다양성에 있어서 그라스와 필적할 인물을 찾으려면 적어도 200년은 거슬러 내려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거기서 만나게 되는 것은 괴테겠지요. 도대체 이 많은 재주가 어디서 나온 것입니다?
 
그라스:요리에 관해 말하자면, 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음식을 해먹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늘 즐겁게 이 일을 했습니다. 식사를 하는 것, 그러니까 그 최종적인 결과물뿐만 아니라, 물건을 구입하고 하는 그 준비 과정도 즐거웠지요.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적은 돈으로도 맛있는 요리를 해먹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김:요리뿐 아니라, 조각이라든가, 회화라든가….
 
그라스:이렇게 설명을 드리는 것이 좋겠어요. 제 어머니는 남자 형제가 셋 있었어요. 그들은 모두 아주 젊은 나이에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했습니다. 그 중 한 분은 작가가 되고 싶어했어요. 또 한 분은 화가와 무대장식가가, 마지막 한 분은 요리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요. 저의 어머니는 외삼촌 세 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그래서인지 어느새 저는 이 살지 못한 삶을―그분들은 스물둘, 스물셋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제가 대신 살아야 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작은 단편집을 아르투르 크노프라는 가명으로 낸 적이 있습니다. 아르투르 크노프는 바로 작가가 되고 싶어했던 제 외삼촌의 이름입니다. 그런 식으로 저는 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외삼촌이 사후에 작은 문학작품을 내도록 도와준 셈이지요.
 
김: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제 독일 통일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통일과정에서 보여 주신 선견지명은 실로 놀라운 것입니다. 당신이 통일공간에서 제기한 경고와 우려가 통일 이후 10년이 지난 오늘날 거의 모두 그대로 현실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이제 통일의 행보를 막 시작한 한국인들에게 분명 하실 말씀이 있으시겠지요. 독일의 통일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그라스:통일의 전제는 분단된 두 체제가 서로를 존중하며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체제하에서 살고 있는 것이 그들 자신의 책임은 아닙니다. 남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미국의 비호를 받은 독재정권 아래서 살았던 것이 그들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 모두는 지난 세계대전의 결과였습니다. 서로 상대방과 접근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역사에 대해,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그 숱한 지난 삶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독일인들이 소홀히 한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우리는 통합(Einigung)이 되기도 전에 통일(Einheit)되었습니다. 하지만 통합이 통일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통일은 통합의 결과물이어야 합니다. 독일에서는 통합과정이 시작되기도 전에 속전속결로 통일이 문서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은 고려하지도 않았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서독헌법에는 중요한 조항이 있습니다. 헌법 146조가 그것인데요, 이 조항은 독일이 통일될 경우 동서독 국민들에게 새로운 헌법이 제출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항은 무시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지요. 만약 이 조항이 지켜졌다면, 물론 그래도 논쟁과 대립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동독사람들의 삶의 체험과 기대를 이 새로운 헌법에 반영시킬 기회가 주어졌을 겁니다. 그들은 이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소홀히 취급된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않았지만, 경제 분야에서도 엄격하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금이 간 동독의 경제를 일격에 박살내 버렸고―이와 유사한 것이 북한에서도 시도될 것입니다―그 결과 동독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심각한 실업문제와 서독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 모두는 성급한 통일의 부정적인 결과들입니다. 우선 동독의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투자부터 했어야 옳았습니다. 한 가지 역사적인 예를 들어보지요. 이른바 독일의 경제기적을 생각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라인강의 기적"을 루드비히 에어하르트 총리의 공적으로 돌리지만, 이는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노력한 결과입니다. 전후 통화개혁이 있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분명해진 사실은 아직도 완전히 전시물자 생산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폭스바겐이나 잘츠기터, 페바 같은 대기업들이 경쟁을 버텨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루트비히 에어하르트는 즉시 이 기업들을 국유화시켰고, 국가보조금을 통해 회생시킨 다음에야 다시 사유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경우에는 이런 조치가 전혀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김:시간 관계상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은데요. 당신은 노벨상을 수상한 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브르디외와 가진 한 텔레비전 대담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기형화하는 것은 이상과 언어의 전면적인 부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과 언어가 사라진" 오늘의 현실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라스:우리 유럽인들은 계몽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 사람들에게는 평등이나 박애, 정의와 같은 말들이 구닥다리로 들릴 것입니다. 연대라는 개념도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교적 잘 작동하는 사회보장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점차 망가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목도되는 현상입니다. 연대라는 이 개념, 저에게는 전혀 낡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젊은이들에게는 분명 낡은 느낌을 주는 이 개념이야말로 우리가 사회적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전제입니다. 지식인의 역할을 문학의 영역과 관련지어 이야기해 보지요. 작가는 승자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됩니다. 작가가 앉을 곳은 그때그때의 패자들, 전쟁의 패자만이 아니라 경제적 과정, 사회적 과정의 패자들이 앉아 있는 그곳입니다. 승자에겐 옹호자들, 지지자들이 넘치는 법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대중들이야말로 작가에겐 더욱 소중한 존재이지요.
 
김:피에르 부르디외는 당신과의 대화에서 세계화 시대인 오늘날 [신자유주의 정부들의 중요한 능력은 유토피아를 살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라스:유토피아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세계화란 것도 하나의 유토피아에 불과합니다. 끔찍스런 유토피아지요. 우리는 여러 가지 형태의 끔찍스런 유토피아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제게는 영예로운 칭호가 아닙니다. 지식인 또한 제게는 영예로운 호칭이 아니고요. 거짓 이데올로기에 유혹당한 지식인, 하나의 이데올로기에서 다른 이데올로기로 널뛰기를 하는 지식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매우 존경하고 높이 평가하는 빌리 브란트는 이런 맥락에서, 에른스트 블로흐의 말을 빌려, [구체적인 유토피아]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지요.
 
김:한국인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그라스:한국에서는 통일 이전에 통합과정이 상호존중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곳, 특히 독일에서 저질러진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김:대담에 응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대담은 2001년 7월 16일 북부 독일 뤼벡 시 근교의 작은 마을 벨렌도르프에 있는 귄터 그라스의 작업실에서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되었으며, 이중 일부가 2001년 8월 21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다.)  
 


(출처: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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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 / 1927년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태어나 1948년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조각 및 회화 공부를 했고, 1953년 베를린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1955년 『악센트』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으며, 『양철북』 『개들의 시절』 『국부마취를 당하고』 『무당개구리의 울음』 『나의 세기』 등의 소설과 두 권의 시집, 여러 편의 희곡작품을 발표했다. "47그룹상, 독일비평가협회문학상, 바이에른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김누리/ 1960년에 태어나 서울대 독어교육과와 동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한 후, 독일 브레멘대학에서 「귄터 그라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비유나 진정성이냐』 등이, 역서로 『황야의 이리』 등이 있으며, 현재 중앙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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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서평 끝내준다...

 

  "'노빠'는 어떻게 파시즘의 도래를 예고하는가"  

  [화제의 신간] 빌헬름 라히이의 〈파시즘의 대중심리〉


  파시즘 연구의 역사에서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할 책이 새롭게 번역, 출간됐다. 빌헬름 라이히가 쓴 〈파시즘의 대중심리〉(황선길 옮김, 그린비, 2005)가 그것이다. 독일어로 쓰인 초판이 1933년에 출간되었으니까, 독일의 나치당이 급성장하고 집권에 성공한 1930년대 초, 바로 그 현장에서 집필된 것이나 다름없는 책이다. 동시대에 대한 연구가 그로부터 70년 이상 지난 지금에도 고전으로 꼽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 바, 이 책이 갖는 연구사적 가치에 대해선 달리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연구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의 황우석 사태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파시즘이란 용어를 자주 불러들이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가 영웅을 넘어 우상을 만들어냈고, 이제 그것이 무너지면서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함 때문에 비합리적 공황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진단이 분명 지나친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 역시 이 책을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병리적 사회심리와 파시즘
  
  라이히가 강조하듯이, 대중운동의 형태를 띤 파시즘은 반동적인 성격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기득권 질서에 대한 하급 중산층의 반역적 열정이 결합된 급진적 내용이 함께 있다. 초기 파시즘 운동이 보수적으로 타락하는 단계로 접어들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좌파 정당에 대한 혐오, 노동운동에 대한 적대, 유태인에 대한 공격성이다. 사회구성을 우생학의 관점에서 바꿔 보려는 것도 파시즘의 한 특징이며, 여기에 덧붙여 퓌러(Führer)라고 하는, 우리말로는 영웅적 지도자에 대해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자 하는 대중심리가 동원된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파시즘을 과거 독일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나타났던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사태라고 생각한다면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살아있는 파시즘 연구의 총결산자"로 불리는 로버트 팩스턴 교수가 강조하듯이(〈파시즘〉, 조효제 옮김, 교양인, 2004), 파시즘은 민주주의 체제에 내재해 있는 도전이자, 민주주의가 사회적 요구와 갈등을 통합해가는 데 있어서 실패할 때 나타나는 일상적 위험요인이란 점이 강조되어야겠다. 홉스봄을 잇는 차세대 유럽역사 연구자인 마크 매짜와(Mark Mazower) 교수가 〈암흑의 대륙〉(Vintage Book, 1998; 후마니타스 근간)에서 강조했듯이, 파시즘은 당시 프랑스, 영국을 포함 유럽의 중산층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발전모델"로 광범하게 지지를 받았던 대안이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파시즘과 유사한 특징이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다. 한 가지 더 말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귄터 그라스와 피에르 부르디외는 대담에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보수혁명이 진보적 동원의 뉘앙스를 풍기면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역사상 이런 예는 1930년대 파시즘에 이어 두 번째라고 말했다. 지금 정부의 정책기조가 신자유주의라는 보수혁명의 내용을 가지면서도 이런저런 개혁의 수사를 동원해 뭔가 큰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듯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더 주목된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어떻게 파시즘의 징후를 보여주는가
    
  
ⓒ프레시안  
  

  한편으로는 기득권 세력을 공격하는 듯한 외피를 쓰면서도 실제로는 정부 정책의 성격이 민중적 내용과 배치되는 상황에서 그 간격을 상당수 대중들이 진보파에 대한 공격과 황우석 비판자에 대한 공격으로 채우고 있는 현실은 아주 위험하다. 그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은 노무현 지지자들 중 일부가 황우석 사태의 책임을 묻는 비판자들에 대해 보여준 태도이다.
  
  기본적으로 이들이 황우석 교수의 비판자를 대면하는 방식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자들을 대면하는 방식의 복제판에 가깝다. 분명 안티조선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냉전반공의 기득권 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고 노무현 정부의 집권을 가져오는 데 기여했던 이들에게서 점차 두드러진 것은 진보세력에 대한 혐오, 조직 노동운동에 대한 반감, 이데올로기화된 반(反)지역주의, 나아가 핍박받는 지도자와 영웅을 자기 동일시하는 현상이다. 이들에게서 과거와 같은 한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판을 기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파시즘을 사회심리적 현상으로만 이해해서도 안 되고, 한국 사회가 파시즘과 같은 국가 사회체제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한다면 다소 비약일 것이다. 또한 파시즘이란 비판이 오히려 비합리적 논란을 가져오는 부작용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꼭 파시즘이냐 아니냐를 떠나 한국 사회가 지금 민주화의 여러 과제들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왜곡되고, 사회가 발전시켜야 할 공동체적 요소는 더욱 파괴되고, 연대와 공존의 가치들이 약화되면서, 그러는 사이 파시즘과 유사한 병리적 사회현상이 제어되지 않고 우리 사회에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비판적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것이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비합리적이고 공격적이며 파괴적인 열정에 스스로를 내맡기게 되었을까? 이런 질문을 갖는 독자라면 응당 빌헬름 라이히의 이 책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속류적 해석을 경계해야
  
  이 책을 정확히 소개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잘못된 소개는 책에 대한 이해를 돕기는커녕 책으로부터 오히려 멀어지게 하는 부정적 효과를 낳기 쉽다. 아마도 이 책만큼 부적절한 소개 내지 잘못된 독해에 의해 그 가치가 절하된 책도 없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공산당 내부에서 그의 출판물 배부가 금지되고 결국 당에서 축출되었으며, 국제적 방랑생활 끝에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한 감옥에서 사망한 빌헬름 라이히의 삶만큼 이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안타깝게도 이 책에 대한 협애한 이해 방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더 그렇게 보인다.
  
  이 책의 특징을 소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가능할 것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기계적 유물론에 대한 라이히의 비판을 강조할 수도 있고, 그러면서 사회경제적 조건과 역행하는 이데올로기의 운동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발견에 주목할 수도 있으며, 프로이트적 심리학과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연원으로부터 발전한 그의 생체심리학의 구조를 설명하고 이로부터 그가 왜 성정치학과 성경제학에 몰두하게 되었는지 아울러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나아가 이러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구성하는 권위주의적 가족이데올로기, 인종주의, 신비주의, 국가주의 등에 대한 그의 비판적 분석을 요약할 수도 있겠고, 그의 연구를 둘러싼 당시의 논란을 통해 공산당을 비롯한 파시즘 비판세력 안에서의 과도한 도덕적 엄숙주의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고, 이후 그의 책이 미친 연구사적 영향에 대해서도 추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에 대해 후속 연구들이 개진한 여러 비판들을 검토하면서 라이히의 이론과 설명이 갖는 강점과 약점을 균형 있게 따져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라이히에 대한 대중적 소개에서 이런 논의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 책에 대한 속류적 이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책이 파시즘은 성욕에 대한 도덕적 억압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중들의 비합리적 성격구조 때문에 파시즘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의 몇몇 문장과 자구를 뜯어 맞추면, 이러한 독해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라이히 책의 전체적 논의구조로부터 분리된 이러한 독해는 지나칠 정도로 단순, 무모한 일이다. 이런 속류적 해석을 따르게 되면 전통적 가부장주의도 파시즘이 되고, 스포츠 응원에서 나타나는 대중적 열광도 파시즘이 되며, 민중주의와 같은 정치적 대중동원도 파시즘이 되고, 사회운동도 민주정치도 모두 미시 파시즘의 혐의를 받게 된다. 그야말로 파시즘이라는 용어가 무제한적으로 범용되는 일이 가능해지거나, 때에 따라선 라이히가 성욕 개방론자 비슷한 뉘앙스로 만들어지거나 대중의 집단행동을 경계하는 이론가의 이미지를 갖게 되기도 한다.
  
  속류적 해석에 따르게 되면 당장 독일과 이태리, 일본이 특별히 성적 억압이 강해서 파시즘이 승리한 것인지, 왜 유사한 성적 억압이 있었던 다른 나라에서는 파시즘이 성공하지 못했는지 등의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고, 대중의 비합리성을 강조하는 수많은 보수적 해석 속에 이 책 역시 무의미하게 묻히게 된다. 그 결과 노동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살아 숨쉬고, 도착적 욕구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원초적 사랑이 복원되기를 추구하는 사회주의자 라이히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파시즘에 대한 여러 고전적 접근 중에서 이 책이 갖는 진정한 강점은 우리의 인식지평 너머로 실종되고 만다. 라이히의 논의가 이렇게 단순한 것이라면 한나 아렌트나 푸코와 같은 사상가들이 이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이 분석하려는 것은 파시즘의 출현을 가능케 했던 대중의 심리 상태에 대한 것이다. 대중심리, 곧 인간의 심성구조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라이히의 독창적인 작업은 프로이트적인 접근의 핵심 개념인 무의식의 세계, 그 다음에 정치경제적이고 역사적인 조건에 의해 영향받는 더 깊은 '생물학적 하부구조'의 존재를 밝히고자 하는 데 있다. 라이히가 강조하듯이 "좋은 사회적 조건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이 가장 깊은 핵심에서 근본적으로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협동적이며, 사랑을 하고 있는 동물,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 합리적으로 증오를 표출하는 동물이 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 "교양의 가면을 벗기면, 자연스런 사회성이 아니라 도착적이고 가학적인 성격층만이 우세를 점"하게 된다.
  
  요컨대 라이히가 밝히고자 한 것은, 자본주의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사회조직의 원초적이고 노동민주주의적인 형태가 붕괴"될 때 무의식이라고 하는 2차적 욕구의 층에서 인간의 심성은 어떻게 도착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변형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성격구조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집단화되면서 파시즘적인 사회구조를 어떻게 재생산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려는 데 있다. 결국 우리가 천착해야 할 것은 성의 사회적인 측면에 대한 것이지 사회의 성적 측면에 대한 것이 아니다.
  
  확실히 라이히에 대한 속류적 해석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다른 사람의 소개나 평가에 의존하는 일없이 직접 독서되어야 할 것이다.
  
  발전모델로서 생명공학 산업화론이 갖는 위험성
  
  사회적 관점을 강조하는 참에 새로운 발전모델로 신봉되는 '생명공학론' 혹은 '생명과학 산업화론'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사실 생명과학기술이나 의학기술이 덜 발달해서 인간 사회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기존의 의료기술의 혜택을 폭넓게 받을 수 없는 사회구조의 불평등이다. 신용불량자의 불행한 처지로 떨어진 사람들의 상당수가 의료비 부담 때문인 현실에서, 인간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은 평등의 문제이다. 평등하지 않으면 가난한 자가 자유로울 수 없고, 자유로울 수 없으면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은 약해지며, 결국 사회는 병들게 된다. 의료산업화, 생명과학 산업화에 엄청난 국가예산을 쏟아 설령 뭔가 엄청난 기술이 개발된다 한들 산업화 논리의 귀결은 가난한 다수를 여전히 혜택에서 배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의 문제에 대한 접근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좋은 사회라면 장애인이나 난치병 환자 문제를 그들만의 불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의 문제로 보고, 이들이 인간으로서 필요한 여러 조건을 향유하게 하면서 사회 속에서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것에 더 많은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떤 위대한 기술을 발전시켜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를 모두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반사회적이고, 반자연적이며, 위험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를 포함해 인간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커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기술 개발에 인간과 사회의 구원을 의탁하려는 도구적 관점이 더 커져버린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속에서 자극되는 것은 반대자나 비판자에 대한 복수의식 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비극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관에 의해 대중의 심성 구조가 반사회적인 방향으로 파괴되면서 만들어진 문제가 아닌가 싶다. 모두가 경제와 기술 발전의 혜택을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사회에서 불안과 소외는 일상화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는 사이 인간의 내면과 자아가 황폐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조건에서 자신의 문제를 자기 외부의 누군가에게 전가하려는 사회심리적 조건은 커지게 되고, 탁월함이라고 하는 귀족주의적 가치가 숭상되고, 그러한 능력을 갖는 영웅의 출현으로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병리적 현상이 만들어지게 된다. 집권 개혁파의 신자유주의적 타락이 우리사회의 불행을 심화시키는 현실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태의 기원이 이처럼 사회적이고 정치적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가 검찰의 조사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더 참담하다.
  
  이런 고통과 참담은 라이히의 이 책을 읽을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인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개선해야 할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대가를 얻게 된다면 그야말로 좋은 거래가 아니겠는가? 언제나 그렇듯, 좋은 서평보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수천 배 더 나은 일이다.  

  박상훈/후마니타스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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