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율, 강의와 강연 하이데거 전집 10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김재철 옮김 / 파라아카데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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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때문에(weil)’에 머물고, ‘왜?’를 묻지 말라!” -괴테-

근거율은 다음과 같다. ‘이유 없이는 아무 것도 있지 않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근거 없이는 아무것도 있지 않다.’ 라틴어 표현 양식으로 이것은 ‘모든 존재자는 이유를 가진다(omne ens habet rationem)’로 표현된다. 이것은 “각각의 존재는 근거를 가진다.”라는 식으로 표현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그리고 우리가 알게 된 것에 대해 특별히 주목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가 체류하는 곳은 언제 어디에서나 세계 안에 있으며, 우리와 마주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 근거를 탐구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때때로 배후로 들어가 보려고 시도하지만 사유의 심연에 이르기까지 충분하게 그 근거를 들어내는 것은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한 대답을 근거율이 내포하고 있지만 근거율은 대답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명석하고 판명하게 제시되는 것만을 확실한 인식으로 허용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지식을 흔들리지 않는 근거위에 두려고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방식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그가 주도적인 원리로 여기는 표상작용의 명석함과 판명함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포기하였다고 지적한다.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는 그러한 지점에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근거율은 우리에 의해 언제 어디서나 버팀목이자 척도로서 사용되고 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근거율은 그것의 가장 고유한 의미를 숙고하지 않을 때, 우리를 무근거에 빠뜨린다고 한다.

장미는 왜 없이 있다. 그것은 피기 때문에 핀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지 안 보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

                                             -안겔루스 질레지우스-

장미는 장미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장미는 본래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장미는 자신이 존재하는 방식을 위해서 유달리 자기 자신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장미는 피기 때문에 핀다. 장미의 개화와 개화의 근거들 사이에는 근거가 그때마다 비로서 근거로서 존재할 수 있게하는 그런 근거들에 대한 주의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

안겔루스 질레지우스는 장미의 개화가 근거를 가진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장미는 피기 때문에 핀다. 이에 반하여 인간은 자기 현존재의 본질적 가능성 속에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을 위해 그때마다 규정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어떻게 근거가 존재하는지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라이프니츠의 사유에 따르면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즉 장미가 피기 위해서 장미는 자신의 개화가 근거하고 있는 근거의 송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장미는 이유를 보충하는 것, 즉 근거의 송달이 장미-존재에 속하지 않아도 장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미는 결코 근거 없이 있지 않다. 장미와 근거율이 말하는 것과의 연관은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오히려 인간이 ‘왜’없는 장미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인간은 가장 숨겨져 있는 본질적 근거 속에 참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근거율』에서 하이데거는 근대의 표상적 주체에 기초한 라이프니츠의 근거율을 비판하고, 근거의 본질이 탈-근거로서 존재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을 밝힌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이정표는 필수로 읽어야하는 듯하다. 이정표는 하이데거 전집 9권에 수록되어 있다. 주석이 풍부하지 않아서 철학사전에서 용어를 검색하지 않으면 읽기가 버거웠다. 처음부터 출판사와 번역자도 이 책의 독자를 하이데거의 이정표를 이해한 독자로 설정하고 출판한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존재의 시간에 관한 내용도 나오고, 라이프니츠에 대한 근거율을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칸트와 헤겔의 관점도 나와서 이 둘을 모른다면 이 책은 활자만 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에서 존재의 역운 등의 다양한 개념어가 쏟아져 나온다. 솔직히 매우 어렵다. 고대철학의 내용도 나오고, 그리스 비극에 관한 내용도 나온다. 물론 이에 대한 주석은 없다. 앞부분을 이해를 못했더라도, 이 책에 마지막 챕터인 「근거율 강연」에서 하이데거 무엇을 말하고 싶은 지 조금은 알 수 있다.

P317 ~ P318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 근거는 ‘라치오’ 즉 해명으로 제시된다. 인간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생명체, 즉 이성적 동물이다. 인간이 이상적 동물이라는 규정이 인간의 본질을 다 드러내고 있는가? ‘존재는 근거를 뜻한다’라는 말이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종적인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의 본질, 존재에 대한 인간의 귀속성, 존재의 본질은 여전히 계속해서 놀라움을 일으킬 만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다면 오로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의 질주와 그것의 엄청난 성과를 위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포기해도 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에 현혹되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지나치는 대신에 사유가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우리는 애쓰고 있는가?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사유가 물어야할 세계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이 땅과 이 땅위의 현존재에서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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