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라주미힌 > 성과급제 원조…그는 노동자의 적인가/송성수

기술 속 사상/테일러주의와 엔지니어의 꿈

요즘에 구인 광고란을 보면 새로운 직종이 많이 생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기술관리’다. ‘관리’라는 단어 앞에 붙일 수 있는 업무가 인사, 조직, 재무, 회계, 생산, 판매를 넘어 기술로 확장된 것이다. 기술이 점점 복잡해지고 급속히 변화함에 따라 그것을 관리하거나 기획하는 업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할 사람이 필요해졌다는 뜻이다.

역사상 기술과 관리를 결합시킨 선구자로는 과학적 관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레더릭 테일러(Frederick W. Taylor, 1856~1915)를 들 수 있다.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배경은 테일러가 기업의 관행을 개혁할 수 있는 기술자 및 관리자로 성장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철강산업과 기계산업의 중심지였고, 테일러의 집안은 기업가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청교도적인 품성은 실용적인 활동을 장려하고 게으름을 죄악으로 받아들이게 했던 것이다.

기술과 관리 결합시킨 선구자

테일러는 1878년에 미드베일 철강회사에 일반노동자로 입사한 후 기계공, 조장, 직장, 주임을 거쳐 수석 엔지니어로 승진했으며, 스티븐스 공과대학을 야간으로 다니면서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의 철강산업과 기계산업에서 보편화되어 있었던 ‘은밀한 태업’(soldiering)의 관행에 직면하면서 관리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은밀한 태업은 공식적 태업(sabotage)과 달리 적당히 일함으로써 산출고를 제한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생산과정에 대한 실제적인 권한이 숙련노동자들에게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테일러는 이러한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제도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미드베일 철강회사에서 금속절삭작업을 대상으로 새로운 관리법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부터는 ‘경영 컨설턴트’라는 직함을 내걸고 다양한 기업의 기술적·경영적 문제에 대한 자문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테일러는 1898~1901년에 베들레헴 강철회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자신의 관리법을 체계화하였다. 그 이후에는 현업에서 은퇴하여 자문, 강연, 저술 활동에 몰두하면서 <공장관리>, <금속절삭의 기술에 관하여>, <과학적 관리의 원리들> 등의 저작을 남겼다.

테일러리즘의 핵심적인 관념은 과업(task)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되는 하루의 공정한 작업을 뜻한다. 테일러는 작업도구와 작업방법에 관한 시간연구(time study)를 통해 과업을 설정하였고, 노동자에게 과업 실행의 유인을 제공하기 위해서 차별적 성과급제(differential piece rate)를 개발했으며, 과업이 제대로 실행되고 관리될 수 있도록 기획부(planning department)와 기능별 직장제(functional foremanship)를 고안하였다.

테일러주의는 금속절삭작업의 도구와 방법을 표준화하기 위한 시간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우선, 테일러는 작업도구의 칼날의 형태와 사용방법을 개량하고 도구를 규격화하여 노동자들이 사용할 도구를 자세히 지시하였다. 또한, 그는 노동자들의 작업을 기본동작으로 분해한 후 쓸모없는 동작을 제거하고 각 동작별로 최선의 것을 찾아낸 후 스톱워치(stop watch)로 단위시간을 측정하였다. 이런 식으로 특정한 작업에 대하여 도구, 동작, 시간을 결합하여 테일러는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할 수 있는 과업을 구성하였다.

시간연구의 초보적인 형태는 19세기 영국의 과학자이자 기술자인 배비지(Charles Babbage)가 이미 시도한 바 있었다. 그러나 배비지가 업무 수행의 총 시간에 만족했던 것에 반해 테일러는 작업을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분해하여 분석한 후 이를 다시 결합시켰다. 또한 배비지는 실제로 행해졌던 시간을 측정했던 반면 테일러는 작업이 수행되어야만 하는 시간에 초점을 두었다. 테일러는 “한 사람이 주어진 일정량의 작업을 하는 데 걸리는 전체 시간에 대한 단순한 통계는 시간연구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20세기초 도마에 오른 테일러주의

» 기술과 관리를 결합시킨 선구자 프레더릭 테일러.
차별적 성과급제는 노동자가 과업을 달성한 경우에는 임금에 높은 비율을 적용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낮은 비율을 적용하는 임금제도였다. 그것은 과업을 달성한 노동자가 이전에 비해 30~100%의 임금을 추가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특히, 테일러는 차별적 성과급제의 성패가 기계와 작업에 관한 정밀한 시간연구를 통해 적절한 과업을 구성하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기획부는 이전에 숙련 노동자들이 가졌던 작업에 대한 지식을 관리자의 손으로 옮기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그것은 ‘구상과 실행의 분리’ 혹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로 상징된다. 기능별 직장제는 참모 기능이 강화된 수평적 조직으로서 기획부와 작업장에 각각 4명씩 배치된다. 그들은 각각 작업 순서의 결정, 작업지시카드의 작성, 임금 산출의 내역 계산, 업무의 조정, 작업 방법의 교육, 작업 속도의 설정, 기계의 관리 빛 정비, 제품의 품질 검사를 담당하였다.

테일러주의는 20세기 초 미국 사회에서 두 번의 커다란 시험대에 올랐다. 1910년에 동부철도회사가 운임 인상을 요구했을 때 당시에 ‘민중의 변호사’로 불린 브랜다이스(Louis D. Brandeis)는 테일러의 방법을 적용하여 비능률적 요소를 제거하면 운임을 인상할 필요가 없다고 맞섰다. ‘과학적 관리’라는 용어는 그 때 만들어져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각광을 받았다. 테일러는 워터타운 병기창(Watertown Arsenal) 사건을 매개로 1911~1912년에 청문회에 불려가기도 했다. 워터타운의 경영진은 테일러주의를 적용하려고 했지만 노동조합이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노동조합은 테일러주의를 도입하면 작업속도가 빨라지고 일자리가 줄어들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 청문회는 과학적 관리를 위해 별도의 예산을 사용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노동조합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처럼 테일러주의가 반드시 경영진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테일러주의를 경영진과 노동자의 이분법적 구도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사실상 테일러는 자신의 관리법을 개발하면서 엔지니어를 핵심적인 주체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임금 산출의 기준이 되는 작업속도를 엔지니어가 정했다는 점, 시간연구를 통해 작업에 대한 지식을 엔지니어에게 집중시켰다는 점, 기능별 직장제를 통해 기획부나 작업장의 주요 업무를 엔지니어가 담당하였다는 점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엔지니어가 전문성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공장관리를 주도함으로써 노사양측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테일러는 엔지니어를 중심으로 한 공장관리에 관심을 기울였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엔지니어의 사회적 지위가 변화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테일러 이전 세대의 엔지니어들은 공장의 소유주인 경우가 많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독립적인 사업가에 가까웠다. 그러나 테일러 세대의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대기업의 고용인이었고 이에 따라 이전과 같은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지위하락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엔지니어 자신이 독자적인 사업을 하는 방법과 공장관리의 문제를 공학의 한 분야로 취급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의 방법은 통로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자의 방법이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테일러가 주목했던 것도 공장관리의 문제를 엔지니어가 담당하는 방법이었다.

엔지니어를 주체로 설정했으나

» 송성수/부산대 교수·기술학
그러나 테일러주의의 이상이 실현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엔지니어가 경영진에 종속되는 정도가 심해지면서 공정한 전문가로 기능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테일러주의의 철학적 기반은 무시하고 단순한 기법만을 도입하는 사례도 속출하였다. 특히, 제3세계의 경우에는 노동력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어 “출혈적 테일러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테일러주의는 기술적?조직적 측면에만 중점을 둠으로써 인간적?사회적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테일러주의가 인간적인 요소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집단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 주목하고 있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화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치중하다보면 인간의 사회적 측면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기 마련이다. 테일러주의가 인간을 기계와 조직의 노예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이러한 측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송성수/부산대 교수·기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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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촌지의 추억 / 서민

사전에서 ‘촌지’를 찾으면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정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는 돈.” 사전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성을 드러내고자 주는 촌지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촌지는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최소한 불이익은 받지 않기 위해 뿌려지니까.

내가 유일하게 아는 땅부자가 어느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특실의 화려함에 취해 병문안이란 본연의 목적을 잊어버릴 무렵 담당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환자가 많기로 소문난 분, 난 황망히 자리를 피했고, 밖에서 교수님이 나오시기만을 기다렸다. 문틈으로 봤더니 교수님은 환자 옆에 서서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계셨고, 그 상담은 30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그 분의 회진을 따라간 적은 없지만, 학생 때 내가 겪은 회진은 그런 다정한 모습은 아니었다. 인턴이 먼저 들어와 텔레비전을 끄게 하고, 교수님은 잠시 후 전공의들과 실습 학생들을 우르르 대동하고 환자 옆에 선다. 레지던트가 환자에 대해 보고를 하면 교수님은 한두 마디 말씀을 하신 뒤 다음 환자로 이동한다. “별 이상 없죠?” 환자가 입원 후 교수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때이건만, 환자들은 1분도 아깝다는 듯한 교수의 태도에 눌려 하고픈 질문을 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그럴 것이다. 일인당 맡은 환자 수가 많고, 강의와 연구에 전념하려면 시간이 없을 만도 하다. 하지만 그리 중한 병도 아니고, 이렇다 할 연고도 없는 병실에 30분이 넘도록 머무는 교수님의 모습은 좀 씁쓸했다. 내 지인이 제공할, 혹은 제공했던 많은 촌지가 아니었다면 교수님이 그렇게 긴 시간을 투자하셨을까?

그 병원에서 오래도록 부친의 간병을 했던 내 친구는 ㅇ 교수가 아니면 아버지께서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했을 거라고 얘기한다. ㅇ 교수는 물심양면으로 친구 부친을 돌봐주셨는데, 회진 때 말고도 병실에 틈틈이 문병을 왔고, 궁금할 때마다 ㅇ 교수의 방으로 찾아뵐 수 있는 특권도 누리게 해줬다. 교수가 관심을 갖는 환자인지라 친구 아버님은 간호사와 전공의들한테도 따스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는데, 전부는 아니겠지만 친구는 ㅇ 교수의 친절을 자신이 수시로 제공했던 촌지 덕분이라고 말한다. “촌지를 받고도 여전히 성의가 없는 교수님들도 많은데 ㅇ 교수는 얼마나 훌륭하니?”

그럼에도 친구는 ㅇ 교수에게 일말의 서운함을 표시한다. “아버지께서 4년이나 입원해 계시느라 매달 내야 할 병원비가 장난이 아니었어. 그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촌지를 한 번도 거절 안하신 거 있지. ‘그냥 입원비에 보태 쓰세요’라고 한번만 말해줬으면 그 교수님을 더 존경했을 텐데 말이야. 설마, 그런다고 우리가 촌지를 다시 거둬가겠냐.”

몇 해 전, 환자 보호자에게 무안을 줘가면서 촌지를 돌려준 교수가 있었다. 그 얘기가 그 병원 보호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그런 교수가 워낙 드물기 때문이리라. 사회학자 김종엽은 〈시대유감〉에서 촌지가 부도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다른 거래에서 촌지를 주지 않아 손해를 보게 된다면, 그 손해를 감수해야 할 사람은 바로 촌지를 주지 않은 사람이 된다. 이것은 도덕적 자유의 행사 대가이며, 자유인은 자유의 행사 대가를 스스로 부담하는 자이다. 그러나 교사와의 관계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사람은 촌지를 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자녀가 된다. 이런 상황은 일종의 인질극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는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있는 사람이며, 촌지는 몸값이 되는 것이다.”

병원 의사가 환자 보호자에게서 받는 촌지는 과연 얼마나 다를까.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기생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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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 > 나 부교순데...

 

 

 

 

난 ‘교수’라는 단어를 별반 좋아하지 않는다. 하는 일에 비해 지나친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 때문인데, 남자 파악에 능한 술집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직업군이 교수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됨됨이로 따지자면 평균에 결코 미치지 못할 사람들이 왜 그리도 목에 힘을 주고 사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들은 조교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존재가 아닌가.


아무리 학교 내에서 일어난 일이라 해도 수업과 무관한 걸 가지고 “나 교수인데”라고 말하며 기선을 제압하려는 행태를 난 특히 싫어한다. 언젠가 우리 학교 학생이 교내에서 치대 선생과 접촉사고를 낸 적이 있다. 서로 잘잘못을 가리던 중 치대 선생은 “나 교수야. 넌 뭐냐?”라고 했는데, 단과대도 다른데 그런 말에 기죽을 학생이 아니었는지라 별반 좋지 못하게 결말을 맺었나보다. 분이 안풀린 그 교수는 우리 대학 의학과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당신 말야 학생 교육 좀 똑바로 시키라고.”

자기들끼리의 문제를 권력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거, 문제 있지 않는가. 나 같으면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뒤 무시했겠지만, 우리 의학과장은 나보다 훨씬 멋진 사람이었다.

“그 학생이 잘못했다고 치자. 하지만 이렇게 불쑥 전화해서 그딴 말을 하는 당신도 잘한 거 없다.”


오늘 낮, 의학심리학을 가르치는 러시아과 선생에게 전할 게 있어 인문대로 갔다. 그 선생 방에 갔더니 자리에 없다. 조교 선생에게 전해야겠다 싶어서 과사무실을 찾았더니 못찾겠다. 다른 과 사무실에 가서 러시아과 사무실을 찾았다. 당시 난 전날 집에 못간 탓에 무척 남루한 행색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거기선 날 위아래로 보더니 “한층 내려가세요”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거다. 평소 스스로를 교수라고 하는 걸 부끄러워했지만, 이런 말이 나올 뻔했다. ‘나 교순데....좀 잘해 주면 안되겠니?’


3층에서도 러시아과 사무실은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러시아과’라고 쓰인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갔더니 학생 비슷한 젊은이 셋이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다. 정중하게 물었다.

“러시아과 사무실이 어디지요?”

젊은이 하나가 날 슥 쳐다봤다. 그리고는 컴퓨터 화면에 눈을 고정시키며 한마디 내뱉는다.

“옆에.”

조교를 만나 전할 걸 주고 의대로 오는 동안, 그 학생이 말한 ‘옆에’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내 행색이 초라해도 자기보다 몇십년 위인데, 말버릇이 그게 뭔가.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여기 교수야. 엊그제 부교수도 됐어. 어따 대고 반말이야?”

무더위 속을 걸으면서 난 이런 말을 해주지 못한 걸 자책했다. 물론 오래지 않아 난 이성을 찾았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수업 외의 일로 생긴 문제에 교수라는 백을 동원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니까.


그렇긴 해도 한가지는 결심했다. 인문대 갈 땐 빨간 모자는 쓰지 말고 가야겠다는. 그것 때문에 내가 너무 젊어 보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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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신자유주의와 도시 -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와 도시 -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와 도시
Neo-liberalism and the City



데이비드 하비 David Harvey
뉴욕시립대 대학원 인류학과 교수
국토연구원 2005년 11월 16일 오후 3:00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사유재산권의 틀 안에서 기업의 자유를 극대화함으로써 인간의 안녕이 증진된다는 정치경제적 실천에 관한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 국가의 역할은 이러한 실천에 적합한 제도적 틀을 만들고 보전하는 것이다. 국가는 사유재산권을 보장하고 자유롭게 기능하는 시장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력, 경찰력, 사법권을 발휘하며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교육, 의료, 사회보장 또는 환경오염)에서 시장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국가의 역할은 이 보다 크면 안되고 시장에 대한 개입은 최소한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시장에서의 가격이라는 정보보다 더 불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뿐이며 권력자들의 이해관계가 국가의 개입을 왜곡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이론의 기본적 뼈대다.

하지만 이른바 ‘파묻힌 자유주의 embedded liberalism’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케인즈적 국가 개입을 전제로 한, 즉 국가의 개입에 파묻힌 국제적 시장경제체제]에 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그 이론의 특성상 그들이 자본주의와 경제를 더 잘 조직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이윤과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실업과 물가가 상승하는 위기가 닥치면서 신자유주의는 ‘파묻힌 자유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는 공공부문과 활동의 사유화, 노동시장에서의 조직노동(노조)의 영향력 약화, 복지국가의 축소를 주요한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끔 만든 두 가지 결정적 사건이 1970년대에 일어난다. 하나는 1973년 9월 11일(작은 ‘9/11’)에 발생한 칠레의 쿠데타이다. CIA와 미국 국무부 장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Pinochet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Salbador Allende의 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부를 전복하였다. 피노체트 정권은 모든 좌파 사회정치조직을 억압했을 뿐 아니라 모든 대중조직을 해체하고 노동시장의 모든 규제를 풀어 버렸다. 그리고 1970년대 초에 이미 그 적합성을 잃기 시작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을 수출주도 전략으로 대체하였다. 칠레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이른 바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 즉 시카고대에서 가르치던 밀튼 프리드만Milton Friedman의 신자유주의 이론을 따르던 미국 경제학자들이 초빙된다. 외국회사들이 칠레에서 얻은 이윤을 본국으로 송금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고, 연금제도는 사적 연금제도로 전환되었으며, 수출주도 성장은 성공적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대처Margaret Thatcher 정권하의 영국, 그리고 레이건Ronald Reagan 정권하의 미국이 보다 더 공공연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선회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모델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칠레 경제의 경험은 현재의 이라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003년 9월 19일 연합군 임시행정청장 폴 브레머Paul Bremer는 “공기업의 완전한 사유화, 외국기업이 이라크 기업을 전적으로 소유할 권리, 해외투자자 이윤의 본국 송금, … 해외투자자에 의한 이라크 은행 통제 허용, 외국회사와 국내기업의 동등한 대우, 거의 모든 무역 장벽의 철폐”를 포함한 4가지 포고령을 내렸다. 이와 같이 이라크의 경제는 칠레의 경제를 모델로 하고 있다.

두번째 사건은 뉴욕New York에서 발생했다. 혼합경제하에서 뉴욕은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는 도시였다. 그러나, 1973-75년의 불황은 사회적 지출 수요가 증가하게끔 한 반면에 시의 세수입은 감소시켰다. 불황은 제조업 부문의 고용을 감소시켜서 시의 경제를 약화시켰고, 당시에 미국에서 진행되던 교외화(suburbanization자본이 도심에서 교외로 이전하는 것)에 따라 도심의 인구가 사회적으로 주변화됨에 따라, 이들을 공공부문에서 고용하고 보조하는데 많은 돈이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를 보조하던 연방정부가 지원을 중단하게 되고, 동시에 공공보조금을 받으며 당시에 진행되었던 부동산 투기/투자가 실패로 판명되게 된다. 예를 들면 9/11때 붕괴된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는 오피스 임대사업에 실패해서 “흰색 코끼리 White Elephant”라고 불렸으며 결국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공공기관을 받아들여야 했고, 여기에 필요한 돈 때문에 도시의 재정과 예산은 압박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시는 민간부문에서 빚을 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975년 은행가들은 채무의 만기연장을 거부하여 뉴욕시를 파산의 상황으로 몰아갔다. 은행가들은 국가권력과 결합하여 뉴욕시를 신자유주의적으로 규율discipline하였다. 비상금융통제회의Emergency Financial Control Board는 도시의 예산과 재정을 통제하면서 채무상환을 최우선시하였다. 즉 인민의 안녕보다는 금융자본의 이해가 우선시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전에는 국가의 의무였던 것이 민간과 개인이 져야 할 사적인 책임으로 전환되었다. 예를 들면 뉴욕시립대City University of New York은 뉴욕의 다른 어느 대학보다도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1975년까지 무상 교육을 제공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시의 재정지원이 줄어들면서 재정부족으로 점차 그 위상이 하락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시청노조의 약화, 공공부문 고용조정, 임금동결, 사회보장의 축소 등이 도입되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쿠데타였다.

한편 1970년대초의 오일쇼크 와중에 미국이 사우디 아라비아 침공 계획을 짰었다는 것이 최근에 드러났다. 하지만 당시 사우디 아라비아는 석유수출로 얻은 막대한 달러를 뉴욕에 투자하기로 동의함으로써 침공의 위협에서 벗어났으며, 그 결과 뉴욕은 명실상부한 전지구적 금융의 중심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또한 오일 달러로 인해 일거리를 얻은 뉴욕의 투자은행들은 뉴욕의 부동산 시장을 되살려 냈다. 뿐만 아니라 뉴욕시는 뉴욕시를 전세계적으로 마케팅하기 시작했다. “I ♡ NY”이라는 문구가 이 때 처음 등장하였으며, 수많은 박물관/전시관들이 공공자금으로 건설되어 뉴욕은 미디어, 예술,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즉 공공자금은 복지가 아닌 금융, 관광 및 기타산업을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1980년대부터 국가/정부의 역할은 인구의 안녕과 복지가 아니라 ‘좋은 사업환경good business climate’를 만들어내는 것이 되었고, 이제 이러한 관념은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예를 들면 세계은행World Bank에서 나온 세계발전보고서World Development Report 2005년도 판의 부제는 ‘모두에게 더 좋은 투자 환경A Better Investment Climate for Everyone’이다(http://econ.worldbank.org/wdr/).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결코 국가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는 금융자본의 이해를 보호하고 사업/투자 환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른바 '민관협력public-private partnership'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공공부문이 모든 위험risk를 떠안고 사적부문이 모든 이윤을 챙긴다는 것이다. 또한 지역간, 시 자치정부간의 경쟁이 일어난 것도 신자유주의와 더불어서이다. 이러한 지역간의 경쟁은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는 데 있어서 하나의 매개고리가 되었다. 예를 들면 노스 캐롤라이나의 샬롯 시Charlotte, North Carolina는 최저한도의 환경규제, 약한 노조, 전기, 수도 등 공공서비스의 무상 또는 염가 서비스를 내걸고 기업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내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자유주의는 자본축적을 재활성화시키는데 있어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신자유주의 하의 경제성장률은 그 이전 시대보다 확연히 낮다. 그렇다면 문제는 둘째로, 왜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그렇게 성공적이었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 그리고 국가에 대한 공격은 (심지어 68세대에도) 큰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는 부자에게 소득을 집중적으로 재분배하는데 있어서 환상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뒤메닐과 레비Dumenil and Levy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처음부터 계급권력의 복원을 위한 프로젝트였다. 미국의 상위 1퍼센트의 소득자의 소득이 20세기말에 전체 소득의 15퍼센트까지 폭증하였으며, 상위 0.1 퍼센트 소득자의 소득이 1978년의 2퍼센트에서 1999년에 6퍼센트로 증가하였다. 또한 사원 봉급의 중간값(median)과 CEO 봉급과의 비율은 1970년의 1 대 30에서, 2000년에는 1 대 400으로 증가하였다 (http://www.jourdan.ens.fr/~levy/). 미국의 400대 부자를 매년 선정하여 보도하는 Forbes 400 리스트에 따르면 미국 400대 부자들의 1980년대 평균 재산은 6억 5천만 달러였으나 현재는 25억 달러에 달한다. 반면 사회복지와 공공연금에 대한 권리 등은 축소되었다(cf. http://www.wsws.org/articles/2004/sep2004/forb-s27.shtml). 셋째,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균등하게 전파된 것은 아니다. ‘반세계화’ 또는 ‘대안적 세계화’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 특히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모델이 경제적으로 실패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증대되고 있으며, 유럽에서도 신자유주의와 유럽식 모델과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Tony Blair는 신자유주의편인 반면에서 프랑스 공화당의 시라크Jacques Chirac는 전통적 프랑스 사회경제모델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모델 또한 실패했다는 것이 지난 몇 주간의 사태로 입증되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신자유주의가 한편으로 심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도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가 처음부터 계급적 프로젝트였다면,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계급 문제class issues일 것이다.

<질문과 응답>

계급에 관해: 우리는 계급문제와 진보정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더 이상 ‘영국노동계급’과 같은 것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진보적 정치를 보수적으로 사고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현상태를 유지하거나 기존 관념에 매달린 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도시non-urban계급에 관해: 한국의 농민운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브라질의 소작농민landless peasant 운동, 멕시코의 사파티스타Zapatista 운동, 인디아의 ‘생물해적질bio-piracy’ [전통적인 지역 식물 종자 등에 대해 사기업이 특허를 내는 행위]에 반대한 환경운동 등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중 많은 수가 전통적인 노동계급 외부로부터 나온 것이다. 자본축적은 전통적인 산업사회에서는 자본의 확대재생산, 예를 들면 공장의 확장 등에 의존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박탈에 의한 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 (이것은 마르크스가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이라고 불렀던 것이다)이 증대되고 있으며 이것이 이러한 운동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대안: 즉각적 만족이나 혁명은 있을 수 없다. 하이에크Hayek가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지주로서의 몽 페를랑 협회 Mont Pelerin Society를 창립한 것이 1947년이다. 신자유주의 혁명도 오랜 과정을 거쳤다 [장기적 투쟁이 필요하다].

신도시계획에 대한 의견: 사실 행정복합 신도시계획의 정치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인류학과에 몸 담고 있는 입장에서 이러한 계획이 실제로 어떻게 짜여지는지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참여관찰’을 위해 (청중 웃음) 신도시 국제공모전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최근의 인류학적 연구관심사: 사실 뉴욕시립대에는 지리학과가 없다. 인류학과에 초빙될 때부터 아무것이나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조건으로 갔다. 그래서 인류학적 연구는 진행중인 것이 없다. 인류학과 내에 지리학 과정이 개설되어 있으며, 내 주변에서는 내 연구에 기반한 인류학적 작업들을 하고 있다.

*요약정리/pepe


다운로드: David Harvey - Neo-Liberalism as Creative Destr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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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신자유주의와 도시 -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와 도시 -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와 도시
Neo-liberalism and the City



데이비드 하비 David Harvey
뉴욕시립대 대학원 인류학과 교수
국토연구원 2005년 11월 16일 오후 3:00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는 사유재산권의 틀 안에서 기업의 자유를 극대화함으로써 인간의 안녕이 증진된다는 정치경제적 실천에 관한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 국가의 역할은 이러한 실천에 적합한 제도적 틀을 만들고 보전하는 것이다. 국가는 사유재산권을 보장하고 자유롭게 기능하는 시장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력, 경찰력, 사법권을 발휘하며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교육, 의료, 사회보장 또는 환경오염)에서 시장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국가의 역할은 이 보다 크면 안되고 시장에 대한 개입은 최소한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시장에서의 가격이라는 정보보다 더 불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뿐이며 권력자들의 이해관계가 국가의 개입을 왜곡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이론의 기본적 뼈대다.

하지만 이른바 ‘파묻힌 자유주의 embedded liberalism’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케인즈적 국가 개입을 전제로 한, 즉 국가의 개입에 파묻힌 국제적 시장경제체제]에 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그 이론의 특성상 그들이 자본주의와 경제를 더 잘 조직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이윤과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실업과 물가가 상승하는 위기가 닥치면서 신자유주의는 ‘파묻힌 자유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는 공공부문과 활동의 사유화, 노동시장에서의 조직노동(노조)의 영향력 약화, 복지국가의 축소를 주요한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끔 만든 두 가지 결정적 사건이 1970년대에 일어난다. 하나는 1973년 9월 11일(작은 ‘9/11’)에 발생한 칠레의 쿠데타이다. CIA와 미국 국무부 장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Pinochet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Salbador Allende의 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부를 전복하였다. 피노체트 정권은 모든 좌파 사회정치조직을 억압했을 뿐 아니라 모든 대중조직을 해체하고 노동시장의 모든 규제를 풀어 버렸다. 그리고 1970년대 초에 이미 그 적합성을 잃기 시작한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을 수출주도 전략으로 대체하였다. 칠레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이른 바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 즉 시카고대에서 가르치던 밀튼 프리드만Milton Friedman의 신자유주의 이론을 따르던 미국 경제학자들이 초빙된다. 외국회사들이 칠레에서 얻은 이윤을 본국으로 송금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고, 연금제도는 사적 연금제도로 전환되었으며, 수출주도 성장은 성공적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대처Margaret Thatcher 정권하의 영국, 그리고 레이건Ronald Reagan 정권하의 미국이 보다 더 공공연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선회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모델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칠레 경제의 경험은 현재의 이라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003년 9월 19일 연합군 임시행정청장 폴 브레머Paul Bremer는 “공기업의 완전한 사유화, 외국기업이 이라크 기업을 전적으로 소유할 권리, 해외투자자 이윤의 본국 송금, … 해외투자자에 의한 이라크 은행 통제 허용, 외국회사와 국내기업의 동등한 대우, 거의 모든 무역 장벽의 철폐”를 포함한 4가지 포고령을 내렸다. 이와 같이 이라크의 경제는 칠레의 경제를 모델로 하고 있다.

두번째 사건은 뉴욕New York에서 발생했다. 혼합경제하에서 뉴욕은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는 도시였다. 그러나, 1973-75년의 불황은 사회적 지출 수요가 증가하게끔 한 반면에 시의 세수입은 감소시켰다. 불황은 제조업 부문의 고용을 감소시켜서 시의 경제를 약화시켰고, 당시에 미국에서 진행되던 교외화(suburbanization자본이 도심에서 교외로 이전하는 것)에 따라 도심의 인구가 사회적으로 주변화됨에 따라, 이들을 공공부문에서 고용하고 보조하는데 많은 돈이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를 보조하던 연방정부가 지원을 중단하게 되고, 동시에 공공보조금을 받으며 당시에 진행되었던 부동산 투기/투자가 실패로 판명되게 된다. 예를 들면 9/11때 붕괴된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는 오피스 임대사업에 실패해서 “흰색 코끼리 White Elephant”라고 불렸으며 결국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공공기관을 받아들여야 했고, 여기에 필요한 돈 때문에 도시의 재정과 예산은 압박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시는 민간부문에서 빚을 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975년 은행가들은 채무의 만기연장을 거부하여 뉴욕시를 파산의 상황으로 몰아갔다. 은행가들은 국가권력과 결합하여 뉴욕시를 신자유주의적으로 규율discipline하였다. 비상금융통제회의Emergency Financial Control Board는 도시의 예산과 재정을 통제하면서 채무상환을 최우선시하였다. 즉 인민의 안녕보다는 금융자본의 이해가 우선시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전에는 국가의 의무였던 것이 민간과 개인이 져야 할 사적인 책임으로 전환되었다. 예를 들면 뉴욕시립대City University of New York은 뉴욕의 다른 어느 대학보다도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1975년까지 무상 교육을 제공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시의 재정지원이 줄어들면서 재정부족으로 점차 그 위상이 하락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시청노조의 약화, 공공부문 고용조정, 임금동결, 사회보장의 축소 등이 도입되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쿠데타였다.

한편 1970년대초의 오일쇼크 와중에 미국이 사우디 아라비아 침공 계획을 짰었다는 것이 최근에 드러났다. 하지만 당시 사우디 아라비아는 석유수출로 얻은 막대한 달러를 뉴욕에 투자하기로 동의함으로써 침공의 위협에서 벗어났으며, 그 결과 뉴욕은 명실상부한 전지구적 금융의 중심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또한 오일 달러로 인해 일거리를 얻은 뉴욕의 투자은행들은 뉴욕의 부동산 시장을 되살려 냈다. 뿐만 아니라 뉴욕시는 뉴욕시를 전세계적으로 마케팅하기 시작했다. “I ♡ NY”이라는 문구가 이 때 처음 등장하였으며, 수많은 박물관/전시관들이 공공자금으로 건설되어 뉴욕은 미디어, 예술,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즉 공공자금은 복지가 아닌 금융, 관광 및 기타산업을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1980년대부터 국가/정부의 역할은 인구의 안녕과 복지가 아니라 ‘좋은 사업환경good business climate’를 만들어내는 것이 되었고, 이제 이러한 관념은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예를 들면 세계은행World Bank에서 나온 세계발전보고서World Development Report 2005년도 판의 부제는 ‘모두에게 더 좋은 투자 환경A Better Investment Climate for Everyone’이다(http://econ.worldbank.org/wdr/).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결코 국가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는 금융자본의 이해를 보호하고 사업/투자 환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른바 '민관협력public-private partnership'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공공부문이 모든 위험risk를 떠안고 사적부문이 모든 이윤을 챙긴다는 것이다. 또한 지역간, 시 자치정부간의 경쟁이 일어난 것도 신자유주의와 더불어서이다. 이러한 지역간의 경쟁은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는 데 있어서 하나의 매개고리가 되었다. 예를 들면 노스 캐롤라이나의 샬롯 시Charlotte, North Carolina는 최저한도의 환경규제, 약한 노조, 전기, 수도 등 공공서비스의 무상 또는 염가 서비스를 내걸고 기업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내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자유주의는 자본축적을 재활성화시키는데 있어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신자유주의 하의 경제성장률은 그 이전 시대보다 확연히 낮다. 그렇다면 문제는 둘째로, 왜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그렇게 성공적이었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 그리고 국가에 대한 공격은 (심지어 68세대에도) 큰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는 부자에게 소득을 집중적으로 재분배하는데 있어서 환상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뒤메닐과 레비Dumenil and Levy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처음부터 계급권력의 복원을 위한 프로젝트였다. 미국의 상위 1퍼센트의 소득자의 소득이 20세기말에 전체 소득의 15퍼센트까지 폭증하였으며, 상위 0.1 퍼센트 소득자의 소득이 1978년의 2퍼센트에서 1999년에 6퍼센트로 증가하였다. 또한 사원 봉급의 중간값(median)과 CEO 봉급과의 비율은 1970년의 1 대 30에서, 2000년에는 1 대 400으로 증가하였다 (http://www.jourdan.ens.fr/~levy/). 미국의 400대 부자를 매년 선정하여 보도하는 Forbes 400 리스트에 따르면 미국 400대 부자들의 1980년대 평균 재산은 6억 5천만 달러였으나 현재는 25억 달러에 달한다. 반면 사회복지와 공공연금에 대한 권리 등은 축소되었다(cf. http://www.wsws.org/articles/2004/sep2004/forb-s27.shtml). 셋째,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균등하게 전파된 것은 아니다. ‘반세계화’ 또는 ‘대안적 세계화’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 특히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모델이 경제적으로 실패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증대되고 있으며, 유럽에서도 신자유주의와 유럽식 모델과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Tony Blair는 신자유주의편인 반면에서 프랑스 공화당의 시라크Jacques Chirac는 전통적 프랑스 사회경제모델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모델 또한 실패했다는 것이 지난 몇 주간의 사태로 입증되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신자유주의가 한편으로 심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도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가 처음부터 계급적 프로젝트였다면,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계급 문제class issues일 것이다.

<질문과 응답>

계급에 관해: 우리는 계급문제와 진보정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더 이상 ‘영국노동계급’과 같은 것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진보적 정치를 보수적으로 사고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현상태를 유지하거나 기존 관념에 매달린 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도시non-urban계급에 관해: 한국의 농민운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브라질의 소작농민landless peasant 운동, 멕시코의 사파티스타Zapatista 운동, 인디아의 ‘생물해적질bio-piracy’ [전통적인 지역 식물 종자 등에 대해 사기업이 특허를 내는 행위]에 반대한 환경운동 등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중 많은 수가 전통적인 노동계급 외부로부터 나온 것이다. 자본축적은 전통적인 산업사회에서는 자본의 확대재생산, 예를 들면 공장의 확장 등에 의존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박탈에 의한 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 (이것은 마르크스가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이라고 불렀던 것이다)이 증대되고 있으며 이것이 이러한 운동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대안: 즉각적 만족이나 혁명은 있을 수 없다. 하이에크Hayek가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지주로서의 몽 페를랑 협회 Mont Pelerin Society를 창립한 것이 1947년이다. 신자유주의 혁명도 오랜 과정을 거쳤다 [장기적 투쟁이 필요하다].

신도시계획에 대한 의견: 사실 행정복합 신도시계획의 정치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인류학과에 몸 담고 있는 입장에서 이러한 계획이 실제로 어떻게 짜여지는지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참여관찰’을 위해 (청중 웃음) 신도시 국제공모전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최근의 인류학적 연구관심사: 사실 뉴욕시립대에는 지리학과가 없다. 인류학과에 초빙될 때부터 아무것이나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조건으로 갔다. 그래서 인류학적 연구는 진행중인 것이 없다. 인류학과 내에 지리학 과정이 개설되어 있으며, 내 주변에서는 내 연구에 기반한 인류학적 작업들을 하고 있다.

*요약정리/pe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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