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도올과 박노자의 기독교 상식

도올 김용옥의 문제제기를 기화로 하여 한국 기독교와 관련된 글들을 몇 차례 옮겨오고 몇 마디 덧붙이기도 했다. 그가 출간한 <기독교 성서의 이해>(통나무, 2007)도 출간되자 마자 사두긴 했는데 아직 펼쳐볼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 경향신문에 그 책에 대한 차분한 리뷰가 게재되었기에 옮겨놓는다. 미리 읽어둘 만하다.

경향신문(07. 03. 24) ‘보수 교리’ 뒤엎은 ‘도발적 비판’

도올 김용옥은 최근 ‘기독교 성서의 이해’와 ‘요한복음 강해’라는 두 권의 저서를 동시에 출간함으로써 한국 그리스도교계에 충격적인 화두를 던졌다. 삼위일체와 동정녀 탄생의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적 예수의 신성(神性)성 문제 등과 관련해 정통적인 한국 보수 신학계와 교회가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올은 “콘스탄티누스(313년) 이후의 역사는 ‘성서주의’의 본연으로부터 너무 이탈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가 아니라, 황제교화된 다른 차원의 기독교 발자취”라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성서주의’는 ‘교권주의’와 대비되는 말이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 논쟁도 ‘교권주의’의 산물로 파악한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부정하다가 이단으로 지목된 아리우스를 황제교화된 교회의 권위로 부당하게 축출된 하나의 희생양이라고 본다.

이에 대해 보수적 신학자인 이국헌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된 존재(니케아 신조)이며, 그 분은 완전한 인간이시다(칼케돈 신경)”라는 정통주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도올은 오히려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보다 반대파 아리우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정통적 삼위일체론의 교권적 해석을 거부한다.

도올은 또 “복음서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아버지(파테르)와 아들(휘오스)’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개념은 예수의 자기 이해 속에서 일차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며, 가부장적 유대인 가정에서 일상적으로 쓰였던 토속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신적 존재”라기보다는 “자비의 품”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버지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하고 증명하려던 일체의 시도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올은 유일신론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석한다. 예수 이전의 유대교 전통에서도 하나님은 유일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외의 다른 신들을 ‘참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서 기자들의 입장으로 보면 어떨까. 도올은 “마르시온이 구약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라면서 구약성서와의 단절의 정당성을 부추기고 있다. 그의 지적대로 신약성서가 구약성서의 율법적 정신을 대치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이 더이상 편협한 유대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적 하나님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서의 창세기가 지니는 다양한 메타포와 예언서들이 외치는 정의와 공의는 시대를 막론하고 신자들에게 언제든지 효력을 발생한다.

도올이 말하는 ‘낭송문화로서의 복음서’는 여전히 문학적 효과 이상을 던져주지 못한다.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도 심청전의 문맥에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심청의 죽음과 연꽃에서의 부활은 “어린 도올의 통곡을 자아내는 ‘역사적 사실’이고”, 그렇게 ‘믿는’ 자에게는 감동이 크며 기쁜 소식으로서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또 다른 의미의 “역사적 사실”이 된다. 예컨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의 확충이라는 점과 그리스도 복음의 독특성이 다른 문맥 속에서 보편적 이야기로 세속화되는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그는 또 동정녀 탄생을 우리나라의 시조설화인 난생설화와 비교하고, 마태가 이사야서 7장14절을 인용하여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는 것은 그릇된 인용이라고 비판한다. “순결한 처녀로서의 마리아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난센스”라면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도 은근히 부정하는 눈초리다.

이 책에서 도올이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요한복음과 로고스 기독론’이다. 로고스는 ‘말씀’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이는 ‘나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과 나의 말씀은 하나로 통한다. 이러한 논리를 확대해서 도올은 로고스의 화신으로서의 아인슈타인을 언급한다. 범인이 접하기 어려운 상대성이론의 수리적 사유를 영감으로 구성해 내었는데 그것이 로고스다. 그 로고스가 아인슈타인이라는 역사적 인물로서 육화되어 나타났다. 이를 극단화시켜보면 ‘과학적 진리의 구조’를 띠고 발언되는 모든 견해는 로고스의 기능을 가지게 되며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로고스의 화신이 된다. 따라서 붓다도 ‘연기(緣起)’적 사실을 말한 것 하나만으로도 로고스의 화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도올의 일부 주장은 실상 진보주의적 신학자들이 이미 개진해왔던 내용이다. 이러한 책이 만일 서양에서 발행되었다면 그다지 관심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계몽주의 이후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무수히 나왔다. 유독 한국에서 반론이 거센 까닭은 그만큼 한국 그리스도교가 보수적인 색채가 짙다는 뜻도 되겠지만 진보적인 해석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한 까닭도 있다.

성서는 언제나 누구에게든 열려 있는 책이기에 다양한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한 해석과 주장들을 감정적으로 혹은 교리적으로 다투는 식으로 대해서는 안될 것이며, 성숙하고 열린 자세로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본다. 본서의 출간을 기화로 한국 기독교계에 진보와 보수간의 건전한 대화의 신학적 풍토를 기대해 본다.(이명권|코리안아쉬람대표·종교학박사)

07. 03. 25.

P.S. 마지막 문단의 멘트, 곧 "이러한 책이 만일 서양에서 발행되었다면 그다지 관심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계몽주의 이후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무수히 나왔다." 같은 진술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상식적인 주장을 상식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지적/정서적 성숙이다. 그럴 때 아래와 같은 박노자의 '만감' 또한 '상식'(공통감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한국의 교육문제에 대한 박노자의 지적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지만 종교문제에 대한 그의 '외부자적 시선'에는 많은 부분 공감한다. 제기한 문제가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문제라는 '지각'을 갖고 있는 걸 보면 그의 마음상태도 거의 한국인이 다 된 듯하다). 

박노자글방(07. 03. 14) 유사 성행위와 유사 신앙 행위

유럽 같으면 조금 더 대담하게 대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한국 같으면 "이미지 클럽/대딸방에서 아르바이트한다"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여성이 거의 없을 듯합니다. 대체로 이와 같은 일이 "부끄러운 직업"으로 인식되지요. 물론 실제로는 성매매 정도로는 아니지만 일단 성적 이미지를 상품화시키고 남성의 일방적인 만족을 전제로 하는 직업인 만큼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고 또 심신상의 피로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기에 별로 "자랑"스러워할 것이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도 과연 다른 직종에 비해 그렇게 "부끄럽게"만 생각해야 하나요? 솔직한 말씀으로는, 저는 "마사지 클럽 아가씨"보다 상당수의 성직자들이 훨씬 더 부끄러운 직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사지클럽에 오는 손님도 한 시간 동안의 "플레이"를 "사랑"으로 착각할 일이 없지만 서빙하는 여성도 굳이 "사랑" 따위를 연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지 않습니까? "클럽"에서 이루어지는 행위가 일시적인 만족을 주되 본격적으로 외로움과 같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대체물"이라는 것을, 양쪽에서 다 알고 솔직하게 하는 것이지요. "유사 성행위"와 남녀간의 진짜 사랑 사이의 거리란 거의 천문학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컨대 대다수의 교회에서 설교되어지는 이야기나 행해지는 행위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사랑"의 사이의 거리도 거의 같을 것입니다. "우리 종파"가 아닌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느니 진정한 영적 생활을 못한다느니 하는 이야기와, 차별과 배제가 없는 하나님의 평등한 사랑을, 사실 같은 차원에서 논하기조차 어렵지요. 그리고 만법의 연기를 깨닫고 팔정도를 통해 사생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불교의 원래 논리와, "49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거의 메꿀 수 없는 갭이 벌어져 있는 것이지요. 대다수의 교회나 사찰에서 "신앙"이라고 포장하여 파는 것은, 마사지클럽에서의 "유사 행위"와 다를 바 없는 진정한 신앙의 "대체품" 내지 그 수준에도 못미치는 신앙적 "짝퉁 상품"입니다.

그런데 마사지클럽 아가씨가 자신의 손을 움직이는 것이 돈이 아닌 사랑이라고 거짓말 하지 않는 것과 달리, 수많은 목사님 분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전달한다"고 큰 소리를 치지 않습니까? 이 분들이 차라리 이미지클럽에 가서 거기에서 진솔함과 겸손함을 배웠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 분들께서 "부자가 낙원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을 충실히 따라 가난은 몰라도 적어도 국내 도시 근로자의 한달 평균 소득인 1,600.000-1,700.000원 정도로 자신들의 소득과 소비를 조절했으면 그나마 "하나님"과의 진정한 연결고리가 보였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과연 많습니까? 그리고 교회에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면 지금의 교회가 "사학법"을 갖고 떠드는 대신에 아이들의 인성을 파괴하는 성적, 등수 없애기 운동 정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교회"/"사찰"이라는 제도상에 이야기되어지고 실행되어질 수 있는 "신앙"과 진정한 신앙의 차이는, 말그대로 이미지클럽과 이도령과 성춘향의 첫날밤의 차이 정도지요. 그러면서도 저 분들은 이 사실을 꾸준히 부인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직자들이 "사회적 어른"의 대접을 받는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대딸방"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정말로 부끄러워하실 것은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 반론이 가능해요. 대형 교회에 가서 일주일에 한 번 "성령"을 받아보고 미쳐보는 것이, 마약복용이나 알콜 중독, 인터넷상에 이효리 팬클럽하는 일 등 또 다른 종류의 "자기 물화"보다 낫지 않느냐는 반론이지요. 맞습니다. 비툴어진 사회에서 비툴어진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필요하다면 안방 극장과 술보담 교회가 더 나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물론 거기에 다니다가 아주 광신으로 안나가는 한에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위안"과 진정한 의미의 "신앙" 사이의 차이를 좀 인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위안"이야 교회에서도 사찰에서도 휴게텔에서도 다 가능하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어딜 가나 뭘 하나하고 무관하게 자기 안에서의 거짓을 불태우고 자기 바깥에서의 거짓을 적어도 "거짓"이라고 정확하게 부를 수 밖에 없는 아주 특별한 마음상태입니다. 그런데 그걸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런 민감한 문제(다 알지만 대놓고  말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가 어젯밤 MBC 시사프로그램 '뉴스후'에서도 다루어졌다. 나는 예고편만 보았을 뿐인데, '한국인'으로서의 감각에 따르면 기독교계의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이었다(한기총에서는 이미 방송취소를 요구한 바 있다). 관련기사는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8340§ion=sc4 참조. 방송 내용의 개략적인 내용은 아래의 뉴스엔 기사에 정리돼 있다.

MBC 시사프로그램 ‘뉴스 후’가 국내 대형 교회들의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을 방송한다. 이에 따라 기독교계의 큰 반발이 예상되고 있다. ‘뉴스 후’는 ‘목사님, 우리 목사님’이라는 제목으로 대형 교회의 세습, 부당한 부의 축적 등에 대해 취재한 내용을 24일 오후 10시50분 방송한다.

취재진에 따르면 K교회 김모 목사는 공금횡령 혐의로 지난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교단 법정은 ‘기소유예’의 면죄부를 안겼고, 김 목사는 아들을 자신의 후임자로 내세웠다. 김 목사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부정당선자금과 당선 사례금 2억3,000여 만원과 부인 명의 별장 건축비 3억1,000만원, 미국 유학 중이던 큰 사위 생활비 2억원 등 총 30여억원의 교회 공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았다. 또 지난 1998년 100% S교회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한 기업체는 이 교회 당회장인 목사의 장남 조씨가 취임했으며 조씨는 수익 부서들을 개인소유회사로 넘기는 방법으로 2년 만에 재벌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조씨는 모두 200여 억원을 탈세하고 횡령한 혐의로 지난 2005년 1월 50억원의 벌금형이 확정됐음에도 벌금을 한푼도 내지 않고 해외로 도피, 현재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취재진은 밝혔다. 조씨는 ‘뉴스 후’ 취재 결과 일본 도쿄의 부자 동네에 살면서 도쿄 소재 S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또 S교회는 미래에 교회 시설을 확충하겠다는 명분으로 경기도 파주에 땅 3만평을 장로들의 명의로 집중적으로 사들였으며 이 가운데 2만여 평이 교회 소유가 아닌 조 목사 개인 소유로 드러났다고 취재진은 전했다. 취재진은 또 “매입 당시 땅값은 평당 1만원이었으나 지금은 최대 60만원까지 급등했다”고 덧붙였다.

취재진은 “조 목사가 교회 돈으로 자신의 부동산 자산을 늘린 것 아니냐는 의혹을 S교회 측에 제기했으나 교회 측은 토지법상 농지를 교회 재단 명의로 살 수 없어 장로들의 이름으로 매입한 뒤 조 목사 개인 소유로 바꿨다고 해명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교회측 주장과 달리 농지뿐 아니라 교회 재단 명의로 소유할 수 있는 일반 땅들도 조목사 개인 소유로 바뀐 사실도 드러났다”고 설명했다.(김은구 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민주주의, 비평 그리고 교양

학술저널 담비의 리뷰를 가끔 스크랩해놓는데, 이번에 옮겨오는 것은 영국 비평가 매슈 아놀드의 '교양'론에 관한 것이다. '매슈 아널드'의 <교양과 무질서>(한길사, 2006)는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다룬 바 있지만 아직까지 손에 들어보지 못했는데 전공에 대한 관심사와도 맞물려서 조만간 훑어보기라도 할 작정이다. 아놀드 비평의 요체를 되짚어본 논문에 대한 리뷰를 워밍업으로 읽어둔다. 

담비(07. 03. 23) 매슈 아놀드의 '교양'을 다시 논하다

매슈 아놀드(Matthew Arnold, 1822~1888)는 영미 신비평(New criticism)이 활개를 쳤던 지난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국내 인문학 담론 전반에서 널리 인용된 학자이다. 비평의 인문주의적 기능을 확립시킨 그는 어떠한 사적 의도도 갖지 말고 작품을 대하라는 '몰이해적 관심'(disinterestedness), 이제까지 존재한 최상의 작품과 비교해보았을 때 손색이 없어야 비로소 뛰어난 작품이라는 '시금석 이론' 등으로 유명하다.

F. R. 리비스와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 정초된 문학 텍스트주의가 미국으로 건너가 남부 귀족 교수들의 보수적 세계관과 맞아 떨어지면서 제도권 평단을 석권했다는 비판이 있듯이, 이들의 사상적 鼻祖(비조)에 해당하는 매슈 아놀드 또한 그간 좌파 비평가들에게는 우파 부르주아 비평관의 원조격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소위 아놀드 때리기와 이에 맞선 아놀드 구하기가 영미 문학계 내부에서 진행되어온 것이다.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 후 영국사회에 불어닥친 이념의 혼란상을 타개하기 위해 '비평' 기능의 회복을 주장하거나, 대중들의 민주주의적 열망이 대중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면서 '교양' 개념을 통해 대중의 문화적 수준향상을 꾀하려했던 인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현 시기 비평의 기능'(The Function of Criticism at the Present Time, 1864)과 '교양과 무질서'(Clture and Anarchy, 1869) 등의 저작을 통해 새로운 비평을 제안하고 그 핵심으로 교양 개념을 제시했다.

이런 아놀드의 기획에 대해 전형적인 맑스주의적 비평을 가한 이는 테리 이글턴이다. 그는 아놀드가 당대 계급세력의 급진적인 재편을 지배블럭 안에서 효과적으로 달성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기존체제로 포섭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고 비판했다. 귀족계급이 급속도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잃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부르주아의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문화적 패권 확보가 아놀드의 주된 관심사였다고 본 것이다. '문학에서 문화연구로'의 저자 앤서니 이스트호프 또한 "아놀드의 교양이념에서 문학이 계급갈등을 희석시키고 국가적인 조화를 긍정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본다.

이글턴과 이스트호프는 당연히 문학의 정치적 읽기로 나아간다. 이들의 단골메뉴는 대중문학(문화)과 고급문학(문화)의 위계철폐다. 그러나 요즘 이런 주장의 효력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대중들의 민주주의적 열망을 담아내기보다는 자본의 확장에 동원되는 측면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에서 철지난 '아놀드 때리기'와 '구하기'에서 벗어나 그의 핵심사유를 다시 읽어보려는 시도가 있어 눈길을 끈다. 김재오 영남대 교수(영문학)가 최근 '19세기 영어권 문학' 제10권 2호에 발표한 '아놀드의 사상-민주주의, 비평, 그리고 교양'이 그것이다. 김 교수는 "아놀드가 오늘날 대중문화의 자본종속과 같은 사태를 누구보다 우려하고 그 폐해를 실감했다"는 점에서 볼 때 "아놀드의 비판대상이 되었던 관점으로 아놀드를 비판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흐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평자들이 아놀드의 이데올로기적 입장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아놀드의 주장을 거꾸로 읽어야 올바른 독자가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 효과'"라며 김 교수는 목소리를 높인다. 아놀드의 현실인식이 '정치적 정답'과 일치하느냐의 여부보다 그의 비평과 교양개념에 담긴 당대적 의의를 살펴보는 것이 인문학의 위기라는 오늘날의 현실을 진단하는 데 유용한 참조틀이 될 것이라며 아놀드 다시 읽기를 시작한다.

우선 김 교수는 아놀드의 첫번째 비평적 주저에 해당하는 '현 시기 비평의 기능'이 프랑스 혁명 후의 영국사회의 변화상에 대한 사상적 대응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아놀드가 보기에 당시의 문인들은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처럼 '창조성'이 중요한 사상의 흐름 속에 있지 않았다. 그것보다 '인간의 힘'과 같은 것이 부족했고 필요했다. 아놀드는 바이런과 괴테가 위대한 창조력을 갖고 있었지만 괴테가 삶과 세계에 대해 폭넓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력이 더 오래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아놀드는 워즈워드를 비롯한 이전 세대 시인들이 프랑스혁명의 여파를 전 유럽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했고, 그 이념의 전파가 몰고 올 영국사회의 변화를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지 못한 점이 불만스러웠다.

먼저 프랑스혁명과 영국혁명의 차이를 보자. 아놀드가 보기에 프랑스혁명은 이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사상에서 그 동력을 발견한 것이었고, 영국의 경우는 법이나 양심 등의 실제적인 감각에 기초한 것이기에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지 않았다. 하지만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을 두개로 쪼개서 보았다. 사상적 혁명에서는 성공했지만, 정치적 혁명에서는 실패했다고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에드먼드 버크에 동조했다. 버크는 프랑스의 과격한 혁명문화가 영국에 밀어닥칠 것을 우려한 대표적인 보수파 지식인이다. 주권재민의 원칙은 영국에서 시발되었으나 권리장전에 채택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프랑스로 건너가 형멱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이에 대해 버크는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정리했다. "주권재민의 원리는 영국 토양에 전적으로 맞지 않으나 영국에서 자란 가공되지 않은 산물로서 어떤 사람이 이중의 사기로 불법적으로 선적해 [프랑스에] 수출한 위조품이다. 이 수출의 목적은 이 위조품을 향상된 자유라는 최신 프랑스식의 유행을 따라 다시 제조해서 영국에 밀수입하려는 데 있다."

대단히 역동적인 정리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여기서 아놀드가 읽어낸 교훈은 "훌륭한 사상들을 정치적이고 실제적인 부분에 즉각적으로 적용하려는 열광은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사상은 '그 자체로' 평가해야 하나 자신들의 요구에 따라 사상의 본질을 왜곡하면서까지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보았다. 김 교수는 여기서 "아놀드의 사상은 정치이념으로서의 성격보다는 한 문화를 성장시키는 정신적 토양에 가깝다"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 명제가 김 교수 논문의 핵심이다.

아놀드는 프랑스 혁명사상이 과연 보편적인가를 심각하게 질문했던 것이다. 그 방식은 바로 그것을 영국사회의 특수성 속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것은 '추상적'이라는 판단을 받게 된 것이고.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현실세계에 작용하는 '사상'에 대한 필요성이 아놀드에게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교양' 개념은 이런 필요성에 따라 등장한 개념이라고 김 교수는 말한다.

이 '교양'이 '프랑사(*프랑스)의 사상'과 다르게 하기 위해 그는 독일에 눈을 돌렸던 듯하다. 쉴러 같은 독일 관념론자들에서 잘 나타난 '인격도야(Bildung)의 개념이 그것이다. 리딩스(Bill Reading) 등의 지적에 따르면 독일 관념론자들의 기획은 지식과 역사적 전통을 미학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매개하여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교양(문화)의 이상을 드러내는 일과 개인의 발전을 하나의 과정을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과 영국의 국민적 기질은 거의 상반됐다. 민족적 정체성보다는 개인주의가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따라서 아놀드는 개인적 도야를 역으로 틀어 당시 영국에 퍼지던 물질적 문명에 대한 맹신, 강한 개인주의, 융통성의 부족(똘레랑스의 실종?) 등의 문화적 에토스에 대한 대응으로서 '교양'을 설정했다.

교양이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학문적 열정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선행에의 충동, 인간적 오류를 개선하려는 사회적 동기와 결합한다. 무엇보다 아놀드는 교양의 이념을 국가 개념과 결합시키려고 노력한다. 노동계급이 오랜 봉건적 습속에서 벗어나 자유 그 자체를 숭배하는 무질서한 경향이 뚜렷해지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아놀드의 노동계급에 대한 시각은 일방적인 면이 있음을 김 교수는 인정한다.

계속 지적하자면 아놀드에게는 계급의 현실이 부차적이거나 항상 생략됐다. 교양의 작용이 계급을 없애려면 계급간의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는 우선적 고려사항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아놀드 교양이념의 재료를 발견할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은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의 탁월한 윌리엄즈는 "교양개념은 올바른 실천과 앎이 결합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되지 않고 '앎'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일종의 '물신'이 되어버렸다"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결론에서 아놀드의 교양개념이 현실을 수용하지 못한 측면이 많지만,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가는 길목에 '교양'의 이념이 있음을 강조했고, 그 이념을 당성하는 데 '문학'의 역할이 있음을 알렸다는 측면을 높이 평가한다. 김 교수의 논문은 아놀드 사상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그 장단점을 잘 정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교양이라고 일컬어지는 가벼운 것들과 아놀드의 교양을 비교해볼 필요는 충분히 있을 듯하다.(리뷰팀)

07. 03. 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달팽이 > [퍼온글] 열정의 학자 정민 "미치지 않고 뭘 해요"




[인터뷰]<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펴낸 정 민 교수

[북데일리]정 민(47)교수의 글은 빠르게 읽힌다. 반복과 부연이 ‘덜’ 하기 때문이다. 군더더기 없는 그의 ‘마른’ 글은 중고생이 읽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쉽다. 그 어렵다는 연암도, 다산도 정민 교수의 손을 거치면 평이해진다.

그는 “학자들의 글은 어렵다”는 통념을 깬 저술가다. 특정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전문적인 단어 대신 보편적인 단어와 문장을 통해 고전읽기를 대중화시켰다. <한시미학산책>(솔. 1998) <미쳐야 미친다>(푸른역사. 2004) <다산선생지식경영법>(김영사. 2007) 모두 그가 만들어낸 베스트셀러다.

이번에 발표한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휴머니스트. 2007)은 2001년부터 7년에 걸친18세기 탐구에 대한 중간 결산작업이다. 18세기의 특징적 문화현상,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 지적 경향 등을 다뤘다.

19일 그가 재직 중인 한양대학교를 찾았다. 병원 차트 보관대에 꽂힌 수백 개의 자료파일, 이중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크기의 서가. 연구실 곳곳에 붙어 있는 메모들이 치열한 연구의 흔적을 드러냈다. 정 교수는 저술법과 연구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2시간여에 걸쳐 밝힌 학문을 향한 고백은 뜨겁고, 순수했다.

-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의 도입부를 보면 한 분야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는 <미쳐야 미친다>에서 엿볼 수 있었던 ‘벽(癖)’의 예찬론입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진정한 ‘벽’의 의미란 무엇입니까.

“벽이란 자신까지 잊는 ‘몰두’입니다. 벽은 맹목적이고 저돌적이죠. 예전에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해서 늘 지나친 것을 경계하고 차단했습니다. 과거에 ‘벽’이 터부시 되었다면 지금은 ‘벽’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미치지 않고 뭘 할 수 있나?”라는 자문이 끊임없이 필요합니다. 실로 ‘벽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18세기 지식경영의 배경, 조선지식인들을 살펴보면 이렇듯 미칠 듯한 몰두가 엿보입니다. 18세기는 외형적으로는 ‘정보화의 문화’ 내부적으로는 ‘벽의 추구’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 교수님의 방대한 저술량을 보면 스스로도 ‘벽’ 의 기질이 다분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한 가지에 몰두하면 끝을 보는 성격입니다. <한시미학산책>을 쓸 때 얘긴데. 우연히 어떤 논문에 있는 새 울음소리로 만든 금언체(禽言體) 시를 보게 됐습니다. 딱 4수였는데 퍼즐을 풀 수가 없어 무척 답답했죠. 밤낮으로 그걸 고민하다 보니 같은 시기의 다른 논문집에 실린 또 다른 금언체 한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간 금언체 한시를 모았습니다. 논문을 써야겠다는 결심이 서자 새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죠. 당시 대만에 교환교수로 가있었는데. 대만조류협회에가서 중국에서 새 관련 책자, CD, 테이프, 우표를 사서 공부했습니다. 일본에 가서 조류도감도 가져왔죠. 그렇게 필요한 게 있으면 어디든 가서 찾아와야 직성이 풀리는 편입니다. 대부분의 작업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됩니다. 보이는 대로 자료를 모으다 보면 먼저 모이는 것이 생기죠. 그 중에서 ‘나 좀 어떻게 해주세요’라고 외치는 것들이 다른 것보다 먼저 책으로 만들어집니다”

-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을 통해 찾아낸 18세기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18세기는 조선이 체험한 최초의 정보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세기를 실학의 코드로만 설명하는 것은 전면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실학은 유용성의 담론이기 때문에 가치의 유무만 따지죠. 어찌 보면 유득공집비둘기에 몰두한 것이나, 앵무새, 화초, 꽃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실학기준으로 보면 잡학일 뿐입니다. 그러나 18세기에 정보화의 대 변혁이 일어나며 많은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18세기는 지금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예전과 비교해 볼 때 지금은 무가치하다고 생각되던 정보들이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판매가 되고 수요층이 있기 때문이죠. 정보의 우선순위에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 되는 것이 바로 ‘편집’의 능력입니다. 정보를 어떻게 선별하고 취할 것인가로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면 많이는 알되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박제가나 유득공처럼 급제를 하지 못한 서얼들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대학은 나왔지만 취직을 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학문을 향한 태도만큼은 다릅니다. 시험에 관계없이 학문을 향해 열정을 불태우던 그들과 달리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열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18세기를 정보화 하고 체득하는 과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 과거 시대의 인물.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시대 인물들에게 특별한 애착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정말 꼽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요.

“다산과 연암을 빼놓을 수 없겠죠. 10년간 연암을 연구했습니다. 다산은 미국에 가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죠. 기질로 봐서 저는 다산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꼼꼼하고 소심한 편이죠.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연암입니다. 연암을 알고 나서 저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습니다. 공부하는 스타일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죠. 지금처럼 다양한 주제에 폭넓은 관심을 갖게 된 것 모두 연암의 영향입니다. 연암을 체험하기 전에는 전통적인 한문학을 연구하는 학자 일 뿐이었죠. 그러다 또 이덕무에 빠져서 여러 해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덕무하면 우선 삐쩍 마른 몸. 퀭한 눈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인간이 저렇게 열심히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죠. 책읽기와 학문을 향한 그의 성실한 태도는 배울 점이 정말 많습니다. 다산에 도착하면 또 달라집니다. 다산 역시 성실의 화신이지만 이덕무가 주는 인간적인 면은 없죠. 엄청난 절망 속에서 자신을 세우려는 의지가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18세기 문인들은 소통의 글쓰기를 실천했습니다. 그들의 글을 읽다 보면 스스로가 움직이는 것을 느낍니다. 매번 매료되곤 합니다”

- 고전읽기 붐이 일고 있습니다. 직접 쓰신 <다산선생지식경영법>을 비롯해 많은 책들이 고전 읽기의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전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시공간을 초월해 가치 있게 읽히는 것이 고전입니다. 지금 수업 중에 강독하는 것이 <고전명문감상>인데 학생들이 굉장한 혼란에 빠집니다. 글이 갖고 있는 충격이 굉장히 무겁게 다가온다고 합니다. 자꾸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고 해요. 심지어 어떤 학생은 책을 읽다 수업 중에 울기도 합니다. 리포트 쓰다 우는 학생도 많았습니다. 모두 자신이 새까맣게 잊었던 것을 회복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과거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렇듯, 미친 듯이 열정을 쏟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자문을 하게 되는 것이죠. 지금 대학생들을 보면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모두 영어공부, 취업공부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12년간 대학에 들어오려고 공부하고, 대학 와서는 취직을 위해 공부하고, 직장에 들어가면 안 잘리려고 공부하고. 결국 자신을 위한 공부는 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얼마나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관심만 있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죠. 고전은 그 본질적 문제를 명확히, 깊숙이 찔러줍니다. 그리고 확인시켜주죠. 그러니 지금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클 수밖에요. 지금 지식은 전부 실용적인 것들뿐입니다. 고전에는 도구적인 것을 뛰어넘어 삶의 자세를 가다듬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 600페이지가 넘는 <다산선생지식경영법>을 6개 월 만에 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왕성한 저술력의 비결이 궁금합니다.

“어떤 관심사가 생기면 일단 메모를 시작합니다. (병원카트에 꽂혀 있는 파일 철 세 개를 가져와서) 얼마 전에 <에도시대의 여행문화>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그걸 읽으면서 왜 조선시대를 소재로 한 이런 책은 없을까라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18세기 조선의 여행문화’라는 이름의 파일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지에 어떤 내용들이 가능할까 쭉 써내려 갑니다. 그러면 30개 혹은 40개에 달하는 소재들이 정리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두 장짜리 세부안을 만듭니다. 여기에는 추가적인 메모들이 곁들여집니다. 미쳐 생각 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붙이고 추가 하는 작업이죠. 그 다음에는 ‘내가 왜 이 책을 쓰고 싶은지’에 대한 집필 의도를 씁니다.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하면 쓰지 않습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파일 철이 (차트를 가리키며) 저기 꽂힌 것들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해서 바로 논문이나 책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죠. 몇 년 후에 완성될지 몰라요. 그렇지만 떠오르는 것들은 반드시 파일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을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게 될 때 본격화 하는 식이죠”

- 교수님의 글쓰기는 중고등학생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다는 평을 받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단문체의 비결, 쉽게 쓰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글은 반드시 짧게 씁니다. 퇴고 할 때 글 자르는 게 일이죠. 글이 짧으면 속도감이 생깁니다. 마냥 늘어놓으면 뜻이 접속이 안 됩니다. 관용어절을 끌고 들어가는 습관을 매우 싫어합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영희언니를 만났다’라는 문장을 예로 들어볼까요. 벌써 내가 좋아하는 게 영희인지 영희 언니인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글쓰기에 있어 구문의 간결성은 무척 중요합니다. ‘조선후기고문론(문장론)연구’가 제 박사학위 논문입니다. 예전 한문가들의 문장을 연구했죠. 글쓰기에 있어서 간결함, 표현의 함축성을 추구하는 것이 제 전공입니다. 그러다보니 글쓰기에 굉장히 예민한 편입니다. 우리나라 문장에는 ‘이다’ ‘있다’ ‘것이다’ 체가 있습니다. 모든 글쓰기의 기본은 ‘이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있다’는 늘어지고 ‘것이다’는 권위적인 느낌을 줍니다. ‘것이다’라는 표현을 자주 쓰면 ‘00은 것이었던 것이다’라는 문장까지 쓰게 됩니다. 강조하는 데 매달리게 되는 거죠. 권투로 말하자면 ‘이다’는 ‘잽’ ‘있다’는 ‘어퍼컷’ ‘것이다’는 ‘스트레이트’입니다. ‘어퍼컷’이나 ‘스트레이트’는 아무 때나 쓰면 안 됩니다. 결정타로 정말 필요한 곳에만 써야 합니다. 자신이 쓴 글을 읽어 보면 스스로가 ‘이다’ ‘있다’ ‘것이다’ 중 어느 형의 인간인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학자들의 글을 보면 그 세 가지 분석이 가능합니다”

- 글쓰기를 두려워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동어 반복을 피하는 방법도 들려주시죠.

“리듬 살리는 것에 주의하다 보면 동어반복은 피할 수 있습니다. 글에는 리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머릿속에 들어옵니다. ‘그러나’가 나오면 그 다음은 ‘반면에’로 다음은 ‘또한’으로 고쳐야 합니다. ‘00처럼 00 처럼 00 처럼’이 아니라 ‘00처럼 00이냥 00같이’로 다양하게 바꾸어야 합니다. 어미를 다르게 하면 완전히 다른 글이 됩니다. 글을 쓸 때는 반드시 소리를 내서 읽어야 합니다. 더 좋은 것은 남이 읽어주며 퇴고하는 방법입니다. 제 글의 대부분은 아내가 읽어줍니다. 듣다 보면 ‘턱’ 걸리는 부분이 나옵니다. 잘못된 문장이죠. 그러면 고칩니다. 읽히기 위해 쓰는 것이 글입니다. 읽히지 않으면 글이 아니죠. 그래서 퇴고는 아무리 해도 부족합니다. 끊임없이 고치고, 또 고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 글쓰기와 함께 거론 되는 것이 독서의 중요성입니다. 책읽기의 필요성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통찰력을 기르는 과정입니다. 자신의 삶을 운영해나가는 기본적인 힘을 기르는 과정이 독서죠.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정보취득의 목적으로 책을 읽습니다. 잘못된 방법이죠. 책이 잘 읽히고 않고 손이 가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독서는 삶의 안목과 통찰력을 길러주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습니다. 삶의 기본을 가르치는 책을 처음부터 소리내어 읽는다면 그것이 갖는 힘은 실로 대단할 것입니다. 동종 분야보다는 다른 분야의 책에서 더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보는 자신의 관심사에 의해 ‘재배열’이 됩니다. 같은 책이라도 읽는 이에 따라 효과가 달라집니다.

실용위주의 책읽기가 아닌 자신의 자양분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책읽기가 필요합니다”

- 글 쓰고 공부하는 것 외에 다른 취미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이덕무처럼, 정약용처럼 오직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고 계신 듯 보입니다. 지금의 삶에 행복을 느끼십니까.

“물론 행복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글은 주로 저녁에 씁니다. 낮에는 강의도 있고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일도 있거든요. 저녁 11시 12나 돼야 집에 갑니다. 강의실에 있을 때도 부재중으로 해놓고 문을 잠가 놓을 때도 있어요. (웃음) 토요일 일요일에도 주로 학교에 나와 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은 그때 밖에 공부할 시간이 없어요. 그래도 연구실에 조용히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예전에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종종 갖곤 했는데 요즘에는 시간이 아까워서 못 마십니다. 어떻게 보면 삶이 무미건조 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 묘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건 다른 사람과 같이 나눌 수 없는 나만의 즐거움이겠지요”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한국어가 소멸된다고?

막간에 뉴스들을 둘러보는데, '한국어가 소멸된다고?'라는 선정적인 타이틀이 눈에 띄었다. 프레시안 편집자의 말대로, 일부 언어학자들은 소수 부족들의 언어가 급속하게 사멸해가고 있음을 이미 경고한 바 있다. 그 멸종어 대열에 한국어도 포함되는 일이 적어도 당분간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가까운 장래에 이중언어적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이미 대학캠퍼스와 강의실에 '영어'를 도입하고자 하는 시도가 '세계화'를 명분으로 맹렬하게 추진되고 있지 않은가. 미국 국적을 얻기 위한 원정 출산 대열이 줄지 않는 데에서 보듯이 '한국인'이 되는 일이 더 이상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게 될 때, '한국어'의 운명을 낙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국어 파괴'는 거기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기사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은 '파괴'라기보다는 '오용'에 가까운 것 아닌가? 문법학자의 근심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프레시안(07. 03. 20) 한국어가 소멸된다고?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淸)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언어인 만주어가 사멸 위기에 놓여 있다고 <뉴욕타임즈>가 최근 보도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세기 말까지 전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6800개의 언어 가운데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한국어도 크게 예외는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한국사회에서 '영어'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제 특정계층에서 영어는 '외국어'가 아닌 '공용어'의 위치를 차지한 듯 보이기까지 한다. 또 인터넷 공간에서 구어체 중심의 '쓰기 문화'가 10-20대 계층에 일반화되면서 한글 맞춤법과 문법의 파괴 속도 역시 가속화되고 있다.
  
따라서 '만주어 사멸' 뉴스를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수많은 민족어 중 하나인 한국어도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이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사라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굳이 패권주의적인 민족주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해 온 이들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지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나 발명된 '과학적 문자'인 한글은 세계 모든 언어를 음성기호로 표기할 수 있는 매우 수용성이 높은 언어다.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해 인하대 국어교육과 박덕유 교수가 기고한 글을 싣는다. 박 교수는 이 글에서 한국어 파괴의 징후들을 거론하면서 이를 막기 위한 교육적 대처 방안 수립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편집자>

인구 규모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출산율은 2.08명인데, 최근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1.08명이다. 이러한 출산율이 계속 유지된다면 2050년에 3000만 명으로, 2200년이면 500만 명으로 줄어들다가 2800년이면 완전히 멸종될 것이라는 'UN미래보고서'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시급한 것은 한국어에 대한 소홀이 지금처럼 진행된다면 한국어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근 학생들의 문법 지식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서 서울, 인천, 천안 등 3개 도시의 6개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게 하였다. 40분의 시간을 주고 제목은 학교마다 다르게 다양한 주제를 주었다. 아래 예문은 학생들이 쓴 문장 중 일부만 제시한 것이다.

학생들이 잘못 쓴 문장 → 수정한 문장
  
  한국가 일본사이에 애매하게 위치해 있는 독도→한국과 일본 사이에 애매하게 위치해 있는 독도

  
  휴전선을 없에고 통일을 한다면 →휴전선을 없애고 통일을 한다면
  
  올림픽과 월드컵까지 개최한 세계적인 국가가 됬다. → 월드컵을 개최한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다(됐다).
  
  노력 할꺼고 좋은 아빠가 될꺼다. 노력할 것이고 좋은 아빠가 될 것이다
  
  내 서적에도 안돼고 → ? 안 되고
  
  독도는 자기꺼라고 할 때 기분이 나뻤다. → 독도를 자기나라 거(영토)라고 할 때 기분이 나빴다.
  
  독도의 대해 찾아볼것이다.독도에 대해 찾아볼 것이다.
  
  저번해 뉴스에서 이산가족 상봉장면을 보았습니다. → 저번에 뉴스에서 이산가족 상봉장면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꿈은 수도없이 밖였다. → 지금까지 꿈은 수없이 바뀌었다.
  
  그리고우리동뇨는그리고 우리 동료는
  
  독도는 어면히우리땅인데 일본을 그렇게 실어했는데 →독도는 엄연히 우리땅이므로 일본을 그렇게 싫어했는데
  
  그때잘했을껄그 때 잘 했을 걸
  

  원레 1학년 때는 왼쪽무릎의 쓸개골에 염증이 생겨 깊스를 했었습니다. → 원래 1학년 때는 왼쪽무릎의 쓸개골에 염증이 생겨 깁스를 했었습니다.
  
  작년이나 제작년에는 → 작년이나 재작년에는
  
  그집은 자매나 형재고그 집은 자매나 형제나
  

  시험이끊나고 단합대회를 했으면 좋겠어요. → 시험이 끝나고 단합대회를 했으면 좋겠어요.
  
  가장 기뻣던일 → 가장 기뻤던 일
  

  이빨이 않좋은게 아니라 → 이가 안 좋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나쁜 날은 아마 업을겁니다. → 이렇게 나쁜 날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자기소게자기소개
  
  용서가 돼지 않을만한 것이다. → 용서가 되지 않을 만한 것이다.
  
  뜨거운 포웅 → 뜨거운 포옹
  

  외국인과의 의사소통이 않되었을때 → 외국인과의 의사소통이 안 되었을
  
  언른 나으셔서 오래오래 사시게 해주세요. → 얼른 나으셔서 오래오래 사시게 해주세요.
  
  조은꿈만...조겠다.좋은 꿈만 -- 좋겠다.
  
  몇일전 너무나 어이없고 → 며칠 전 너무나 어이없고
  
  무슨일을하던, 무슨꿈을위해달리던 구지 하나만 고집했다가 →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꿈을 위해 달리든(지) 굳이 하나만 고집했다가
  
  기술시간의 배운 생명공학이라는 → 기술 시간에 배운 생명공학이라는
  
  일본이 실습니다. → 일본이 싫습니다.
  
  지금 난리라고 함니다. → 지금 난리라고 합니다
  
  채벌을 하지 않겠다. → 체벌을 하지 않겠다.
  
  충격을 바드셨습니다. →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남학생과 여학생의 차이가 다소 있지만, 남학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30% 정도가 맞춤법을 제대로 모르고 위의 예문과 같이 사용하는 게 현실이다. 이는 무엇보다 문법 지식이 부족한 데서 오는 것으로 보다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문법 지식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20대 이상의 일반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일반인들의 어문규정(맞춤법, 표준어) 인지(認知)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실제 언어생활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는 단어 100개에 대해 서울, 인천 지역에 거주하는 일반인 57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했다. 100문항 중 정답률이 40% 이하인 단어는 모두 29개였다. 이 중 몇 가지를 보면 다음와 같다.
  

오답 → 정답 (괄호 안은 정답률)
  
  닐리리(15.3%) → 늴리리
  쌍용(18.6%) → 쌍룡
  오뚜기(25.3%) → 오뚝이

  산수갑산(26.1%) → 삼수갑산
  서슴치(27%) → 서슴지

  풍지박산(27.8%) → 풍비박산
  생각컨대(29.4%) → 생각건대

  흐리멍텅하다(31.1%) → 흐리멍덩하다
  숫소[황소](32.0%) → 수소

  개나리봇짐(32.7%) → 괴나리봇짐
  우뢰(32.8%) → 우레

  숫놈(32.8%) → 수놈
  설걷이(32.9%) → 설거지

  곱배기(33.6%) → 곱빼기
  집에 갈께(33.6%) → 집에 갈게

  햇님(34.4%) → 해님
  윗층(36.1%) → 위층

  삯월세(37.8%) → 사글세
  주초(37.8%) → 주추

  홀홀단신(38.4%) → 혈혈단신
  촛점(38.6%) → 초점

  개발새발(39.4%) → 괴발개발


 

 

 

 

 

 

 

 

 

 

 

 

  

연령별로 살펴보면, 나이가 많을수록 성적이 떨어졌다. 20대는 58.1점, 30대는 56.3점, 40대는 54.5점, 50대는 53.9점으로, 1989년 어문규정이 새로 적용된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학력별 성적은 반드시 교육적 효과와 비례하지 않았다. 대재 및 대졸자가 57.1점이지만, 중졸이 55.8점으로 고졸 55.0점보다 오히려 성적이 높았다. 따라서 어문규정이 개정된 이후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어문규정의 교육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지구상에는 약 1만여 개의 언어가 존재했었다. '에스놀로그(Ethnologue)'에 따르면 현재 지구상에 사용되고 있는 언어는 6912개이며, 이들 언어 가운데 언어 전수 기능이 가능한 언어는 300개 미만으로 세계인의 96%가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도 100년 후에는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며,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 일부 언어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소멸될 것이라고 한다. 과학적으로도 훌륭한 문자라고 자랑하는 우리 한국어도 예외는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온통 영어로 난리법석이다. 각종 중고등학교 입학시험이나 평가시험, 대학 입학시험, 취업 시험 등 영어 점수가 낮으면 그 어디에도 들어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게다가 앞 다투어 경쟁이라도 하듯이 각 지방자치마다 영어마을 선포식을 갖는 등 영어는 어느새 우리 민족의 얼과 문화를 잠식해 가고 있다. 특히, 2009년부터는 초등학교 1학년에서 영어를 가르치도록 되어 있어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던 영어공용어 바람이 거세게 불어 한국어의 위기는 갈수록 심각할 것이다.


  
한글은 실질적 의미를 나타내는 어근에 문법적 의미를 나타내는 형태소가 붙어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는 형태적 특징의 언어로 첨가어(添加語) 또는 교착어(膠着語)이며, 자음과 모음 40개의 음소문자로 발음의 전부 또는 일부를 해당글자로 사용하는 표음문자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언어는 한국어 외에 일본어, 터키어, 몽골어, 헝가리어 등 우랄 알타이어계 언어들이다. 표음문자에는 단어의 음절 전체를 한 단위로 나타내는 문자인 음절문자와 음소적 단위의 음을 표기하는 음소문자(자모문자)로 나뉜다. 전자의 예로 일본의 가나 문자를, 후자의 예로 로마자와 우리 한국어를 들 수 있다.
  
그런데 한글은 단순히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음운자질을 반영하는 글자이다. 즉, 발음기관을 본 따 만든 기본 글자(ㄱ,ㄷ,ㅂ,ㅈ)에 가획의 원리(ㅋ,ㅌ,ㅍ,ㅊ)와 병서의 원리(ㄲ,ㄸ,ㅃ,ㅉ)로 거센 글자와 된소리 글자를 만들어 냈다. 따라서 로마자가 무성음과 유성음의 2분법적인데 반해 우리 한글은 3분법적의 음운적 특징으로 세계 모든 언어를 음성기호로 표기할 수 있는 아주 우수한 문자이다.

영국과 미국이 50여 개 이상의 연방국가로 세계를 장악하고, 중국이 50여개 이상의 소수민족을 연합하여 거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또한 아랍국이 연합하고 유럽이 연합하고 있다. 이제 언어도 영어, 중국어, 유럽어, 아랍어 등 몇 개 언어로 좁혀질 것이다.
  
'언어 전쟁'이 시작되고 있다. 우리도 남북통일은 물론 일본, 몽골, 중앙아시아, 터키 등을 연결하는 알타이어계의 중심어로 자리 잡아 나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여러 가지 한국어교육 정책이 필요하겠지만 그 중 대외적으로는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 700만 한민족 동포가 180여 개국에 산재되어 있다. 이들을 기저로 한국어교육 정책을 펼칠 전문기관이 필요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한국어교육에 관련된 교재를 정부에 보내달라고 하니 김대중 대통령 자서전을 보냈다는 웃지 못 할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내국인에게 말하기-듣기 중심의 기능주의에서 벗어나 정확한 언어생활을 할 수 있도록 문자언어 중심의 교육 정책이 필요하다. 언어 소멸 속도는 굉장히 빠르다. 갑자기 한두 세대 만에 사라질 정도로 우리는 '언어 전쟁' 속에 살아가고 있다. 세계의 언어 경쟁력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문법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한국어가 소멸된다'는 가설은 곧 현실로 다가올지 모른다.(박덕유/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

07. 03. 20.

P.S. 지난달에 연재가 끝난 고종석의 칼럼 '말들의 풍경'에서 한국어의 운명에 관한 마지막회분을 참고로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2. 21) [말들의 풍경] <51·끝> 한국어의 미래

수천에서 1만 여에 이른다는 자연언어들 가운데, 그 말을 쓰는 사람 수를 기준으로 한국어의 순위는 어디쯤일까? 개별 언어와 방언의 경계를 긋기가 쉽지 않아서 한국어의 순위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흔히 아랍어라 부르는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 언어를 그 고전적 형태(문어 형태)에 주목해 한 언어로 간주하면, 한국어의 순위는 아랍어보다 크게 뒤질 것이다. 그러나 각 지역마다 사뭇 다른 구어 형태의 아랍어들을 서로 다른 언어로 친다면, 한국어는 그 각각의 아랍어들(이집트 아랍어, 알제리 아랍어 등)보다는 큰 언어다.

이렇게 기준이 물렁물렁하긴 하지만, 순위를 얼추 가늠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과 해외의 한인공동체 인구를 7,500만 남짓으로 잡으면, 그 사용자 수로 볼 때 한국어의 순위는 12, 13위 정도 된다. 1억 가까운 사람이 쓰는 독일어보다는 작은 언어지만, 7,200만 남짓 되는 사람이 쓰는 프랑스어보다는 큰 언어다. 수천이 훨씬 넘는 언어들 가운데 12, 13번째로 사용자가 많다는 것은 한국어가 매우 큰 언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12, 13위라는 순위만큼 한국어가 위풍당당하지는 않다. 우선, 순위의 앞머리 세 자리를 채우고 있는 베이징어(보통화), 스페인어, 영어의 사용자 수가 3억에서 9억에 이르는 것과 비교하면, 고작 수천만의 화자를 거느린 한국어의 비중은 탐스럽지 않다. 남한 인구가 정체 상태에 있는 데다가 북한 인구는 심지어 줄어드는 추세여서, 적어도 단기적으론 한국어 사용자가 늘어날 것 같지도 않다. 더구나 12, 13위라는 순위가 어떤 자연언어를 제1언어(모어,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 수를 기준으로 매긴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한국어의 상대적 위세는 훨씬 더 초라해진다. 사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영어가 베이징어보다 훨씬 작은 언어고 심지어 스페인어보다도 약간 작은 언어라고 할 때, 그것은 이 언어들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 수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3억2,000만 남짓으로 추정돼 3억3,000만 남짓으로 추정되는 스페인어 사용자보다 조금 적다. 그러나 영어를 스페인어보다 비중이 작은 언어로 판단하는 사람은 없을 테다. 영어는 지구 행성의 보편어에서 그리 멀지 않는 국제 교통어의 지위를 이미 확립했지만, 스페인어는 이베리아 반도와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일부에 갇혀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 대부분이 제 모국어에 이어서 배우는 언어는 베이징어나 스페인어가 아니라 영어다. 영어는 스페인어나 (9억인의 모어인) 베이징어보다 비중이 큰 언어인 것이다. 한국어는 모국어 사용자 수를 기준으로 매긴 순위보다 교통어로서의 순위가 사뭇 떨어지는 언어다. 그것은 한국어공동체 바깥에서 한국어가 그리 매력적인 언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제1언어로 한국어를 익히는 사람은 제1언어로 프랑스어를 익히는 사람보다 많지만, 한국어가 프랑스어보다 더 비중있는 언어라고 판단하는 사람은 없을 게다. 프랑스어를 제2언어나 제3언어로 익히는 사람은 수억 명에 이르겠지만, 한국어를 제2언어나 제3언어로 익히는 사람은 아주 늘려 잡아도 수백만 명 정도일 테니 말이다.

교통어로서의 비중만 보면, 한국어는 모국어 화자가 6,000만이 안 되는 이탈리아어보다도 덜 중요한 언어다. 그렇다면 교통어로서 한국어의 미래는 어떨까? 다시 말해, 외국어로서 한국어의 미래는 어떨까? 이 질문은, 자신이 배울 외국어를 고르는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뭘까라는 질문과 관련돼 있다. 사람들은 우선,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이 쓰는 언어를 배우고자 한다. 어떤 언어를 쓰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언어의 커뮤니케이션 폭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국어 화자가 가장 많은 베이징어나 교통어 화자가 가장 많은 영어는 이 언어들이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제2언어 후보가 된다.

이미 많은 사람이 쓰고 있는 언어를 사람들은 배우려 들고, 그러니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은 더 많아진다. 부익부 빈익빈인 셈이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7,500만 남짓의 인구집단은 이 언어를 외국어로 배우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기에 모자람이 없는 규모다. 그러나 모어 화자가 이렇듯 많은 데 비해, 한국어를 교통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한국어 공동체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힘이 가까운 과거에 이르기까지 그리 크지 못했고, 한국인들이 역사의 오랜 기간 국제교류에 소극적이었다는 뜻이겠다. 이 점이 교통어로서 한국어의 가능성에 제약으로 작용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어를 외국어로 익히는 사람이 지금 적다는 사실이 앞으로도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우고자 하는 욕망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 다음, 첫 번째 조건과 부분적으로 겹치겠지만 중요성에서는 아마 으뜸으로, 사람들은 제게 경제적 이득을 베풀 언어를 제2언어로 배운다. 사람들이 (모국어 화자가 가장 많은) 베이징어를 제쳐놓고 영어를 제2언어로 배우려 드는 것은 영어가 경제활동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회사에 일자리를 얻으려 해도 영어를 다소 아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회에서 영어는 각급 학교의 필수 외국어로 지정돼 있다. 고를 권한을 학생들에게서 박탈할 만큼 영어는 온 세상의 교육과정에 깊이 뿌리내렸다.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의 경제적 힘과 관련이 있다. 북한과 함께 한국어 사용권의 핵심부를 이루는 남한 지역의 경제적 활력은 교통어로서 한국어의 미래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베트남이나 몽골처럼 한국과 경제관계가 긴밀해진 나라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셋째, 사람들은 문화 영역의 자아 실현을 위해 외국어를 배운다. 여기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허영심이다. 이를테면 프랑스어는 스페인어에 견주어 모어 화자가 훨씬 적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을 뺀 대부분 지역에서, 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우는 사람이 외국어로 스페인어를 배우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거기엔 프랑스어권에서 축적된 문화가 스페인어권에서 축적된 문화보다 더 풍요롭다는 판단이 개재돼 있다. (거기엔 또 부분적으로 정치적 이유가 개재돼 있다.

한 때 유럽의 중심국가로서 스페인 못지않게 넓은 해외 식민지를 경영했던 프랑스는 오늘날 유럽연합이나 국제연합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스페인보다 훨씬 더 큰 정치적 발언권을 지니고 있다.) 외국인들의 문화적 허영심을 만족시킬 매력이 한국어에는 넉넉하지 않다. 역사의 대부분 기간에 한반도 문화는 고전중국어로 다시 말해 한문으로 축적됐고, 한국어가 문화의 도구로서 본격적으로 행세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 한 세기 남짓 전이기 때문이다.

넷째, 사람들은 배우기 쉬운 언어를 배운다. 다시 말해 제 모국어와 문법 유형이 비슷하거나 어휘가 닮은 언어를 익히려 한다. 일본의 경제력은 프랑스를 포함한 프랑스어권 전체보다 크다. 그렇지만 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우는 사람 수는 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우는 사람보다 훨씬 적다. 그 이유의 큰 부분은, 앞에서 시사했듯, 프랑스어로 축적된 문화가 일본어로 축적된 문화보다 더 매력적으로 비친 데 있겠지만, 대부분의 언어권 사람들에게 일본어가 배우기 너무 어려운 언어라는 사정도 거기 포개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세계적 규모로 행사하는 경제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사람들 다수는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문화권에 몰려 있다.

최근 들어 그 관계가 뒤집히긴 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이나 스페인 사람들이 제2언어로 영어보다 프랑스어를 선호했던 것도 영어보다는 프랑스어가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와 더 닮아 배우기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연관효과’라 부를 만한 것도 학습동기 부여에 간여한다는 점을 지적하자. 사람들은, 꼭 제 모국어와 닮지 않은 언어일지라도, 서로 닮은 언어들이 많은 언어를 배우고 싶어한다. 이를테면 프랑스어를 외국어로 익힌 사람이 그 다음에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나 이탈리아어를 배우기는 쉽다.

네덜란드어를 외국어로 익힌 사람이 그 다음에 독일어나 덴마크어나 영어를 익히는 것도 쉽다. 그러나 동아시아 바깥 사람이 일본어를 어렵사리 배워보았자, 그 ‘연관 효과’로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는 한국어 정도다. 그러니 일본어는 동아시아 바깥 사람들에게는 덜 매력적으로 보인다. 한국어도 같은 처지다. 한국어를 익히는 사람들이 그나마 일본에 꽤 있는 것은, 두 나라 사이에 확대되고 있는 교류나 어찌해볼 수 없는 지리적 근접성말고도, 일본사람들이 배우기에 한국어가 비교적 쉽다는 데 그 이유의 한 가닥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로 앞에서 내비쳤듯, 사람들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까운 나라의 언어를 외국어로 배운다. 최근 프랑스어를 제치고 스페인어가 미국인들의 제2언어로 떠오른 것은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멕시코를 비롯해 라틴아메리카 지역 대부분에서 스페인어를 쓰는 데다가, 미국 사회 안에 스페인어를 쓰는 이민자가 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적 인접 효과가 지리적 인접 효과를 상쇄하는 경우도 있다. 루마니아나 폴란드나 세르비아 같은 중부 동부 유럽 나라들은 지리적으로 프랑스보다 독일과 더 가깝지만, 그 나라 사람들은 외국어로서 독일어보다 프랑스어를 더 선호한다. 그 나라들에 이런저런 이유로 프랑스 애호가 퍼져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최근 늘어난 것도, 일본인들에겐 한국어가 비교적 배우기 쉬운 언어라는 사정에다가, 지리적 문화적 인접성(‘한류’에 대한 친화감을 포함해)이 포개지며 나타난 현상일 테다.

이런 모든 조건들을 따져서 판단할 때, 교통어로서 한국어의 미래는 밝지 않다. 다시 말해,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울 사람이 앞으로 크게 늘 것 같지는 않다. 한국어권 경제의 확장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고, 학습 동기를 유발할 다른 요인들도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래도 간접적으로나마 한국어를 배울 의욕을 북돋을 길은 있다. 그것은 사전을 포함한 한국어 학습 교재를 될 수 있으면 여러 언어로 다양하게 마련해놓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정부와 기업과 대학과 연구소가, 한국어학자와 외국어학자와 교육이론가가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한국어를 익히기 시작한 외국인들이 흔히 투덜거리는 것이 너무 단조롭고 부실한 학습 교재에 대해서다. 일리가 있는 불평이다.



좀더 많은 외국인이 한국어에 매력을 느껴서 이 언어를 배우길 우리가 바란다면, 그런 투덜거림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부가 한국어를 보급하기 위해 세계 여러 곳에 세울 예정이라는 세종학당도 다양하고 효율적인 한국어 학습교재가 마련된 바탕 위에서야 제 구실을 할 것이다. 한국어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조붓한 길이다. 시원하게 뚫린 한길이 아니다. 그러나 정성스레 닦아놓으면 그 길을 산책로로 골라 거닐 사람이 왜 없으랴.(고종석 객원논설위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가을산 > [펌] 이태복 전 복지부 장관 FTA관련 인터뷰

이태복 "FTA에 비(非)위반 제소 도입하면 약값 인하는 물거품"
[ 2007-03-15 오후 10:52:12 ]



한미FTA협정에서 비위반 제소를 인정할 경우 '포지티브 리스트' 등 약값 안정화 방안은 유명무실화 될 것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비(非)위반 제소(Non-Violation Complaint)제도는 한미 FTA 체결 이후 한국이 협정내용을 위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미국정부가 기대하는 이익을 얻지 못했다고 판단할 경우 한국정부를 제소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15일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에 출연, "이번 한미 FTA 협정에서 비위반 제소를 인정하면 약가 인하는 사실상 물 건너가게 된다"고 주장했다.

보건복지부는 작년 말부터 약값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포지티브 리스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비위반제도를 인정한다면 이 포지티브 리스트가 무력화될 수 있다고 이태복 장관은 밝혔다.

이 전 장관은 "미 제약회사의 신약을 우리 국민소득에 맞춰 가격을 낮춰서 포지티브 리스트에 등재하는 경우나 또는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리스트에서 아예 빼버릴 경우 모두 미국은 자국 제약회사의 이익을 위해 비위반제소제를 이용해 소송을 할 것이므로 우리정부의 포지티브 리스트 제도는 무력화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전 장관은 또 FTA 협상에서 정부가 '의약품 등재 및 약값 결정의 투명성을 제고하라'는 미국의 입장을 수용한 것과 관련, 미 제약회사들이 "약값 산정에서 가장 중요한 원가내역은 특허권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으면서 약값 결정과정에는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는 것"이라며 이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신율 (명지대 교수/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 출연 :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 비위반제소란?

한미FTA를 통해 미국정부가 기대하는 합리적인 이익이라는 게 있는데, 한국정부가 협정위반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기대이익에 못 미치게 되면 미국정부가 한국정부를 제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투자자정부제소권과는 어떤 점이 다른가?

투자자정부제소권이란 미국기업이 한국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 수 있는 것이고, 비위반제소란 미국정부가 한미FTA를 통해 기재했던 여러 이익을 한국정부가 지켜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미국정부가 한국정부를 상대로 제소하는 것이다.

- 비위반제소의 적용범위가 상당히 모호하다는데?

모호할 뿐 아니라 너무 애매해서 사실 국가간 협정에서 거의 적용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미국이 많이 활용하려는 협상전략이다. 우리의 경우 구체적인 문제가 될 소지가 너무 많다. 예를 들어 보건복지부에서 약가 등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포지티브 리스트라는 게 있는데, 예전에는 항목을 다 인정했지만 이제는 일정한 품목만 등재를 할 경우 미국의 신약이 빠질 수 있다. 미국은 한미FTA를 통해 그런 신약의 판매를 기대하고 있는데, 자기들의 기대에 못 미치게 될 경우 시비를 걸 수 있게 하는 제도가 비위반제소다.

- 보건복지부의 포지티브 리스트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그렇다. 이번 협정에서 비위반제소를 인정하면 사실상 약가 인하는 물 건너가게 된다. 그리고 두 가지 경우가 발생할 것이다. 첫 번째는 신약 가격을 우리가 인정한다 하더라도 현재 G7 국가들, 미국계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인정하라는 게 미국의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의 국민소득이나 경제규모로 볼 때 그것과 똑같은 기준을 인정할 수 없다. 당연히 우리는 약값을 다운해서 등재를 하게 될 텐데, 미국 입장에선 이게 위반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가 아예 등재하지 않는 경우다. 약값이 너무 비싸니까 우리 국민이 부담할 수 없다고 해서 빼는 경우인데, 이럴 경우에도 미국 입장에서는 한미FTA를 통해 자기들이 확보하려는 제도를 무력화하려는 제도라고 해서 비위반제소를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정부가 계속 시비를 받아야 하니까 구체적으로 집행하는 데 굉장히 어려워질 것이다.

- 비위반제소와 더불어 의약품 등재 및 약값 결정 등 투명성 제고라는 미국 입장을 수용하게 되면 약값 문제가 더욱 커질 텐데?

그렇다. 세부사항의 투명성 재고라고 얘기는 하지만 사실 투명성을 가로막는 제도가 바로 이 조항이다. 약값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원료를 사용했는지, 그 원료의 원가가 얼마인지다. 그런데 어떤 원료를 썼는지에 대해서는 미국 특허권에 의해 보호가 되기 때문에 그들은 자료를 제출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 결정과정에 자신들이 결정하고 알 수 있도록 절차를 열어달라는 게 투명성의 내용인데, 가장 핵심원료 가격을 산정할 수 있는 물질의 원가 리스트를 내놓지 않는 조건 하에서 투명성 재고라는 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 얼마 전 정부가 내놓은 의료법 개정안에서 병원의 영리법인화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FTA 서비스 분야에 병원의 영리화는 포함돼있지 않지만 정부가 이를 추진하는 건 결국 FTA에서의 의약개방과 맞물려있다'고 지적하는데?

그런 기조와 맥이 닿아있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병원을 비영리법인으로 규정해서 묶어놓다보니 사실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번 의료법 개정이 그런 부분을 적극적으로 허용해주면서도 의료법인의 비영리화라는 전제는 깔고 있다. 지금 세금이나 기타부분에서 수익 발생하는 부분에 제대로 부과를 못하고 있다는 점을 시민단체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의료산업이 일정하게 변화하고 있고, 한국이 세계적 기술을 가지고 있는 부분을 세계시장에서 경쟁력 있게 해주려면 일정하게 길을 열어주는 방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길을 열어주는 것이 의료법 개정 과정이나 공공의료 확대와 같이 가지 못하니까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 한미FTA로 인해 외국계 병원이 우리나라에서 들어와서 영리법인이 됐을 경우, 일부 병원에서는 건강보험을 안 받고 사보험만 받겠다고 나올 수 있는데?

현재는 우리나라 모든 병의원들이 강제가입을 하게 돼있다. 그러다보니 의료기관이 굉장히 혜택을 보고 있는 건데, 거꾸로 병원 관계자들은 자기들이 굉장히 불익을 받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정부가 의료법인을 강제로 가입하게 하다보니 정부가 의료법인의 불법행위나 문제가 많은 부분을 제대로 솎아내지 못한다. 이런 부정적 진단도 있기 때문에 이를 충분히 염두에 두고 영리법인의 문제를 다른 차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 영리법인화 된다 하더라도 건강보험을 받지 않는 병원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건강보험을 받지 않겠다고 할 수 있는 성형 등의 부분이 최대로 늘어나봐야 15%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동네의원이 워낙 많이 늘어나서 국민이 병의원을 이용하는 데 불편함은 없다. 그렇다면 국민이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리고 대형병원의 경우 건강보험을 안 받겠다고 나올 수가 없고, 일반의원도 안 받겠다고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현재 수입구조나 여러 여건으로 볼 때 거의 대다수가 의료보험 환자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는 부유층이 이용하거나 성형 등 건강보험과 관련이 적은 부분이 건강보험과 관련 없이 움직이는 의료기관이 될 것이다. 따라서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 현재 부유층이 내는 건강보험료의 비중은?

그리 높다고 볼 수 없다. 의료보험 등급 기준은 일정하게 소득을 제한해서 부과하도록 돼있다. 예를 들어 1억을 번다고 해서 1억에 대한 건강보험료를 다 부과하는 게 아니라 400만원을 상한으로 해서 그 안에서 보험료를 부과한다. 이는 모든 나라가 똑같다.

- 그렇다면 의료서비스에서의 양극화 현상은 일어날 염려는 없을까?

이미 의료분야에서 양극화 현상은 현실적으로 진행돼있다. 시장경제 하에서 지나치게 양극화가 악화되는 걸 막는 노력을 정부가 해야 한다. 공공의료기관을 확대해서 빨리 대책을 세우고 넓혀가야 한다. 그런데 정부가 공식적으로 30%를 넓히겠다고 말했지만 보건소 하나 넓히고 있지 못하고 있다. 참여정부 내내 시범사업을 한다면서 10개 정도밖에 넓히지 못한 게 현실이다. 공공의료 확대가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빨리 공공의료를 확대해서 빈곤층이나 서민층이 부담 없이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 의료체제를 갖춰야 한다.

- 비위반제가 도입되면 양극화가 심화될까?

양극화가 심화될 분 아니라 다국적 제약사, 특히 미국 쪽 제약사를 포함한 기업들의 한국시장 장악률이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다. 지금도 50% 가까이 되는데, 한미FTA를 졸속으로 추진하면 시장장악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질 것이다. 70~80%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본다. 현재에도 국내의 500여개의 제약사 중에서 R&D를 할 수 있는 제약회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새로운 신약을 만들고 자본을 투입할 여력이 없는 영세기업이 많다. 따라서 빨리 M&A를 통해 덩치도 키우고, 정부가 여러 산업전략을 구사해서 대책을 세우는 게 중요한데 너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