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뿌리를 내릴 거면 비옥한 곳을 찾아가면 좋으련만, 붉나무는 햇볕이 너무 뜨거워 다른 식물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내는 나대지부터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도로 한 귀퉁이까지 당최 가리는 곳이 없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개발한다고 밀어 버린 산 경사면에 능청맞게 자리 잡고는 아래로 흘러내리려는 흙더미를 제 뿌리로 꽉 부여잡고 꿋꿋이 버텨 낼까. 그래서 나는 붉나무를 ‘녹색 게릴라‘라고 부른다. - P210
삶의 음지를 양지로 바꾸는 건 결국 마음에 달린 일이므로우리는 주어진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즐겁고 씩씩하게 살아가야한다는 사실을 말없이 일러 주는 듯하다.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아서 ‘내가 이 모양인 건 다 세상 탓이고 빌어먹을 환경 탓이고 남의 탓‘ 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는 녹색 게릴라 붉나무를 한 번쯤 떠올려 보면 어떨까. - P213
먼나무도 마찬가지다. 모양새나 꽃으로는 다른 나무들과 견주어 승산이 없지만 그것때문에 슬퍼하거나 누군가 자신을 먼저 알아봐 주기를 마냥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찾아 어필했다. - P211
하지만 우리 눈에 늘 싱그러운 버즘나무의 삶은 보기와 달리 무척 치열하다. 나는 서울에 갈 때마다 지하철역 근처에 자리한 버즘나무 줄기에 가만히 귀를 대 보곤 한다. 그러면 뭔가 웅웅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름 아닌 도심을 통과하는 지하철의 진동 소리다. 척박한 환경에 사는 가로수의 운명상 버즘나무는 늘 주변의 변화에민감하다. 하지만 도심 한가운데에 있으면 하늘 높이 치솟은 건물에 가려 바람의 흐름도, 햇볕의 움직임도 제대로 알아챌 수 없다. 그래서 선택한 전략이 길게 뻗은 뿌리를 통해 주변의 움직임을 느끼는 것이다. 버즘나무의 뿌리들은 얼마 되지 않는 땅속의 흙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 - P228
대체 그 강인한 생명력은 어디에 기인한 걸까? 소나무는 보통 나무들과 자라는 방식이 다르다. 대부분의 나무는 봄에 새싹을 틔우고 나면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계속 가지가 자란다. 딱히 병충해나 폭풍우 같은 위기를 맞지 않는다면 앞날을 크게 염려하지 않고 무럭무럭 성장을 거듭하는 것이다. 반면 소나무는 이른 봄부터 여름이 오기 전까지 딱 한 마디만 자란 뒤 생장을 멈춘다. 그래서 소나무는 마디만 세면 나이를 알 수 있다. - P232
곳은 어떤 나무도 좋아하지 않는 바위 땅이었다. 조금 어렵더라도경쟁 대신 천천히 자라기를 택한 것이다. 과도한 경쟁에서 벗어나자신만의 길을 일궈 온 덕에 소나무는 애국가의 한 구절처럼 철갑을 두른 듯 바람과 서리에도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자리할 수 있었다. - P233
그런데 이렇듯 오래된 나무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속성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느리지만 자기만의 속도로 자라면서 경쟁을 하지 않는 나무들이 결국 오래 사는 것이다. - P235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한 말을 마지막으로 전한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鼓手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 북소리의 박자가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는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 P235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스스로에게 참 야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를 하느라 늘 바쁘면서도 부족하다고 말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서도 더 열심히 하지 않는다며 자책한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모두 쓰임이 있게 마련인데 왜 사람들은 스스로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걸까. 왜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아끼고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 우리 곁에 매해 한 번씩 세상 그 어떤 나무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을 가꾸는 데 온 힘을 쓰는 나무가 있다. 봄 하면 개나리, 진달래에 이어 자동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벚나무다. - P240
하지만 1년 내내 고단한 삶을 사는 벚나무는 매해 봄 그 지난란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 상처 난 가지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온몸을 꽃으로 치장한다. 병충해와 싸우느라 만신창이가 된 몸이지만, 그 누구도 상처 자국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새 옷으로갈아입는 것이다. 내게는 1년에 단 한 번, 찬란하게 피어나는 벚나무의 꽃이 마치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처럼 보인다. 화려한 벚나무 꽃그늘 아래 서있으면 "이만큼 고생했으니 1년에 한 번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게살아 봐도 괜찮아" 하는 벚나무의 혼잣말이 들리는 듯하다. - P240
그래서 나는 불확실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꾸만 초조해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곤 한다. 설사 미래가 보이지 않는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를 미완의 존재라고 함부로 규정짓지 말라고, 어딘가에 제대로 소속되지 못한 채 늘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러면 좀 어떤가. 대나무는 풀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지금 설령 사람들이 정해 놓은 틀 안에 들어가지못하고 있더라도 불안해하거나 스스로를 못났다고 자책할 필요가없다. 어쩌면 대나무는 기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할지도모른다. "왜 남이 정해 놓은 틀 안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입니까?"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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