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재정의되는 일은 한 사회의 마음이 변화하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 P33

모순 혹은 긴장으로 가득한 자신의 존재를 그럭저럭 거두어 살아나가는 것이야말로 성인의 일이며, 자신의 모순이나 긴장을 빙자하여 남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시민의 덕성이다. - P37

관리되지 못한 개인의 모순이 무절제하게 사회에 분비될 때, 그것은 대개 민폐일뿐이다.
- P37

그는 오늘날의 관심을 과거의 사상에 시대착오적으로 투사하지 말고,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한껏 고려해야한다는 주장으로 유명한 학자였다. - P39

세상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이 쌓일수록, 세상은 모순이나긴장이나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완벽하게 흠결이 없는 혁명가, 오직 탐욕으로만 이루어진 자본가, 오직 순박함으로만 이루어진 농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은, 도덕적이고 싶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던 혁명가, 너무 게을러서 탐욕스러워지는 데 실패한 자본가,
섣불리 귀농했다가 야반도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을 자기 희망대로 단순화하지 않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 P41

공부하는 이가 할 일은, 이 모순된 현실을 모순이 없는 것처럼단순화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모순을 직시하면서 모순 없는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다.
- P42

 정치인들은일단 선거에서 당선되고 봐야 하기에,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한 말을 던질 필요가 있다. 말이 구체적일수록 그 말의 청자(audience)는 제한되고, 말이 모호할수록 청자는 포괄적이 되는 법. 그래서 선거를 앞둔 정치인의 말은 모호하기 마련이다.
- P48

이처럼 모호한 표현으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고자 할 때,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발화자가 아니라 청자다. 표현이 모호하면, 발화자는 그 표현이 담고 있는 의미를 나중에 자의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여지를 누리게 된다. 그리하여 그 모호한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져봐야 하는 책임은 청자에게로넘어가기 일쑤다. 모호했던 말이 나중에 멋대로 바뀌었을 때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청자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모호한 말들을 남발하면, 시민사회 구성원들은 그 말뜻을 구체화하라고요구해야 한다. - P49

사정이 이러하다면, 모호한 말은 종종 권력자의 무기다.
얼버무린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청자의 몫이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연인 관계에서는 덜 사랑하는 사람이권력자라고 했던가. 사랑의 권력을 가진 이가 "내일쯤 전화할게"라고 말했다고 치자. 그 말을 들은 상대는 하루 종일 전화를 기다리게 된다. 전화할 시간을 특정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권력이다. - P50

사용한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 아니겠냐고? 과연 그럴까? 사람들은 종종 사랑, 인권, 유교, 신자유주의, 4차 산업혁명, 민주주의, 창조 경제 등의 단어들을 입에 올리지만, 정말 그 뜻을 알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누군가 진지하게 말한다. "저사람의 인권을 인정해야 할까요?" 인권이라는 것이 인간이라면 누리게 되어 있는 보편적 권리라는 걸 안다면, 나올 수 없는 발언이다. 따라서 저 말은 인권에 대해서 말해주기보다는저 사람이 인권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말해준다. - P53

오용되는 단어, 남용되는 단어, 모호한 단어, 다양한 용례가 있는 단어일수록, 신중한 사람들은 해당 단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그 단어를 가능한 한 정확히 정의하고자 든다.
- P54

인종 구분과 같은것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구분이 단지 현상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현상을 평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노예라는 말을 생각해보라. ‘노예‘라는 단어는 단지 특정 현상을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평가하는 역할까지 한다. 그렇기에,
조선 시대 노비를 노예로 부를 것인가, 위안부를 성노예로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치적인 이슈이기도 하다.
틴 스키너(Quentin Skinner)가 말했듯이, 평가어는 해당사회의 의식을 반영한다. 그렇기에, 어떤 단어에 단순히 변화를 준다고 해서, 해당 사회가 곧 바뀌는 것은 아니다.  - P55

퀜틴 스키너는,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규범적인 평가어들의 쓰임새에 의해 지탱되므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 평가어의 적용 방식을 바꾸는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한 바 있다. 실로 뛰어난 작가는 시대의 흐름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당대의 평가어를 재정의 해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한때 미덕으로 높이 평가되던 관대함(liberality)이 사실 악덕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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