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비미학󰡕 정리

1. 서론

이 책은 ‘비미학’이라는 주제아래 다양한 장르의 예술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어떤 구획된, 뚜렷한 체계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착각이다. 이 책이 노리는 바는 ‘탐색’이지 ‘정리’가 아니다. 이 부분에 혼동이 있으면 독서 자체가 굉장히 괴로울 수 있다는 점을 우선 언급하고 싶다.

미학과 사유의 실체를 향한 탐색은 (철학에 있어서) 하나의 전진(前進) 활동이다. 즉, 세계를 확장시키는 첨병의 족적인 셈이다. 그렇다보니 이 책은 일반적인 독자에게는 다소 어려운 책이다. 필자 역시 이 책을 따라가는 것도 급급하여 괴로웠다는 점을 고백한다. 여기서 필자는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어렵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 이 ‘어려운 책’은 ‘나쁘’지 않다. ‘어려운’만큼 ‘좋은’ 책이다. 그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겠다. (필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책을 읽다보면 누구나 공감 하리라. 이 책은 상당한 실력자의 글이다.

이 책이 어려운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보인다. 첫째바디우의 문체 자체가 다소 어렵다는 점이다. ‘의미의 의미의 의미’를, ‘심층의 심층의 심층’을 찾는 작업이다 보니 기표들이 뒤섞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는 철학의 난해성 그 자체와도 닿아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필자는 이 책을 느리게, 아주 천천히 사유의 선을 따라가는 방법으로 읽어 나가라고 제시하겠다. 아직까지 내가 아는 한 그 수밖에 없다. 둘째로 이 책은 ‘비미학’이라는 주제 자체가 함의하는 바가 뚜렷하지 않다. 여기서의 ‘비미학’이란 철학이 예술과 어떻게 접점을 맺는지 사유의 방식과 미학의 방식은 어떻게 겹쳐지는 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관계망’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보니 이 책은 좌표를 가로질러 예술이 진리를 어떻게 생산하는지, 작품들이 어떻게 스스로 실존하는 지를 폭발적으로 토로한다. 이 부분에서 독자들은 당혹감을 느낄 것이리라 생각된다. 셋째로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배경으로 두고 있기에 어렵다. 이 책은 친절하게 각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 정도는 기본적으로 안다’라는 믿음 위에 편안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런 세 가지 이유로 이 책은 어렵다.

2. 대강의 정리

우선 깊이 있는 이해 자체가 어려웠으므로 필자가 이해한 바를 그나마 적어보려고 한다. 1장 「예술과 철학」은 이 책이 향하는 기본 방향을 제시한다. 즉, 예술과 철학의 종전의 관계들에 대해서 바디우는 설명하는데 그는 크게 세 가지 틀에서 예술과 철학이 달려왔다고 말한다.

(1). 플라톤에서 시작된 ‘지도적 도식’

- 예술을 규정하고 제한한다. 공공에 미치는 효과 때문이다. 예술은 이데아(혹은 진리)에서 모방된 것의 재 모방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예술은 진리로부터 먼 것’이다. 따라서 예술은 규정되야 한다. 이 동력은 ‘예술의 바깥에 있는 진리’이다. 이것이 예술을 묶고 진리의 감독 하에 예술을 바라본다.

(2) 낭만적 도식

- 지도적 도식의 정반대. 예술만이 진리를 담는다. 예술의 절대성을 믿음. 예술은 진리가 육화된 것으로 예술은 교육 그 자체이며 따라서 이 도식의 신봉자들은 실체로서의 예술을 믿는다.

(3) 아리스토텔레스로 인해 발생된 ‘고전적 도식’

-예술과 철학의 평화 협정. 예술의 목표는 진리가 아니라고 보는 것. 모방이면 어떤가. 예술은 경험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장한다. 따라서 예술은 진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결백하다. 이들의 목적은 즐거움이다.

대략 관계는 이렇게 맺어져왔다. 바디우는 이 오래된, 해묵은 도식이 지금가지도 이어져오고 있으며 인간들은 새로운 도식을 내지 못한 채 도식 안에서의 재생산만을 하고 있다고 본다. (예-> 지도적-맑시즘 / 고전적- 정신분석 / 낭만적 -하이데거 해석학/ 혹은 도식들의 결합) 결국 이러한 세 가지 도식은 아방가르드를 끝으로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그는 네 번째 도식을 제안하려는 시도를 하려 한다. (물론 그것이 뚜렷하지는 않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동시성’을 긍정해야 한다고 즉, 철학과 예술은 앞서거나 뒤서는 개념이 아니며 깊게 연관되는 것도 또 연관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술은 동시적으로 그 자체가 하나의 진리 절차라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결과를 드러내어 그것이 효과를 파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재 그 자체로 움직이는 사유라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주의’를 부르짖은 철학자들과 같이) 예술이 가르치는 것은 ‘교훈, 진리, 계시’가 아니라 ‘예술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진리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유적인 집합이다. 늘 어떤 상황에서든 완벽하게 적용되는 진리란 없다. 예술 작품 역시 그러하다. 완벽한 작품은 없다. 독특하게 몇몇 상황에 따라 예술은 진리를 보여주고 동시에 그 독특함이 보편을 지향하는 것이다. 국지적이며 동시에 보편에 포함되는 것. 결국 ‘작품은 진리에 대한 한 번의 탐색(p.29)’이다. 철학은 그러한 흩어진 진리들을 모아 하나의 진리 범주를 만드는 사명을 지닌 것이다. (그 범주의 예가 바로 ‘짜임’이다)

2장‘시란 무엇이며, 철학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서는 시의 특성과 철학의 자세를 이야기한다. 플라톤은 주지하다시피 ‘시인 추방론’을 주장했다. 익히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시가 가진 모방적 특성(모방한 것의 모방인 시)을 경멸했다. 그러나 바디우는 이러한 통상적인 플라톤 해석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바디우는 플라톤이 시를 추방하려 한 이유를 이렇게 든다. ‘시는 연역, 추론의 사유를 하지 못하게 한다’. (수학적 정밀성, 로고스의 노동) 결국, 시의 은유적 모호함은 수학적 명백함을 방해하고 결국 궤변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게 플라톤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디우는 현대인들을 다르다고 말한다. 현대의 시들은 언어로써 수에 접근하는 이성적 작업을 행한다. 또, 단순히 맹목적인 은유로서의 시가 아니라 일정한 메커니즘(혹은 장치)을 가지고 시 전반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시는 사유의 체제를 감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결국 바디우는 시가 하나의 ‘작용’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작용은 진리에 매우 가까운 것이다.

3장 ‘어떤 프랑스 철학자가 어떤 폴란드 시인에게 대답함’은 밀로스의 강연에 대한 바디우 나름의 반론이라고 볼 수 있다. 밀로스는 서유럽의 시가 폐쇄석, 애매함, 주관성에 몰락하여 세계와 대상을 잊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바디우는 난해성, 시의 대상, 파울첼란의 시편들 이라는 주제로 이러한 주장을 일갈한다. 결국 이 문제들은 다음의 바디우의 말에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사유하기 위해서 시 안에 뛰어들 것’이라는 말. 이 말은 시의 작용성, 즉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듯 시를 읽음으로써 겪게 되는 작용,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라는 말이다. (말라르메의 사라짐, 암시적인, 결코 직접적이지 않은) 이 장에서 파울첼란의 시를 분석하는 바디우의 글은 매우 빛난다.

4장 페소아와 동시대인이 되기…와 5장 어떤 시적 변증법…은 ‘시’라는 장르가 어떻게 진리를 드러내는 과정인지, 또 시인마다의 그 양상은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는 대목이다.

페소아는 부정의 방식, 이명법의 방식을 사용

라비드 이븐은 시로 진리와의 결합을 드러냄 ex-공산주의 내재적 진리

말라르메는 진리와 지배를 분리하지만 동시에 초월성 희생을 강요 ex-민주주의, 과학 분리된 진리 익명적 진리)

여기서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진리의 복수성’ 즉, 진리는 다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시는 ‘공백’이라는 상황을 통해 그것을 드러내려 한다는 점을 말한다. 공백에 대한 하나의 시는 그 자체로 고정되지 않고 진리에 가까이 (결코 진리 그자체는 되지 못하는)까지를 다가간다.

6장은 쉬우니까 패스 그러나 매우 중요하다. 많은 토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아주 아름다운 대목, 원시의 표출이나 상승 욕망에 국한된 의미로서 춤을 볼 것이 아니라 사유의 은유, 이름(명명되기)을 가지기 전의 모습, 이라는 것. 충동이 억제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운동하는 것. 따라서 이것은 예술적이기는 하나. 결코 ‘예술’자체는 아니다. 예술의 가능성을 함유하는 것이 춤이지 춤은 예술 그 자체는 되지 못한다.

7장 연극에 관한 테제들에서는 춤의 반대편에서 연극이 나타난다. 춤의 긍정성을 앞장에서 많이 설명하였다고 해서 바디우가 연극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연극은 춤의 긍정적인 반대편에 있다. 그는 연극은 ‘짜여진 것’ 철저하게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춤이 몸으로부터 확장된 날 것이라고 한다면 연극은 삶의 맥락들을 전형적으로 끌어와 단순하게 만드는 예술이다. 바디우는 ‘성(性) 사이에 순환하는 인간적 욕망’과 ‘정치적, 사회적, 국가적 권력 욕망’을 연극의 거대한 두 축으로 본다. 결국 인간의 삶에서 기인하는 이념을 극 행위라는 것으로 완성시키는 것인데 이 또한 순간적이다. 연극은 ‘상연 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장르로 작용하고 동시에 상연이 끝나고 난 뒤에는 흔적만이 남는 ‘불완전한 이념’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관객들 역시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바디우는 이념에 주목한다. 연극은 이념 중심적인 것이다. 짜여 지고 구성되는 것. 이것은 정치적이며 동시에 국가적이다. 결국 연극은 볼거리를 제공하거나 스펙타클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관객에게 교양을 주는 것도 아니다. 연극은 본래 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삶에서 파생된 단편들은 물리적으로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이것이 하나의 이념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이념은 관객을 충격한다.

8장 ‘영화의 거짓 운동들’에서는 영화의 독특한 성질을 말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복합적으로 구성된 예술이다. 이 속에는 회화의 가시성, 음악에의 도취, 연극의 짜임, 소설의 서사성 등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결국 이는 전체적인 운동으로 볼 수 있겠는데 끊임없이 예술의 후진으로 보인다. 이러한 특성은 문학이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파격을 다시 뒤엎는 특성을 보여준다. 문학은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영역을 만들지만 영화는 이를 다시금 순화시켜 관객에게 이해시키려한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그가 부정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9장 ('존재, 실존, 사유 :산문과 개념') 이 책에서 매우 중요한 장이다. 바디우가 텍스트의 결을 분석하는 모습은 놀라우리만큼 아름답다. 이 9장은 베케트의 󰡔가장 나쁜 쪽으로󰡕를 통해 철학적인 진리를 발견한다. 즉 존재와 실존의 양태 그리고 사유의 가능성을 작품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큰 틀에서 봤을 때 베케트의 글은 끊임 없이 ‘계속한다’라는 작용, 활동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더. 더 말하기. 더라고 말해지기. 어떻게든 더’라는 베케트의 텍스트 문장만 봐도 알 수 있다. 말한다는 운동성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 (여기 있음)이 실행되는 것이다. 베케트에게 글은 하나의 시험장이다. 글은 스스로 끊임없이 전진하며 공백에 다가가려 한다. 그러나 그 방향성은 ‘더 나쁜 쪽’이다. 즉 끊임없이 실패하는 글쓰기를 통해 베케트는 실존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가능성에 대한 물음의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다. 그의 텍스트에서 ‘나’라는 하나의 주체는 ‘하나’로 표현되며 이것은 정신을 부정하는 존재 그 자체이다. 그리고 쌍은 타인인 동시에 숫자 2로 기능한다. 이것은 ‘두 개’의 의미가 아니라 ‘쌍’ 즉 하나이자 둘인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치는 두개골이다. 이것은 사유를 나타내는데 기본적으로 사유란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이성적이지 않다. 세계를 이기적(?)으로 해석하는 사유는 크게 감겨진 눈으로 잘못된 왜곡된 세계를 인식하고 동시에 뇌수는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말로 드러난다. 이들은 정신의 물질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장치 위에서 세 가지의 조건이 보인다

공백 - 순수 존재 (본성) 이것은 있는데 결코 지울 수 없고 동시에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것

어둑함 - 순수 존재가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

-> 공백과 어둑함, 이 두 가지는 하이데거의 존재, 존재자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들은 물음들을 위한 존재의 조건이다.

그림자 - 실존의 증거이다.

이러한 배경아래에서 이 텍스트의 서술자는 끊임없이 잘못 말하려한다. 이것은 말라르메 식의 ‘무’의 공간을 마주하기 위함인데 이러한 잘못 말하기는 세계에 대한 의식의 관성, 목표 아래에서의 말하기를 삭제 시킨다. 그러나 뒤에서 베케트는 이러한 사실을 부정한다. ‘잘못 말하고, 모든 것을 없애기 위해 말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설정하는 순간 그 말하기는 ‘명령’에 종속되어 버린다. (결국 베케트는 ‘축소하는 말’을 지향하고 말라르메는 유사하게 ‘암시적이고 결코 직접적이지 않은 단어’들을 사용한다.) 순수 존재로 가는 방향은 분명히 더 나쁜 쪽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결국 이 장의 요체는 예술의 극단은 진리에 매우 가까워지는 작용의 형태를 보이나, 결코 진리 그 자체는 되지 못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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