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생의 첫날
비르지니 그리말디 지음, 이안 옮김 / 열림원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고등학교 때 동경의 대상이었던 불어 선생님이 귀에 못이 박히게 얘기하던 두 명의 프랑스 가수가 있었다. 파트리샤 카스와 장 자크 골드만, 두 사람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이들의 노래도 꽤 들려 주셨다. 그렇게 열심히 배웠던 불어를 전부 홀라댕 까먹은 지금도 저 두 사람의 이름과 몇몇 곡의 제목만은 또렷하니 참 웃긴 일이다. 친구에게 빌려온 이 책의 첫 장에서 바로 장 자크 골드만의 이름을 봤을 때 내가 알던 그 가수 맞나맞나 그랬는데 그가 맞았고 불어가 아닌 한국어로 된 그의 노래 가사를 계속 만날 수 있었다.

바람난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고독 속의 세계 일주'라는 크루즈 여행을 떠난 마리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배 안에서 일생의 사랑과 겪은 위기를 완전한 해피엔딩 혹은 새드엔딩으로 매듭짓기 위해 온 안느와 비만에서 환골탈태하였으나 여전히 낮은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남자 사냥 여행을 온 카밀을 만나 절친이 된다.

마리와 안느, 카밀이 함께 더 이상 그립지 않은 것들이란 목록을 작성하고 태워 버리면서 주문처럼 외쳤던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이라는 말은 마지막에 그녀들의 건배사가 된다. 40세가 된 마리, 60대인 안느, 20대의 카밀은 각기 다른 이유로 위기를 느끼고 일상을 떠나 왔다. 고독함을 느끼며 세계 일주를 하라는 여행 프로그램의 특성상 완전한 혼자를 꿈꿨지만, 세 사람은 서로를 의지해가며 인생의 다음 장으로 갈 수 있는 마무리를 지었고, 함께 남은 생으로 출발했다.

 

화장품과 목욕은

피부를 부드럽게 하지만

아무도 어루만지지 않는 이에게는

먼 세상의 일

여러 달과 여러 해를

사랑하는 이 아무도 없이

그렇게 시간이 갔네

사랑을 잊은 채

꿈과 욕망도 잊은 채

무엇이 지혜롭고 또 무엇이 가능하지 알지 못한 채

어떤 외침도 열정도 없이

받아들이고 만

빛 없이 보낸 여러 해들

그날들이 남긴 열, 혹은 스무 장의

평범한 사진들

그것이 신비가 사라진 그녀 삶의 결산이었네

그녀는 천 번도 넘게 이 노래를 들었었다. 단지 꿈꾸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물으면서,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꿈과 현실을 혼동하며 흔들리는 일은 없으리라. 


『남은 생의 첫날』 中


이야기 속에서 마리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등장하는 장 자크 골드만, 그녀와 디디에가 주고 받는 편지 속에서 계속 그의 노래 가사가 등장한다. 선생님이 들려줬던 노래들이 이런 가사들을 가지고 있었구나를 깨달으며 문득 이 책을 장 자크 골드만의 노래로 이루어진 뮤지컬로 각색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마리와 안느, 카밀의 얘기가 메인이기는 하지만 조르주와 이블린, 그 외에 그녀들이 관계 맺는 크루즈의 사람들 얘기가 가슴 따뜻하게 때로는 분통 터지게 그려진다. 이렇든 저렇든 해도 3개월 후 여행의 마지막에 작별 인사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같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걸 보면 읽으면서 나도 정이 든 모양이다. 읽는 내내 '고독 속의 세계 일주'라는 여행 프로그램이 진짜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니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 그러니까 힘차게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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