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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섭은 두 언어가 접촉했을 때 그 효과로 한쪽 또는 양쪽 언어에서 일어나는 변화 현상을 가리킨다. 한국어는 역사적으로 중국어, 일본어, 영어의 간섭을 크게 받았다. | | |
외국인이 쓰는 한국어가 한국인이 쓰는 한국어와 달라 보이는 것은 그 외국인의 모국어가 새로 배운 한국어에 간섭하기 때문이라고 지난 주 이 자리에서 지적한 바 있다. (언어)간섭(interference)은 두 자연언어가 접촉(contact)했을 때 그 효과로 한쪽 또는 양쪽 언어에서 일어나는 규범이탈이나 규범변경을 가리킨다.
지난 주에 살핀 것은 한 개인이 부려쓰는 두 자연언어가 그 개인의 두뇌에서 맞닿아 꼬이며 빚어진 간섭이었다. 그러나 한 개인이 어떤 외국어를 구사할 줄 모르더라도 그의 모국어가 오랜 세월 그 언어와 접촉했다면, 이 개인의 모국어에는 그 외국어의 간섭 흔적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 외국어가 그의 모국어보다 세력이 큰 언어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이 때의 간섭은 이 특정한 개인만이 아니라 모국어를 그와 공유하는 화자 집단 전체가 겪는 간섭이다.
신인(新人)= 새댁 / 실내(室內)= 남의 아내 / 방송(放送)= 죄인을 풀어줌 / 한국 한자어 뜻도 일본쪽 변질
‘-에 있어서’‘-에의’ 등 통사구조에도 간섭 미쳐 韓日문장구조 더 비슷해져
19세기 끝머리 이후로 한국어에 가장 크게 간섭한 자연언어는 일본어다. 1945년까지는 일본어와의 접촉이 한반도 주민집단 대부분에게 열려있거나 강요되었고, 그 뒤에도 일부 지식인들을 통해 그 접촉이 계속되었으니, 간섭의 흔적이 큰 것은 당연하달 수 있다. 일본어의 간섭은 1945년 이후 남한에서 크게 위세를 떨친 영어의 간섭보다도 훨씬 깊고 넓게 이뤄졌다. 그 간섭은 특히 한국어의 한자어 계통 어휘부를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그래서 그 전까지 중국어의 그늘을 짙게 드러냈던 한국어 한자어들은 오늘날 일본어 쪽을 훨씬 더 닮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허다한 한자 신조어들이 한국어 어휘부로 밀려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그 전부터 한국어에 있던 한자어들도 일본어의 간섭으로 뜻이 바뀌었다.
예컨대 한국어에서 ‘생산’(生産)은 본디 ‘아이를 낳는 일’ 곧 ‘출산’의 뜻이었으나, 이젠 일본어 ‘세이산’(生産)의 쓰임새에 간섭을 받아 ‘인간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일’을 뜻하게 되었다. 물론 ‘생산’이라는 말이 지금도 ‘출산’의 의미로 쓰이는 일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변적 의미가 되었고, 게다가 그런 의미의 ‘생산’은 낡은 말투로 여겨진다. 남의 아내를 점잖게 이르는 말이었던 ‘실내’(室內)도 이제 그런 의미를 거의 잃어버리고 일본어 ‘시쓰나이’(室內)의 간섭으로 ‘방안, 집안’을 뜻하게 되었다.
이런 예는 수두룩하다. 몇 개만 더 살펴보자. ‘마음 속’을 뜻했던 ‘중심’(中心)은 일본어 ‘주신’(中心)의 간섭으로 ‘한가운데’를 뜻하게 됐고, 막 결혼한 여성 곧 ‘새댁’을 뜻했던 ‘신인’(新人)은 일본어 ‘신진’(新人)의 간섭으로 본디 뜻을 거의 잃어버리고 ‘어떤 분야에 새로 들어온 사람’을 뜻하게 됐다.
‘방송’(放送)은 본디 ‘죄인을 풀어줌’의 뜻이었으나 일본어 ‘호소’(放送)의 간섭으로 ‘새 소식이나 오락물을 전파에 실어 내보냄’을 뜻하게 됐고, ‘발명’(發明)은 본디 ‘죄가 없음을 말하여 밝힘’ 곧 ‘변명’의 뜻이었으나, 이젠 그런 용법은 사극에서나 볼 수 있을 뿐 일본어 ‘하쓰메이’(發明)의 간섭으로 ‘새로운 기술이나 물건을 만들어냄’의 뜻을 지니게 되었다.
일본어가 한국어에 간섭한 것은 의미 수준에서만이 아니다.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의 문장 구조가 매우 닮은 것은 이 두 언어의 유형이 본디 비슷했다는 사정말고도, 구한국 시절 이후 한국어가 일본어로부터 받은 통사(統辭) 간섭에 적잖은 이유가 있다.
일본말투의 전형으로 흔히 지적되는 ‘-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관형사구를 만들어내는 ‘-에의’, ‘-에로의’, ‘-로서의’, ‘-로부터의’ 따위 겹조사 표현도 일본어 통사구조의 간섭으로 태어났다. 일본어를 직역하다보니 그런 간섭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다. 또 피동형의 남용도 일본어가 한국어 통사구조에 간섭한 결과랄 수 있다.
두 언어의 접촉에 따른 간섭은 다른 자연언어들 사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1066년 노르망디공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상자 기사 참조) 이후 수백년간 영어에 간섭했던 프랑스어는 20세기 들어 거꾸로 영어의 간섭을 받고 있다.
프랑스어에는 본디 영어의 -ng(우리말의 받침 ‘ㅇ’)에 해당하는 연구개음이 없었지만, parking이나 home-banking 같은 영어가 프랑스어 어휘부에 들어오면서 이 음이 독립 음소로 자리잡아 가는 중이다. 또 프랑스어 동사 realiser는 당초 ‘실현하다, 구현하다’의 뜻만 지니고 있었지만, 영어 realize의 의미 간섭을 받아 지금은 ‘깨닫다’라는 뜻도 겸하게 되었다. 영어 realize가 본디 프랑스어 realiser의 차용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역전이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 가짜친구(Faux amis)
같은 어원서 유래됐지만 낱말 뜩이 달라진 경우도
간섭은, 가장 넓은 뜻으로 쓰일 때, 접촉하는 두 자연언어 한 쪽 또는 양쪽에서 이 접촉의 효과로 일어나는 변화를 몽땅 가리키기도 한다. 이런 뜻의 간섭은 그 외연이 차용과 거의 겹친다. 옆 기사에서 간섭의 예로 거론한 것들도 결국은 의미, 통사, 음운 수준의 차용이었다. 자연언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차용의 가장 큰 부분은 어휘 형태의 직접적 차용이다. 그래서 한 언어가 다른 언어에 행사하는 간섭의 가장 큰 부분도 어휘 간섭이랄 수 있다. 두 언어의 격렬한 접촉은 양쪽에 이른바 ‘외래어’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영어는 세계의 다른 모든 자연언어의 어휘에 깊이 간섭하고 있지만, 과거엔 프랑스어의 깊은 간섭을 받았다. 그 간섭의 정도는 한국어나 일본어 어휘에 대한 중국어의 간섭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컸다. 프랑스어가 영어에 들입다 간섭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지방의 영주 윌리엄(프랑스어로는 ‘기욤’)이 잉글랜드에 쳐들어가 노르만왕조를 세운 1066년 이후다.
영국사에서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으로 알려진 이 사건 뒤로, 프랑스어는 잉글랜드에서 수백 년 동안 지배계급의 언어 노릇을 했다. 잉글랜드에서 영어가 프랑스어를 제치고 다시 제1공용어가 된 것은 14세기 후반~15세기 전반의 백년전쟁 뒤다. 이 전쟁이 프랑스와 프랑스어에 대한 잉글랜드사람들의 거리낌을 부추긴 덕이다. 그러나 그 뒤로도 프랑스어는 여전히 잉글랜드 법정의 언어였다. 그 나라 법원이 프랑스어를 포기하고 영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1731년에 들어서다. 그 때는 이미 영어 어휘의 반 이상이 프랑스어로 채워진 뒤였다.
프랑스어의 영어 간섭은 영어에 셀 수 없이 많은 유의어 쌍을 만들어내 이 언어를 살찌웠다. 물론 그 유의어들은 뉘앙스에서 거의 일관된 차이를 보였다. 프랑스어는 잉글랜드 지배계급의 언어였으므로, 영어에 흡수된 프랑스어 단어도 본디 있던 앵글로색슨 단어(게르만계 단어)보다 더 기품과 격조가 있어 보였다.
예컨대 to begin(시작하다)과 to commence, to end(끝내다)와 to finish, to feed(먹이다)와 to nourish, to help(돕다)와 to aid, to sell(팔다)과 to vend, to keep up(유지하다)과 to maintain, to answer(대답하다)와 to reply, to sweat(땀흘리다)와 to perspire 같은 영어동사들의 유의어 쌍에서, 거의 일관되게 더 격이 있어 보이는 것은 앵글로색슨 계통 어휘인 앞쪽이 아니라 프랑스어에서 차용한 뒤쪽이다.
한국어에서 한자어가 그 고유어 유의어보다 흔히 더 격조 있어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격식의 뉘앙스를 띤다는 것이 늘 긍정적이진 않다. 한국어에서 한자어보다는 고유어가 정서를 환기시키는 힘이 더 크고 그래서 더 한국어답게 들리듯, 영어에서도 프랑스어계 낱말보다는 앵글로색슨계 낱말이 그 정서적 환기력 덕분에 더 영어다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한자어가 한국어 어휘를 크게 두 층(고유어와 한자어)으로 만들었듯, 프랑스어계 외래어도 영어 어휘를 크게 두 층으로 만들었다.
프랑스어에서 차용된 영어 낱말들은 그 말들의 원산지인 프랑스어에서보다도 격식의 뉘앙스가 짙다는 점을 지적하자. 프랑스어에서는 그 낱말들에 지배계급의 표지가 없었던 데 비해, 영어에서는 오래도록 지배계급의 표지가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컨대 to commence, to nourish, to vend, to aid 같은 영어동사들은 이 말들의 원래 형태인 프랑스어 동사 commencer, nourrir, vendre, aider 따위보다 격식의 뉘앙스가 짙다. 다시 말해 프랑스사람들에게 이 프랑스어 낱말들이 환기시키는 정서를 영국인들에게 거의 비슷하게 환기시키는 영어 낱말은 프랑스어와 형태가 닮은 이 차용어들이 아니라 to begin, to feed, to sell, to help 같은 고유어다.
그런데 프랑스어 낱말과 이를 차용한 영어 낱말 사이에 이런 뉘앙스 수준에서가 아니라 의미 수준에서 차이가 벌어진 예도 적지 않다. 차용이 이뤄진 뒤에, 프랑스어에서든 영어에서든 또는 양쪽 다에서든, 그 낱말의 뜻이 변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 경우에, 도버해협을 건너서 빌려주고 빌려온 이 낱말들은 형태도 닮았고 어원도 같지만, 의미는 다르다.
(물론 어원이 같으므로 의미연관이 있긴 하다.) 예컨대 영어 advertisement(광고)는 프랑스어 avertissement(경고)을 차용한 것이지만 그 뜻이 다르다. 15세기에 이 말이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차용됐을 땐 도버해협 양쪽에서 다 ‘경고’의 뜻이었지만, 그 뒤 영어에서 이 낱말의 뜻이 변해 그 의미 대응이 고스란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프랑스어 avertissement에 해당하는 영어는 warning이고, 영어 advertisement에 해당하는 프랑스어는 publicite다. 언어교사들은 avertissement과 advertisement처럼 거죽은 닮았지만 의미가 다른 쌍들을 ‘가짜 친구’(faux amis)라고 부른다.
프랑스어와 영어 사이엔 이런 가짜 친구들이 적지 않다. 예컨대 프랑스어 librairie는 ‘서점’(영어의 bookshop)을 뜻하지만 이 단어를 차용한 영어 library는 ‘도서관’(프랑스어의 bibliotheque)을 뜻하고, 프랑스어 licence는 ‘학사학위’(영어의 university degree)를 뜻하지만 이 단어를 차용한 영어 license는 ‘면허’(프랑스어의 permis)를 뜻한다.
이런 가짜 친구들을 솎아내는 것이 프랑스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영국사람이나 영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프랑스사람에겐 가볍지 않은 짐이다. 형태만이 아니라 뜻이 닮은 ‘진짜 친구’들이 두 언어 사이에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가짜 친구’들은 한국어/일본어의 한자어와 중국어 사이에도 적잖게 있다. 그것을 살필 기회가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