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결국 밥하기는 인류가 먹고 살아야 하는 한 도망칠 수 없는 노동이라는 자각에서 고민과 갈등은 시작되었다. 이 책의 절반은 부엌이란 공간에서의 노동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리매김할 것인가, 평등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자연을 크게 거스르지 않으며 이 작은 공장을 어떻게 가동할까에 대한 부단한 몸부림의 기록이다. 부엌은 뾰족한 사회적 자아와 뜨거운 모성적 자아가 충돌하는공간이었다. 나에게 한 편의 신화가 된 엄마와 할머니처럼, 내 아이의 몸에 차곡차곡 쌓여 그 아이를 성장시킬 음식들 속에서 나 또한신화가 되고자 하는 욕망과, 이 반복적인 노동에 최소한의 시간만투여하겠다는 냉정한 이성이 늘 씨름한다.
아이가 커가며 엄마는 더 이상 아이와 같은 생체 리듬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엄마는 자신에게 주어진 필생의 의무를의지로 수행한다. 아이를 건강하게 생존시키는 일, 그것을 제 손으로 행할 수 없을 때에 이르면 최소한 그들의 건강한 생존을 확인하는 일로 바뀌는 것이다. 매일 밤 반복되던 그 한 가지 질문 "밥은 먹었니?", 그것은 성인이 된 딸에게 엄마가 행하기로 다짐한마지막 한 가지 의무였다. ‘네가 아직 나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 난너의 건강한 생존, 그 한 가지만을 관여하겠다.‘는 선언이다. - P18
"밥은 먹었니?", 그 질문은 어디 가서 누굴 만나고, 어떤 사랑을 하고, 어떤 기쁨과 아픔을 겪으며네 인생을 만들어가는넌 언제나 밥 세 끼를 제대로 챙겨 먹으며 살 것. 무엇보다 너 자신을, 네 몸의 건강을 먼저 챙기는 것을 잊지 말 것. 그 한 가지를 주문하는엄마의 지치지 않는 기도였다. - P19
이곳에 흔한 모로코, 베트남, 태국, 이탈리아 음식도 자주 우리집 식탁에 오른다. 프랑스 문화부가 실시하는 시민들의 문화생활빈도를 묻는 질문에는 얼마나 자주 레스토랑에 가느냐는 것이 문항에 포함되어 있다. 외국 음식을 판매하는 레스토랑에 가는 건, 그 자체로 이국 문화를 체험하는 문화생활에 속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낯선 문명을 먼저 눈과 코와 혀로 만나고, 그 다음 몸 안에 들여보내 조금씩 우리를 구성하게 한다. 요리는 각기 다른 문명이 음식으로 만나 서로의 온기와 에너지를 몸 안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음식을 만들며, 그들의문명 속으로 들어간다. 그 음식으로 새로운 방식의 온기를 가족과친구들에게 전한다. - P27
마치 손을 뻗으면 무엇이든 손에 쥘 수 있는 세상에 사는 듯, 할머니는 무엇이든 땅과 자연에서 구하셨다. 그래서 어떤 두려움도 없으셨다. 어딜 가든 땅과 자연은 있고, 그들이 언제 무엇을 품었다. 건네줄지 할머니는 잘 알고 있었다. - P38
하루 세 번 돌아오는 밥시간, 종종, 이 정도 밥 했으면 됐지, 또 해야 돼? 싶을 때가 있다. 투수로 선발되어서 9회 말까지 잘 선방했는데 구원투수도, 선수 교체도 없이 다음날이면 또 내가 방어해야 하는 해일처럼 끝없이 밀려온다. 야구 선수들은 몇 달 하다 보면 시즌 오프가 있고, 특히나 잘 해내고 나면, 그에 따르는 눈부신보상도 있건만 밥하기는 나 포함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져야 끝난다. - P43
허기란 실현되지 않은 모든 욕망들을 대신하여찾아드는 육체적 신호였던 걸까? 원하던 것을 먹는다고 해도더 많은 양을 먹는 것은 아니었지만내 맘대로 정한 메뉴가 나오던 시기, 시도 때도 없이 입이 궁금하던 증상이 사라졌던 것은허기가 반드시 육체적인 욕망만은 아니란 걸 알게 해준다. - P46
육개장은 아빠를 떠나보내며 먹은 음식이다. 아빠를 기억하게 하는, 그러나 아빠와는 나누지 못했던 음식. 내가 기대어 살던 세상의 한 기둥이 사라지던 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음식이었다. - P55
뱅쇼는 말 그대로 ‘뜨거운 와인‘이다. 적포도주에 오렌지와 계피, 사과, 레몬, 정향, 생강, 흑설탕, 그밖에 넣고 싶은 과일들을 멋대로퐁퐁 집어넣고 끓여낸다. 알코올은 증발하고 달콤한 설탕과 향긋한 과일, 쌉쌀한 정향과 계피가 신이 주신 선물인 와인과 만나 후끈하게 온 몸을 녹여준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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