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 대산세계문학총서 31
미셸 뷔토르 지음, 권은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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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변경 - 미셸 뷔토르 / 권은미 옮김 / (주)문학과지성사

로마행 기차의 유령 - 이 책의 맨 뒤에 옮긴이는 이 작품을 설명하면서 이 작품을 읽으려는 사람은 많은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고 혹시 다 읽은 사람이라면 무척 힘들게 읽었을 거라는 왠지 동정조의 코멘트가 있다. 그리고 보면 세상을 살다보면 참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야할 책이나 몸을 비비 꼬며 보아내고야 마는 영화가 종종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최소한 나는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다. 이 책 문장의 속도는 ‘흥미진진’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아주 멀지만.

이야기는 아주 아주 단순하다. 40대 중반의 주인공 남자가 내연녀를 데려오려고 로마행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 남자의 내면을 매우 세밀하게 추적하는 것이 전부다. 특히 남자의 내부가 과거와 현실과 역사와 환상으로 소용돌이치며 '변경‘되는 과정을 아주 세세하게 표현했다. 파리에서 로마까지 가는 동안 지나가는 역의 이름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남자는 내부의 소용돌이로 즐겁다가도 괴롭고 괴롭다가도 환상을 보고 다시 번민하고 고민하고 온갖 풍경을 직접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고 같이 동승한 기차의 승객들에 대한 끊임없는 상상을 펼친다.

이 모든 것들이 무척 ‘흥미진진’하게 들렸다면 그건 사실 거짓말이다. 이 소설의 문체는 ‘흥미진진’을 허용하지 않는다. 프루스트에 맞먹는 무척 세밀하고 긴 묘사와 좀체 끝이 보이지 않는 문장의 길이가 독자를 괴롭히고 결국은 완독을 포기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바람피우는 남자의 심경의 변화”라는 것이 줄거리의 전부이므로 읽을거리로 보았을 때 별 가치가 없다고 평가절하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 소설을 혼자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힘은 어디에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잘 모르겠다......(참 무책임한 대답). 남자는 항상 1등칸을 타고 다니는 제법 자리 잡은 회사원이다. 그런 그가 이번 여행에는 3등칸을 선택했다. 어쩌면 고통이 예견된 선택. 그의 불편함은 몸의 불편이 아니라 마음의 불편이라는 걸 남자는 아직 모르고 있다. 하지만 3등칸을 선택했을 때부터 이미 남자는 아내와 이혼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애인을 데려오지도 못할 거란 걸 몸을 불편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결정해 버렸다. 그는 어떠한 불편도 감수할 수 없는 소심한 인간일 뿐이다. 그의 ‘흥미진진’한 심경의 변경은 그런 면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반한 건 이 작가가 그것을 어찌나 세밀하게 그려내는지 어느새 내가 불편한 3등칸 좁은 좌석에 몸을 구기고 내연녀를 찾아가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몸서리치며 침착함을 잃지 않는 우아한 부인을 생각했고 젊고 싱싱한 검고 긴 생머리의 애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새 둘 다 잃지 않으려는 남자의 이기적인 욕심이 내 목을 치고 올라왔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이 남자의 구질구질함을, 남자 부인의 냉담함을, 남자 애인의 바람 같은 애정욕구를 야금야금 비웃고 말았다.

남자는 이번 로마행에서는 절대로 애인을 자신이 부인과 살고 있는 파리로 데려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사업차 애정차 앞으로도 그는 얼마나 많은 로마행 기차를 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는 로마행 기차의 유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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