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딸기 > 아프리카 역사에 대한 알찬 길잡이
아프리카의 역사 히스토리아 문디 2
존 아일리프 지음, 이한규 외 옮김 / 이산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이브의 일곱 딸들’에서 넬슨 만델라까지 아프리카의 역사를 종으로 횡으로 엮은 이 책은 참 알차다. 맛뵈기 개론서로서 알찬 것은 좋은데, 책 읽는 동안 너무 많은 것들이 머리 속에 들어와서 정신이 없었다. 세계 곳곳 낯설지 않은 땅이 어디 있으랴마는, 때로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역사도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아프리카의 역사는 참 낯설었다. 낯선 고유명사들을 기억에 남기는 것은 아예 포기했다.

머리 속이 복잡했던 것은 이 곳의 사정이란 것이 워낙 그동안 내가 몰랐던 것들인지라 이해하고 외우기에 벅찼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과정은, 내가 쥐꼬리의 털 하나만큼 알고 있었던 아프리카의 역사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과정이기도 했다.


책은 열 두 개의 챕터로 이뤄져 있는데, 인류의 선조들과 진화, 농경의 전래 등을 다룬 앞부분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대사를 다룬 맨 뒷부분까지, 저자는 인구학적 분석을 중요한 틀로 삼고 있다. 1~3장은 인간의 출현에서 고대 이집트 문명까지를 다룬 것이어서 그냥 슬렁슬렁 책장 넘기듯 읽었는데, 4장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부터는 허투루 넘기기가 어려웠다. 아프리카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래 및 확산 과정은, 이들 종교가 탄생한 유라시아에서와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그 ‘특수성’을 설명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간단히 정리하면 아프리카에서는 유일신앙들이 현지의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토착신앙과의 융합과정을 겪어야 했다는 것. 저자가 꾸준히 강조하는 것은, 어떤 역사적 과정도 ‘아프리카가 미개했기 때문에’라는 식으로 해석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거다. 담담하게 ‘사실(史實)’들만 정리하는 것 같으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하려 하는 서술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종교 부분을 지나 나오는 3개의 장(章)들은 아프리카를 북아프리카/서부 아프리카/동부아프리카로 나눠 지역별로 약사(略史)를 정리해놓고 있다. 아프리카의 역사라고 했지만 오래되고 큰 대륙의 역사를 이렇게 한 권에 담으려니 복잡해 보인다. 아프리카가 유난히 부족이 많고 복잡하고 역사에 일관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프리카 각 지역의 독자성보다 ‘아프리카’라는 덩어리를 놓고 보는 내 잘못된 시각 때문에 이 곳의 역사가 중구난방처럼 들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해봤다.


책이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지는 것은 7장 노예무역에서부터다.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시작되는 ‘노예사냥의 시대’와 서양 열강의 침략, 식민통치, ‘독립의 시대’를 아주 빠른 속도로 읽어가면서(머리에 박히지 않는 부분들은 쓱쓱 지나갔다) 이 지역의 역사가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것과는 참 많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놀랐다.

서양 열강이 아프리카를 침략했다, 노예들을 잡아갔다, 아프리카는 폐허가 됐다, 그러다가 독립을 했는데 식민지 폐해 때문에 여전히 못 살고 있다... 내 머리에 들어있던 아프리카의 역사는 이런 구도였다. 그런데 저자는 식민제국이 남긴 기록들과 인구학적 분석을 통해 이런 단순무식한 편견을 뒤집는다. 아프리카에는 원래부터 노예경제가 있었고, 포르투갈이 14~15세기 이후 이른바 상아해안 황금해안(기니만 일대)에 요새를 세우고 노예들을 사갔지만 노예밀매의 주축은 아프리카인들이었다. 대서양 노예무역이 시작되면서 기니만 일대에 시류를 탄 여러 왕국들이 명멸했다. 서양만 나쁜 것도 아니었고, 아프리카인들이 피동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아프리카인들이라 해서 똑같은 흑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부족이 있고 저런 왕국이 있고 강자도 있고 약자도 있었다.

정작 서양 열강이 아프리카 전역을 제멋대로 갈라 마구잡이 착취를 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아프리카가 오늘날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이 기근과 내전으로 갈라진 ‘절망의 대륙’이 된 것은 거의 20세기 중반 이후의 일로, 거기에는 식민지의 잔재들과 환경인구학적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 어느 것도 ‘상호작용’이 아닌 일방의 형태로 이뤄진 것은 없었다. 그것은 지구상 어떤 지역에서나 마찬가지이고 아프리카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예수출은 적어도 2세기 동안 서아프리카의 인구성장을 가로막았다. 노예무역은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조직형태가 생겨나도록 자극했고,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광범위한 노예 사용을 부추겼으며, 고통에 대해서 더욱 야만적인 태도를 갖게 했다.... 역설적이게도 이 치욕의 시기에 아프리카인은 가장 용감하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인간의 힘을 보여주었다.” (230쪽)


요는, 아프리카는 농업하기 힘든 기후조건을 가진 곳이 많고 질병 같은 ‘자연의 도전’이 많아 현대에 들어서기까지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아프리카의 역사는 ‘머릿수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었으며, 힘센 자들이 약한 자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쓰는 구조였다. 그것이 서양 노예사냥꾼들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면서,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노예상인들이 기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많은 사람이 노예로 다른 대륙에 끌려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아프리카의 ‘인구재앙’을 가져올 정도의 숫자였던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극소수일지라도, ‘노예가 되느니 죽음을’ 택해 서양인들이 끝내 노예화를 포기하게 만들었던 부족도 있었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은 아프리카가 ‘당하는 대륙’이었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구만 가지고 역사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치적인 사건들에 가려진 것들을 보게 해주는 효과는 있다. 인구학적인 역사 설명은 아마도 요사이 과학과 역사를 결합시켜 보는 학자들 사이에 유행하는 방식인가 보다.

열 두 번째 챕터는 남아공을 비롯한 남부 아프리카 일대의 근대 이후 역사를 다루는데, 요사이 넬슨 만델라의 자서전을 보고 있는지라 그것과 연관지어가며 흥미롭게 읽었다.


책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역사가 ‘재미만 있는’ 역사는 결코 아닌지라 머리가 맑아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들의 역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 때문인지도 몰라. 아프리카가 피동적으로 강자에게 당하고만 있던 대륙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적어도 역사의 여러 시점에서 그들이 지구상의 많은 사람보다 앞선 물질적 문명을 갖고 있었다고도 하지만, 내 눈에 현.재. 비치고 있는 아프리카의 모습은 좌절스럽다. 시에라리온의 그 절망스런 거리, 폭력과 고통에 인이 박힌 불량스런 눈빛들, 재앙이 겹치고 겹쳐 희망의 싹을 찾아보기 힘든 그 땅의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역사를 꾸려갈까. 내 일도 아닌데 내 머리가 아프다. 쉽사리 희망을 이야기하기엔 현실은 너무 무겁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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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퍼온글] [펌] 강풀 - FTA를 말한다.

우와!  이젠 강풀도 FTA를 말하네요! 
원래 하던 연재를 중단하고 FTA 만화를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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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툰 - 나의 이상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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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문학이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는가

한겨레 북리뷰의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에서 도정일 교수의 칼럼 ''문학집배원'의 인기비결'을 옮겨온다. 문학의 사회적 가치/효용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는지라 제목을 본문의 문구인 "문학이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는가?"로 바꾸었다. 문학을 즐겨 읽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짐작엔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인간은 대체로 유구하다), 칼럼은 보다 긍정적인 견해를 제출하고 있다.

한겨레(06. 07. 14) 평소에 시, 소설, 드라마 같은 문학작품을 즐겨 읽거나 일 년에 최소한 몇 편이라도 챙겨 읽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될만한 어떤 행동상의 특징을 보이는가? 문학교수들치고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자기 자신을 향해 던져보거나 그 질문에 자진해서 시달려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선은 그것이 문학 그 자체와는 별 관계없는 질문처럼 들린다는 것이 첫째 이유다. 정치학을, 혹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만한 행동 특징을 보이는가라는 것이 정치학이나 경제학 본령의 질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듯이 말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어쩌면 이게 진짜일지 모른다) 그 질문에 그렇다/아니다로 대답할 실증적 증거를 들이댈 길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즐겨 마시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같은 거라면 몰라도 문학독자와 비독자 사이의 행동 차이라고?

-그러나 그 질문은 상당히 의미 있다. 평생 대학 강단에서 소위 ‘문학 강의’란 걸 하면서 문학이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도 던져보는 일이 없다면 문학 강의가 될까? 학생들에게 시, 소설, 드라마를 읽어라 해놓고 그 읽기의 경험이 학생들에게 어떤 변화 효과를 일으키는지 아닌지 아무 관심도 없다? 내 생각에, 많은 경우 문학 강의가 망하거나 혼수상태에 빠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질문이 강의의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사실 '변화'에 대한 기대는 교육 일반이 의도하는 것이지 '문학 강의'만의 특화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런 변화를 측정하거나 측정의 방법을 찾아내는 일은 문학 강의의 본령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질문 자체가 아예 제기되지 않는다면 문학 강의의 교육적 의미는 살아날 길이 없다(*이러한 주장엔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얼마간 공감하면서도, 이젠 문학교육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해야 하는 요구에 직면해 있구나, 라는 유감). 학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중적으로도, 문학을 읽는 행위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문학 독서의 중요성을 어디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구 문예진흥원)는 작년부터 ‘문학의 대중적 친숙화’를 위한 사업들을 펼쳐오고 있다. 작년에는 ‘문학회생’이라는 이름으로, 금년에는 ‘문학나눔’이라는 명칭으로 전개되고 있는 사업들이 그것이다. 회생이건 나눔이건 간에 사업의 목적은 문학의 대중적 향수 기회를 넓히기, 곧 사람들이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크게 열고 넓혀보자는 것이다. 창작자들을 위한 생산지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향유자를 위한 지원이다. 이 점에서 문학을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고 들어가 시민들이 더 자주, 더 많이 문학을 나눌 수 있게 지원한다는 것은 독서인구 키우기는 물론이고 시민의 예술참여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사업이다.

-문학의 이런 대중적 친숙화 작업의 하나로 지금 두 달째 진행되고 있는 것이 시인 도종환의 ‘시 배달’이다.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일주일에 시 한 편씩을 인터넷으로 배달해주는 것이 그 사업의 골자다. 시인이 손수 고른 시가 플래시 영상카드에 실려 텍스트와 낭송의 형태로 매주 월요일 아침 사람들에게 ‘선물’로 배달된다. 스스로 ‘문학집배원’이 되어 시 배달에 나선 시인은 우리더러 잠깐 삶의 템포를 조절하고 “당신의 한 주일을 시 한 편 읽는 것으로 시작”해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일상의 바쁜 쳇바퀴에 갇힌 사람들에게 이건 신선한 메시지다. 시인의 이런 노력에 대한 호응이 ‘폭발적’이라는 소식이고 보면 사람들이 그 메시지에 얼마나 목말라 있었던가를 알만하다. 대구 지역에서는 교육청이 나서서 대구경북 일원의 중고등학생 2만 여명에게 월요 아침의 시를 받아볼 수 있도록 주선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사람들은 왜 시를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시가 그들의 삶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중요성의 핵심은, 내 생각에, 시가 ‘연결의 다리’라는 데 있다. 시는 사람들의 가슴과 가슴을 연결하고 나를 나 아닌 모든 다른 것들과 연결시키고 나를 나 자신에게 연결한다. 사람과 사람들을 이어붙이고 인간과 별과 바람, 나무와 구름, 지렁이와 개구리까지도 한데 이어 붙인다는 점에서 시는 인간이 가진 최선의 선린 외교정책이다. 무엇보다도 시는 내가 나보다 더 큰 어떤 것, 내가 ‘나’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더 크고 중요한 어떤 것과 연결되게 한다.

-‘더 크고 중요한 어떤 것’이라는 소리가 고깝게 들리는 사람에게라면 말을 바꿔도 된다. 나보다 더 작고 약하고 미천한 것, 그래서 내가 노상 업신여기고 깔아뭉개고 구둣발로 걷어찼던 것들을 어느 순간 나에게로 이어 붙여 그 모든 작은 것들의 존재의 고귀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시다. 사람들이 시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있는 삶을 강요당하면서도 시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시가 가진 이 연결의 마술 때문이다. 시가, 문학이, 사람들을 바꿔놓을 수 있는 힘의 원천도 거기 있다.

 

 

 

 

-문학독자한테서는 비독자와는 다른 어떤 행동상의 특징이 발견되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의 사회적 의미를 확인하기 위한 시도를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다. 그러나 미국 예술기금위원회(NEH)가 2002년에 연방 통계청을 통해 실시한 ‘미국인의 예술참여도’ 조사를 보면 그 질문과 관련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발견은 문학독자가 비독자에 비해 자선활동이나 자원활동 같은 사회적 참여행위의 빈도가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다른 변수들과는 정말로 무관한 것일까?).

-문학독자들이 사회적 자선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43%임에 비해 비독자의 참여율은 17%에 그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이 차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참여란 연결의 다른 이름이다. 문학 외의 예술 형식, 음악회에 가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하는 등 인접 예술 영역에 대한 참여율도 문학독자가 비독자에 비해 두 배 이상 높다는 것도 그 조사에서 드러난 발견의 하나다(*문학 체험이 공감의 능력을 확장시킬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긴 하다. 그런데, 거꾸로 미술관/박물관을 방문할 여력이 되고 자선활동에 참여할 준비가 돼 있는 이들이 문학도 향유하는 건 아닐까? 이 '인과성'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가능한가?).

 

 

 

 

-우리는 문학의 가치와 효용이 그것의 무효용성에 있다는 주장을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해 있다(*가장 대표적인 건 자신의 '쓸모없음'으로 유용성에 대해 반성하게 한다는 김현의 문학론이다). 그 주장의 진리 가치를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문학을 읽고 즐기는 행위의 사회적 효용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 읽고 쓰고 생각하고 성찰하는 행위가 사회적 삶의 기초라면, 문학 읽기는 사람이 사람으로 자라고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인, 그리고 시민적인 힘의 원천이다. 도종환 시인의 시 배달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의 큰 줄기 하나도 거기 있을 것 같다.

(*)시배달의 사회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치와 효용'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사회적 장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확장시키려는 노력과 결부돼 있으며 또 언제나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갖는다. 나는 문학전공자들의 인성이 (아무래도 문학작품을 덜 읽게 되는) 공학도/공학자들의 인성보다 특별히 우량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때는 게임중독자들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었는데, 게임매니아를 자처하는 문학교수들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인지! 해서, 이 칼럼은 아무래도 아침에 배달되는 기분좋은 덕담 정도로 치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하다. 문학이 사람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가? 당연하지! 한데, 그 바꿔놓기 능력에 있어서 문학이 돈이나 정념을 따라갈 수 있을까? 뭐라고요, 문학이 돈이나 정념에 들러붙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요?..

06.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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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딸기 > 별 두 개도 잘 줬다.
콘돌리자 라이스
안토니아 펠릭스 지음, 오영숙 외 옮김 / 일송북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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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콘돌리자 라이스에게 관심이 많이 생겼다. 내가 뭐 콘돌리자 라이스를 아는 사이도 아니고(그렇게 위대하고 대단한 인물을 내가 어케 알겠는가? 영어도 못하는데...)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편의상 조지 W 부시가 부르는대로 ‘콘디’라고 부르기로 한다(이 책에서 하도 콘디, 콘디 해서 귀에 못이 박혔다).

부시 정권 들어서고 나서 콘디 빼놓고는 미국 뉴스 담기가 힘들 정도로 콘디라는 인물의 비중은 막대했다. 백악관 안보보좌관일 때에도 부시가 귀담아듣는 건 콘디와 체니의 말 밖에 없다는 둥, 백악관에 살다시피 하며 말 그대로 지근거리에서 부시를 보좌하고 있다는 중, 콘디네 흐름이 콜린 파월의 흐름을 이미 진작에 압도했다는 둥, 콘디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이 미국 신문들에는 차고도 넘쳤다.

그런데 그렇게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콘디가 한 짓이 결국 부시가 한 짓이고 보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고 세계 만방을 돌며 미국 패권을 휘두른 것들이다. 그러니 그 능력 있다는 콘디라는 사람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흑인에, 여성에... 어퍼머티브를 잔뜩 주고 싶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마는 이렇게 주류적이고 보수적이고 패권적일수가. 콜린 파월이 겉만 검은 공화당 골수 보수파라더니, 콘디라는 이 여자는 한술 더떴다.


작년에 콘디가 국무부를 완전히 장악한 것을 넘어서 ‘개혁’까지 하면서 파월 시절 도널드 럼즈펠드의 국방부에 빼앗겼던 외교 주도권을 되찾아왔다는 미국 언론 보도들이 줄을 이었다. 학자 출신인 콘디라는 여성이 관료사회를 어떻게 장악할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당연히 생겨났지만, 외신에 나오는 fact들 만으로는 이 사람의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기가 좀 힘들었다.

결정적으로 콘디의 캐릭터를 알아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지난해 콘디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이집트 국경검문소 폐쇄 소동을 해결했을 때였다. 이스라엘은 국경검문소를 닫아 가자지구를 봉쇄했고, 먹고 살 길이 막힌 가자 주민들은 아우성을 쳤다. 콘디는 이-팔 양측을 방문해 팔레스타인을 죄고 이스라엘을 야단쳐 국경을 다시 열게 했다. 어쩌면 이것은 국제정치에서 ‘현실주의의 승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을 옹호하고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식의 자유주의적(더 나아가면 ‘좌파적’) 발상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를, 보수적인 현실주의자 콘디가 풀어냈던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미국에서 콘디와 함께 ‘여성 대통령감’으로 지지자와 안티세력을 몰고 다니는 힐러리 클린턴의 경우 유대인들의 표와 돈을 원한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보이며 콘디와 같은 시기에 이스라엘을 방문, 유대인 비위맞추기에만 몰두해 눈총을 받았다(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지금도 힐러리는 열심히 이스라엘을 옹호하고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라는 책은 콘디의 ‘위인전’이다. 머리 좋은 콘디가 자서전을 썼다면 절대로 이렇게는 안 썼을 것이다 싶을 정도로 유치찬란하다. 도대체가 국민학교 때 간디니 처칠이니 하는 사람들 위인전을 숙제 삼아 읽은 이래로, 이렇게 유치한 위인전을 다시 읽는 것은 처음이란 말이다. 게다가 무슨무슨 대학 총장을 했다는 번역자는 기본적인 단어의 뜻도 모르는 것 같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버젓이 ‘3부 요인’이라고 해놨다. 미국 국가안보위원회(NSA)는 처음부터 끝까지 ‘안보리’로 표기했다. 안보리의 ‘리’가 이사회의 약칭이란 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모스크바의 세인트피터즈버그’라는 코믹한 지명까지 등장할 정도이니, 유고의 베오그라드를 ‘벨그레이드’라고 쓴 것은 애교 삼아 용서해줄 수 밖에.


번역 때문에 눈에 가시가 걸린 것은 그렇다 치고, 책에 쓰여진 수사들은 참으로 화려하다. 콘디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며 그의 훌륭한 부모들은 콘디를 위해 헌신하였고 보수적인 남부에서 어린 딸이 인종차별의 설움을 겪지 않도록 완벽하게 보호했다. 콘디는 피아노 천재에 어려서부터 책 읽고 공부하고 스케이트도 잘 탔는데 이 모든 것은 ‘남보다 두배 열심히 해야 한다’는 라이스 가문의 가훈을 따른 것이었다. 콘디는 위대한 스승(매들린 올브라이트의 아버지)을 만나 학문의 길을 걸어 뛰어난 성과를 거뒀고 정·관계는 물론이고 기업체 이사로서도 명성을 쌓았다(콘디가 셰브론 텍사코 이사를 지낸 경력이 정경 유착 의혹의 한 빌미가 됐던 것도 저자에겐 ‘미담’이다). 콘디는 외교무대에서도 너무나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으며 조지 부시 부자를 훌륭한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다. 콘디는 인격적으로도 뛰어나서 보수적이면서 우아하고 완벽하고... 탁월하고... 완벽하고... 뛰어나고... 우아하고... 탁월하고... 완벽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 보람이 있다면, 첫째 콘디라는 인물의 캐릭터를 상상하는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 저자의 화려한 찬사를 잠시 뒤로 치워놓고 골자를 보면 콘디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힘의 논리’에 충실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문제를 머리 속으로 ‘정리’하고 타인을 ‘설득’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데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흑인 여성으로서 스탠퍼드대학교 교무처장을 지낸 것은 우습게 볼 경력이 아니다. 국무장관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정계가 됐든 외교문제를 연구하는 싱크탱크가 됐든 혹은 에너지기업이 됐든, 다양한 분야에서 인맥을 쌓으며 성공/승리/목표 달성을 위해 매진했다. 언제나 노력하고, 자기관리에 철저하고, 심지어 체력관리도 ‘스탠퍼드대학 운동선수들 수준으로’ 완벽하게 한다니! 콘디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아직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조지 W 부시보다는 낫지/나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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