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문제의 본질은 번역자다

필요 때문에 번역 문제에 관한 자료들을 검색하다가 작년 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발행하는 <기획회의> 18호(2005년 4월) 특집이 '번역출판의 오늘을 말한다'였다는 걸 알게 됐다. 특집기사들 중에서 한기호 소장의 글 '문제의 본질은 번역자다: 번역출판의 제도적 측면'을 옮겨온다.

 

 

 

 

-이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내내 나는 <아나 트롤>(창비, 1991)의 경험을 순간적으로 떠올렸다. 뛰어난 서정시인이자 정치풍자시의 대가 하인리히  하이네의 대표적 장편풍자시 <아나 트롤>과 12편의 시사시를 번역 수록한 이  책은 1991년에 시인 김남주의 번역으로  창비에서 출간됐다(*이 책은 현재 절판중이다). 당시 그 회사 영업책임자이던 나는 교정지에서 접한  번역문의 유려한 문장에 반해 <아나 트롤>에 대해 더 상세하게 알고 싶었다. 그래서 <아나 트롤>을 다룬 석사논문을 찾아 읽어보았는데 논문 속의 인용문은 교정지의 번역문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석사논문 속의 인용문은 그냥 뜻이나 통하게 옮겨놓았다고나 할까? 내가 만약 그 인용문 수준의 글부터 읽었다면 과연 <아나 트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게 되었을지, 책이 만약 그런 수준이었다면 책을 구해 읽었을지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날 표면적으로는 번역출판의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전체 발행종수 가운데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 15%에서 2003년 29.1%로 2배 가까이 늘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만화와 아동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 두 분야를 제외하고는 역사 분야가 평균 성장률과 비슷하고 나머지는 모두 밑돌고  있다. 결국 출판시장의 성장에 비추어보면 질적으로 상당한 퇴보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번역출판을 놓고 단순한 통계수치만으로 ‘상당한 양적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분석이 없지 않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속빈 강정’임을 알 수 있다.  

-이런 흐름은 2004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됐다. 2004년에  번역서는 전체 발행종수 35만394종의 28.5%인 10만88종으로 2003년과 비슷하다. 만화(3108종)와 아동(2245종)을 합하면 여전히 번역서의 절반을 넘는다. 단지 아동은 늘어나고 만화가 줄어들었을 뿐이다.

 

 

 


-번역서의 번역 수준은 우리 출판의 아킬레스건이다. 한 마디로  앞에서 예를 든 석사학위논문 인용문 수준의 번역문을 그대로 담은 책들이 줄줄이  출간되고 있다.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이 영미 문학 대표작 가운데 ‘친숙하게 읽혀온’ 작품의 변역 수준을  평가한 결과에 따르면 “영미문학의 번역은 양적인 풍요와 질적인 빈곤으로  요약될 수 있다. 대상 작품들의 번역서로 최종 검토 대상이 된 완역본은 총 573종인데 이중 추천할 만한 번역본은 모두 61종(11%)에 불과하다.

-대략 10권  중 한 권 정도가 믿고  읽을만한 번역본인 셈이다. 추천본이 없는 작품도 전체 작품의 3분의 1이 넘는다. 소설의 경우에는 추천본이 전체 번역본의 6%에 불과”했다. “비소설의  경우는 추천본 비율이  높으며(29%), 추천본의 종수가 가장 많은 것도 ‘햄릿’(10종)”이었지만 “검토본 가운데 반수 이상(54%ㅎ310종)이  표절본으로 그대로 베낀 것부터 짜집기, 윤문潤文까지 다양한 형태를 확인” (1) 할 수 있었다.

-여기서 표절의 책임은 대부분 출판사에 있다. 특히 잘 팔리는 책, 독자에게 친숙하게 읽혀온 문학서적의 경우에는 출판사가 기존에 출간된 책을 적당히 윤문해 중복 출판하는 경우가 성행했기 때문이다. 번역출판으로 꽤 명성을  날린 출판사들도 실제로 이런  행태를 자행하고 있음을 수없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영미문학연구회의 평가결과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책임은 먼저 번역가가 질 수밖에 없다. 미디어 평론가 변정수는 그 자신을 비롯해 수많은 편집자들이 “번역 텍스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거의 ‘공역자’ 수준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고  지적한다. “명목상의 역자는 결과적으로 고작해야 초벌 번역의 수고를 해 주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게 되고 편집자가 “사실상의 번역자 노릇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내 저작물에  빗대자면 거의 ‘섀도 라이터’에 해당될 정도의 역할”(2)을 하고 있는 셈이다.

-꼼꼼하게 공들인 번역으로 소문난 유명 역자들은 편집자가 거의 손을 볼 필요가 없는 완벽에 가까운 텍스트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겠지만 대부분은 편집자가 ‘공역자’에 준하는 역할을 하거나 심지어 거의 ‘재번역’을 해야 하는 수준의  번역문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편집자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사실상 대다수의 편집자는 원문대조도 하지 않고 오탈자나 잡아내는 수준의 교열에  머무른다. 그래서 전문편집자의 필요성이 절실하지만 그런  편집자들이라도 ‘교수’의 직함을 달고 있는 학자 번역자의 경우에는 십중팔구 재번역해야 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교수들과 일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학자들이 번역에서 그들만이 이해하는 용어로  그들만의 ‘언어게임’을 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아나 트롤>
수준의 번역보다 못한 번역 원고가 그대로 출판사로 들어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편집자들은 ‘교수’가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조교’나 다른 대행자들이 번역을 대신한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것이 다반사다.  

-상황이 이런데도 편집자들이 ‘사실상의 번역자’ 노릇을 감수하면서 십중팔구 믿지 못하는 교수에게 매달리는 것은 ‘손을 볼 필요가 없는’ 번역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능한  몇몇 번역가들은 밀린 일이 많아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차선으로 선택하는 것이 전문번역회사다. 한 출판번역전문회사의  대표는 “국내 산업번역 규모가  1조원 대에 달하고 그리고 영상미디어 번역이 5천억 원, 출판번역시장이 5천억 원에 달한다”고 전망했는데 시장은 이렇게 크지만 양질의 번역을 빠르게  해줄 수 있는 번역가가 많지 않아 이런 업체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번역전문회사는 대부분  번역지망생과 출판사를 연결시켜주고  커미션을 챙기는 중간업자에 불과하다. 이 회사들은  보통 번역료의 30% 가까이를 챙긴다.  출판사가 지급번역을 요청할 경우에는 원고를 여러 사람에게  쪼개서 번역한 것을 모아 한두  사람이 죽 읽어가면서 획일성만 기하기 마련인데 이런  원고의 수준은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전문번역회사들은 출판사와 번역자들이 만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해 번역자들이 편집자와 만나 번역의 질을 상승시키는 길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리고 번역자가 교열을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하는 병폐가 있다. 하지만 속도를 요하는 분야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출판사들까지 이런 전문번역회사를 애용하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더 많은 전문번역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번역료가 낮기 때문이다. 상위 출판사의 경우 영어는 3500-4000원, 일본어는 2500-3500원, 프랑스어나 독일어는 3500-4000원 수준이다. 물론 수준이 보장되는 전문번역가는 이보다  높은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낮은 경우가 더 많다.  일본의 법인 또는 단체가 일본책의  한국어 번역료를 통상 10,000-15,000원 수준에서 지원하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 번역료가 어느 수준인가를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의 번역료는 몇 년  전의 수준에 머문 것이어서 물가상승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갈수록 뒤쳐지고 있어 번역에 ‘목숨’을 거는 번역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최근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시행하고 있는 고전 번역 지원사업에서는 번역 원고료를 10,000원 안팎으로 책정하고 있다. 나도 신청중인 과제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의 대우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번역에 나서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더구나 인세일 경우 한달 평균 100여 만원 정도의 보상을 기대하면서 번역에 '목숨' 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특히 전문영역에 속하는 책들을 맡아주어야 할 학자들은 번역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사명감에 충만하거나 특별한 인간관계가 아니면 일부러 나서려  들지 않는 것이다. 우선 번역료가 너무 싸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번역을 학문적  업적으로 여겨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출판사는 고육책으로  번역료와 인세를 병행하는 정책을 쓰기도  한다. 기본 번역료는 보장하되 번역료 이상으로 책이 팔리는 경우에는 인세를 추가로 지급하는 방식인데 실제로는 추가 인세가 지급되는 경우가 흔치 않아 확실한 ‘유인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셜록 홈즈’ 시리즈의 사례처럼 인세로 계약한  대중서가 1백만 부나 팔려 평생의 고생을 보상할 수준의 인세가  나오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런  경우가 매우 드물기는 해도 이런 제도가 도입되면 번역자가 어느 정도 번역에 책임을 지려 들 것이다. 하지만 출판사는 기본 번역료를 감당하기도 어렵다.

-인문학, 철학, 과학 분야의 전문분야 출판사인 이제이북스는 지난 3년 동안 60권의 책을 펴냈지만 2쇄를 발행한 책이 단 2종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있다.(3)  이 출판사가  나름대로 번역에 매우  많은 공을  들여왔고 초판을 1000부 밖에 발행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출판사의 출혈투자가 없이는 도저히 책 출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제이북스의 경우는 며칠 전에 다룬 바 있다). 15,000원  정가의 책인 경우 1000부가 다 팔린다  해도 매출액은 1천만 원 내외다. 이 금액 모두가 번역료로  지급되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여기에 제작비, 인건비, 일반관리비 등을 부담해야 하므로 출간 즉시 적자가 발생하는 일이  다반사니 대다수 출판인은 출판을 기피한다.

-번역료가 낮은 근본적인 원인을 출판사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책을 읽지 않는 독자를 탓해야 할까? 물론 탓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독자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독자들은 철학을 쉽게 풀어주고 독해가 가능한 책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부실한 번역이 독자들을 떠나가게 만들었다는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의 뼈아픈 지적을 더 수용하려 들 것이다.


-결국 이 땅의 번역출판 부실은 어느 일방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내수시장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시스템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제도적 후원시스템을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선험적인 연구자들이 결론내린 바  있다.

-김선남(원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한 연구논문(4)에서 “전문 번역가의 부족, 낮은 번역료, 오역 및 중복 출판, 출판사의 과도한 저작권 확보 경쟁 등과 같은 출판사 내·외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번역출판이 활성화되기 위한 방안으로  전문번역인 양성 프로그램 개발, 번역활동 지원 단체의 확충, 번역 출판물 기획의 다양성 확보 등을 제시했다.

-이런 결론은 지난 수십 년간 내려졌고 물론 간헐적인 대응책은 있어왔지만 근원적인 대책은 세워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문 번역인은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 지원자만 모아놓고 교육만 시키면 해결이 될 것인가? 그보다는 전문적인 번역자가 전문편집자와 함께 일을 해가면서 번역의 질적 수준을 높여가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래서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주요 인문출판사와 공동작업을 하면서 번역학교를 따로 꾸리고 있는  것은 모범적인 사례가 된다. 이 단체는 이미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책을 여럿 내고 있으며 고전을 재해석한 ‘리라이팅’ 시리즈처럼 저작의 단계로도 올라서서 인문출판의 성공적인  모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앞으로 이런 모임이 더욱 많아져야 할 것이다(*한데, 이 리라이팅 시리즈도 작년부터는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출판시장이 갈수록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상황에서 상업성이 부족하지만 꼭  필요한 번역출판이 이뤄지려면 공공적인  지원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국가나 기업에서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이 근원적으로 가동되어야  할 것이다. 비단 이것은 번역서뿐만이 아니라 출판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도서관의 기본적인 존립목적인 정보 접근 평등성을 위해 도서관 스스로가 양서를 다양하게 구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공공도서관은 너무 ‘빈약’하다.

-따라서 소기의 성과를 빨리 이루려면 각급 학교도서관의 활성화가 시대적 소명이다. 학교도서관을 활성화하고 이를 지역 주민도 이용하는 기초생활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한 다음  공신력 있는 기구가 선정한 우수도서를 학교도서관이 의무적으로 구비할 수 있는  정책적·사회적 시스템을 갖추어 양서의 경우 5000-10,000부 정도가 소비될 수 있다면, 출판사들은 구태여 시류에 영합하는 책을 만들지  않고도 안정된 경영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출판뿐만 아니라 기초학문과 교육이 사는 길이고 결국 국가가  경쟁력을 갖는 일이다. 우수한 번역서를 여기에서 제외시킬 이유가 없기에 번역출판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정책당국자들은 예산타령만을 일삼지만 이런 일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예산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일 뿐이다.

-다양성은 무척 중요하다. 그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전문성도 중요하다. 지금 구조에서는 번역출판을 통해 한 분야의 전문성을 갖기가 쉽지 않다. “어떤 약삭빠른 출판사가 입도선매식으로 저자권계약을 맺어놓은 다음”에 “자격 없는 역자들을 동원하여 오역·졸역본의 출판을 남발하는 경우”에는 “저작권을 보호함으로써  마구잡이 번역을 막겠다는 원래의 정신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역설적 결과”(5)가 수시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물건이나 언어에는 반드시 그 배경에 주류와 계통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계통도에서 상위에 올라있는 책을 먼저 계약해놓고 책을 출간하지 않으면 하위에  해당하는 책을 펴낸 출판사는 고통만 겪을 확률이 높다. 이것은 원저작은 보지 못하고 비평서만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상호 협조와 양해를 통해  바람직한 조정이 이뤄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상황이 매우 열악하지만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앞의 ‘연구공간 수유+너머’도 희망적인 사례지만 영미문학연구회가 분석한 책들이 출간된 같은 시기에도 “고전  번역에 가담한 새로운 세대 전문연구자들의 활약은 고무적이다. 또  초기에 나온 번역본이 이후 어떤 번역본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 경우도 적지 않아 우수한 번역진의 층이 얇다고 만은 할 수 없다. 더 좋은 번역환경이 마련되고, 다수의 독자들이 좋은 번역을 선별해  읽을 수 있다면 번역 풍토의 획기적인 개선도 기대”(6)할 수 있다는 지적도 우리에게 기대를 갖게 만든다. 따라서 바람직한 비평을 통해 좋은 책을 선별해주는  사회적 시스템이 다양하게 정착되는 일 또한 바람직한 번역출판이 이뤄지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할 것이다.

(1)「번역 평가 왜 필요한가」<한국일보> 2004.2.16
(2)변정수,「번역 출판의 원숭이들」<기획회의> 8호 2004.11.5
(3)김현미,「우리말로, 철학하기, 출판으로 철학하기 -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
   <기획회의>10호 2004.12.5
(4)김선남,「국내 번역 출판물의 현황과 화성화 방안 연구」<한국출판학연구> 제43호 2001
(5)한정숙,「학술서적 번역 이것이 문제다」<국민일보> 1996.8.12
(6)김영희, 같은 글

06. 0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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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된장녀' 사회학

얼마전에 유행어가 된 '된장녀'에 대해서 사회학 논문 한편 정도는 씌어질 수 있다고 했는데, 논문 대신에 특집기사 거리가 먼저 되었다. 중앙일보의 기사이다(혹 논문 자료가 될지도 모르겠다).

중앙일보(06. 08. 16) '된장녀' 사회학 

-"사진 찍는 걸 좋아할 뿐인데, 이젠 커피전문점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사진 찍으면 '된장녀'로 오해받을까봐 걱정되네요." 회사원 이모(27.여)씨는 요즘 인터넷을 달구는 '된장녀' 때문에 색다른 고민을 하고 있다. '된장녀의 하루'라는 글의 내용과 유사한 행동을 할 경우 자칫 허영기 많고 속이 빈 된장녀로 '낙인' 찍힐 수 있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온라인에서 시작된 된장녀 문제가 오프라인으로 확대되고 있다. 허영에 물든 사회의 단면을 꼬집었다는 주장과 근거 없이 여성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왜곡된 인터넷 문화라는 반박으로 이어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 "패밀리 레스토랑 가면 된장녀?"='자기 치장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명품 가방으로 치장하고, 테이크아웃 커피점과 패밀리 레스토랑을 즐겨 찾으며 뉴요커(뉴욕사람)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있는 20대 여성'이 인터넷에 비춰진 이른바 된장녀의 모습이다.

-된장녀는 지난해부터 일부 인터넷 카페에서 20대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사용돼 오다 지난달 한 네티즌이 인터넷에 올린 '된장녀의 하루'라는 글이 확산되면서 '허영에 찬 여성들'이란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어 한 아마추어 만화가가 인터넷에 '된장녀와 사귈 때 해야 되는 9가지'라는 단편만화를 게재하고, '된장녀 키우기'라는 플래시 게임까지 나오면서 논란이 증폭됐다.

-온라인에만 떠돌던 된장녀는 최근 여성 연예인들을 통해 오프라인으로 진출했다. TV 오락프로에 출연한 한 여배우의 말이 발단이 됐다. "(처음 만난 남자가)할인카드를 사용하면 분위기를 깬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이에 네티즌들이 일제히 '된장녀'로 지칭하며 비난을 쏟아부었다. 이후 일부 연예인의 소비행태를 비꼬며 된장녀로 폄하하는 사례가 늘었다.

-최근 일어난 '가짜 명품시계' 사건이 보도되자 "가짜 명품을 산 연예인은 된장녀다"라는 댓글이 이어졌다. 네티즌 '배짱으로'는 "된장녀 논란은 허영심 때문에 안 내도 될 돈을 내고 소비하는 여성들의 삐뚤어진 모습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일반인도 '된장녀 공포'=최근엔 평범한 여성도 된장녀로 몰릴 수 있다는 공포에서 자유롭지 않을 정도로 문제가 커지고 있다. 회사원 고모(26.여)씨는 "나도 된장녀의 하루에 나오는 B원피스, L가방, I MP3 플레이어를 쓰고 있다"며 "남들이 된장녀라고 부를까봐 겁이 난다"고 하소연했다. 이는 중산층 여성의 생활습관이나 소비행태를 빗대 된장녀로 매도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중산층이 찾는 특정 제품과 상표를 마치 사치품처럼 부각시킴으로써 소비문화를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숭실대 배영(정보사회학) 교수는 "취업 등으로 불만에 쌓인 젊은이들, 특히 남성들이 이를 표출할 수 있는 통로를 찾지 못해 된장녀와 같은 대상을 만들어낸 것"이라며 "자칫 우리 사회에 만연된 편 가르기 현상으로 이어질까 우려된다"고 말했다.(한애란. 권호 기자)

된장녀서 파생된 말들

-허영심 가득한 미혼여성을 일컫는 '된장녀'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면서 '고추장남'을 비롯해 '머슴남' '된장아줌마' 등 아류 용어들이 범람하고 있다. 이런 용어는 '~의 하루'라는 내용의 글로 인터넷에서 유포되고 있다.

-고추장남은 된장녀와는 정반대 개념이다. 한마디로 경제적 능력이 없고 자기관리를 못하는 남성을 말한다. 잘 씻지 않고 유행 지난 가방을 갖고 다니며, 돈이 아까워 편의점에서 점심을 때운다. 주위에 친구도 없어 온라인 게임이나 인터넷 글 올리기로 시간을 보낸다.

-머슴남은 된장녀인 여자친구의 마음에 들기 위해 마치 '머슴'처럼 행동하는 남성을 일컫는 말이다. '술에 절어 일어났음에도 오늘은 여자친구를 만나는 날이라 행복하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머슴남의 하루'라는 글은 모든 생활이 여자친구 중심인 남성을 표현하고 있다. '(술이 안 깨) 토끼같이 빨간 눈을 본 여친(여자친구)이 뭐라 할까 걱정' '음식이 나오자마자 디카로 사진을 찍어 여친을 기쁘게 했다'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는 처음이라 감히 싫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등 그의 하루는 여자친구의 비위 맞추기에 집중돼 있다.

 

 



 

-된장아줌마는 결혼한 여성이 주요 타깃이다. 가정은 등한시한 채 주름을 펴 주는 보톡스 주사를 맞아 탱탱한 피부를 자랑하고, 옆 동네 임대아파트 때문에 집값이 떨어질까 걱정하며, 자신보다 작은 집에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주부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미국 시트콤 '섹스&시티' '위기의 주부들'등에 등장하는 30대 중반 이상 여성의 삶을 빗대 한국 주부들을 폄하하는 내용이다.(권호 기자)

06. 08. 16.

P.S. 그밖에 관련기사(내가 이 논란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사회의 실재로서의 '사회적 적대'가 어떻게 표출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래 기사는 성적 적대 관계/의식으로 이 문제를 해석한다. 

데일리안(06. 08. 11) 된장녀 논쟁은 남자의 질투심

-탤런트 김옥빈이 일명 ´흔들녀´에서 ´된장녀´로 불리며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검색 순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유명세를 떨치는 이유는 바로 ´된장녀´ 때문이다. 요새 인터넷 키워드로 떠오른 ´된장녀´ . 된장녀 키우기라고 해서 게임도 등장해 인기를 얻고 있는데, 제일 처음으로 된장녀가 알려진 계기는 ‘된장녀와 사귈 때 해야 될 9가지’를 만든 누리꾼 ‘번개돌이’ 임아무개(20) 씨의 작품이다. 이 만화가 인기를 끌면서 된장녀가 핫 이슈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된장녀의 정의는 설왕설래, 나름의 해석들이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는 여자들’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 욕설 ‘젠장’이 인터넷상에서 ‘된장’으로 변용되면서 ‘젠장녀→된장녀’로 바뀌었다는 설, 서양 문화·서양 남자에 무분별하게 열광하지만 근본은 결국 토종을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들을 비하해 일컫는 말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인터넷상에서 정의되고 있는 된장녀는 ‘전통적인 관습 중 여성에게 이로운 점은 당연시 여기고, 불리한 점은 불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들’을 말한다. 신데렐라 드라마에 빠져 명품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극단적 페미니즘을 신봉하여 남성을 혐오하면서도 남자들에 붙어 이득을 챙기려는 이중적 태도를 갖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단순히 ‘개념 없는 여성들’을 지칭하면서 ‘X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한다’는 말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된장녀 하면 허영심이 많은 여성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언뜻 도화선이 된 만화를 보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념으로 볼 때, 대체적으로 된장녀는 허영심이 많은 여자들인데, 할 일 없이 스타벅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거나, 매일 스타벅스에서 아침을 맞이 하는 여성들, 그리고 섹스 앤 시티에 열광하는 여자들이 된장녀들의 표본으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그녀들을 여성지나, 패션지에서는 유행을 선도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갖춘 여성들도 추앙하고 있다는 점이 된장녀의 논쟁을 근본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패션지는 이들을 ‘뉴요커를 꿈꾸는 여성들’ ‘코스모폴리탄을 꿈꾸는 여성들’이라 부르며, 유행이나 트렌드를 선도하는 집단으로 정의 내린다. 이 정의 마저 네티즌들은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된장녀의 논쟁에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섹스 앤 시티에 열광하는 여자들이 된장녀? 섹스 앤 시티에 주인공들은 된장녀? 라고 매도한다면 그것은 여성을 비하하고 깎아 내리는 것이다. 미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로,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섹스 앤 시티의 주인공 삶은 한 번쯤 여성이라면 꿈꿀 만한 삶이기 때문이다. 캐리, 사만다, 미란다, 샬롯은 어엿한 커리 우먼들이다. 각자 자신들의 일을 하며 사랑과 연애를 찾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가꿔나가는 뉴요커들이다.

-그러기에 이들을 꿈꾸는 여성들을 모두 된장녀로 치부한다면 곤란하다. 물론 드라마상에서 그녀들은 쇼핑과 연애 중동에 빠진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또한 일부 우리나라 여성들이 겉모습을 따라하는 풍조가 일고는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그녀들은 자신들이 직접 일선에 나가 돈을 벌어 그것에 대해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고, 인간에게 있어 빠질 수 없는 사랑, 남자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것을 누구도 욕할 수는 없다. 물론 캐리는 워커홀릭으로 캐리는 워커홀릭으로 너무나 비싼 구두를 사, 세를 내지 못해 쫒겨날 처지에 이르긴 한다. 또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남자 문제로 서로 전화를 붙들고 밤을 지새기도 하고, 이른 아침부터 비싼 아침식사를 하며, 남자 이야기에 열을 올리곤 한다. 문제는 그것은 어디까지느 드라마이고, 그 드라마에 주제에 맞춰서 스토리 전개가 되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실제 인물이라면 커리우먼으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고, 각자 자신들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부분을 드라마에서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리는 칼럼니스트, 미란다는 변호사, 샬롯(결혼으로 일을 그만 두기는 했지만) 큐레이터, 샤만다는 홍보대행사 사장으로 어엿한 직업을 가진 커리우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녀들을 무작정 된장녀의 대표주자로 보는 것은 어쩐지 억울하다.

-캐리의 경우 자신의 돈을 모아서 구두에 소비를 하고, 샤만다는 당당하게 섹스를 좋아하는 여성으로서 남자들에게 절대적으로 뒤지지 않은 모습이다. 오히려 그녀들은 당당한 뉴요커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할 수있다. 그렇기에 이쯤에서 된장녀의 실체를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그것의 실체를 믿고 안 믿고는 성별의 차이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된장녀라 불리는 여성들은 자신들을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된장녀를 주장하는 데 목소리를 드높이는 사람은 남성들이다. 그러한 여성들을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은근한 질투심에 불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성들이 주장하는 된장녀는 소비와 허영을 말하는데, 소비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특히 섹스 앤 시티의 주인공들을 된장녀의 표본으로 본다면 더욱더 소비는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브런치를 즐기고, 구두에 빠져있는 여성들이 아무때나 거금을 들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특정인 부분에서만 소비하고 있기에 누구보다노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다. 설사 쫄쫄 굶어가며 그러한 것들에 매달린다고 해도 각자 개인의 취향과 선택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된장녀의 논쟁이 계속 된다는 것은 여성과 남성의 대립일 뿐이다. 아주 소모적이면서도 불필요한 논쟁일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돈을 벌어 저축을 한 나머지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 돈을 소비한다는 것은 건전한 소비이다. 오히려 지지부지한게 돈을 알게 모르고 쓰는 비계획적인 소비가 지양되어야 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더욱더 이러한 된장녀의 논쟁은 남성들의 질투심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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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황해문화2006년 가을호(통권52호)

황해문화2006년 가을호(통권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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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해문화』 2006년 가을호(통권 52호)
 ■ 판  형 : 신국판
 ■ 면  수 : 456쪽
 ■ 발행인 : 지용택
 ■ 발행처 : 새얼문화재단
 ■ 발행일 : 2006년 9월 1일

한미 FTA 추진은 느닷없는 일이다. ‘느닷없다’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무엇이 나타남이 전연 뜻밖이고 갑작스럽다’로 풀이되어 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참여정부의 FTA 추진 계획에서 우선 대상국은 일본, 싱가포르, 멕시코, 캐나다, 인도 등이었다. 미국이나 중국과의 FTA는 우호적인 여건을 마련해가면서 점진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모든 FTA는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이러한 방침마저도 그 전의 방침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다. 여러 나라와 동시에 적극적으로 FTA를 추진한다는 방침이 정해지고 알려진 것은 2003년이다.

대통령이 한미 FTA에 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힌 것은 올해 초이다. 대통령은 결코 짧지 않은 신년연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주 짧게 밝혔다. 1월 18일의 신년연설을 작은 글자로 인쇄하면 열한 쪽에 이르는데, 그 중 열째 쪽에서 세 문장을 찾을 수 있다. “그동안 여러 나라와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해 왔습니다.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서 미국과도 자유무역협정을 맺어야 합니다. 지금 대화가 시작됐습니다만 조율이 되는대로 협상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서는 2월 초에 한미 두 나라는 FTA 협상 공식개시를 선언했고, 6월 초에 1차 협상이 워싱턴에서 시작되었다. 7월 초에는 2차 협상이 서울에서 계속되었다.

특 집│FTA와 대한민국
『황해문화』 가을호(통권52호)의 특집은 「FTA와 대한민국」이다. 편집위원 김진방(인하대 경제학부) 교수가 권두비평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서 밝히고 있듯 한미 FTA는 국민 모두에게 느닷없는 일로 다가온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초반 일선 검사들과의 토론을 기점으로 국민과 권력, 권력과 언론, 권력과 권력의 토론을 통해 대한민국을 토론공화국으로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토론을 통해 대의민주주의를 실현에 갈 것임을 공언해왔다. 그러나 한미FTA 추진 과정과 작전통제권 환수 그리고 평택 미군기지 확장 이전 문제 등 현재 진행 중인 그 어떤 사안들에서도 토론하는 정부, 토론하는 권력, 토론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어쩌면 “이미 대통령의 신념이 굳어지고 결단이 내려져서 추진되고 있으니 정부기관으로서는 검토하고 토론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정부와 대통령은 “그저 국민을 설득하려 할 뿐”이다. 과연 한미 FTA를 비롯해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대립은 과연 어떻게 진행되고 수습될 것인가? 대체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유종일(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참여 없는 FTA, 이대로 가면 안 된다」를 통해 현재 진행 중인 FTA 협상이 국민의 참여와 동의 절차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문제를 지적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현재의 FTA 정국을 놓고 개방과 쇄국 사이의 갈림길에 섰던 구한말을 빗대곤 한다. 유종일 교수는 구한말 주체적인 개방, 개혁 시도였던 갑신정변이 실패했던 까닭은 민중의 참여 없이 소수 엘리트들만으로 시도되었기 때문이며, 현재 추진 중인 FTA협상 역시 민중의 이해와 관심이 배제된 채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노무현 정부는 FTA 협상 반대와 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해 ‘쇄국주의’ 심지어 ‘반미주의’라는 식으로 이념적 덧칠까지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반대의 목소리는 개방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우리가 지난 김영삼 정부 때 이미 경험했던 것과 같이 무분별한 개방이 초래할 엄청난 결과를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종일 교수는 개방에는 혜택도 있지만 부작용도 따르기 때문에 우리 경제의 경쟁력과 성장 동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극대화하고 부작용은 극소화할 수 있는 개방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다 같은 외국자본 유치라 하더라도 론스타에 대한 외환은행 매각과 지멘스의 R&D 센터 설립은 기술이전, 고용창출 등”은 여러 면에서 매우 다른 효과를 초래했음을 지적한다. 즉, 이와 같이 개방은 단순히 일차원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이 있으므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임하되 국익을 극대화하는 분명한 전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FTA 찬성론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정인교(인하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한미 FTA의 제조업 및 농업에 대한 예상영향」에서 FTA(지역무역협정)는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 확산  추세에 있으며 우리는 이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가 결국 금융위기 이후 주요 교역국과 FTA를 체결하는 것으로 정책을 선회했다고 말한다. 금융 위기의 원인이 수출경쟁력 약화와 무역수지 적자의 누적이었기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FTA추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수출시장 확보 및 낙후된 서비스시장 선진화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 한미FTA가 필요했고, 미국의 경우엔 세계 10위권인 한국과의 FTA로 경제효과는 물론 동아시아 지역주의 움직임에 대응하고, 정치·외교·군사적 이해관계를 유지해나가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주요 국가와의 FTA 추진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다만 한미 FTA가 자동차, 섬유, 가전 등 제조업 분야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되기는 하지만 축산, 과일 등 농업 품목의 피해가 우려되므로 협상과정에서 민감한 품목에 대한 개방을 최소화하고, 피해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지원 및 피해보전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FTA는 단순히 무역자유화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양국간 통상제도, 산업구조조정의 문제를 유발하고, FTA하에서 구조조정의 비용이 매우 클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양국에 이득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고 있다.

임준(가천대학교 의대) 교수는 「의료산업화를 강제하는 FTA」를 통해 의료분야에 있어 한미FTA의 파장을 예고한다. 현재 이미 한국은 ‘의료산업화’로 일컬어지는 보건의료 부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로 민중의 건강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는 중요한 사회적 공공재인 의료를 산업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부와 언론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의료산업화론은 ‘의료의 질 저하’ 문제를 거론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의료산업화’와 ‘영리법인화’만이 대안인 것처럼 국민 여론을 현혹하고 있다. 임준 선생은 현재 정부는 의료산업화가 국민의 의료생활에 미칠 영향에 대한 평가와 연구, 의견수렴 절차 없이 WTO DDA와 한미 FTA라는 외부의 조건을 통해 도리어 의료산업화를 가속화하고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현재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보건의료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시장친화적 의료체계보다는 공공적인 의료체계로의 재편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 FTA 협상은 보건의료 측면만 보더라도 전면적으로 재고되어야 하고, 별도의 대책 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거용 (상명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경제논리의 흥정대상으로 전락한 교육개방」에서 FTA가 교육부문에 끼칠 영향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미국은 한미 FTA 1차 협상에서 “교육과 의료서비스 분야”를 개방 대상에서 제외하더라도 수용하겠다고 밝혔지만, 도리어 한국의 일부 보수언론들은 “교육개방을 반대하는 이들의 ‘과잉 대응’으로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고급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며 전교조 등 교육개방에 반대하는 이들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했던 사실을 지적한다. 이와 같은 현실 때문에 미국은 협상에 임하기 전부터 느긋한 자세로 한국의 현실 변화를 관망하는 여유를 한껏 부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정부의 교육개방 추진은 교육개방에 대한 실익을 냉철하게 분석한 것이기 보다 단순히 기대효과를 선전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구체적 실익은 무엇인지,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한 대책이 무엇인지 시급히 연구할 필요를 제기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교육개방이 경제적 이익을 위한 흥정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야 하며, 교육개방의 목적조차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개방을 전제로 한 개방의 기대 효과란 개방을 합리화하는 도구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지금종(문화연대 사무총장, 한-미 FTA저지 문화예술공대위) 집행위원장은 「예고된 몰락, 한미 FTA와 문화」에서 한미FTA 추진은 단순히 스크린쿼터 축소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화적 ․ 지적 재산권 전반에 걸친 몰락을 예고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지금까지 미국과의 FTA 추진문제에 대해 찬성과 반대 모두 지나치게 산업적 영향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 한미 FTA가 체결될 경우 발생하게 될 문화적 영향, 즉 우리 삶의 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하는 측면은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원인 중 하나는 정부가 스크린쿼터제 축소를 제외한 나머지 부문은 협상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비밀주의에 입각해 자료를 일체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란 것이다.  지금종 선생은 이번 한미 FTA 협상에 있어 숨겨진 최대 쟁점은 지적재산권이며 이 분야에 대한 미국의 요구는 국제적 관례조차 무시할 만큼 위압적임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현재 국제저작권보호협약에 따르면 저작자 사후 50년간의 저작권을 보호하는 것이 통례인데 미국 측은 이를 70년으로 연장하겠다고 주장한다던지, 인터넷의 일시적 복제(인터넷 사용자가 특정 웹 사이트를 방문할 경우, 해당 웹 사이트 정보가 자기 컴퓨터의 ‘임시’ 폴더에 자동저장 되는 것까지)를 저작권자의 권리로 인정, 기술적 보호조치 회피에 대한 제재 강화, 법적 제재 강화 등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미 FTA의 위험은 관세장벽뿐만 아니라 비관세 무역장벽까지 제거된다는 데 있으며 한미 FTA가 체결될 때, 한국경제에 끼치는 영향은 우리가 경험한 바 있는 ‘IMF 사태’의 열 배가 될 수도 있다며 암울한 미래를 예측하고 있다.

강경희(제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NAFTA 12년 후 ‘멕시코’」는 한미FTA의 미래를 예견케 한다는 점에서 최근 정부와 시민단체 사이에 공방이 되었던 NAFTA 체결 이후 멕시코의 현실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모두를 두루 살피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강경희 선생은 NAFTA가 멕시코의 수출, 외국인투자, 고용창출, 소비자물가 등에서 긍정적 결과를 보였다는 멕시코정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실제 그 이면에는 과도한 대미 수출의존, 경제사회적 양극화의 심화,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 부재, 마퀼라도라(임가공수출)를 제외한 다른 산업에서의 고용상실, 불안정 고용 증대 및 임금하락 등의 경제적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농축산업 부문에서는 미국산 수입물의 증대, 멕시코에 비해 현격히 높은 미국의 농업보조금, 피폐한 농촌과 도시로의 이주, 농민운동의 확산 등의 사회적 문제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문화적 부문에서는 민간대기업에 의해 독점된 TV 체계, 국내 영화산업의 붕괴, 미국 이외 다른 영화산업의 진출 미흡, 고등교육 체계의 미국화 등의 문제는 물론 여성 저임금 노동의 증대, 이에 따른 여성의 빈곤화, 마퀼라도라 지역의 환경문제 심화, 의료·연금 등 공공서비스 부문의 축소 등의 여러 문제들이 심각하다. 강경희 선생은 멕시코 국민들은 이와 같은 문제들이 대안들을 통해 시정되지 않는 한, 현 정부의 자유무역정책에 반대하는 저항세력들은 더욱 연대하게 될 것이며 제도적 방법이 불가능하다면 비제도적 길을 통해서라도 NAFTA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분석한다.

연속기획 「통일을 준비한다」 / 「북·미 대결은 끝날 수 있는가?」
권용립(경성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건국 이후 미국이 보여 온 미국의 국제정책(미국예외주의)를 정치문명적 입장에서 분석해왔다. 연속기획 「북·미 대결은 끝날 수 있는가?」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핵무기를 앞세운 벼랑 끝 전술의 북한과 미국의 향후 추이를 분석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약소국의 ‘깡’과 초강대국의 ‘힘’이 맞붙은 비대칭적 냉전이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와 같은 북미대결구도 속에서 돌출될 수 있는 여러 시나리오를 분석해보고,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는 무엇이며 어느 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좋은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우선 권용립 선생은 북미간 대결이 지속되는 원인으로 미국이 애초에 예측했던 것과 달리 냉전 해체 이후 ‘자연사(自然死)’할 줄 알았던 북한이 ‘고난의 행군’ 이후에도 내부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9·11’과 부시 행정부의 등장 이후 심화된 미국의 대북 불신에서 찾는다. 이후 미국은 북핵 문제를 북한 문제로 변모시키면서 대북 금융제재와 북한인권법을 동원해 대북 압박을 강화하면서 북한의 붕괴를 유도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역시 ‘철천지원수 미국’에 대한 적개심과 반제민족주의를 최고의 외교적 덕목으로 내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면 대결을 통해 미국과의 담판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결의 종식’을 위한 몇 가지 기본 시나리오는 첫째, 미국의 대북 정밀 폭격 성공에 따른 북한 붕괴 시나리오, 둘째, 대북 금융제재, 북한인권법 제정과 탈북자 문제를 내건 전 방위 압박으로 미국이 북한을 질식시켜 붕괴시키는 방법, 셋째, 중국과의 경제 통합을 거쳐 북한이 중국의 자치 독립국 또는 ‘동북 제4성’으로 전환하는 경우, 넷째, 다자회담 틀 내에서 양자협상을 통한 외교적 타결이 있을 수 있다. 이상의 시나리오들 가운데 가장 평화적이고 현실성이 높은 방안은 네 번째 다자회담 틀 내에서 북미간 양자 협상을 통한 외교적 타결이며, 이를 위해서는 미국 보다는 체제의 ‘절대 안전’을 요구하는 북한이 우선 양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북한에게 ‘체제 보장’과 ‘대미 억지력 포기’는 서로가 가장 내주기 싫은 선물이지만, 파국적 종말을 맞이할 패자는 결국 북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더 큰 패자는 한반도이므로 북·미 대결의 종결은 우리에게도 시급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 구축의 선결 과제 - 대추리와 야스쿠니 신사 참배
특집과 기획 이외에도 이번 『황해문화』 가을호(통권52호)는 풍성한 읽을거리로 가득하다. 우선 평택미군기지 문제의 과거부터 현재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노순택 선생의 「대추리, 36.5。C」에 담고 있다. 노순택 선생은 700여 일간 지속되고 있는 대추리 평화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대추리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정부가 그간 공표해온 평택미군기지 이전 협상의 법적 ․ 정치적 정당성마저 실제 사실과 다르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1990년 6월 25일 이상훈 국방장관과 메네트리 주한미군사령관 간에 교환된 ‘용산기지 이전에 관한 합의각서MOA 및 양해각서MOU’는 1996년까지 용산 사령부를 오산으로, 기타 지원부대는 평택으로 이전하고, 이전비용 전액을 한국이 부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각서는 용산미군기지 이전 문제에 관한 첫 협정문인데, 협정에 나선 이상훈 국방장관은 정부간 협정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정부대표권한’을 위임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협정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노순택 선생은 현재 평택미군기지 확장 이전에 관한 자물쇠는 미국이 쥐고 있지만, 열쇠는 미국만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 자물쇠를 열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라는 것이다.

한승동(한겨레신문) 기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싼 세계의 시선」을 통해 급격한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과 동북아 3국의 외교관계를 경색시키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를 한국과 일본, 중국의 각기 다른 입장 차이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승동 기자는 일본이 지금 미일동맹 강화 ‘탈아입미(脫亞入美)’를 부르짖고 있는 것은 다시 한 번 서구(미국의 세력)를 등에 업고, 100여 년 전 자신들을 구원해준 ‘탈아입구’의 신화를 다시 재연해보려는 갈망이란 역사적 분석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이와 같은 행보는 동아시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데,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미국이 침묵하고 있는 까닭은 동아시아의 긴장 고조가 중국 봉쇄(견제)라는 미국의 세계전략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 문제는 이런 미국과 일본의 희망사항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며 남북 및 북미관계가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경우 일본 우파의 우경화가 야기할 동아시아의 긴장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을 달리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한반도와 한민족을 다시 최대 희생자로 만들 새로운 냉전체제가 도래할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이외에도 『황해문화』 가을호(통권52호)는 앞으로 매호마다 창작만화를 게재하기로 했다. 그 첫 번째로 『'그'와의 짧은 동거』로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한 장경섭 작가의 「원효를 기다리며」를 수록했다.

황해문화 가을호(통권52호) - 목차

  권두비평
 2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김진방

    특 집│FTA와  대한민국
 10    참여 없는 FTA, 이대로 가면 안 된다│유종일
 31   한미 FTA의 제조업 및 농업에 대한 예상영향│정인교
 50   의료산업화를 강제하는 FTA│임준
 71   경제논리의 흥정대상으로 전락한 교육개방│박거용
 92    예고된 몰락, 한미 FTA와 문화│지금종
 114   NAFTA 12년 후 ‘멕시코’│강경희

  창 작
 134 시    박찬·문태준·안현미·故 박영근 추모특집
 161 만화  원효를 기다리며│장경섭
 176 소설  위대한 배우│윤동수

  연속기획│통일을 준비한다(20번째)
 195  북·미 대결은 끝날 수 있는가?│권용립

  황해리포트
 219 행복의 나라! ‘부탄Bhutan’을 찾아서│이덕희

  황해네트워크
 244 부산, 광양, 평택 신항만을 돌아보며│최정철
  -미래의 인천 신항만을 상상하다

  황해논단
 272 대추리, 36.5。C│노순택

  인천, 이 사람
 304 괭이부리2길, 인천의 마지막 번지에 사는 홍순녀 할머니│김윤식

   시 평
 315 5·31 지방선거 평가와 향후 전망│김형준
 329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싼 세계의 시선│한승동
  
     문화비평 
 346  문학·중년 탐색의 허와 실-김훈의 소설에 대한 단상│김경수 
 353  미술·인천미술은행 도입 관련 세미나 개최│민운기
 361  음악·하찌&TJ-국적과 세대를 가로지르는 초국적·초세대 듀엣?│신현준
 368  연극·연극과 기억│안치운
 373  영화·퓨전 사극의 욕망과 역사적 상상력│박명진
 379  사진·한반도에 사진촬영을 허하라!│이경민
   -근대 사진문화의 풍경3
 391  출판·부평 기적의 도서관│최성일
 401  건축·어느 커미셔너의 퇴장│전진삼
          
  서 평    
 407 『난민과 국민 사이』│김철     
 419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여건종
 428 『민주주의의 민주화』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이병천
 440 『귀농길잡이』 『씨앗은 힘이 세다』 『아이들은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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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한겨레> 구본준 - 평전 ‘성장통’

평전 ‘성장통’
외국선 자료 수집·인터뷰 최소 10년
국내 출판풍토선 엄두 못내 ‘위인전’ 위주
‘조영래 평전’ 논란…“평전이 뭐냐” 되물어
거시사적 안목·객관성 확보 필수
평전 저술문화 향상 계기 되길
한겨레 구본준 기자


커버스토리

“평전이란 무엇인가.”

고 조영래 변호사의 일생을 그린 <조영래 평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처음으로 우리 출판계와 독서대중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평전(評傳)이, 그것도 거의 가뭄에 콩나듯 했던 국내 인물을 국내 지은이가 쓴 평전이 출판계 뉴스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이번 소식은 안타까우면서도 눈길을 끈다. 그만큼 지금까지 우리 독서계에서 평전은 자리잡지 못한 장르였다.

<조영래 평전> 논란은 조 변호사의 유가족들이 지은이 안경환 교수(서울대 법대)가 “고인의 사상과 인물됨을 왜곡하고 있고,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불거졌다. 이어 권인숙 명지대 교수가 이 책이 사실을 왜곡했으며, 안 교수가 자신의 사상적 틀에 조영래를 끼워 맞추고자 했다고 비난하면서 파장이 커졌다. 이에 대해 지은이 안경환 교수는 “평전은 한 사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자의 몫”이라고 강조하면서 “가족으로서 마음 아픈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평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썼고, 책 내용은 자신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사람중심의 역사 평전의 매력

한 인물을 재구성한 평전을 놓고 대상 인물과 관련된 각 주체들이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은 평전을 바라보는 처지와 시각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조영래 평전 논란’은 아직까지 평전에 대한 사회 공통의 인식이 정립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동시에 평전란 출판장르가 본격적으로 우리 출판시장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라고 할 수 있다.

‘평전’은 한마디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전기다. 한 인물을 기리려는 것이 주된 목적인 전기와 달리 한 사람을 통해 당시 시대를 들여다보면서 그 사람의 업적과 역할을 평가하는 것이 목적이다. 평전은 방대한 자료 수집이 필요해 기술적 측면에서는 사회 전반의 기록문화가 갖춰져야 하며, 사회문화적으로는 한 역사인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성숙한 분위기가 갖춰져야 한다. 그래서 사진집, 대화나 대담집 등과 함께 대표적인 선진 출판물로 꼽힌다.

평전은 한 인물을 칭송할 수밖에 없는 위인전이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당사자의 시각만으로 쓰는 자서전이 갖는 객관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어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는만큼 출판 의미가 크다. 또한 독자들에게는 위인전에서는 볼 수 없던 역사인물의 단점과 함께 인간적 측면도 함께 볼 수 있어 한 인물을 좀더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사건 중심인 역사책들이 들려주지 못하는 사람 중심의 역사를 통해 부담없이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것이야말로 평전의 강점이자 특유의 매력이다.

평전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동양의 경우 사마천이 쓴 <사기>의 ‘열전’이 분명한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인물을 평가한 글이란 점에서 평전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화가들을 기록한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이 효시로 꼽힌다.

서양에서는 이후 동양에 견줘 평전문화가 활발하게 발전하면서 평전을 전문적으로 쓰는 ‘전기작가’들이 따로 등장했고, 출판에서 평전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전기작가의 위상이 대단하다. 오스트리아의 슈테판 츠바이크, 프랑스의 앙드레 모루아, ‘전기장르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리튼 스트에이치(오타인 듯 싶다. "리튼 스트래치") 등은 ‘20세기 3대 전기작가’로 불리며 평전작가의 대명사로 꼽힌다. 서양에서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석학 E.H. 카도 평전을 쓴 적이 있을만큼 학자와 유명 문필가들이 평전을 쓰는 것도 흔한 일이다.

그래서 주요 역사인물들은 여러종의 평전이 동시에 나와 있어 독자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던 ‘악인’이나 문제인물들에 대해서도 거의 빠짐없이 평전이 나와 있다. 국내에도 소개된 나치즘 광기의 주역 괴벨스같은 이를 다룬 평전도 여러종이다. 또한 문화인물에 대한 평전도 많아 영화배우나 가수 등 대중문화 스타들에 대한 평전도 활성화되어 있다. 외국 주요서점에는 별도의 평전코너를 따로 마련한다.

사회 전반 기록문화 갖춰져야

반면 우리나라 출판시장에서 평전은 그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다. 평전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 80년대 이후였고, 인물을 다룬 책은 으레 ‘전기’나 ‘위인전’이 주종으로, 이런 경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출판전문가들은 외국 평전에 견줘 볼 때 아직까지 국내에서 본격적인 평전은 없다고 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나온 평전들 대부분이 평전이란 이름을 달았지만 훌륭한 인물들의 삶을 기리는 ‘전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문화적 특성 때문에 국내에서는 평전 저술이 힘들다는 지적도 많다. 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많은 기록이 유실돼 자료가 부족하고, 무엇보다도 아직은 인물에 대한 평가에 이해당사자들이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또한 워낙 역사가 굴곡졌던 탓에 역사속 주요 인사들이 자기의 역사적 역할을 증언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드러내는 것조차 꺼리는 경향이 강한 것도 주요한 원인이다.

여기에 평전이 다른 책에 비해 엄청난 수고로움을 필요로 하는 점도 출판시장의 규모가 작은 국내 사정상 출간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외국의 경우 전기작가들이 평전을 준비하는 기간은 최소한 몇년, ‘10년은 기본’일 정도다.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야 하고 주변인물들을 많이 인터뷰해야만 대상 인물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그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에 준비기간이 길고, 책의 분량도 1000쪽 가량인 경우가 흔할 정도다. 그래서 외국 작가들의 경우 평전을 ‘가장 나중에 쓰는 책’으로 여기는 편이다. 특정 분야에 대한 여러 책을 써서 전문성을 갖춘 뒤 평전을 쓰는 게 일반적이다. 역사인물들에 대한 평전을 썼다가 후손들에게 비난받는 웃지못할 경험을 해야했던 역사저술가 이덕일씨도 “한 사람의 세밀한 일생을 추적하지만 그 일생을 통해 그 시대를 조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평전이란 기본적으로 미시사지만 거시사적인 안목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라고 평하고, “개인적으로 평생에 걸쳐 할 영역으로 평전을 설정했다”고 말한다.

이렇다보니 출판사 입장에서는 번역 평전도 용기를 내지 않고는 쉽게 내지 못하며, 국내 인물을 다룬 평전은 더욱 성공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다행히 90년대 이후 외국 인물 평전들이 하나둘씩 꾸준히 선보이기 시작했고, 국내 인물을 다룬 국내 지은이의 평전도 간간이 출간되기 시작해 최근 1~2년 새 <문익환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등이 나오면서 국내에서도 조금씩 평전 저술 문화가 싹트기 시작하고 있다.

또 외국의 우수한 평전물들이 점점 많이 소개되면서 평전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 노먼 베쑨이나 프란츠 파농, 비노바 바베 등 국내에는 생소했던 인물들을 소개한 실천문학사의 ‘역사인물찾기’ 시리즈, 도발적 사진작가 헬무트 뉴튼이나 영화감독 히치콕, 재즈거장 마일스 데이비스 등의 평전을 모은 을유문화사의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 그리고 비교적 적은 분량에 선명한 주제를 내세우는 평전을 지향하는 푸른숲의 ‘푸른숲 비오스’ 시리즈, 출판사 교양인의 ‘문제적 인간’ 시리즈 등이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실천문학사의 <체 게바라 평전>의 경우 게바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과 맞물려 35만부나 팔리는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1~2년새 평전 쏟아져

지금까지 국내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평전은 <전태일 평전>(돌베개)이다. 모두 50만부 가까이 나간 것으로 추산되는 이 평전을 쓴 이는 다름아닌 조영래 변호사다. 그 자신이 평전으로 획을 그은 조 변호사에 대한 평전이 논란이 된 상황은 그래서 더욱 역설적이다. 이번 논란이 평전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인식폭이 넓어지는 계기가 된다면 조영래 변호사는 평전문화에 예상치 못했던 또다른 기여를 하게 되는 셈이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전문가가 추천하는 평전

이광수와 그의 시대1·2

김윤식 지음, 솔 펴냄

이광수란 문제적 인물을 시대적 상황과 함께 종합적으로 들여다보는 묵직한 평전. 우수한 국내 평전의 대표작. (도서평론가 이권우씨 추천)

프란츠 파농

알리스 셰르키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알제리 독립을 이큰 프란츠 파농의 일생을 정치적 동지이자 같은 의사였던 셰르키가 썼다. 평전의 대상을 가장 잘 아는 이가 객관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모범적인 평전. (출판평론가 최성일씨 추천)

세계를 매혹시킨 반항아 말론 브랜도

패트리샤 보스워스 지음, 푸른숲 펴냄

평전에 대한 부담감을 가질 필요 없이 편하고 재미있게 읽어볼 수 있어 평전 입문용으로 좋은 평전. (출판평론가 한미화씨 추천)

모차르트

노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문학동네 펴냄

한 시대와 사회의 여러 측면이 구조적·제도적으로 개인의 천재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씨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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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퍼온글] 전공투 일본학생운동사 소개기사

연대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세대를 위한 그림책
다카자와 고지 - <전공투 일본학생운동사>(1985년, 백산서당>

   
만화 천국인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다양한 주제들이 만화로 제작된다. 역사책을 만화로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각종 시험과 관련된 내용이나 영행이나 취미 같은 안내서들도 만화로 제작된다. 철학이나 천황제 같은 심각한 주제들도 피해갈 수 없다. 물론 모두 성인독자를 대상으로 기획되는 것들이다.

우리의 경우 80년대에 일본에서 들여온 PC학습용 만화교재들이 번역되기 시작한 것을 필두로 점차 확대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전문적인 내용을 만화로 재현한 것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교양만화의 대부분은 아동이나 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다. 예전과 달리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만화를 펴들고 있는 학생들이 많아졌지만 아직까지 넥타이 멘 직장인이 만화를 펴들고 있는 모습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만화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지금도 강하게 남아있지만 80년대 그 엄혹한 시절에 이미 ‘아이들은 절대 안 볼’ 심각한 만화 책들이 사회과학 서점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모았었다. 오월출판사가 주로 냈던 이 만화책 시리즈는 마르크스, 레닌, 체 게바라 같은 위험한 인물부터 사회주의, 반핵, 페미니즘 등 골치 아픈(?) 주제들을 다뤘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이 중 몇 권은 출판사를 바꿔 지금도 출판되고 있다.

오월 출판사의 사회과학 만화들이 비교적 인기를 끌었던데 반해 백산서당에서 1985년 출판한 만화 <전공투 일본학생운동사>는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유통량도 적었고 출판사가 재판을 찍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그만큼 안팔렸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왜일까? 멀리는 오월광주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고, 건대사태와 열사들의 희생이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던 시절이니 만큼, 아무리 남의 나라 학생운동사라고 해도 그런 숭고한 주제를(?) 감히 만화로 다루는 것이 못 마땅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아무리 책 자체가 ‘입문서’라고 해도 당시 일본 사회에 대한 배경지식이나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는 무슨 말인지 잘 납득이 안됐을지도 모르겠다. 일본학생운동의 활약상이 정말 ‘만화 같은’ 이야기로 다가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정말 재밌다.

* * *

원서는 1984년에 나온 <일러스트레이티드 전공투(イラストレイテッド 全共闘)>다. 저자인 다카자와 고지(高沢皓司)는 대학시절 전공투 운동을 체험했고, 그 경험에 기반 해 훗날 프리랜서 저널리스트가 되어서는 일본의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에 관한 저작들을 주로 발표했다. 1990년 이후로는 1970년 비행기를 납치해 북한으로 갔던 적군파 조직원들의 행로를 직접 북한에 들어가 취재하기 시작했다. 취재 결과를 정리해 2000년 발표한 책 <숙명-요도호 망명자들의 비밀공작>은 그해 고단샤논픽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림을 그린 도요타가 주히코(豊田一彦)는 와세다대 출신으로 유명한 아동그림책 작가다. 아마 그의 작품 활동 경력에서 이 만화책의 작업은 별종 중의 별종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전공투, 그러니까 “전학공투회의”에 대해 다룬 이 책은 150쪽 정도로 얇다. 앞부분의 1/3은 이해를 돕기 위해 일본의 패전부터 전공투 운동이 시작되는 68년까지의 학생운동 상황을 정리하고 있다. 전공투 운동은 사실 4년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의 폭풍이었지만 책은 1945년부터 일본 학생운동이 실질적인 막을 내리는 70년대 초반까지를 다루고 있는 만큼 ‘일본학생운동사’라는 부제가 어색하지는 않다.

일본의 학생운동은 ‘전학련’과 ‘전공투’로 상징된다. 전학련은 자치회, 우리식으로 말하면 학생회의 연합체다. 50년대 초반까지 전학련은 단일한 조직이었지만 이후 신좌익운동이 시작되고 정파들이 분립하면서 각 파벌마다의 전학련이 따로 생겨났다. 전대협이 학생운동의 대표체였다가 지금 한총련이 ‘하나의 분파’로 전락한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반면에 전공투는 어떤 조직형식을 갖춘 운동이 아니었다. 모든 학생의 공동투쟁 회의라는 이름에서 보듯 당면한 투쟁을 위한 임시기구의 성격이 짙었다. 68년 도쿄대와 니혼대에서 대학의 민주화와 재단과의 갈등을 계기로 자연발생적으로 이들 대학에서 학생투쟁체가 건설됐다.

여기에는 두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기존의 학생운동이 정파운동으로 재편되면서 4~5년 넘게 상호간의 헤게모니 투쟁에 전념하고 있는 동안, 베트남 전쟁의 격화, 일본경제가 고도성장하면서 발생한 사회모순, 기성세대에 대한 학생들의 반감 등이 학생 대중들을 급진화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기존의 학생운동 정파에 가담해 체제에 대항하기도 했지만 조직의 틀을 거부하고 급진적 행동을 표출하기도 했다.

무당파라는 의미에서 “논섹트 라디컬”로 불려진 이 일본의 68세대들이 학원분쟁이라는 형태로 행동에 나선 것이 바로 ‘전공투’ 운동인 것이다. 전공투의 시작은 거창한 정치적 목표가 아니었다. 니혼대는 한 교수가 돈을 받고 부정입학을 알선한 것이, 도쿄대는 의대 수련의들이 근로조건과 병원의 권위주의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렇게 시작된 학원분쟁은 한두달 만에 국가권력을 대행하는 학교와 재단, 경찰기동대와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전체 학생이 대립하며 학원을 해방구로 만든다는 사상으로 발전했다. 바리케이드와 학생파업 속에서 니혼대 전공투는 1968년 5월 28일, 도쿄대 전공투는 같은 해 7월 5일 결성됐다.

전공투 운동은 기존의 신좌익운동과는 다른 사상을 만들었다. 도쿄대 전공투 의장이었던 야마모토 요시다카가 처음 사용한 ‘자기부정’이다. 처음에 그것은 일본사회의 최고 엘리트로서 오늘은 시위에 나서지만 내일은 관료로의 출세가 보장된 모순된 존재에 대해 비판적인 반성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논리가 확장돼 대학의 해체와 자기 존재에 대한 철저한 부정만이 진정한 변혁에 이른다는 식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전공투 뿐만 아니라 일본 학생운동의 최대 사건 중 하나인 도쿄대 야스다 강당 공방전이 발생했다. 이미 1968년 말부터 각 학부 건물을 점거하고 파업농성 중이던 전공투는 해가 바뀌자 주력부대를 야스다 강당으로 집결시키고 있었다. 결국 대학당국이 경찰투입을 요청하고 기동대가 1월 18일 진압을 개시했다. 꼬박 이틀이 걸린 공방전은 TV중계를 통해 일본 전역에 생중계됐다.

이 책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강당 꼭대기 층까지 밀리면서 최후의 저항을 한 500명의 전공투 활동가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마지막으로 부르고 전원 체포됐다고 한다. 이들이 강당을 점거하고 농성한 이유는 그해의 도쿄대 입시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자기부정의 한 방법으로 이 더러운 제국대학의 엘리트를 재생산을 막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뜻대로 그해 도쿄대 입시는 중단됐다.

도쿄대 전공투는 야스다 강당 건물의 방송시설을 이용해 점거기간동안 자주방송을 실시했다. 본인은 죽을 때까지 확인을 해주지 않았지만 이 방송은 후에 사회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는 의대생이 책임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는 기동대가 강당을 함락하기 직전 마지막 방송을 이렇게 끝맺었다. “우리의 방송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국의 학생, 시민, 노동자가 우리의 투쟁을 이어나가 주십시오. 다시 해방강당을 되찾는 그날까지 방송을 중지합니다.”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닐지 몰라도 확실히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있었다. 그리고 방송은 37년째 중지상태다.

   
▲ '자기부정'은 전공투 운동의 화두이면서 동시에 운동의 모순적 성격을 보여주는 단어다. '민청'은 일본공산당의 청년조직으로 당시 학원분쟁에서 일종의 '구사대'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좌익운동은 이들을 '체제의 일원'으로 규정했다.
 
* * *

야스다 강당 이후 일본의 대학에서는 유행처럼 전공투가 결성됐다. 학생운동의 불모지였던 여대와 체육계 대학에서조차도 전공투가 결성돼 학원분쟁이 격심해졌다. 전공투 운동의 정치성이 강화됐다.

1969년 9월 5일 도쿄 히비야공원에서는 3만명의 학생이 모인 가운데 전국전공투가 결성됐다. 각 대학 전공투가 연합하고 도쿄대 전공투 의장과 니혼대 전공투 의장이 각각 의장과 부의장에 선출됐다. 그러나 내막은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8대 당파의 연합체였다. 운동의 주도권이 다시 당파에게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책은 “전국전공투의 결성이 결국은 전공투 운동의 마지막”이었다고 회고한다. 전국전공투의 정치성과 학원투쟁이 괴리되기 시작하고, 무당파 활동가들이 당파에 반발해 이탈하고, 조급해진 일부는 ‘무장투쟁론’으로 나아가면서 전공투 운동은 내부에서 붕괴되어 갔다. 그리고 등장한 것이 적군파다. 또 당파들은 대중과 혁명의 전망을 잃어버리면서 경쟁당파를 ‘반혁명 집단’으로 규정하고 상대조직의 활동가를 살해하는 ‘내분’을 시작했다. 책은 여기서 끝맺는다.

골치아픈 이야기만 적었는데 만화로 구성한 책답게 재밌는 이야기들도 있다. 일본 학생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공사장 안전헬멧이 당시 500엔이었고 주무장이었던 각목은 50엔이었던 반면 기동대의 개인안전장비는 모두 합쳐 9,550엔이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서 구치소에서 제공하던 관식의 메뉴 같은 자료는 진지한(?) 책이라면 결코 다루지 않았을 내용들이다.

각 시기별로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 책이나 대중문화를 적어놓은 것도 당시의 시대상황이나 정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 글로만 적어놓으면 실감이 나지 않을 데모의 전개상황이나 점거상황들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등 만화책만이 누릴 수 있는 이점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일본에서도 재판이 나오지는 않은 만큼, 국내에서 이 책이 다시 출간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혹시 도서관이나 아는 사람을 통해 책을 구할 수 있다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꼭 읽어보길 권한다. 우리나라 도서관에 과연 만화책이 구비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 *

그 자신이 전공투 세대인 작가는 책을 통해 전공투 운동이 가졌던 ‘연대감’을 강조하고 있다. 전공투 운동은 사회세력화에 실패하면서 세대가 아닌 세대를 남겨놓았다. 전공투 세대는 규모나 그 경험에 있어서 우리의 소위 366세대와 비교가 안 되지만 운동의 패막과 함께 급속도로 기성 사회에 빨려 들어갔다. 전공투 운동 이후 일본사회에서 전공투 세대의 특성이 집단적으로 발휘된 적은 없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저자는 사라져간 연대의 기억에 목말라 하는 것 같다.

 

# 출처 :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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