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든 지금은 노목에게서 나이 듦의 자세를 새삼 깨우치고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제 속을 비우고 작은 생명들을품는 나무를 보며 가진 것을 스스럼없이 나누는 삶, 비움으로서 채우는 생의 묘미를 깨닫곤 한다. 평생을 나무를 위해 살겠다고 마음먹고 병든 나무를 고쳐 왔지만, 실은 나무에게서 매 순간 위로를 받고 살아갈 힘을 얻은 것이다. - P7
누구에게나 오로지 짊어지고 가야 할 인생의 무게가 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저마다 생의 대가로 무언가를 책임지고 감내하며 살아야 한다. 백창우 시인이 표현했듯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 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나서는 것이 인생일지 모른다. 때로 넘어지고 때로 좌절하는 쉽지않은 일상에서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고 마음을 오롯이 나눌 그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만으로 인생은 살 만한 것일 게다. 내게는 나무가 그런 존재였다. - P7
생각해 보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현재를 희생하는 건오직 인간뿐이다. 더 큰 문제는 선택 앞에서 지레 겁을 먹고 고민만하다가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이다. 미래를 걱정하느라 오늘을 희생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한 번쯤청계산의 소나무를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소나무는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망치지 않았다. 방향을 바꾸어야 하면 미련 없이 바꾸었고, 그 결과 소나무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 P21
어떤 어려움이 닥치는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척도는내게 달렸고, 정말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 보는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최소한 나를 옥죄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옮겨 간 곳에서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된다는 것이다. - P27
막 싹을 틔운 어린나무가 생장을 마다하는 이유는 땅속의 뿌리때문이다. 작은 잎에서 만들어 낸 소량의 영양분을 자라는 데 쓰지않고 오직 뿌리를 키우는 데 쓴다. 눈에 보이는 생장보다는 자기 안의 힘을 다지는 데 집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비축하는 시기, 뿌리에 온 힘을 쏟는 어린 시절을 유형기‘라고 한다. - P32
나무는 유형기를 보내는 동안 바깥세상과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을 벌인다. 따뜻한 햇볕이 아무리 유혹해도, 주변 나무들이 보란 듯이 쑥쑥 자라나도, 결코 하늘을 향해 몸집을 키우지 않는다. 땅속 어딘가에 있을 물길을 찾아 더 깊이 뿌리를 내릴 뿐이다. 그렇게 어두운 땅속에서 길을 트고 자리를 잡는 동안 실타래처럼가는 뿌리는 튼튼하게 골격을 만들고 웬만한 가뭄은 너끈히 이겨낼 근성을 갖춘다. 나무마다 다르지만 그렇게 보내는 유형기가 평균 잡아 5년, 나무는 유형기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하늘을 향해 줄기를 뻗기 시작한다. 짧지 않은 시간 뿌리에 힘을 쏟은 덕분에 세찬바람과 폭우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는 성목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 P32
어린 전나무는 다른 큰 나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까지10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필요로 한다 - P33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깊은 산중에 싹을 틔운 야생의 나무들은언젠가 하늘을 향해 마음껏 줄기를 뻗을 날을 기다리며 캄캄한 땅속에서 뿌리의 힘을 다지고 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을 기꺼이 감수해야 더 높이, 더 크게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 P35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자라는 데 총력을 기울이던 나무는 여름이깊어질수록 조금씩 성장을 멈추기 시작한다. 햇살이 여전히 머리위에서 작열하고 있고, 날이 추워지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도더 이상 뻗어 나가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멈춘 가지는 그 끝에 꽃을피운다. 한여름 우리의 눈을 기쁘게 하는 형형색색의 꽃들은 가지가 성장을 멈췄다는 증거다.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기만 하면 풍성한 꽃도, 꽃이 진 자리에 달리는 튼실한 열매도 볼 수 없다. 내처 자라기만 하면 하늘에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뿌리로부터 점점 멀어져 결국 에너지가 고갈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는 스스로 멈춰야 할 때를 잘 안다. 지금까지최선을 다해 성장했고, 욕심을 내면 조금 더 클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나무들은 자라기를 멈춘다. - P38
본다고 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보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고, 관심의 문제이기때문이다. 관심이 없으면 나무가 바로 옆에 있어도 있는 줄 모른다. 어떤 존재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중요하지않다는 말과 같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보고 있어도 보이지않는 것이다. - P45
하지만 생존만을 위해 경쟁하는 숲은 죽어 간다. 햇볕이 바닥까지 닿지 않으니 온기가 부족해 어린 생명이 싹을 틔울 재간이 없다. 어린 나무와 풀꽃, 그들과 함께하는 작은 곤충들이 살아갈 공간이생기지 않는 것이다. 겉으론 완벽해 보일지 몰라도 그런 숲은 결국희망이 없는 불임의 땅과 다르지 않다. 숲이 새 생명을 품을 수 있는 희망의 땅으로 거듭나려면 틈이 필요하다. - P49
완벽을 목표로 삼고 부족한 것을 모두 채우려고 무리하는 순간부터 찾아드는 건 불안과 초조뿐이다. 오래된 숲의 틈이 말해 주지 않는가. 비움으로써더 좋은 것을 채울 수 있는 법이다. - P53
그러고 보면 나무의 삶은 결국 버팀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버틴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굴욕적으로 모든 걸 감내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평생 나무를 지켜본 내 생각은 다르다. 나무에게 있어 버틴다는 것은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 내는 것이고, 어떤시련에도 결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버팀의 시간 끝에 나무는 온갖 생명을 품는 보금자리로 거듭난다. - P57
정호승 시인은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나 나무나 삶을 제대로 살아 내는 과정에는 오로지 버텨 내야하는 순간이 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건투를 빈다. - P59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챙겨 온 물건들이 도움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마음의 평정을 깨뜨렸다는 것을 짐은 곧 두려움이었다. 그렇게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걷다 보니 걷는 것이 마치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친 욕심으로 무겁게 배낭을 메고서는 절대 멀리 가지 못하는 것처럼, 인생도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지 않고는 진정 원하는 곳에 이를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마음을 낮추고 가진 것을 내려놓을 때 인생길이든 여행길이든 비로소 가볍게 걸을 수 있다는 걸 왜 진작에 몰랐을까. - P64
신기한 것은 나무가 제 자식 키우는 법도 그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육아 원칙은 하나, 최대한 멀리 떼어 놓기‘다. 자신의 그늘 밑에선 절대로 자식들이 큰 나무로 자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까닭이다. 보호라는 미명 하에 곁에 두면 결국 어린 나무는 부모의그늘에 가려 충분한 햇빛을 보지 못해 죽고 만다. 그래서 나무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식을 되도록 멀리 보내려한다. - P69
한 예로 햇볕을 좋아하는 소나무는 씨앗이 최대한 멀리 갈 수 있도록 가지 제일 높은 곳에 열매를 맺고는, 바람이 세게 부는 날 미련 없이 씨앗을 날려 보낸다. 다만 어미 나무는 싹이 제대로 틀 때까지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을 챙겨 줄 뿐이다. 그러니까 씨앗을 감싸고 있는 배젖은 먼 길 떠나는 씨앗에게 어미 나무가 챙겨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도시락인 셈이다. 그렇게 멀리 떠난 어린 씨앗은 싹을틔우는 순간부터 오직 제 힘으로 자란 덕에, 죽을 때까지 저만의 삶을 씩씩하게 꾸려 간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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