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삼라만상을 집어삼킨다.
그러나 모든 생물종은 대를 이어 지혜의 전수하는 자기 나름의독특한 방법이 있다. 사유를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거스르지 못할 시간의 파도에 맞서는 방파제처럼 잠시나마 동결된 것으로 만드는 방법 말이다.
모두가 책을 만든다.
- P195

알레시아인은 자신들의 글쓰기 체계가 다른 어떤 종족의 것보다도 우월하다고 믿는다. 알파벳이나 음절 문자, 표의 문자로 쓴 책과달리 알레시아의 책은 말뿐 아니라 글쓴이의 어조와 음성, 억양, 강세, 성조, 리듬까지 담아낸다. 이는 악보인 동시에 녹음이다. 연설은연설 같은 소리를 내고 만가(歌)는 만가 같은 소리를 내며, 이야기는 화자의 숨 막히는 경탄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알레시아인에게독서란 문자 그대로 과거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다.
- P196

영향력이 가장 큰 작품들은 현재 유통되는 해석본만 수백 수천종에 이르며, 이들은 차례차례 새 사본으로 만들어져 다시 해석되고 전파된다. 알레시아인 학자는 서로 모순되는 판본들의 상대적인정통성을 논의하면서, 또 불완전한 사본의 다양성을 근거로 상상한선조의 목소리, 즉 독자가 오염시키지 않은 이상적인 책의 모습을추론하면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다.
- P197

시간이 흐르면서 돌을 통과하는 물은 흐르는 양상이 변한다. 오래된 수로는 닳아서 사라지거나 막혀서 끊긴다. 그리하여 어떤 기억은 소멸된다. 새 수로가 만들어지고 전에는 갈라졌던 흐름들이합쳐지면서 통찰이 일어나고, 떠나는 물은 돌의 끄트머리 가장 어린 자리에 새 광물을 축적시킨다. 이곳의 불안정하고 연약한 미세종유석이 바로 가장 새롭고 신선한 사유들이다.
- P198

그러한 까닭에 쿼촐리인은 그 자체로 책이다. 그들은 저마다 돌로 된 뇌 속에 모든 선조의 지혜가 차곡차곡 적힌 기록을 지니고 있다. 수백만 년에 걸친 침식 작용을 견딘 가장 튼튼한 사유들이다. 저마다의 정신은 수백만 년에 걸쳐 물려받은 씨앗에서 자라나고, 사유 하나하나는 읽고 볼 수 있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 P199

한때 헤스페로인은 거칠고 잔인한 종족이었다. 그들은 토론을 무기 척 즐겼지만, 그보다는 전쟁의 영광을 훨씬 더 사랑했다. 헤스페로철학자들은 정복과 살육을 전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전쟁은 대대로 전해지는 정적인 책 속의 이상에 생명을 불어넣는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이상이 진실한 것으로 남도록 보장하기 위하여, 훗날에 대비해 이상을 정련하기 위하여, 사상은 오직 승리로이어질 때에만 보존할 가치가 있었다.
- P200

툴톡인은 우주 만물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 P202

우주 공간의 깊은 침묵 속에서 진실처럼 들리는 강조 구절이다. 행성은 저마다 시 한 수를 품고 있다. 그 시는 거칠고 뾰족뾰족한 암석질 핵의 스타카토 리듬으로, 또는 소용돌이치는 거대 가스층의서정적이고 유장하고 화려하며 남성적인 동시에 여성적인 압운으로 쓴 것이다. - P202

차갑고 깊은 우주의 공허 속에서, 막막하고 캄캄한 바다의 거품처럼, 지성을 품은 무리들이 반짝이고 있다. 추락하고, 이동하고, 합쳐졌다가 나뉘면서, 그들은 아직 보지 못한 수면을 향해 상승하며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소용돌이 모양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저마다 서명처럼 독특하다.
모두가 책을 만드는 것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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