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우스는 빈 접시와 김이 올라오는 커피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지금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확실하게 깨어 있는 순간임을 절감했다. 천천히 잠을 떨치고 의식이 완전히 들 때까지 조금씩 잠에서 깨어나는 그런 명료함이 아니었다. 지금 이 느낌은 아주 달랐다. 이제껏 몰랐던 세상에 있다는 각성, 전혀 이질적인 눈뜸이었다. 리용 역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는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후 플랫폼에 발을 내딛으면서, 온전한 의식으로 기차에서 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 P50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無音)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 P55

교장에게 시(詩)는 값비싼가구나 고급 와인, 멋진 만찬용 양복과 마찬가지였다. 그레고리우스는 교장이 자기만족 때문에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시구절들을 훔친다고 생각했다. - P57

조용한 고어(古語)들을 그 무엇보다도 더 숭배하며 사랑하는 소년이 아니라, 그때 돈 상자에서 돈을 꺼냈던 그 소년이 자기 인생을결정했더라면 그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그때와 지금의 일탈에는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공통점이 있기는 한 것일까.
- P59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책을 집어들고, 히르쉔그라벤에 있는에스파냐 책방 주인이 그에게 번역해준 간결한 문장을 찾았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 P60

"사람들은 가끔 정말 두려워하는 어떤 것 때문에 다른무엇인가에 두려움을 갖기도 하지요." 그때 그가 한 말이었다.
- P63

여기서 얻는 결론이 뭘까? 그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적용할 수있는 이 사람들의 반응은? 속으로 그의 행동에 동의하거나 한걸음더 나아가 그를 부러워할까? 그레고리우스는 몸을 일으키고 앉아은빛으로 동이 터오는 올리브 숲을 내다보았다. 그가 지난 세월 내내 동료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 익숙함은 착각에 가득한습관이요, 틈이 생긴 무지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한, 정말 중요한 일인가? 이문제에 대답할 수 없는 이유가 잠을 못 자서 머리가 복잡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늘 존재했지만, 사회적인 의식 뒤에 숨어 있어 깨닫지못했던 낯설음을 지금 막 깨닫고 있는 중인가?
- P69

프라두의 글이이 도시를 그레고리우스의 마음속에 자라게 하고, 완전히 낯선 도시라는 생각을 사라지게 하는 듯했다.
- P72

그때 형태가 잡히지 않은 채 우리 앞에 놓여 있던 그 열린 시간에 우린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을 해야 했을까. 자유로워 깃털처럼 가벼웠고, 불확실하여 납처럼 무거웠던 그 시간에.
- P75

이렇게 계속 학교로 다시 찾아오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과거는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나 미래는 아직 시작되기전이었던, 그 순간의 학교 운동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시간은 머뭇거리며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 뒤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 마리아 주앙의 갈색 무릎, 그녀의밝은 옷에서 나는 비누 냄새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 아니면 지금의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 꿈과 같이 격정적인 갈망인가.
- P77

이 갈망은 약간 이상하고 역설의 냄새가 나며, 논리적으로독특하다. 아직 미래를 경험하지 않은, 생의 갈림길에 서 있는사람은 이런 갈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온, 그래서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를 겪은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돌이키기 위해 옛날로 돌아가길 원한다. 지나온 시간이 괴롭지 않은 사람도 돌아가려고 할까? 다시 한 번 손에 모자를 쥐고 따뜻한 이끼 위에 앉아 있고 싶은 것,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하면서 그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이미 겪은 나를 이 여행에 끌고 가려고 하는 것, 이는 모순적인 갈망이 아닌가. 내가요즘 가끔 생각하듯이 당시의 그 소년이 아버지의 소원에 거역하고 의학부 강의실에 들어서지 않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
그렇게 반항한 소년이 여전히 나였을 수 있을까. 당시의 나에게는 갈림길 앞에서 다른 길을 갈망할 만한 고통을 경험한 관점이 없었다. 그러니 경험을 하나씩 지워버리고 시간을 되돌려, 마리아 주앙이 입은 옷의 신선한 냄새와 그녀의 갈색 무릎에 빠져 있던 당시의 그 소년으로 돌아가는 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 P77

프라두는 자기가 다니던 학교에 계속 찾아가 계단에 앉아 다른 삶을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실우베이라의 질문을 받고 원하던 삶을 살았노라고 대답하던 자신의 반항적인 모습을 떠올렸다. 이끼 덮인 계단에 앉아 고뇌하는 의사의 모습, 회의에잠긴 사업가가 기차에서 한 질문이 그의 마음속에 동요를 일으켰다.
확실하고 익숙한 베른의 거리에서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동요.
- P79

낯선 사람의 삶을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남의 뒤를 밟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전 그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온 감정은 아주 새로운 호기심이었다.
- P80

그가 사랑하는 고전들은 각자의 삶을 산 인물들로 가득했고, 그 책들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이런 삶을 읽고 이해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포르투갈 귀족 그리고 조금 전 다리를 절던 저 남자의 삶이왜 지금 이토록 새롭게 느껴지는가. - P80

이곳이 리스본이었다.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자기 인생을 마지막 관점에 서서 생각하게 됐고, 어떤 포르투갈 의사가 마치 그에게 쓴 것처럼 느껴지는 책을 우연히 손에 넣게되어 찾아온 도시.
- P82

일인지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의 절반쯤이지금 전화를 걸며 자신을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준다는 느낌,
거의 예약의 윤무를 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본 기억이 없었다.
- P86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새어버리는 시간과 죽음에 대한 생각?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갑자기 모른다는 것? 자기 소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 자기 의지가 지녔던 지극히 당연한 익숙함을 잃은 것? 그래서 이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낯설어지고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
- P101

나는 그의 시선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내 안에 그의 시선을만들고, 그 시선에서 나온 나의 모습을 내 안에 받아들였다. 그렇게 보이는 나는 중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닐 때든, 병원에서 일을 할 때는 결코 내가 아니었다. 평생 단 일 분도,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외모에서 스스로를 알아채지 못할까? 그들에게도자신의 영상이 천박한 왜곡으로 가득 차 있는 무대처럼 생각될까? 그들도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받는 인상과 그들 스스로 경험하는 방식 사이의 엄청난 괴리를 느낄까? 그들에게도 내면의 익숙함과 외부의 익숙함이 서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어 동일한 사람의 익숙함이라고는 생각될 수 없을 정도일까?
이런 의식이 불러오는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는, 스스로의 눈에 비치는 우리의 바깥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모습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욱 커진다. - P106

사람들이 타인을보는 방식은 집이나 나무, 별을 볼 때와 사뭇 다르다. 이들을특정한 형식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자기 내부의 한 부분으로 만들려는 기대를 가지고 보는 것이다. 각 사람의 상상력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소원과기대에 맞게, 하지만 또한 그들로부터 자신의 불안과 선입견이옳다는 확인을 받을 수 있도록 이들을 각자의 구미에 맞추어가지런하게 정리한다. 우리는 편견 없이 확실하게 다른 사람들의 외적인 윤곽에조차 다다르지 못한다. 우리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도중에 이미 딴 곳으로 돌아가고, 우리를 우리라는 사람으로 만드는 특별하고 특이한 온갖 소원과환상으로 흐려진다.  - P106

그들이 문두스라고 불렀던 사람은 이렇게 생겼다. 처음에는 선생님을 사랑하여 첫째 줄에 앉았던 여학생, 나중에는 아내였던 플로렌스의 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공부하던 반짝이는 로만 문학 세계가 지닌 마술과 자유분방함과 매력을 파괴하기 위해 자신의 학식을 남용하는, 힘들고 지루한 남편이 되어갔다.
- P108

기에게는 없다는 초조한 생각이 충격과 뒤섞였다. 프라두는 왜 다른 사람들이 보는 모습과 자기는 완전히 다르다고 확신했을까? 어떻게 이런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그는 이 확신이 마치 언제나자기를 비춰주던 내면의 밝은 빛, 자신에 대한 뚜렷한 익숙함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엄청난 생소함을 동시에 나타내는 빛인 양 이야기했다.  - P109

 대체 무슨 상관이 있기에? 단 하나의 포르투갈어 단어와 이마에 적힌 단 하나의 전화번호가 도대체 어떻게 질서 정연했던 삶에서 그를 떼어내고, 베른에서 멀리 떨어진 포르투갈 사람의 인생에 - 그것도 이미 죽고 없는 - 개입하게 할 수 있었을까.
- P110

람들과 오랫동안 마주 보고 앉아 있다. 함께 먹고 일하며 옆자리에서 잠을 자고, 한 지붕 아래서 산다. 스쳐 지나가는 덧없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속성과 신뢰감과 친밀한 이해심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속임수는 아닐까? 매순간 견딜 수 없으므로 불안하고혼란스러운 이 덧없음을 은폐하고 없애려는 시도….. 다른 사람을 향한 눈빛이나 시선 교환은, 모든 것을 흔들고 덜컹거리게 만드는 엄청난 속도와 기입에 마비된 기차 승객들이 서로스쳐 지나가며 던지는 지극히 짧은 시선의 만남과 같은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스치며 지나가는 밤의 만남처럼 언제나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건 아닌지. 만나는 게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들은 아닌지.
- P123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방법일까. 이게 가능할까. 자기 시간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자각과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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