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인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서 상식적인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의 상식을 의심해야 했다.
- P29

"여긴 그냥 거대한 기업이야. 공공이라는 이름의 회사가 몸집을 불리고 있는 것뿐이지. 돈이 없는 사람들은병원도 못 가고 애도 못 키우는데, 돈이 되는 기관들은누군가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다는 뜻이야."
- P70

대가가 보장되지 않는 단순한 일을 기계처럼 반복하는 삶은 뒷걸음질 같았다. 두렵고 더디고 힘들게 도착하고 보면 늘 더 못한 자리, 맨션사람들은 어려지고 유치해지고 단순해졌다.
- P74

"다 가진 놈이 뭐가 아쉬워서 ………."
진경이 중얼거리자 영감은 아무 대꾸 없이 리모컨을들어 텔레비전을 껐다. 한참만에 무거운 생각이 말끝을누르는 듯 느릿느릿 말했다.
"그런데 잃을 것도 없는 우리는, 왜 저런 짓을 못 하나 모르겠다. 나비 혁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네."
- P79

사하맨션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라에게 세상은 딱 그크기, 그 만큼의 빛과 질감, 그 정도의 난이도였다. 그런데 요즘 사라에게 너머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 왔던 많은 일들에 화가 나고 억울했다.
- P112

"괜찮아?"
"난 이제 지렁이나 나방이나 선인장이나 그런 것처럼그냥 살아만 있는 거 말고 제대로 살고 싶어. 미안하지만언니, 오늘은 나 괜찮지 않아."
- P112

"우리,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서로 미안하지? 나한테진짜 미안해야 할 사람은 누구지? 아무도 내게 사과를안 해. 누군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나는, 요즘 분해서 자꾸 눈물이 나."
- P117

"제 이름은 ‘만‘ 이에요."
"아주 예쁜 이름이네."
"고맙습니다. 아빠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하면 큰일 난다고 했는데, 그럼 이제 제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할머니한테만 말해요. 할머니,
제 이름은 만이에요, 둘이 있을 때 가끔 불러 주세요."
"그래, 만, 늦었다. 이제 자라, 만."
- P141

수가 죽고 도경이 사라졌는데 진경은 할 수 있는 게없었다. 무력감이 들 때마다 진경은 이아가 생각났다. 그때 진경은 맨션의 다른 사람들처럼 덮어놓고 이아 엄마를 비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합리적인 의문들마저 폭력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 P161

"위로는 받았어요. 위로라고 생각하고 받았어요. 위로와 배려를 받고 나니 그걸 준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따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팔아먹은 게 됐어요..
그러니까 진경 씨, 살면서 혹시 위로받을 일이 생기더라도 받지 말아요. 위로도 배려도 보살핌도 격려도 함부로 받지 말아요."
아니요. 위로받아도 됩니다. 위로와 배려를 받게 되면 받는 거고 받았더라도 따질 게 있다면 따지는 거고 그리고 더 받을 것이 있다면 받는 게 맞아요. - P163

"여기서 아무것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살면 그런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아. 맨션 사람들이 어리석고 게을러서가 아니야.
- P176

7시 이후에 아기를 데려오라고 했다. 내내 초조했다. 7시가 다 되어, 그날따라 마지막으로 병원을 나서던 원장이수의 진료실에 찾아와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먼저 갈게. 잘, 해 보자, 우리."
그리고 창가로 가서 블라인드를 내리고는 천천히 진료실에서 나갔다. 신호, 혹은 암호, 수는 원장의 모든 말과 행동, 시선과 호흡에도 각주가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어깨를 도닥이던 마른 손, 잘, 해 보자는 인사, 조용히 내려오던 블라인드, 느린 발걸음.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알 것 같았고 확신했다.
- P183

적지 않은 목격담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수와 도경을평범한 연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증언보다 상식이더 설득력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L2도 아닌 완벽한 사하이고 여자는 타운의 소아과 의사다. 여자가 뭔가 약점을 잡혔을 거라고도 했고 위협을 당했을 거라고도 했다.
- P200

수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많은 말들을 갖다 붙였지만 아무도 수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연애는 두 사람만의 세계고 그 세계에서만 통하는 상식이 있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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