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 나의 가난한 마음. 다시 읽는 책. 이 세 가지가 만나는 날에 서평을 쓰게 된다. 내게는 없지만 책에는 있는 목소리와 시선을 빌려 쓰는 글이다. 나로는 안 될 것 같을 때마다 책을 읽는다. 엄청 자주 읽는다는 얘기다. 그러고 나면 나는 미세하게 새로워진다. 긴 산책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처럼, 현미경에 처음 눈을 댔을 때처럼. 낯선 나라의 결혼식을 구경했을 때처럼, 어제의 철새와 오늘의 철새가 어떻게 다르게 울며 지나갔는지 알아차릴 때처럼. 커다란 창피를 당했을 때처럼,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나는 사랑을 배우고 책을 읽으며 매일 조금씩 다시 태어난다. 내일도 모레도 그럴 것이다. - P7
입장료는 1만 원이며 제한 시간은 없습니다.
입구와 출구가 다른 곳에 있으니 이 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 P16
이른 아침 그는 식물원으로 들어갔다.
해질녘 그가 식물원에서 나왔을 때는 전 생애가 지나가버린 뒤였다. - P16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우리는 한 생에서도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날 수 있잖아. 좌절이랑 고통이 우리에게 믿을 수 없이 새로운 정체성을주니까. 그러므로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었어. 다시태어나려고, 더 잘 살아보려고, 너는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도 몰라. 그러느라 이렇게 맘이 아픈 것일지도 몰라. 오늘의 슬픔을 잊지 않은 채로 내일 다시 태어나달라고 요청하고 싶었어. 같이 새로운 날들을 맞이하자고, 빛이 되는슬픔도 있는지 보자고. - P20
"이제 잘래, 태어나는 건 피곤한 일이야." 엄마는 웃었어. 태어난 아이를 꼭 껴안고 잘 자라고 입맞췄어. 태어난 아이는 푹 잠들었어. 『태어난 아이』는 이렇게 끝나. 『100만 번 산 고양이』의 마지막과는 달리, 태어난 아이는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겠지. 그리고 한참을 더 살아가겠지. 태어났으니 이제 너무나 상관있게 된 것들을 모조리 느끼면서, 가끔은 이렇게 또 말하겠지. 태어나는 건 피곤한 일이라고, 오늘은 나 역시 그 말을 내뱉은 하루였어. 태어나는 건정말 피곤한 일이지 뭐야. 하지만 또 어느 날에는 태어나서 참 좋다고 말하는 날이 또 오게 될 것을 알아. 시인 쉼보르스카가 말했듯 두 번은 없을 테니까.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기까지 우리는 모든 일을꼭 한 번씩만 겪어.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지. 두번의 똑같은 밤도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어. 『100만 번 산 고양이』와 『태어난 아이』 사이에서 얻은힘으로 나는 내일을 맞이할 준비를 해, 사랑할 힘과 살아갈 힘은 사실 같은 말인지도 모르겠어. - P28
의 말만 기억하며 살아가기엔 빈약해서일까? 『박완서의말은 이렇게 시작해. 내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으면소설을 결코 쓰지 않겠죠. 첫 장에 적힌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웃음이 나, 소설가들의 고생이자 힘의 원천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 같아서, - P31
‘유리가 들어 있으니 조심하세요. 아래엔 깨진 컵의 모양이 간단히 그려져 있었지. 우리는 같이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곳에 그 봉투를 두고 왔어. 네가 붙인 경고문이 잘 보이도록 놓았어. 나도 너처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지만 그런 건 해본 적이 없었어. 너를 보며 생각했어. 윤리란 나의 다음을 상상하는 능력일지도 모르겠다고. - P42
2년 전 4월 16일에 세상에 나온 책이야. 이 책은 슬픔과 애도가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해, 슬픔은 상실을 마주한 채로 고통받는 감정이야. 반면 애도는 슬픔을 끝내기 위한 작업이야. - P44
이제야 우리는 그들이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된다. (…) 그것은 세계의 균열이었던 그 상실을 봉합할 정당한 언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처를 위로할 합당한 단어와 문장들이, 말을 지탱하는 법과 규범들이 우리 공동체 안에 존재하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들이 슬픔을 통해 항변하려 했던 것은 부당함이었다. - 백상현,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 21~22쪽 - P44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적당한 속임수에 동의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잖아. 하나의 사회는 사실 적당히 속아주는 사람들 덕분에 유지되니까. 하지만 유가족은그 모든 것에 속지 않는 자들로서 방황했어. 기존 권력으로 유지되는 현재 세계를 거부하면서. 그들의 요구는 현재세계에서 통용되는 정의를 낡고 초라한 것으로 만들었어. 적당한 수준의 정의가 민낯을 드러내도록 했어. - P45
이 책을 통해 나는 슬픔을 다시 배워. 그들이 슬픔으로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해냈는지를, 그러므로 어째서 보존되어야만 하는지를 알게 돼, 속지 않는 자들의 방황을 지지하고 알리게 돼. 그들 덕분에 우리는 미래의 정의를 얻었다고, 이 책은 말해. - P47
내가 겪은 이 나쁜 일을 당신은 부디 겪지 말라고 알려주는 게 바로 연대라는말 그 말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도 말이야. - P47
당신들도 아시다시피 월요일에는 몸과 마음을 추슬러야 합니다. 주말이 끝났기 때문이고 이제 겨우 한 주의 시작이기 때문이고 감당해야 할 요일이 한참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채로 시작하는 월요일 역시도 당신들은 아실 겁니다. 월요일이 밝았는데도 추슬러지지 않는 몸과 마음을 말이에요. 어제는 조금 아프고 조금 슬프고 많이 게으른 월요일이었습니다. 일요일의 끝을 붙잡고 늘어지고 싶은 월요일이요. - P58
하지만 무척 고요한 여행을 해요. 생각 여행이라고도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저 걷고 그저 보고 그저 내맡기고 그저 먹고 특별한 목표도 없이 시간을 쓰고 그러다가 뭔가 압도적인 풍경 앞에 넋을 잃고, 놀란 나머지 그만 내 자신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게 되고, 마침내 풍경 속에 저의 일부분을 두고 오면 가벼워지고 행복해져요. 괴테가 말한 나를 잃고 세계를 얻었다!‘ 같은 순간이 있다는 것을 저도 알게 된 거지요. 내가 누구인지가 전혀 중요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풍경의 한 조각이라서 오히려 뛰는 가슴을 지그시 눌러야 할 정도로 행복한 순간 아시죠? - 정혜윤, 인생의 일요일들, 22쪽 - P60
"존,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다른 사람의 선을 대신 그어줄 수는 없어.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규칙을 지키는 것과 삶을 존중하는 건 같지 않아. 그리고 삶을 존중하려면 선을 그어야 해." - 같은 책, 209쪽 - P63
사랑할수록 구체적으로 말하게 된다. 사랑은 인생의세부사항이 몹시 소중해지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몸과 마음과 시간을 아끼느라 시선이 촘촘해지고 질문이 많아진다. - P65
기업주의 감시를 피해 겨우 배포하고 회수한 이 한 쪽짜리 설문지에서물러설 수 없는 마음이 전해진다. 이것조차 지켜지지 않는삶이어서는 안 된다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라는 확신 같은 것. 그는 구체적으로 묻는다. 동료 노동자들의 근무 조건과 건강과 월급과 여가를,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을 살핀다. 너무 오래 일하지 않는지, 너무 적게 자고 적게 쉬지 않는지 정확히 조사한다. 주변 이들의 열악한 삶과 노동 증명하는 근거 자료로 만들기 위해서다. - P67
만약 돈을 아주 많이 벌게 되면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나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프거나 슬프면 일을 쉬어도 되는 시간을 말이다. - P69
"살면서 나는 알게 되었어. 그는 자신을 참 사랑하는사람이었구나. 그 눈으로 남을 볼 줄도 아는 사람이었구나. 마치 자기를 보듯이, 남을 나처럼 여기니까 고민에 빠졌던 거야. 어떻게 해야 나 같은 남들이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을까를 고민했던 거야.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잖아." - P73
"누구를 만날 때 적당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또하나의 나를 만드는 것처럼 남을 만나야 돼, 최선을 다해야 해."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듣자 어느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이규리 시인의 시 특별한 일에서 읽은 몇 문장이었다.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 아무렇지도 않게 / 몸이 몸을 버리지요 // 잘려나간 꼬리는얼마간 움직이면서 /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 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 - P75
그런데 지금 내 앞에 누군가가 한 명 더 있었다면 오늘을 더 잘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첫 출근했던 날, 너랑 나랑 좋은 동네에 가서 삼계탕을 먹었었잖아, 하면서. 그렇지만 어쨌든,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라서, 스스로를 챙길 줄 아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덕목이다. 적어도 나는 나의 고생을 알아주는 내가 있는 것이다. - 양다솔, 간지럼 태우기, 15쪽 - P101
이렇게 마음 아픈 이야기를 왜 여러 번 다시 읽나, 자꾸 들여다보고 싶은 슬픔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아름답기도 하기 때문이다. - P104
천재가 되어야 한다면 나는 ‘다시‘의 천재가 되고 싶다. 정혜윤 작가가 쓴 문장들 때문이다. 무의미와 허무와 자포자기에 빠지기 쉬운 우리에게 신이 준 은총이 하나 있다며그는 이렇게 적었다. "그건 바로 ‘사랑을 알아보는 힘‘이야. 우리의 멋진 친구 심보선이라면 사랑을 다시 알아봄‘이라고 표현할 것같아. 우리가 미래를 사랑하기 시작했단 것은 뭔가를, 특히 사랑할 만한 것을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말과도 같아.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포함해서, 무릇 다시 시작하려는 자는 자기 자신도 다시 알아볼 수 있어야만 해." - P105
하다.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라고, 절대이 재앙을 닮아가진 않을 거라고,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겠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옆에는 바로 그를 닮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 세계는 망해가고 있으며 그들은만났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를 만나고 싶었다. 강도와 살인과 폭력과 강간이 범람하는 와중에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고싶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각박한 세상의 끝까지 같이 걸어갈 수도 있었다. - P112
솔직함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솔직함과 작품의 완성도는 무관한 경우가 많고 솔직한 글이 늘 좋은 글인 것도 아니다. 어떤 솔직함은 몹시 무책임하고, 어떤 솔직함은 너무 날것이라 비린내가 나며, 어떤솔직함은 부담스러워서 독자가 책장을 덮어버리게 만든다.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쉴 새 없이 주절대는 친구처럼눈치 없는 솔직함도 있다. 그러므로 솔직하게 쓴다는 피드백이 내게는 칭찬에 포함되지 않는다. 솔직함만으로는 좋은 글이 될 구 없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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