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카페에 가고 싶지만, 어떤 카페가 좋은 카페인지생각해본 적은 없다. 너무 화려하고 예쁜 카페는 불편하고, 유명한 카페는 지나치게 붐비고, 촌스러운 카페는 속상하다. 다만 카페를 고를 때 커피 맛보다 더 중요한 것을 꼽자면, 그건 너무 딱딱하지도 너무 파묻히지도 않는 적당한 쿠션감의의자다. 말하자면 화목한가정집에 놓인 식탁 의자 같은 것. - P7
내가 원하는 카페는 파리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곳, 그렇게잠시 머물다가 나 자신이 풍경이 되는 곳이다. 풍경은 적절한 거리를 요구한다. 대상을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대상과 나 사이에 약간의 왜곡과 굴절이 이뤄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일상을 아주 조금 왜곡하고 굴절시킬 수 있는 공간, 내게는 그런 카페가 이상적이다. - P8
호두나무 테이블을 좋아했다.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아니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 시절 둘의 기억은 복잡하게얽혀 있어 쉽게 주인을 찾을 수 없다. 호두나무 테이블을좋아했던 기억은 누구의 것일까? - P18
미셸 투르니에는 뒷모습」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다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그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 ) 뒤쪽이 진실이다! - P23
그는 이상한 표정으로 실실 웃었다. 이 자식이 왜 웃는걸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발음이 이상한 것일까? 아니면 비웃는 것일까? 기분이 상했지만 참았다. 어쩔수 없었다. 마음은 사르트르인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텔레토비 수준이니 싸움을 걸 수도 없었다. 어학원에서는언제나 곱고 귀여운 말만 가르쳐줬다. ‘감사합니다‘ ‘또 만나요‘ ‘반갑군요‘ 등. 기초 프랑스어 교재에 ‘싸우는 법‘ 챕터가 있었다면 파리에서 사는 일이 한결 나았을 것이다. - P28
파티시에 한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달콤한 맛은적당함을 잃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 적당히단맛은 없으며, 혀끝에서 달콤함을 느끼는 순간, 이미 하루권장량을 한참 초과한 당분이 들어간 것이라고. 인생에서 ‘적당함‘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아마 ‘달콤함‘을잃었을 것이다. - P55
언제부턴지 순간 포착된 이미지 혹은 1분짜리 동영상속에 살고 있다. 상상이 1분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 나는1분짜리 다른 세상을 꿈꾼다. 버리고 싶은 나의 현재가남루할수록 1분을 더 열망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질병이 맞다. - P58
어쨌든 순진한데 유식하다. 유식해서 좋은 것은 아니고 유식한데 자기가 유식한지 몰라서좋다. 지식을 자아의 장식품으로 쓰지 않는다. 아마 장난감정도가 맞겠다. 아주 흥미롭다. 맥주를 더 마셔도 되겠다. - P62
그는 ‘자신의 것‘을 이야기한다. 크루아상이 맛있는 그의빵집, 고기를 많이 넣어주는 그의 케밥 집, 저글링을 하는친구들이 모이는 그의 공원. 아무 데나 소유 형용사 ‘Mon‘ (남성 명사 앞에), ‘Ma‘ (여성 명사 앞에)를 붙인다. 웃기는애다. 그런데 묘하게 빠져든다. 어디든 자기 텐트를 펼쳐놓고내 집이라 여기며 사는 사람 같다. 마음에 든다. 나는 부자를만나고 싶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찾는 사람이 맞는 듯하다. 어디든 내 것이 되는 사람이면 가난하지 않은 마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 P63
스탕달은 이것을 ‘결정작용‘이라 불렀다. 잘즈부르크의소금 광산 깊은 곳에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를 던져놓고 한참후에 꺼내보면 그 나뭇가지가 온통 소금 결정체로 뒤덮여서반짝이는데, 소금 결정이 평범한 나뭇가지를 다이아몬드처럼빛나게 하는 것, 그것이 결정작용이며, 사랑이란 바로 이런결정작용이라고 말했다. 내 인생의 마른 나뭇가지들이 소금결정체로 빛나는 중인데 밥 좀 굶으면 어떠하리. - P68
70어쨌든 나는 지금 연애의 마지막 단계, 생활의 영역에무사히 안착했다. 같이 사는 남자가 물구나무를 서면 모를까, 하하하 웃을 일은 별로 없다. 연애뿐만이 아니라 살면서하하하 웃을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가끔 하하하 웃는척을 하는 것은, 그가 물구나무를 서며 재주를 부리는 모습이어쩐지 안쓰러워서. 소금 결정체는 녹았지만 서로의 마른 나뭇가지는흉측하지 않다. 매일 우리에게 달려든 혹독한 바람이결정작용보다 강력한 전우애를 만들었다. 우리는 같은 편에서싸우고 있다. 바람을 가르는 펀치력은 없지만, 맷집이 늘어난그에게서 나를 본다. 내가 빛나는 나뭇가지에게 내어줄 수있는 것은 ‘하하하‘ 기쁜 웃음이 전부였지만, 마른 나뭇가지가된 나의 전우를 위해서는 총 한 발쯤 대신 맞아줄 수도 있다. 그런 마음으로 그를 보면, 웃기지 않아도 웃을 수 있다. 웃음쯤이야 얼마든지! 이제 스탕달의 연애론」은 내게 낡은 책이 됐다. 사랑을이론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을 이미 벗어난 사람이라생각한다. 길 위에 있는 사람이 지도를 그릴 수 없듯이, 사랑중에 있는 사람은 사랑을 말할 수 없다. - P70
나는 나의 사랑이 무엇인지, 어떤지 말할 수 없다. 내가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바람뿐이다. 내 사랑의 바람은치사하지 않은 사랑. 마음의 크기를 비교하지 않고, 내가 잃은것과 그가 얻은 것을, 그가 잃은 것과 내가 얻은 것을 셈하지 않고, 속도와 거리와 길이와 면적을 측정하지 않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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