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라주미힌 > 오용과 남용


이 영화를 여기저기서 써먹는구만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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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로쟈와의 인터뷰

북매거진 <텍스트>로부터 이메일 인터뷰 요청을 받고서 답한 초안의 내용을 옮겨놓는다. 분량상 책에는 얼마간 걸러진 다음에 게재될 것이다. (-)가 질문이고 (=)가 그에 대한 답변이다.

-‘로쟈’라는 이름에 관해서 직접 말해달라. 그 이름은 자신을 얼마만큼 반영하고 있는지도 더불어...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어서 감사하다. 어떤 용도가 될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또한 자기 존재감의 과시이면서 자기 존재의 '확장'일 테니까. 물론 이건 모두 '로쟈'가 열심히 끄적거려준 덕분이다. 어느 자리에선가 밝혔는데, '로쟈'는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다(즉, 로지온의 애칭이다). 교양있는 분들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대개 연상하고서 '여자' 이름이 아닌가로 판단하는데, 로쟈는 '혁명가'가 아니라 '살인자'의 이름이다(혹 '박노자'의 닉네임이 아닌가란 의견도 예전엔 있었다.^^).

인터넷에서 글쓰기를 처음 시작한 게 지난 99년부터인데, 초기엔 '이가두' '이가휘' 같은 중국풍의 닉네임을 한동안 쓰기도 했다. 그러다 '로쟈'로 정착된 건 기억에 <죄와 벌>을 다시 읽을 필요가 생기면서부터였다. 보르헤스가 언젠가 '보르헤스와 나'란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나와 로쟈'도 비슷하다. 많이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다. 그는 나의 페르소나(가면)이면서 대변인이고 때론 주인이면서 동시에 하인이기도 하다. 그래도 가장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책읽기 주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그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bibliological subject' 정도라고 해두자. '나는 책을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란 명제로부터 탄생하는 어떤 주체.

-당신의 알라딘 활동(?)이나 비평고원 활동(?)은 이른바 ‘업계(책을 읽고 쓰길 좋아하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의미에서)’에서는 꽤 유명한 편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당신의 독서편력에 혀를 내두른다. 당신의 그런 현재를 있게 한 책읽기의 시작점이 궁금하다.

=내가 글을 쓰는 공간은 그 딱 두 군데인데, 해놓은 일에 비해서는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오역에 관한 지적들을 자주 하면서 출판 동네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해서, '내성적인' 성격과는 좀 다르게 많이 나서는/나대는 인물이란 인상도 주는 듯하다(나는 책 얘기가 나오지 않는 대부분의 자리에서 '조용한' 편이다!).

'비평고원' 같은 카페는 내가 선택한 것이지만(나는 초창기 멤버인데,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보다도 더 열심히 '활동'했다), 알라딘의 서재 같은 경우는 어느날 뚝 떨어진 것이다. 알라딘은 책값 좀 벌어보려고 마이 리뷰를 몇 개 쓰다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해서 나름대로 애착을 갖고 있는 공간이다. 그렇다고 리뷰를 많이 쓴 건 아니고 아마도 유명세의 8할은 '페이퍼' 때문인 듯하다. 책에 대한 잡담들.  

'독서편력'이라고 하면 좀 부끄럽다. 생각만큼 책을 많이 읽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건 독서의 성격과도 좀 관계가 있는데, 문학 전공자라서 자연스레 갖게 된 태도이기도 하지만, 나는 '자세히 읽기'가 필요한 책이 아니면 손에 잘 들게 되지 않는다(더불어 책을 빨리 읽는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많이 읽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아는 체'를 많이 해서인 듯한데(보수만 두둑이 준다면 앉은 자리에서 하루 종일 책 이름들을 적어나갈 수 있다), 사실 책들을 둘러보고 찾아보고 하는 일들을 즐기는 편이긴 하다(주변에선 내 전공이 '서지학'이라고 말하곤 한다).

한데, 그건 '독서편력'이 아니라 '도서편력'이라고 해야 맞겠다. 어쩌면 '편력'도 정확하지는 않다. <어린왕자>에 보면 지리학자가 사는 별이 나오는데, 그는 여행자들이 보고 온 내용을 책에 기록하기만 한다. 즉, 그가 하는 건 편력이 아니라 기록이다. 나는 책들의 성좌, 문학과 사상의 '지도'를 작성하는 데 취미가 있다.      

책읽기의 시작점? 어머니 말씀으론 내 당사주에 그렇게 나와 있다고 한다. 백발 도사가 책을 읽는 모습이 나의 당사주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여하튼 8살 때쯤 동네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책꽂이에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이 좍 꽂혀 있는 걸 보고 경이감을 느낀 적이 있다(우리 집에는 낱권으로도 책이 별로 없을 때였다). 어쩌자고 세상엔 도대체가 아무것도 없지 않고 책이란 게 있는 것일까?! 그러한 책의 존재 자체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경이롭다(여성들 또한 경이롭지만, 그들은 책만큼 친절하지 않다!).  

-당신의 글쓰기는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편이다. ‘인터넷’이 글쓰기와 관련하여 갖는 어떤 의미가 있나? 지면을 허락받는 게 아니라, 지면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인가?

=사이버 공간이란 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원래 독서일기 같은 걸 PC에다 쳐넣곤 했으니까. 다만, 공개된다는 게 다를 뿐인데, 사실 그게 ‘특별한’ 의미를 갖긴 한다. 좀더 친절하게 좀더 풀어써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면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자유로움과는 별개로(그건 별로 의식해보지 못했다) 오프라인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은 글쓰기라는 걸 얼마간 의식하고는 있다. 그건 자유로움이면서 동시에 어떤 막연한 슬픔 같은 것이기도 하다.

‘곁다리 텍스트’라고 부르는 것에 나는 애정을 갖고 있는데, 가끔씩 들어오는 청탁을 받고 쓰는 게 아닌, 온라인에 직접 쓰는 글들의 대부분은 ‘곁다리 텍스트’들이다. 번듯하지도 않아서 내세우기에는 멋쩍은. 그래서 ‘책’으로 묶이지 않을 텍스트들. 그런 텍스트들을 모아놓을 수 있다는 점이 인터넷 공간의 특장이고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외국문학, 특히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당신의 학과 진학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치더라도(아니라면, 그 이유도 물론 궁금하거니와), 그것을 당신의 업으로 삼은 것은 엄연히 당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문학을 한다는 것, 러시아 문학을 한다는 것이 당신을 위태롭거나 공허하게 한 적은 없는가(여기서의 위태로움은 경제적인 위태로움에 관한 것은 아니다).

=러시아문학을 전공으로 고른 것은 운명이다.^^ 나는 예정조화설 같은 걸 믿기도 하고(‘예정파국설’이어도 무방하다). 애초에는 그냥 ‘문학’을 전공한다는 생각이었고, 러시아문학에 큰 작가들이 많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경제로운 위태로움’을 논외로 하면, 문학이나 러시아문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에 회의를 느낀 적은 거의 없다. 동료들끼리는 상투적인 푸념들을 늘어놓지만 그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에 주변 사람들의 ‘희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성채는 인간들이 써놓은 최우량의 텍스트들로 구성된다. 이 텍스트들을 읽고 음미하는 일을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고답적인 어투의 육법전서 따위를 읽는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러한 오만의 대가는 현실에서 톡톡히 치르고 있다.^^ 

한편으로, 질문은 ‘외국문학도’로서의 한계 같은 걸 느낀 적은 없는가, 라고도 읽히는데, 전공에 국한하여 말하자면 내가 목표로 하는 건 ‘러시아문학에 대한 이해’라기보다는 ‘러시아문학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 혹은 ‘러시아문학에 대한 나의 이해’이다. 충분히 행복하고 보람된 일이다. 그저 인생이 짧다는 게 한스러울 뿐(이미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책들을 다 읽기 전에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당신은 이전에 <텍스트>에 출판번역의 오류에 관해서 글을 쓴 적도 있다. 번역 문제에 관하여 글을 쓸 때, 당신은 더욱 집요하고 철저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비단 당신의 전공인 ‘노어->한국어’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외국문학을 공부하는 동안 특별히 이런 작업에 대해서 더욱 날카로워진 것인가?

=나는 한국어를 사랑하지만, 한국인이 한글로 쓴 책만 읽고서 무얼 좀 알게 되고 또 똑똑해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유감스럽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본다. 때문에 필요한 것이 좋은 번역이다. 특히나 고전들의 번역(‘우리시대의 고전’들을 포함해서). 기본적으로 좀더 많은 책들이 좀더 정확하게 번역되어야 한다. 그게 총론이다. 번역상의 오류 등에 대한 지적은 각론에 해당한다. 읽을 만한 책을 읽고 싶다는 개인적인 바람도 거기엔 겹쳐 있다. 더구나 내 돈 주고 산 책 아닌가?

그러한 작업과 관련하여 외국문학 전공자라는 정체성을 크게 의식한 적은 없다. 사실, 내가 문제삼았던 책들은 대부분 문학서들이 아니라 철학서나 이론서들이었다. 나는 그 책들이 교양서라면 일반 대학생들이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적어도 한국어로 된 책 아닌가?).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

한 지방대학에서 문화기호학 같은 과목의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시키지 않았는데도 어려운 이론서들을 읽다가 나가떨어지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아무래도 머리가 나쁜 듯하다면서. 그런데, 그들이 읽은 책들 가운데도 주어 술어도 못 맞추는 오역서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게 ‘학문’이고 ‘관행’이라면 어처구니없을 뿐더러 비참한 일이다.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책들과 함께 우리가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당신은 교육 잘 받은 세대로서 풍요로움과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직업을 유전 받지 못한 세대로서의 곤궁함과 난처함 또한 당신의 몫이다. 당신의 풍요로움과 곤궁함에 관해 듣고 싶다.

=교육 잘 받은 ‘세대’라는 건 무슨 뜻인가?(어느 세대와 비교해야 하는 것인가? 아버지 세대?) 교육 ‘잘 받은’은 대학원졸을 의미하는 건가? 그런데 백수인? 나의 ‘실상’을 까발려놓으라는 얘기 같다.^^ 나의 풍요로움은 물론 책이다. 책밖에 없기도 하다. 가진 재산이라고는(지방 도시의 아파트 한 채 값 정도는 책값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러니까 나의 곤궁함은 정확히 그 풍요로움이 낳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곤궁은 확산력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곤궁에 시달린다(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시달린다!). 이런 문제를 자세히 늘어놓는다는 건 궁상맞은 일이다.^^  

-사람들은 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한다. 어느 때도 인문학이 위기에 놓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위기’란 인문학적 역사가 된 듯싶다. 이것이 비록 상투적인 얘기가 되어버렸다고 한들, 당신 나름대로의 대답을 갖고 있을 텐데 (그것이 비록 상투적이라고 하더라도) 들려달라.

 

 

 

 

=사안은 좀 다르지만 문학이고 인문학이고 늘 위기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회고적으로라도 ‘그때가 좋았지!’ 할 만한 시절은 있는 법이니까. 더불어, 나는 (인)문학 자체의 위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느낌을 갖고 있지 않다. 사회 속에서의 위상이 저하되고 있다든가 필요가 절하되고 있다는 식의 평가는 가능하겠지만 (인)문학 혼자 억울할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건 인문학자의 위기, 내지는 인문학 후속 세대의 위기이다. 물론 이 위기의 빌미는 태생적인데, 그것은 (인)문학이 기생적이라는 데 있는 듯싶다. 자기 스스로 밥벌이하는 게 아니라는 것. 보다 실감나게 말하자면, (인)문학 ‘공부’가 기생적이다. 이 공부는 있는 집 거덜내고 없는 집 주저앉게 한다. 한마디로 멜랑콜리한 공부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인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굳이 있다면 생태학적이고 진화론적인 것이다. 학문 후속 세대를 배려하고 격려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가 있을 법하다. 그들은 각자의 풍토에 맞는 인문학의 부피와 깊이를 갖게 될 것이다.  

-인문학적 공간(혹은 장) 안에서 자신을 바라봤을 때, 현재의 당신의 자리는 어떠하며, 미래에는 어떨 것 같은가?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내게 주어진 자리가 있고 찾아가야 할 자리가 있다. 즉, 해야 할 몫이 있고 나잇값이 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 해야 할일은 많다. 물론 일차적인 관심은 그것들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리보다 중요한 것은 책임이다. 인문학도로서 나는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의 지분을 넓히면서 인문학이 더 많은 책임을 떠안도록 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인문(人文)은 ‘사람의 무늬’란 뜻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 인문학의 책임은 우리가 ‘무늬만 사람’인 이들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나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많이 읽어야 하며, 제대로 읽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은 자기 고백적인 글을 쓸 때, 시와 시인을 인용하곤 한다. 그리고 어느 글에서인가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날카로운 태도를 취한 바 있다. 시(인)란 당신에게 무엇인가?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었나?^^ 20대 초반에 많은 시들을 읽었고 몇 권 분량의 시도 썼다. 인문학이란 궁극적으로 ‘말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고 사랑이다. 시라는 건 그러한 관심/사랑의 최적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의 시인 르네 샤르는 시를 ‘영혼의 끼니’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러한 끼니로 ‘비만한’ 영혼들을 좋아한다. 한편으론 ‘찌라시’ 수준의 강파른 언어를 혐오하고. 물론 시인들은 그런 ‘끼니’가 될 만한 시들을 쓸 책임과 의무가 있다. 저급한 시들로 식중독이나 걸리게 하면 안된다.   

-당신에게 있어서, 혹은 당신의 글쓰기에 지식이란 어떤 쓸모를 갖는가? 당신은 주로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글을 쓰는 편이다. 그렇지만, 러시아에서 보내온 ‘편지’들을 돌이켜보면, 시적인 감수성으로 씌어진 글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도 엿보인다. 현재 당신의 글쓰기는 당신을 얼마만큼 드러내고 있는가.

=<텍스트>는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글들이 원래 체질에 잘 맞는 건 아니다. 러시아인들이 대개 그렇듯이 나도 주정적인 면이 강하다. 한데, 그러한 면이 걸러지지 않은 채로 드러나는 걸 혐오하는 편이다. ‘시적인 감수성’이 ‘너절한 감상’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시는 그냥 언어만이 아니다. 시는 삶이고 삶의 파토스이다. 나는 니진스키의 일기를 시로 읽는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라는 걸 읽으며 나는 울고 싶지만, 대신에 쓴다. 이러한 울음이 감상으로 함부로 절하되는 걸 혐오하고 경계하기 때문에 이론적이고 논리적으로 쓴다.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가?   

-지금 당신은 진정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는가?

=마지막 질문은 의외이다. 보통은 “당신이 진정 쓰고 싶은 글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게 예의 아닌가?^^ 아무래도 쓰고 싶은 것보다는 써야겠다는 걸 더 많이 쓰게 된다. 만약에 직업이 ‘공부’가 아니라 전업 작가라면 한두 달에 한권씩 책을 낼 만큼 쓸 생각도 있다. 어쩌면 그게 더 ‘자아실현’에는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한데, 문제는 내가 쾌락적이면서 또한 너무 금욕적이기도 하다는 데 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만 한다. 나는 진정 쓰고 싶은 걸 내내 아주 조금씩만 쓰게 될 듯하다...

06. 0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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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세계에서 가장 황당한 FTA를 보여주마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16716&section=section2&wdate=1155436920

FTA의 'A'는 아로마로 아는 현실에서
 
얼마 전 한 케이블 방송에서 소개팅을 하는 오락프로그램을 봤다. 그 프로그램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는데 바로 한 남자가 무식한 여자는 싫다면서 FTA의 약자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는데 5명 중에 알고 있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그 중에 한 여성이 FTA의 ‘A’가 아로마(Aroma)를 뜻하는 게 아니냐는 말처럼 FTA가 향기를 머금은 낭만적인 단어로 보기에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가혹하다.
 
공중파 토론회에서도 FTA를 자주 다루고는 있지만 대중들에겐 이들 오피니언 리더들의 ‘말의 향연’이 그저 고담준론, 신선들의 수다로써 공허하게만 들리는 듯하다. 그러니까 대중들도 막연하게나마 FTA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심증은 있는 데 물증은 없어 답답해한다고나 할까.
 
때마침 이러한 대중들의 앎의 갈증을 풀어주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책이 나왔다. 바로 대자보 논설위원이자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인 우석훈의 역서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는 한미 FTA에 대한 대중들의 접근과 이해를 도울 탁월한 안내서로서 반가운 출판이다.
 
FTA에 관한 대중의 이해를 돕는 안내서로써 탁월
 

▲한국FTA 협상의 허술함과 치명적 독소를 예리하게 해부한 우석훈 박사의 역서     © 녹색평론, 2006
본서의 시작은 대중들에게 한미 FTA가 대두되기까지 세계무역체계에 대한 GATT부터 시작하여 WTO, MAI, BIT 등의 개론적인 통상개념을 정리하면서 FTA의 역사적 배경의 이해 돕기를 시도하고 있다.   
 
다음장에서는 두 개의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 하나는 KIEP(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한미 FTA 효과에 대한 데이터 조작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통계를 다루는 어려운 부분이라며 넘어가도 된다고 밝혔지만 월간 <말>지의 KIEP 데이터 조작 특종에 대해서 대중들이 이정도면 쉽게 풀이되었고, 또한 이해해야만 한다고 본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KIEP가 한미 FTA 효과를 측정하는 데 사용했던 CGE 모델이라는 게 무엇인가부터 시작하여 KIEP의 억지논리에 대해서 공박했다. 이 책을 읽는 백미중의 하나로 단연 손꼽을 수 있으며 더불어 조지 오웰의 <1984>에서나 나올 법한 조작의 진수가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독자들은 치를 떨기 충분하다.
 
과연 정부는 미국, 한국시장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또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을 필두로 한 친미 성향 엘리트들의 한미 FTA에 대한 자신감에 대해서 저자는 미국시장과 한국시장에 대해서 과연 그들이 얼마나 충분히 알고 있는 가를 의문을 던진다. 
 
“지금 한미 FTA에서 외교부가 상대하는 협상대상은 세계에서 가장 통상협상을 잘 한다고 말하는 미국무역대표부(USTR)이고, 이들은 사실상 전세계를 통치한다는 공포의 미 국무성 그 자체다. 게다가 그 뒤에는 자국 대통령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무섭도록 노련한 상원의원들과 지역주민들에게 뭔가 보여주기 위해서 호시탐탐 ‘한 건’을 노리고 있는 젊은 하원의원들이 ‘독사 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 실제로 필요한 미국의 시장별 디테일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것 같다. 하다못해 미국 협상에 관여하는 50대 중요 협회의 명단과 조직체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지금 누구를 실제로 상대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테이블에 나가는 것이 아닌가.”(94~95쪽)
 
본서에서 면면히 나타나고 있는 수년 간 국제 협상에 참가했던 저자의 경험에 비추면 저자의 경고가 결코 과유불급이 아니다.
 
계속해서 한국시장에 대한 정부의 파악능력에 대한 핵심적인 의문점은 한국의 순환보직제의 폐해를 들고 있다.
 
“실물경제를 이해하느라고 잔뼈가 굵은 담당관 시스템(서구, 일본)과 한국의 순환보직제에서 발생하는 정부 담당관에서의 ‘전문성’ 차이는 굳이 수치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래서 문제가 터진 다음에 담당관들이 ‘현황파악’을 하게 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구조화되었다.”(99쪽) 
 
이 책의 백미 중에 하나로 다음의 서비스업에 대한 저자의 서술이다. 국제표준산업분류에 맞추어 크게 전기가스수도사업, 건설업, 도소매 및 음식숙박업, 운수창고 및 통신업, 금융보험업·부동산업, 공공행정·국방 및 사회보장행정 서비스, 사업 서비스, 교육 서비스, 보건 및 사회복지 서비스, 기타 서비스업으로 나누어 한미 FTA 효과를 예측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각자 자신의 직업에 맞추어서 살펴보도록 하고,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실제로 한미 FTA 체결로 인하여 이익을 보는 업종도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말을 계속해서 들어보자.
 
“건설업은 한미 FTA를 통해서 확실히 좋아질 것이 분명한 거의 유일한 분야이다. … 그렇지만 건축학과에 진학을 고려하고 있는 경우라면 취업을 위해서라도 대학교 단계에서 미리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111~112쪽)
 
“(통신업에 대하여) 인터넷 못 한다고 먹고사는 데 큰일 나는 것 아니므로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블리자드사(社)에서 나오는 게임을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늘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115쪽)
 
“정부에서는 한가지를 알고 있다. 병원 안 간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물론 그렇기는 하다. 돈 없어서 병원에 못 가는 것이 서럽기는 해도, 아프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니다. 약초요법과 전통요법 등 ‘대체의학’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도 있다.”(128쪽)
 
저자는 한미 FTA에 대해서 전면적 반대보다는 이렇게 친절하게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노마진’식의 유머를 통해서 독자들이 각자 알아서 판단하기를 요청하는 듯한 데 씁쓸한 개그다.
 
우석훈의 ‘노마진’표 개그의 절정은 미장원에 대한 분석이다. 저자는 “개방에서 살아남고 성장한 거의 유일한 자영업이 바로 미장원”이라면서 “그깟 미장원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동네 서점과 음반가게, 그리고 구멍가게가 무너진 이후로 미장원들이 거의 유일하게 지역경제와 동네를 지키고 있는 셈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미 FTA 이후 미장원의 생존 여부가 중요한 지표”(125쪽)로 보고 있다.
 
그나마 개방화에 맞섰던 업종마저 증발시키는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
 
저자의 미장원 인용은 좀 더 넓은 범위를 함축하고 있다. 바로 통상을 공부하면 기본적인 개념 중 하나인 포지티브 리스트(Positive List)와 네거티브 리스트(Negative List)다. 여기서 잠깐 개론적인 수준에서 이들 개념을 들춰보면 한국은 “1963년 GATT에 가입하면서부터 무역관리제도를 포지티브 시스템에서 네거티브 리스트 시스템으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특수한 품목을 수입할 때만 허가를 얻도록 하는 수입개방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1977년 경상수지가 균형을 이루게 되면서 수입자유화가 추진되었다.”(이희연, 경제지리학, 법문사, 551쪽)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론적 수준의 수입자유화 논의고 FTA에 있어서 그간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에서 호주와의 FTA 체결부터 바뀌게 된 네거티브 리스트는 GATT 수준의 자유화를 넘어서 “한국에 적용될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은 열거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예외 없이 개방하고, 별도로 명시되지 않았다면 아무런 보호장치를 둘 수가 없”(우석훈, 같은책, 246쪽)는 강력한 장치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미장원 프렌차이징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미국회사가 생겨나 한국 시장의 잠재력에 눈을 돌리는 순간, 언제라도 20만개의 동네 미장원이 허공으로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246쪽) 앞서 말했듯이 ‘개방에서 살아남고 성장한 거의 유일한 자영업인 바로 미장원‘이 망한다는 것은 일반 대중의 일상적 삶과 직업에서 한미 FTA의 직접적 파급이 얼마나 촉각적인지를 나타낸다. 
 
논의의 여지가 남아있는 것
 
우석훈은 87년 체제에 대한 장단점을 짚으면서 현재 급한 불을 끄는 수단으로 “2007년 대선정국에서 ‘한미 FTA 조기 재협상’이 대선 최대공약으로 상정되는 것”(252쪽)을 기대하고 있다. 스위스가 국민투표(레퍼랜덤)을 통해서 미국과의 FTA 협상을 중단시킨 사례를 통해서도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라크 파병에서의 국민여론 무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국민의 의견무시가 반복되고 있는 사안에서 진보성향의 씽크탱크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에서 내놓은 국민직접정치의 실현을 위한 국민소환권, 발안권의 현실화, 생활정치의 활성화, 거주지 보다 직장 우선의 선거구 제안, 시민감사제, 청빈관료제 등 그동안 유럽의 사민주의 정치를 이상적인 모범답안으로 제시한 수준이 아닌 보다 한국정치지형을 감안하고 고민한 재기발랄한 대안 등의 보다 근본적인 접근과 해결책 논의가 남아있다.
 
또한 저자도 황우석 사태를 언급하면서 현 정부의 ‘무오류 집단최면 시스템’에 대하여 지적했듯이 초역사적이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미 FTA를 비롯한 동북아 정치경제 지형은 100여 년 전 한반도의 위기와 너무나 흡사하다.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지식인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여 일본이 조선을 병합해야 한다는 주장을 여과없이 받아들인 그의 애제자 천재 윤치호의 ‘소신적 친일파’로의 변신은 얼마 전 <한겨레>가 입수한 2005년 9월 12일치 '제5차 대외경제위원회 안건' 자료의 내용에서도 나타난다.
 
이 문서에 따르면 FTA 추진에 있어서 미국의 두 지식인의 발언 “미국에 앞서 중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할 때, 워싱턴에서는 충격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엄청난 실수(enormous mistake)가 될 것”,“미국 조야에서 불만의 소리(some unhappiness)가 들릴 것”이라는 경고에 지레 겁먹고서 중국과의 FTA 협상을 미루고, 한미 FTA로 선회한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관료들의 사대주의성에서부터 ‘소신적 친미파’의 모습이 포개어진다. 
 
대체 이러한 엘리트 정치의 오만은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가. 몇 년 전 이삼성의 책에서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는 깔끔한 단어가 떠오른다. 자발적 노예주의.
 
대안에 대한 고민, 실천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어져야
 
장하준 교수가 익히 지적했던 선진국의 후진국에 대한 ‘사다리 걷어차기’, 즉, 선진국의 ‘반칙’을 경제사(史)적으로 꼼꼼히 증명한 수준의 비판은 이제 대안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문제는 대안의 실천유무다. 대안의 실천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론의 실천으로의 연결이 단락된다면 다시 처음에 지적받았던 고담준론으로 돌아갈 뿐이다.   
 
미국에 대항하여 남미 좌파정권을 중심으로 한 자유무역지대인 ALBA를 제안한지 일년이 지난 지금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는 FTA에 맞서 인민무역협정(PTA·People’s Trade Agreement)을 체결하여, 쿠바는 볼리비아의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의사와 교사를 파견하고, 베네수엘라는 볼리비아에 석유를 제공하게 됐다. 지정학적으로 결코 미국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들 국가들의 발칙한 상상력이 실천으로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목도할 때 이들 세나라보다 경제수준이 결코 낮지 않은 한국이 대안의 실천을 이루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이번 우석훈의 저서는 대중들이 실제 자신의 생활세계에서 한미 FTA가 어떻게 침투할 지에 대한 실질적 체감을 할 수 있다는 점과 한국 최고 엘리트들이 모였다는 외교통상부의 협상전략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저자 자신의 협상 경험을 토대로 공박하고 있다는 점에서 FTA를 보는 또 다른 시선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데 출판의 의의가 있겠다. 독자들의 일독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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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딸기 > [퍼온글] 화장품, 만드는 법 알게 되면 못 쓸 걸?

 

[오마이뉴스 김현자 기자]

 
▲ <화장품, 얼굴에 독을 발라라>
ⓒ2006 미토스

최근 고민되는 책 한 권을 읽게 됐다. 바로 오자와 다카하루의 <화장품, 얼굴에 독을 발라라>(미토스)로 화장품의 실체를 밝히는 책이다.

'화장품, 계속 발라야 하는 걸까?' '어떤 화장품을 믿어야 할까?' 20년 넘게 화장품을 써 온 나로서는 여간 고민스러운 선택이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화장품의 실태, 그 놀라움도 나에게는 여전히 고민스럽다.

석유에서 뽑아낸 '합성계면활성제'가 화장품의 주원료라고? '합성폴리머'까지? 비누로 잘 지워지지 않는 화장품을 지워내는 클렌징 오일은 합성계면활성제의 함량만 다를 뿐 주방세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주방세제로도 얼굴을 닦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주방세제는 합성계면활성제 30~40%를 물에 녹인 것이오, 클렌징 오일은 합성계면활성제 10~20%를 물에 녹인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최근 몇 년 동안 화장품의 공해와 독성에 대해 조금씩 밝혀지면서 조금이나마 안정적인 화장품을 쓰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이 믿고 선호하는 '무첨가' 화장품의 실체는 어떤가!

"화장품, 특히 영양크림은 물과 기름을 유화시켜 만든다. 기름은 산화되고 냄새도 난다. 따라서 화장품에는 방부제와 향료 등이 첨가되어야 하는데 '자연=무첨가' '무첨가·무향료=안전'이라는 등식은 화장품 첨가물을 기피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화장품에 변질되지 않고 썩지 않는 원료가 쓰이게 되었다. 여기서 합성폴리머가 등장, 합성 폴리머로 에센스와 로션을 만들고, 식염수로 스킨의 점성도를 조절해 '무첨가' '무향료'라고 하거나...." - 책 속에서

넣을 것 다 넣은 무첨가 화장품? 게다가 합성폴리머까지? 기저귀, 생리대, 습기제거제 등에 쓰이는 '합성폴리머'는 1970년대에 폭발적으로 개발됐다. 수용성 합성수지, 합성고무, 합성 셀룰로오스 등이 모두 합성 폴리머다. 에센스와 로션뿐일까. 특별한 효과를 자랑하는 기능성 화장품일수록 합성폴리머는 많이 첨가된다. 무첨가 화장품은 물론 다양한 화장품에 합성폴리머가 쓰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충격이다.

주름개선화장품은 사기?

화장품에 대한 진실
<화장품, 얼굴에 독을 발라라>에서

▲ 세제로 성공한 회사는 화장품으로도 성공? ▲ 합성계면활성제에 의한 1차 화장품공해 ▲ 피부를 밀폐, 피부에 이로운 세균을 죽이는 환경공해 합성폴리머의 다양한 얼굴 ▲ 건조피부의 책임은 화장품에 있다? ▲ 주름개선화장품이 노화 촉진? 주름개선화장품은 사기다? ▲ SPF의 한계는? 자외선 차단제, 제대로 알고 쓰자 ▲ 기능성 화장품의 독과 미백화장품의 실체 ▲ 사망사고도 낸 의약부외품 믿지 말자 ▲ 젊을 때 화장이 노화를 부른다? ▲ 들어갈 것 다 들어가는 '무첨가' 화장품? ▲ 아름다운 피부는 피지가 많은 피부다? ▲ 건강한 피부를 만드는 방법은?
미용과학평론가요 화장품 전문가인 오자와 다카하루는 이 책에서 '주름개선제는 사기'이며 '바보가 쓰는 화장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름개선제의 진실을 보자.

신진대사가 빠른 표피의 세포 재생은 한 달 정도. 중장년층은 2~3개월 가량 걸리는데 화장품 하나로 1~2주 만에 주름이 펴지고 어떤 제품은 하룻밤 사이에 주름살이 펴진다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며칠 만에 진피까지 재생, 촉촉한 피부로 사라진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니 죽는 날까지 불로장생을 찾아 헤맨 진시황이 알면 살아 일어나 땅을 치고 통곡할 법하지 않은가!

"피부가 젊어져 보이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피부에 물을 넣으면 되는 것이다. 우선 화장품에 들어있는 합성계면활성제가 피부장벽을 파괴하고, 파괴된 피부장벽을 통해 합성계면활성제가 포함된 수면이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 피부는 부풀어 불룩해지고, 주름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주름개선제는 합성계면활성제와 합성 폴리머가 주원료인 서양식 보습화장품을 모방한 것이다. 수분은 피부에 흡수되지만 합성폴리머는 거대분자이기 때문에 피부에 흡수되지 않고 약간의 물기를 가지고 피부표면에 남는다. 그리고 서서히 물기는 증발해 생고무 같은 (매끈한) 피막이 되고, 이 피막이 피부 속에 있는 수분 증발을 막는 것이다."
- 책 속에서


이런 원리에 의해 합성폴리머 피막으로 표면은 매끈하고, 합성계면활성제 수용액으로 안쪽은 팽팽해져 주름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것으로 보이게 된다. 이때 합성계면활성제의 농도에 따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합성계면활성제 농도가 진할수록 효과는 빨리, 눈에 띄도록 확실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주름개선제의 원리를 전혀 모르는 소비자 입장에서 합성계면활성제가 많이 들어간 제품일수록 그 효과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의약부외품화에 이용당하는 미백화장품

이 정도의 사실만으로도 이 책은 충격이랄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이 파헤치고 있는 화장품의 실태는 이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로션, 에센스, 미백화장품, 클렌징 오일, 염색약 등의 실체와 제조현실을 알려주고 있다. 저자는 일본인, 일본의 현실일 뿐이라고? 글쎄 그럴까?

<화장품, 얼굴에 독을 발라라>는 화장품의 실태를 고발하는 책이다. 몇 년 전부터 기초화장만이 아닌 색조화장을 하는 남성들도 많아지는 현실이고 보면 화장품은 이제 생활필수품이나 다름없다. 우리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화장품. 그러나 정작 우리는 화장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 책은 화장품의 실체는 물론 화장품에 대한 바람직한 관심과 역할을 충분하게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화장품 전문가 '오자와 다카하루'는 누구?

저자 오자와 다카하루는 1938년생. 게이오 대학교 공학부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06년 현재 미용 과학 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화장품에 대한 여성들의 지식향상을 위해 올바른 미용과학의 보급과 기초화장품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그래도 독성 화장품을 사용하십니까?> <당신의 갈색 머리가 위험하다> <아름다운 피부를 갖고 싶다! 화장품 선택법> <좋은 화장품 나쁜 화장품> <머리는 비누로 감아라> <화장품 성분사전>등 화장품 전문가이다.

옮긴이 홍성민은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책으로는 <먹고 싶은 대로 먹인 음식이 당신 아이의 머리를 망친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100가지 비결> <뇌력사전> <내 아이의 10년 후를 결정하는 엄마의 힘> <재미있는 우리 몸 이야기> <식원성증후군> 등 최근 주목받았던 작품들을 다수 번역하였다.
<화장품, 얼굴에 독을 발라라>는 다 읽은 후에도 마음이 자꾸 쓰이고 고민하게 한다. 이 책을 통해 건강한 피부와 바람직한 화장품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아울러 우리가 이 책을 통해 관심 두어야 하는 것이 있다. 몇 년 동안 미루어 오다가 2006년 1월에 시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아직까지 시행되고 있지 않는 (우리나라의) 전성분표시제가 그것.

전성분표시제는 화장품에 들어가는 성분을 표시하는 것으로 바람직한 화장품제조와 직접 연관이 있다. 책에서는 일본의 전성분표시제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단어지만 소비의 주체자로서 꼭 알아야 하는 제도다.


덧붙이는 글
<화장품, 얼굴에 독을 발라라>-바보가 쓰는 화장품
-오자와 다카하루 지음/홍성민 옮김/미토스 2006.8.1/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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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신성을 향한 귀족주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남진우씨의 새 시집이 출간되었다.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문학과지성사, 2006). 그의 네번째 시집이라고 하는데, 시인으로서는 지난 81년에 등단했으니까 네 권의 시집은 (상당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과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내가 기억하는 남진우는 첫시집 <깊은 곳에 그물을>(민음사, 1990)과 첫 평론집 <바벨탑의 언어>(문학과지성사, 1989)를 펴낸 '젊은 남진우'이다(그의 평론집을 나는 지방의 시립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고 시집은 사서 읽었다. 내 기억에 그는 정현종론으로 등단했으며 초기에 '시운동' 동인들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적어놓고 보니까 시인으로서 먼저 등단하고서도 평론집을 먼저 낸 셈인데, 아무튼 군복무 때문에 휴학중이던 한 문학도에게 20대 초반에 시와 평론으로 등단하고 후반에 각각 첫시집과 평론집을 상자한 이 젊은 시인/비평가는 얼마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갓 스물에 쓴 것으로 보이는 그의 데뷔시 제목이 "로트레아몽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이었다. 요즘 같아선 '치기'로 폄하될 수 있겠지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런 류의 '포즈'는 시인다움의 징표였다. 가령 이런 시를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1
그 겨울 내 슬픈 꿈은 18세기 外套를 걸치고 몇닢 銀錢과 함께 외출하였다. 木造의 찻집에서 코피를 마시며 사랑하지 않는 여인의 흰 살결, 파고드는 快感을 황혼까지 생각하였다. 때로 희미한 등불을 마주 앉아 남몰래 쓴 詩를 태워 버리고 아, 그 겨울 내 슬픔 꿈이 방황하던 거리, 우울한 샹송이 정의하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그 숱한 만남과 이 작은 사랑의 불꽃을 나는 가슴에 안고 걷고 있었다.

2
밤 열시, 시계의 태엽을 감으며 그녀의 살속으로 한없이 下降하는 헝가리언 랍소디. 따스한 체온과 투명한 달빛이 적시는 밤 열시의 고독, 머리맡에 펼쳐진 十二使徒의 눈꺼풀에 主祈禱文이 잠시 머물다 간다.

3
날개를 준비할 것 낢, 혹은 우리의 좌절에 대한 代名詞. 솟아오름으로 가라앉는 변증법적 사랑의 이중성.

4
가로등이 부풀어 오른다. 흐느적거리는 밤공기 사이로 킬킬대는 불빛의 리듬. 안개는 선술집 문앞에 서성이고 바람은 취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걸어나온다. 쉬잇 설레이는 잠의 音階를 밟고 내가 바다에 이르렀을 때, 보았다. 아득히 밀려오는 파도와 살 섞으며 한잎 두잎 지워지는 뱃고동 소리,조용히 모래톱에 속삭이는 잔물결을 깨우며 한 여인이 꽃을 낳는 것을.

5
물결치는 시간의 베일을 헤치고 신선한 과일처럼 다디단 그대 입술은 그대 향기로운 육체는 깊은 昏睡로부터 꿈을 길어오른다.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박수를 치며
젖은 불꽃의 옷을 벗으라 나의 하아프여.

가만히 촛불을 켜고 기다리자.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地中海의 녹색 문을 열고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피어나는 연꽃 속에 눈뜨는 보석을 찾아.

6
子正이 되면 샤갈과 함께 방문하는 러시아의 雪海林. 모닥불 옆에 앉아 우리는 수평선 너머 사라지는 船舶을 그 긴 항해를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는군요. 바람 부는 海岸 푸른 고요 속에 목마른 자 홀로 남아 기도하는 子正의 海岸 그 어둠 속에 눈은 내리고 내리고 幼年의 마을 어디쯤 떠오르는 북두칠성. 地上의 모든 불빛이 고개 숙인다.

7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문학청년으로서의 감수성과 재능 이외에도 이국적 취향과 교양체험 등이 쉽게 감지되는 시인데,  사실 이러한 경향성은 남진우의 시세계를 관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몇몇 리뷰들을 읽다 보니까 문단에서는 기형도와 같은 연배의 시인으로서 '그로테스크'한 시적 경향을 보여준다고 이해되는 듯한데, 기형도의 등단작 '안개'(1985)와 남진우의 '로트레아몽' 사이의 거리는 현실과 환상 사이만큼이나 멀며 뚜렷하다. 그리고 그건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남진우의 시들을 읽어본 지 꽤 됐지만 그의 시에 가난과 실연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던가 의문이다(평론가 김현이 기형도의 유고시집을 해설하면서 지적한 기형도의 심리적 외상이다). 

 

 

 

 

'죽음'에 대한 관심 정도는 공유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경우에도 남진우의 관심은 보다 간접적이고 추상적이다. 비평가로서의 계열을 따지자면 남진우적 비평의 정점에 모리스 블랑쇼가 놓여 있을 것이다. 죽음과 언어, 이 두 가지가 나는 블랑쇼적 비평의 화두라고 생각하며 남진우의 비평의 특장은 죽음과 언어의 치명적인 매혹을 짚어내는 것이지 않나 싶다. 이때 '죽음'을 '신성'으로 '언어'를 '책'으로 바꾸어놓아도 무방하다. 실상 그의 시들 또한 그 두 열쇠어들의 자장 안에 놓인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1996)에서 <타오르는 책>(2000)을 거쳐서 이제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2006)까지. 그러한 시세계를 요약해줄 수 있는 문구로 '신성을 향한 귀족주의'를 고를 수 있을까? 그 귀족주의의 태생과 운명은 사실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노트에 이미 기입돼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때로 나이를 먹지 않는다... 

동아일보(06. 08. 12) ‘아득히 먼 사막의 길을 걸어 사자 한 마리/ 내 방문 앞까지 왔다/ 내 가슴의 샘에 머리를 처박고/ 긴 밤 물을 마시기 위해// 짧은 잠에서 깨어나 문득 눈을 뜬 깊은 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의 텅 빈 방.’(‘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에서)

이제 남진우(46·사진) 시인은 보이는 것을 노래한다. 앞선 시집들에서 그는 추상적인 것,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시를 썼다. 그러나 네 번째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에는 동물과 도시의 모습 같은, 금세 떠올릴 수 있는 시적 대상으로 가득하다(*'내 방문 앞'까지 찾아온 사자 한 마리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나?). 표제시 ‘새벽 세 시…’를 포함해 ‘긴 혀를 늘어뜨리고/두 눈에 푸른 별을 켠 개들’(‘저수지의 개들’)이나 ‘갯벌을 건너가는 꽃게 한 마리’(‘종일토록’), ‘해 저물도록 그림엽서를 팔던 소녀’(‘오래된 사원’) 등이 그렇다.

-그는 죽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적 믿음을 시로 옮기는 데 애써 왔다. 새 시집에서는 그동안 죽음과 어둠의 이미지로만 갇혀 있던 시어들을 풀어 준다. 구원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다. 시 곳곳에서 세속적인 세상을 순례하면서 성스러운 ‘무엇’을 찾아다니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이런 목적의식을 더욱 명료하게 한다.

-‘어스름이 내리는 강가/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물소 한 마리 느릿느릿 내 곁을 지나간다…뿔이 긴 소를 타고/ 저 물속으로 깊이 자맥질해 들어가면/거기 나를 기다리는 누가 있을까.’ 그러나 시의 마지막까지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는다.

-평론가 신형철 씨는 “스스로 성스럽지 못한 세상에서 스스로 성스럽지 못한 자의 회한과 동경이 그의 시를 낳았다”고 평한다. 이번 시집의 주제 의식이기도 하다. 상상의 공간에만 머물러 있던 시인이 세상으로 나와 이곳저곳을 다녀 보지만, 어디든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타락한 도시다. 생존경쟁의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시 ‘문 밖에서’의 한 부분.

-‘나는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즐비한 술집 앞엔 매일 얼어 죽은 시체가 발견되곤 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일 년 내내 기침을 해댔고/ 검은 안개 속을 허우적거리듯 걸어다녔다/ 거리의 검투사들은 찌르고 찔리며 환호 속에 죽어갔다.’(김지영 기자)

(*)기형도의 '안개'에는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죽었다"란 구절이 나온다. 거기에 비하면 "즐비한 술짚 앞엔 매일 얼어 죽은 시체가 발견디곤 했다"는 구절은 관념 혹은 상징이다. 그 상징의 세계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나는 그것이 남진우 시의 매혹이면서 아킬레스건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일보(06. 08. 13) 남진우 시의 본적은 묘지다. 때때로 책들의 무덤인 도서관이나 우물, 항아리 속으로 주거를 옮기기도 하지만, 파묻히는 곳이 아니면 가지 않는 그의 시는 한 번도 제 주소를 죽음이라는 본적지에서 전출한 적이 없다(*좋은 지적이다. 문학담당 기자라면 이런 정도의 지적은 해줘야 한다). 문학 평론가이자 시인인 남진우 씨가 네 번째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타오르는 책> 이후 6년 만이다.

-사자, 여우, 개, 호랑이, 악어떼, 벌, 전갈, 낙타 등이 끊임없이 출몰하며 ‘동물의 왕국’을 이루는 이번 시집에서 화자는 번제에 바쳐진 제물처럼 물어 뜯기고 찢긴다(*'사자'는 이 '왕국'의 왕이자 왕족/귀족이다). “한껏 아가리를 벌린 호랑이는 단숨에 나를 삼켜버리고” (‘먼 산 먼 길’), “책을 펼치면 전갈에 발뒤꿈치를 물린 채 낙타 등 위에 혼곤히 엎드린 내가 보인다” (‘전갈에 물리다).

-그러나 시인은 목 잘린 얼굴, 피눈물을 흘리는 깊게 파인 눈구멍, 절단된 사지가 나뒹구는 이 그로테스크한 세속 도시에서 순교를 앞둔 사도처럼 묵묵하기만 하다. 그가 “아득히 먼 사막의 길을 걸어 사자 한 마리/ 내 방 문 앞까지 왔다/ 내 가슴의 샘에 머리를 처박고/ 긴 밤 물을 마시기 위해”(‘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라고 쓸 때, “밤이면 밤마다 죽은 여인이 다가와/ 네 튼튼한 심장을 먹고 싶다, 조금만 다오 말했네// 두 팔에 안긴 채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내 심장을 먹어가며/ 죽은 여인은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고 쓸 때, 시인은 아픈 몸을 내주며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똑딱거리는 심장이 그마저 멈출 날을 기다릴 뿐”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추적자가 문을 두드리는 이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에 “방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문 밖에서’)고, “내 인생에 더 이상 반전은 없다” (‘나는 흑색 소설만 읽는다’)는 것을 익히 아는 탓이다.

-이 시인의 시 세계를 구축하는, 성(聖)을 향한 귀족주의는 ‘새벽 세 시…’에서도 여전하다. 세속 도시를 떠나 앙코르와트로, 반얀트리 밑으로, 카타콤으로 순례의 행보를 내디뎌 보지만, “순례자 대신 장사치와 관광객들로 붐비는 거리/ 영혼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자들이 비좁은 계단 사이 어깨를 부딪치며/ 값싼 지폐와 시성을 교환하기 위해 오”가는 이곳에서 그의 시는 홀로 성스럽고자 하는 자의 고독으로 울울할 뿐이다.(‘몽생미셸’)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선지자조차 지쳐 떨어진 밤/ 길가 하수구는 붕글어 터지는 말의 거품들로 가득”하고 (‘겨울일기’), 그는 다만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라던 기형도의 '켤레시인'답게 읊조릴 뿐이다. “흑색 소설을 읽으며 오늘도 나는 확인한다, 모든 길 끝엔 파헤쳐진 무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흑색 소설만을 읽는다’)(박선영 기자)

문화일보(06. 08. 11) 남진우(46)씨의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마리>는 한밤에 깨어있는 새벽에 깨어있는 예술가의 고독이 구원을 지향하는 순례자의 언어로 푸른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들은 세속 도시의 타락에 대한 절망을 겉에 묻히고 있 다. 이 때문에 속에 배인 푸른 기운의 유열을 맛보기 위해선 시 인이 구축한 언어의 수도원, 혹은 사원에서 참을성 있게 순례자 의 기도를 들어야 한다. 이런 인내가 오늘날의 시독자들에게 얼마나 있을까마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세상의 허무와 맞대응하며 먼 곳의 신성(神性)을 열망하는 시세계는 우리 시문학사에서 드문, 독자적인 영역의 신비로움으로 읽는 이를 매혹한다 .

-1부의 시편들은 여우, 개, 사자, 반달곰, 호랑이 등의 동물들이 나타나 시의 화자가 세속도시에서 느끼는 절망과 갈증을 확장한 다. ‘아득히 먼 사막의 길을 걸어 사자 한 마리/ 내 방 문 앞까 지 왔다/ 내 가슴의 샘에 머리를 쳐박고/ 긴 밤 물을 마시기 위해 ’(표제작 중)

-2부의 작품들은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문밖에서’ 중)에서 삶 자체가 곧 죽음인 모습을 어두운 배경에서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앙코르와트와 인도의 사원 등을 순례한 후에 씌어진 3부의 시편들은 성소(聖所)를 잃어버린 자의 비애를 노 래하고 있다.

-‘저녁이 머뭇대며 내 주위를 에워싸기까지/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조용히 물살을 가르며 내게 다가오는 숲 그림자/ 나는 어 느덧 온몸을 휘감아 오르는 나뭇가지 푸르름에 휩싸여/ 아무도 찾지 못하는 사원이 된다’(‘오래된 사원’ 중).

-숲으로 된 푸른 성벽의 이미지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해 온 남씨가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시세계를 평하는 글에서 등장한 바 있다. “기형도의 시는 우리 세계에서 모습을 감춰버린 아름답고 신비 로운 성(城)을 찾아가는 언어의 순례이자 그 성을 은폐하고 그 성을 향해 가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좌절시키는 현실에 대한 강 력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남씨는 문우인 요절시인 기형도가 생전에 가다가 멈춰버린, ‘숲으로 된 푸른 성벽’ 너머의 신성을 찾아 순례자의 길을 고독하 게 걸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장재선 기자)

06.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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