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배동 김선생의 공부가 희망이다 - 0세부터 10세까지 공부습관 길들이기
김종선 지음 / 이다미디어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나는 서른이 되고도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맷휴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백인인 맷휴와 결혼을 하고도 2세에 대한 계획 역시 없었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는다면 순수 혈통주의자들의 그 따가운 시선을 감당하며 지내야하는 현실이 끔찍했다. 한국에서 박사과정으로 짧게나마 공부를 했을 때, 미국에서 학위를 딴 남자 교수조차 혼혈에 대한 편견이 뿌리 깊게 박힌 것을 확인하고는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아이를 가지게 되더라도 한국에서는 절대로 낳지 않으리라 결심 했다. 

  자녀 양육은 사랑과 책임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이 사람을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장남장녀이신 부모님을 지켜보면서 일찌감치 터득해 왔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 배우자 이외에 친인척의 인연까지 얼키고 설키는 결혼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순간적인 충동으로 가진 아이를 타인에게 떠맡기는 행동은 그 어떤 죄보다 크다고 여겼다. 많은 희생과 헌신이 필요한 육아, 사랑을 쏟지 못할 아이라면 낳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에 때론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내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외롭고 아플 때 위로가 되어 준 맷휴가 청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난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으시고, 나의 사진 작업을 정신적으로 많이 지지해 주셨던 미래의 시어머니는 나와는 사이가 참 좋았다. 그래서 결혼을 하더라도 고부간의 갈등은 없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동서의 자살로 내가 존경하던 시어머니가 쓰러지기 직전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기꺼기 도움이 되어 드리기 위해 한국을 미련없이 떠났다.

  시어머니는 사립대학에서 석사까지 마치신 이지적인 분이시다. 누구보다 문화예술을 즐기셨고, 매주말마다 뉴욕주 근교에서 뉴욕시까지 각종 음악공연과 전시를 감상하시는 중후한 교양인이었다. 그러나, 911이후에 시어머니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둘째 며느리의 자살로 남겨진 세 명의 손주와 하나 밖에 없는 사랑하는 딸이 이혼을 하면서 맡겨진 두 외손주를 돌보기만도 벅찬 나날을 보내고 계셨는데, 설상가상으로 친구처럼 지내 오시던 맷휴의 외할머니까지 노환으로 시력을 잃으면서 문화생활은 커녕, 건강한 사람이라도 버티기 힘든 노동의 나날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내외가 시댁에 도착했을 때 시어머니는 그동안의 긴장과 스트레스로 정말 쓰러지셨고, 보름이 넘도록 제대로 식사조차 하실 수 없을만큼 앓아 누으셨다.

  다섯 명의 시댁 조카와 시어머니, 그리고 맷휴의 외할머니를 우리 부부는 정성껏 돌보았다. 시아버지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참지 못하셨기에 해가 지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되면 나타나셨다. 다행히 시어머니는 건강을 회복하셨으나 긴 한숨과 가시돋힌 말만 내뿜으셨다. 손주들의 재롱은 뒷전이고, 순탄하고 안락하기만 하셨던 시부모님의 노후에 즐거움이라고는 술 밖에 없었다. 술에 취해 독기가 가득찬 말들이 오고가는 것을 옆에서 듣기는 괴로웠다. 이미 죽고 없는 아이들의 엄마에 대한 비난이 끊이질 않았다. 그동안 존경해 마지 않던, 교양 넘치고 지적인 시어머니를 더 이상 볼 수 없어 내 마음은 아팠다. 모든 정성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좋은 의도가 나쁘게 해석될 때는 화도 나고,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시댁의 어린 조카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그 때 뿐이고, 시어머니가 독설을 내뿜을만큼 건강을 회복하셨으니 별 죄책감없이 시댁을 홀가분하게 떠났다. 그래봐야 다섯 명의 조카이고, 친부모가 아니라서 그런 지 이별이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타인을 위해 잠시 희생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으나, 내 자신이 지치고 상처받는 일상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시댁의 가족을 한동안 외면했다. 지금은 새 며느리도 들어오고, 시누이의 생활도 안정이 되어 신경이 덜 쓰이지만, 그 땐 그렇게 외면해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우리 부부는 시카고에 정착했고, 우리는 우리의 아이를 가졌다. 그렇게도 낳지 않겠다고 버텼건만 열심히 어린 조카들을 돌보다가 둘 만 뚝 떨어져 지내는 생활이 적적했는지 아이를 가지는데 별 거부감이 없었다. 유빈이가 세상에 태어나기까지는 회오리와 같은 많은 사건들을 거쳤다. 달랑 하나 뿐인, 딸 아이와 배우자의 뒷바라지를 하며 가끔 내가 없다라는 생각에 또 얼마나 버벅대며 힘들기만 한 지, 최근엔 외롭더라도 혼자가 더 낫겠다며 그 옛날 옛적의 시절이 그리웠다.

  그럴 무렵, '방배동 김선생의 공부가 희망이다.'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쓰신 분은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결혼생활을 너무나 잘 헤쳐 나오셔서 할 말을 잃을 정도이다. 책 내용만을 보면 공부에 관한 자녀 교육관과 저자의 가치관만 담겨 있고, 시집살이가 어떠했는지 자세히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들 하나를 보기 위해서 딸 다섯을 줄줄이 낳아 키워오셨으니까 시집생활 역시 만만치 않으셨으리라. 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엔 '방배동'이라는 강남의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입시와 과외를 부추기는 뻔한 내용의 책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공부습관'이라는 수식어에 이끌려 책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고쳐 먹게 되었다. 저자는 경북의 시골학교 교사출신으로 넉넉하지 않은 가정 생활에도 자녀 여섯 명 모두 건강하고 훌륭하게 잘 키워 오신 분이다. 말이 여섯 명이지, 나도 다섯 명의 조카와 함께 지내온 경험을 떠올리면 정말 힘든 나날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책의 저자는 여섯 명이나 되는 자녀를 자랑이 될만큼 잘 키워 오셨으니, 자녀 교육에 있어 등불과도 같은 분이다. 한국에서 고액과외를 거치지 않고도 소신껏 자녀교육을 해 오신 분의 자녀들의 이력이라고 하기엔 정말 화려하다. 강남의 학원 출신보다 더 높은 확률과 더 나은 학력의 자녀들이 그저 놀랍다.

첫째 딸, 서울 의대
둘째 딸, 서울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을 하다가 가족의 경제를 고려하여 서울 법대로 진학
셋째 딸, 서울 약대
넷째 딸, 한양대 수학과(난 고등학교 때 수학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지금까지 그 영향을 받고 있다.-.-)
다섯째 딸, 연세대 의대
막내 아들, 중학교 99등에서 2등으로 졸업.

  유빈이를 가졌을 때, 나는 시어머니로부터 축복받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행여 우리의 사이가 나빠져서 이혼이라도 하게 되거나, 심지가 약하여 또 자살이라도 하게 될까봐 내게 축복 대신 악담을 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다섯 명의 손주에 또 갓난 아기까지 떠맡게 될까 두려워서 내뱉은 말이었겠지만, 그것이 나에겐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어쨌든 그 악담으로 하나 뿐인 딸, 유빈이를 더 잘 키워야겠다고 각오를 했으니, 시어머니의 악담이 딸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유빈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의 결혼 생활에 별거나 이혼, 혹은 자살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으니까......

  딸 아이 하나에 어쩌다 가끔 다섯 조카들을 신경쓰는 것이 전부인 나의 입장에서, 여섯 명의 자녀를 남부럽지 않게 키워 오신 분이 정말 우러러 보였다. 물론, 그 세월 역시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책 표지 날개에 실린 그 분의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니 환하고 밝기만 한 미소는 아니었다. 사진 찍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자신의 삶보다는 가족만을 위한 희생이 앞섰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그 분은 웃고 있었지만, 내 눈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나의 개인적인 편견일 수 있으나, 개인 생활을 완전히 포기하며 가족만을 위한 나날을 보내신 저자의 생애는, 같은 여성으로서 안타까움이 든다. 

  책의 저자는 가난하기에 공부가 희망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가 볼 땐 그 분은 결코 가난한 분이 아니었다. 현모양처(나에겐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 내신, 대한민국에서 내놓으라고 할만큼 지혜롭고 부유한 분이셨다. 복지 혜택이 빈약한 대한민국에서 자녀 여섯을 그 누구의 도움없이도 성공적으로 키워 내신 것은 물론이고, 가난한 고아까지 마음으로 신경 써 오셨기 때문이다. 아마 미국에서 그 많은 자녀를 키운다면 정부에서 어마어마한 금액을 매달 지원 받았겠지만, 그 분은 평범한 남편의 수입 하나만으로 여섯 명의 자녀들을 건강하고 훌륭하게 키워 오셨다. 그럴 수 있기까지는 한국의 건강한 먹거리도 한 몫 했을 것이니, 가난하고 욕심 없었던 과거의 농부에게 감사할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한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생계에 도움이 되기 위해 자녀들 몰래 숨어서 빵을 팔았다는 내용이다. 건강한 보리빵을 만들어 판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왜 수치스럽게 생각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학교 교사출신이고, 나보다 윗세대분이시니 한국의 유교 사상이 뿌리깊게 내려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대의 자본주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고가 아닐까 한다. 지금의 내가, 선생의 직업보다 훌륭한 기술의 노동자의 가치를 더 높이 사는 미국에 정착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알까 싶어 먼 동네로 돌아다니며 보리빵을 팔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려 빵을 하나도 못 팔았던 날의 일이다.

팔지 못한 빵을 지하철의 노숙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힘없이 돌아오는 나를 첫째 현경이가 우연히 본 것이다.

속이 상해서 부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아이가 내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엄마, 우리들 때문에 고생이 너무 많으시죠? 그래도 우리가 크고 있으니까 힘들어하지 마세요."

  나와는 이렇게도 다른 시대를 살아오신 분이 쓴 책이지만, 식탁에 앉아서 단숨에 읽었다. 무엇보다 자녀 교육에 대한 그 분의 담백한 철학과 건강하신 가치관에 전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이다.

  나는 6남매를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말을 했다.

아이들에게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라고 했다.

또 소중한 만큼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소중하기 때문에, 자신을 지키고 살기 위해서 공부는 필요하다.

대학을 가고 안 가고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공부이건 일이건 한 번 선택한 일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p.166, 방배동 김선생의 공부가 희망이다, 저자 김종선, 이디미디어 출판.


  유빈이가 이담에 어떻게 성장할 지 몰라도 지금으로서는 안전하고 건강하게 성장해 주기만을 바란다. 여러가지 사건사고를 거치면서 한 인간이 온전한 육체를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며, 커다란 축복인지, 어린 딸을 키우면서 매번 깨닫게 된다. 건강한 몸이 바탕이 되어야 공부 역시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겪어 봤기에, 유빈이와 더불어 우리 가족의 건강을 가장 먼저 신경 써 왔다. 유빈이의 미래는 본인이 선택하기에 달린 것이고, 난 엄마로서 아무탈없이 건강하게 자라는 딸을 지켜봐 주는 일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는 내가 처한 상황을 피하고 외면하기보다는 어디든 잘 적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서른 중반에 이런 단순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이기적인 내 자신을 잘 다스려야 했고, 속상할 때도 참 많았다. 



 

이 학교에서 유빈이만 유일한 한국계 미국인이고,

대부분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간혹 히스패닉계 미국인 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종 공휴일 및 학교 행사로 수업이 없는 날은

집에서 할 일이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유빈이의 학교를 결정하기까지, 미국에서 선생이 직업인 나의 배우자, 맷휴와 아주 많은 갈등을 겪었다. 교육에 관심있는 부모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사립학교나 종교단체의 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많다. 우리도 시카고에서 훌륭하고 우수한 학교들의 자료도 찾아보고 연구하며 며칠 밤을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딸과 함께 손잡고 걸어다니면서 주변의 좋은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지내고 싶었다. 초등학생까지는 집에서 걸어다닐 수 있는 가까운 학교가 가장 좋은 학교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우리집으로 이사올 때 유심히 봐 두었던 이 동네의 공립학교를 선택했다. 이런 나의 결정에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넉넉하지 않아도 비싼 사립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벌써부터 없는 돈에 융자까지 받아가며 자녀교육에 신경쓰는 사람들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여섯 명의 자녀들을 훌륭하게 잘 키워오신 분의 교육관이 나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서 책을 읽고 흡족했다. 하지만, 딸 하나만으로도 벅차서 힘들어하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내 눈에 방배동 공부방의 김선생님은 살아있는 부처요, 대한민국 교육의 빛나는 보석으로 보인다.



 

인생을 아주 열심히 살아오신 저자 김종선님의

스스로 공부법을 담담하게 써 나가신 책입니다.

시기적절하게 읽으면서 위안을 얻었고,

유빈이의 교육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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