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 - 세상이 당신에게 은밀히 요구하는 것
김범진 지음 / 갤리온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3th-Jan-2009

 

  나는 과연 섬세한 사람인가?하고 스스로 질문하게 되었던 책, 섬세. 이 책은 소심한 나를 아주 섬세하게 위로해 주었다. 스스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꽁하게 사람들과의 거리를 두며, 때론 외면하면서 살아왔다. 심지어 가족과도 그랬다. 한 때 사람들이 너무 싫어서 완전히 소식을 끊고 살았다. 인간관계에서 적절한 거리유지는 중요하긴 하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의 상처에 의기 소침하여 사람들의 호의도 거절하고, 차갑고 냉정하게 스스로를 보호하기 급급했던 시간을 보냈던 것은 아닌가하고 돌아보았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경영을 공부한, 한 가정의 남자이다. 책 제목이 '섬세'인만큼 책 내용도, 책도 아주 섬세한 책이었다. '한국에도 이와같은 섬세한 남자가 있구나.'하고 내심 감탄하며 책을 읽었다. 이제 중년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인 지위도 갖추며 가정생활에도 충실하게 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한국 남성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게 되었다.

 

  지금은 건강이 많이 나쁘셔서 술을 자제하시지만, 내가 어렸을 때 술만 마시면 폭군으로 변하시던 아버지. 어려운 가정 살림에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 드린다고 학비가 전혀 들지 않는 육사에 자진하여 입학했던 큰오빠. 큰오빠의 권유로 낭만적인 대학 생활을 접고, 학사장교를 준비하면서 성격이 무디고 점점 거칠어져 가던 작은 오빠는 군에서 제대하고는 침묵만 했다. 그리고, 장남 장녀이셨던 부모님의 남동생들. 할아버지와 외할버지가 일찍 돌아가서서 부모님은 삼촌과 외삼촌의 부모 역할을 하셨지만, 친척들은 고마워할 줄을 몰랐다. 그들에게서 섬세하고 고운 마음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게만 여겨졌다. 

 

  나는 여자였고, 가족을 부양해야할 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사진을 공부했다. 가족들의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사진으로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열심히 공부하여 빨리 졸업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립하여 잘 살고 싶었다. 낯선 대학원 생활에 잘 알지도 못하고, 마음에도 맞지 않는 사람들과 매주 억지로 술을 마셔가며 흥청거리는 분위기가 너무 싫었고, 생활비도 빠듯한데 술값으로 지출하는 비용의 부담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공부를 하고 사진 작업을 권장하는 분위기보다 술 마시면서 남을 비방하고, 사진작업보다는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해야하는 시간들로 얼룩진 기억으로 남은 대학원 생활. 우여곡절 끝에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나보다 어린, 군에서 막 제대를 한 직장 동료의 거친 행동과 언어에 난 지쳐 버렸다. 전날 술을 퍼마시고, 직장에서는 사무실을 지키는 대신 차에서 늘 잠만 자다가도 윗사람이 나타나면 예스맨으로 변하던 그의 이중적인 성격은 공포영화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나의 의식 속에 한국 남자는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책을 다 읽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도 그들-사회에서 가정에서 이해받지 못한 한국남성-만큼 거친 삶을 산 느낌이 들었다. 나 역시 섬세한 사람으로 상대해 주지 못했는데, 그들로부터 무슨 기대를 한 것일까. 스스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도 못했고, 그 상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엉뚱한 곳에 불똥이 튄 적도 있었다.(미안해요, 갤리온 편집인이었던 이길호님 - 매력적인 여성이신데 남자인 줄 알고 거리를 두며 불편한 마음을 많이 드러냈음. 지금도 미안한 마음 뿐임.)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갔다. 다행인 것은 이렇게 떨어져서 '가장 야성적이고 섬세한 세계인 자연'과 가까이 하면서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버티겠다고 다짐했건만,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죽을 사 온 맷휴와 함께 하면서 반려견, 바둑이도 입양했고, 결혼을 하여 딸, 유빈이도 낳았다. 이들로 나의 삭막했던 생활에 적어도 '순수'를 회복할 수 있었다. 자기 발로 스스로 찾아 온 업둥이, 노랑이를 내치지는 않았지만, 바둑이만큼 많이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숫놈이라는 이유와 고양이의 날카로운 발톱 때문에 그 발톱에 상처가 날까 경계를 더 많이 했다. 그래서 노랑이가 나 대신, 유빈이에게 상처를 입혔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편견으로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반성을 했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전체와 연결되어 있고 하나라는 자각이다.

내가 다른 존재와 깊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하고 싶고 아껴주고 싶은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그 모든 경계를 넘는다.

연결이 생명이며 창조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포용하는 다양성이 있어야 한다.

한 존재가 나와 다른 존재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해 소통하고, 부딪히고,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에너지,

창조의 에너지가 샘솟는다.

작은 개체가 연결을 통해 무한히 확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이질적인 개체들과의 소통, 통합, 그리고 그것을 뛰어 넘는 힘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


- 섬세, 갤리온, p.100

 

  한국이 그리울 때, 모국어가 쓰고 싶을 때는 블로그를 써 왔다. 그리고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다. 아니었던 블로거도 간혹 있었지만, 그것은 나의 포용력의 한계라 어쩔 수 없었다. 블로그로 가장 섬세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블로거들의 글 속에서 현실의 겉모습보다는 내면을 더 많이 들여다 볼 수 있어서 그럴 것이다. 가끔 글로 사기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역시 그들이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하나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사기꾼들과 엮이고 싶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나의 블로그는 일주일마다 나를 돌아보며 일상을 즐기는 유희가 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을 해 왔다. 별달리 사회활동이 없었던 전업주부였지만, 블로그가 있어서 때론 주말 계획서 내지는 모닝 페이지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두뇌의 배수구, 모닝 페이지를 써라.
<아티스트 웨이> 저자, 줄리아 카메론

' 모닝페이지는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매일 아침 의식의 흐름을 3쪽 정도 적어가는 것이다. "어휴, 또 아침이 시작되었군. 정말 쓸 말이 없다. 참, 커튼을 빨아야지, 그건 그렇고 어제 세탁물을 찾아왔나? 어쩌고 저쩌고..." 모닝 페이지는 저급하게 말하면 두뇌의 배수구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이 모닝페이지가 하는 커다란 역할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섬세, 갤리온, p.171

 

  권위적인 사회에서는 인터넷의 블로그가 하찮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블로그는 가장 섬세하게 인연의 고리를 만들어 주고, 창작의 원동력을 불어주는, 인류가 만들어 낸 최상의 지적놀이임을 인정하는 바이다.

 

  섬세를 쓴 저자, 김범진이라는 분은 '섬세纖細'라는 단어를 잘 정리하고 다듬어 아주 편하고 읽기 쉽게 분석했다. 하나의 단어, 섬세로부터 한 권의 책을 완성하였다. 책에서 아내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딱딱할 수 있는 어려운 내용의 많은 책들이 그의 섬세한 사고에 의해 잘 엮여진 한편의 논문을 읽는 것 같았다. 기존의 논문과 다른 것이 있다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상처가 저자와 공감되면서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책이 지식과 정보 전달 이외에 아팠던 마음까지 위로해 준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아마 그가 그 만큼 섬세한 저자라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섬세한 블로거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노란색, 연초록색, 초록이

하나의 회화처럼 다가온 책, 섬세.

화장실에 둔 과일 바구니와도 잘 어울렸습니다.

 

저는 앞으로 더욱 더 섬세한 블로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새해 복 듬뿍 받으세요.

꾸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