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4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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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스타벅스 신촌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닉네임을 정해야 했다. 아버지의 이름 마지막 글자 ‘휴(休)’자를 따서 Hugh를 적어냈더니, 점장님이 발음하기 힘들다고 바꾸라고 했었더랬다. 그 때 처음 아버지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할머니는 6남매를 낳고 마지막으로 막내인 아버지를 낳으면서 이젠 정말 쉬고싶으셨을까. ‘이름이 천해야 오래 산다카이!’ 할아버지 말씀에 놀고 먹으라며 천한 이름을 붙이고싶으셨을지도. 몇 년 전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당신의 휴식은 충분히 천하지 못했구나 되내었다.


 사촌형이 술을 마시다가 나에게 심장 관리를 잘 하라고 했다. 큰아버지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우리가족들은 대대로 안좋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몇년 전 사귀던 애인이 내 가슴을 베고 자다가 심장소리가 이상하다고 했다. 백신의 부작용인 듯 했지만 괜히 불안하여 애플워치의 긴급 연락망에 애인 전화번호를 연결해놓았었다. 혼자 자다가 심장이 멈추면 이 사람에게 전화 해주렴. 백신 효과가 사라지자 증상도 같이 사라져서 잊어버리고 몇 년을 보냈는데 저번주부터 갑자기 다시 심장박동이 건너뛴다. 이번엔 애플워치 긴급 연락망에 적힌 옛애인의 전화번호를 아차 싶어 지웠다. 그날은 밝고(晶) 넓다(浩)는 내 이름에서 천한 부분을 고민하며 잠들었다.


 이상하게 뛰는 심장을 무시하고 이번 주말엔 모옌의 개구리를 읽었다. 친한 형에게 빌려 읽었던 모옌의 중단편들이 너무 재밌었던 터라 장편을 읽어보자 싶어서 사놓았었는데, 한참 뒤에야.


 개구리는 중국에서 70년대부터 시작된 계획생육 정책이란 배경 속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일한 고모를 중심으로 여러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계획생육 정책이란 산아제한 정책의 중국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국은 이것을 엄격하게 추진했던 터라 국민을 대상으로 정관수술과 루프수술은 물론, 도망친 임신부들까지 잡아와 임신중단 수술까지 강제로 시행했다. 소설은 이런 역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천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몸부림이다. 자신이 살기위해, 아내와 남편을 살리기 위해, 또 자식을 살리기위해 말도 안되는 일들을 한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그리고 이 계획생육까지 사실이라고 믿기 힘든 일들이 중국에서 정말 실제로 일어난 탓에 마치 마술적 리얼리즘같은 실제 이야기들에 홀려 미친듯한 흡입력으로 마지막까지 읽었다. 살면서 이렇게 빠져들어 읽은 소설은 아마 손에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모옌은 고모가 실제로 산부인과 의사였고, 오래 전부터 고모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 마음 먹었다고 적혀있다. 다만 정부의 계획생육 정책을 비판해야 했기에 망설였는데, 결국 계획생육을 배경으로 한 인간들의 이야기로 방향을 정한 뒤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소설 개구리는 고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각본가 커더우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형식적으로 굉장히 특이한데, 고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편지들이 이어진 뒤 마지막으로 결국 완성하게된 ‘개구리’라는 연극 극본으로 마무리된다. 이야기의 재미 만으로도 끝내주게 몰입시키지만, 나는 마지막에 현실을 재현한 연극의 각본을 넣은 이 형식이 그 무엇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인생이 나에게 큰 슬픔을 안겨다줄때 난 내가 슬픔을 연기하고 있다는 감각을 한 적이 있다. 마치 오래전 보았던 한 장면을 재현하는 느낌.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다고 수군대는 친척들 속에서 나는 내 안의 천함을 찾아 헤맸다. 어쩌면 연극이란, 예술이란 이런 슬픔을 놓아두는 곳이려나 싶다. 삶을 재현한다는 것은 예술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 불완전한 재현 속에는 결국 하지 못했던 말들, 얼굴에 뱉지 못하고 삼켰던 침들, 혹은 참지 못했던 헛구역질들이 담겨진다. 이 연극이 사실이냐 아니냐, 혹은 얼만큼 사실이냐는 질문만큼 우스운 것은 없다. 다만 나는 훌륭한 배우가 아니었을 뿐.


 개구리속 고모는 흙인형을 빚으며, 출산시킨 9800명의 아이와 유산시킨 2800명의 아이를 재현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재현한다. 그리고 작가 모옌도 고모의 이야기를 소설로 재현한다. 이 반복 속에서 아마 인간은 조금씩 치유될 것이라 믿는다.


 역사는 대체 왜 배우는거야? 라고 누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글쎄 왜일까. 흑인이나 게이가 차별받는 이유를 생물학적으로 열등해서라고 설명할 순 없으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해서 결국 시원한 대답은 하지 못했던 기억이지만, 이런 역사 소설을 읽게되면 다시 그 질문이 떠오른다. 아마도 더 좋은 이야기로 세상을 해석하고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인간은 세상을 이야기로 이해한다.


 이제 잠들어서 눈을 뜨면 다시 한 주가 시작된다. 어제를 재현하며 오늘 또 내일을 살아간다. 어제를 재현한 오늘에는 어떤 진심들이 담길지. 반복해서 들었다 내리는 체육관의 무거운 쇳덩이는 점점 더 가벼워질지. 내 하루는 얼마나 치유될지. 불가해한 내 심장은 아마도 미처 꿈틀대지 못한 어제의 박동을 뒤늦게 재현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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