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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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계를 보는 오웰의 감수성과 표현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정치적으로만 읽고 해석하는 것에 반대한다. 가버린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 그 사이의 덫에 걸린 인간들의 고통을 연민의 눈으로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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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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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에 이어 영문으로 읽은 두 번째 작품이다. 그 전에 다른 번역본으로 몇 번 읽었다. 문학동네 버전이 원작에 가깝다. 고전은 명불허전이다. 닥치고 사서 읽자! 나도 사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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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5구의 여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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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학작품을 읽다보면 작가의 사상을 투영한 문장에서 지문처럼 묻은 작가의 개성을 느낄 수 있다. 개성있는 작품은 곧잘 문학성과 연결되고 주제와 문체를 중요하게 다루는 순수문학에서 자주 경험한다. 장르소설의 문장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체험이다. 순수문학 작가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표현력도 한몫하거니와  문체보다는 캐릭터와 사건에 집중하는 장르소설의 특성 탓이 크다.

 

그래도 가끔은 아! 하고 깜빡 잠에서 깨는 것처럼 10줄 이하의 단락만으로 특정 작가를 가리킬 경우가 있다. 나에게 레이먼드 챈들러와 데니스 루헤인 필립 클로델, 그리고 더글라스 케네디가 그렇다. 이들 작가가 쓴 작품은 문체보다는 내레이터(narrator/화자)의 목소리에서 개성을 느낄 수 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내레이터는 고독하고, 필립 클로델의 화자는 고뇌가 깊고, 데니스 루헤인의 내레이터는 손가락으로 창문을 그으면 물방울이 주르르 흐를 것처럼 감정이 풍부하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파리 5구의 여인>읽었다. 토요일 오후부터 오늘 새벽까지 열 몇 시간을 달아서 읽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은 <빅피쳐>이후 두 번째인데 한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아하, 더글라스! 라는 감탄이 나왔다. 케네디 트유의 화자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케네디 소설에서는 다른 작가가 카피할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의 내레이터가 있다. 우유부단의 가정에서 자란 게 분명하 작품의 내레이터는 읽던 책을 확 집어던지고 싶을 만큼 소심하고 찌질하다. 만약 작품의 내레이터가 내 옆에 있다면 ‘에라이, 이 인간아!’ 뒤통수 한 대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케네디가 창조한 이 찌질한 내레이터를 미워할 수만은 없다. 

 

 <빅피처>에서도 그랬지만 <파리5구의여인>에서도 주인공- <파리5구의여인>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취하기에 주인공이 곧 내레이터가 된다-은 아내의 배신과 음모로 주인공은 마치 교통사고 현장의 피해자처럼 된다.  그러나 시체를 산자로 오해하여 총을 쏜 것처럼 사후적 결과이긴 해도, 주인공 역시 가정을 무너트리는데 일조하였기에 그는 붕괴된 가정과 흩어진 가족을 생각하며 깊은 죄책감에 빠진다. 하지만 주인공은 빨던 사탕을 떨어트린 코찔찔이처럼 징징거리며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무너진 가정을 다시 일으키려 분주히 움직인다. 이곳저곳에서 억울하게 얻어터져도 버틴다. 독자는 그런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띤다. 그를 응원한다. 왜? 소심한 주인공(내레이터)의 모습에서 독자는 거울을 보듯 바로 자신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더글라스 케네디가 한심한 찌질이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또 내레이터로 선택한 건 우연이 아니다. 

 

 대중소설이 추구하는 목적과  대중소설을 읽는 독자의 바람은 같은 무늬를 벽에 비춘다. 작품의 주인공이 세상을 구하길 원치 않고 다만 주인공만큼나 찌질하고 새가슴인 독자의 가슴을 책 읽는 동안만이라도 부드럽게 만져주며 위로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위로는 반드시 독자가 포복절도하거나 대성통곡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도 없다. 독자를 울리고 약올리고 짜증을 일으키고 때로는 말도 안되는 오컬트적 환상을  불러와 경외감을 일으켜도 좋다.  그러나 다양한 감정의 파도를 일으키되 마무리는 독자가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

 

  <파리5구의여인>의 결말은 독자가 수긍할 수 있는 해피엔딩이다. 해피엔딩은 대중소설의 모범적인 결과 방식이 아니라해도 압도적 다수의 독자는 그걸 원한다. 왜? 대중소설은 독자가 발 담그고 사는 세상을 모사하지만 그 세계의 끝은 소설처럼 독자가 수긍할 수 있는 모양을 그려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는 현실에 지치고 때로 벗어나길 갈망하다.  <파리5구의여인>은 독자에게 탈출구를 제공하고 안전한 복귀마저 돕는다.  그러므로 나는 장르소설 애호가로서 사심없이 말한다. <파리5구의여인>은 출판사가 매긴 작품 한 권의 돈값에 충분한 작품이라고. 

 

 도서관에서 남이 읽다가 대충 버린 책 말고 갓구은 빵냄새 나는 새 책으로 읽기 바란다. 농담 아니다. 출간한지 6개월 이내의 책에서는 분명히 빵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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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6
알베르 카뮈 지음, 이기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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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카뮈가 쓴 <레뜨항제>의 화자(‘나’)는 자궁과 무덤 사이에 선 위태로운 다자인(Dasein)이다.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근거를 확정하지 못하는 ‘나(뫼르소)’는 당연히 왜 사는지도 모른다. 그냥 거기에 이유 없이 던져진(피투) 인생이기에 목적 없이 자신을 미래로 던져가면서(기투)하면서 세계 속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생의 기원도 목적도 알 수 없는 각개의 인생이기에 때로 ‘나’는 세계 속의 타자가 의미한대로 날조된다. 


 하나의 사건은 이어 벌어진 사태에 원인이 되고 다음 사건에 목적이 된다고 믿지만 반드시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오늘 엄마가 죽었고 피곤한 ‘나’는 엄마의 시신을 안치한 관 앞에서 카페오레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때로 졸기도 한다. 사회 질서가 부여한 인위적 도덕 관념을 제거하면 열거한 사태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후 ‘나’가 누군가를 살해하고 법정에 서면 내가 마시고 피운 카페오레와 담배와 때때로 졸았던 행위는  ‘나’를 험하게 추궁하는 무기로 돌변하기도 한다.

 

 작품에서 공판검사는 '나'를 가리켜 “범죄자의 마음가짐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기소하는 바입니다(본 책 104쪽).”하고 말한다. 분명 '나'는 엄마의 장례 이후에 벌어진 아랍인 살해로 기소되었는데 검사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 검사의 진술은 모순이다. 검사는 시간을 소급하여 사건의 인과관계를 역전하였다.

 

  그러나 엄마의 죽음과 아랍인 살해는 시간상 순차적으로 발생한 별개의 사건이나 두 사건은 특정한 시간 속에 ‘나’라는 육신이 담겨 있고 거기에 특정한 질료(까페오레, 흡연, 코미디 영화관람, 연인과 섹스)를 덧붙임으로서 검사는 ‘나’에게 묻는 유책성의 근거로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둘러싼 세계는 지옥(사르트르의 '타자')이 확립한 질서를 준거로 과거에 ‘나’가 행한 각개의 사태를 재단하고 죄를 붙인 것이다. 이렇게 세계 속에 머물고 있는 '나'는 지옥들이 합의한 질서에 갇힌다. 만약 그 질서를 불응하거나 위배하면 개인은 타자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즉자존재(의식없는 사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카뮈 작품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이휘영 선생과 카뮈 연구에 일생을 보낸 김화영 선생은 <레뜨항제L'Etranger>의 캐릭터이자 내레이터인  '나(뫼르소)'를 세계 내에서 이유없이 겉도는 인간으로 보았다. 반면 최근에 번역한 이기언 씨는 '나'를 동일자(le meme) 앞에선 '타자(l'autre)'로 본 것 같다. 말하자면 푸코가 말한 '나에게서 배제된 나'의 존재다.

 

 카뮈의 전작을 읽은 문학애호가로서 의견을 덧붙이면 나는 이휘영 선생과 김화영 선생이 번역한 제목에 이의가  없는 것처럼 이기언 씨가 붙인 제목에도 긍정한다.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거울 앞에 섰을 때를 가정해보자고 말하겠다.

 

 우리는 거울 앞에서 선 나와 거울 속의 나를 동일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악수할 목적으로 손을 내밀면 그 즉시 신뢰는 깨진다. 당신이 거울 앞에서 오른 손을 내밀면 거울 속의 당신은 틀림없이 왼쪽 손을 내밀 것이다. 악수가 친밀함과 화해를 상징한다면 거울 앞에서 선 나와 거울 속의 나는 감정적으로 절대 섞일 수 없는 나의 반의식(프로이트의 무의식)이다. 바로 이기언 씨가 붙인 제목대로 이인이 되는 것이다.

 

 같으면서도 다른, 나이면서도 동시에 내가 아닌 그 누군가. 대관절 이 부조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그걸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차분하게 본 뒤에 역자의 해설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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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ㅣ 현대 예술의 거장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지음, 한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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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네필

 독서광은 때로 작가가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세상 모든 작가는 과거에 독서광이란 명찰을 달고 살았다. 영화감독도 마찬가지다. 세상 모든 영화감독은 영화를 연출하기 전에 오직 영화 보는데 미쳐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 읽기를 좋아하지 않고 소설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영화 보는 걸 사랑하지 않고 영화를 연출할 수 없다. 영화 없이는 하루도 못 살기 때문에 스크린 현장 속으로 자신을 밀어버린 인간이 바로 영화감독이다(예외는 있고, 서너명 알고 있지만 언급할 가치가 없으므로 다루지 않는다).  

 

 누벨바그의 태양이자 시조인 프랑수와 트뤼포를 이야기할 때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그의 영화적 아이덴티티를 지명하는 건 어렵다. 그는 영화감독이기도 하지만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고 영화 제작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를 연출하기 전에 그는 오픈 스포츠카를 몰며 1950년대 파리 시내를 휘젓던(동시에 여자도!) 스타 영화평론가였고 그 이전엔 영화관과 ‘시네마떼크 프랑세즈’를 제 집보다 더 자주 드나든 영화광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트뤼포를 흠모하는 영화애호가들은 그를 가리켜 '영화인과 영화애호가'를 함께 지칭하는 시네필(Cinephile)이라 불렀다. .

 

 2. 누벨바그

  누벨바그(Nouvelle Vague)는 직역하면 ‘새로운 물결’이다. ‘새로운 경향’이라고 의역할 수도 있다. 트뤼포, 에릭 로메로, 장 뤽 고다르, 알렝 레네가 이 그룹에 속하는 대표적인 영화연출가들이다. 그러나 기표는 유사해도 트뤼포와 그외 감독들의 누벨바그는 기의에서 갈라진다. 트뤼포는 르네 끌레망 같은 선배 감독들의 불필요한 형식주의와 클리세(Cliche)적 연출스타일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누벨바그의 이름표를 달았다. 그러나 장 뤽 고다르, 알랭 레네등 소르본대학교 출신 감독들은 영화를 정치적 표현매체로 인식하고 필름에 자신의 의식세계를 투사하면서 누벨바그의 명찰을 달았다. 비록 같은 그룹에 속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소르본 출신의 먹물 누벨바그와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트뤼포의 누벨바그가 성격상 분기한다.

 

 특히 고다르는 트뤼포와 애증이 깊은데, 한때 이 둘은 절친했으나 영화 연출의 노선차이로 끝내 절교한다. 사실 고다르의 영화도 트뤼포의 작품 못잖게 훌륭하다. 일부 평론가들은 트뤼포보다 고다르를 한 수 위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객에게 물으면 고다르는 트뤼포의 명성위에 서거나 압도할 수 없다. 그 까닭은 트뤼포가 누벨바그의 원조이기 때문이 아니고 고다르의 영화가 관객의 마음에 파고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릭 로메로, 알랭 레네등 고다르를 포함한 트뤼포외 누벨바그 감독 작품 중에서 내 마음에 스며든 영화는 오직 트뤼포 뿐이다. 특히 (나는 아무리 애써도)고다르의 영화를 내 몸 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고다르가 찍은 몽타주 쇼트와 점프 컷이 혁신적이고 유명해도 그건 영화평론가들에게나 의미 있지 나처럼 평범하게 영화를 즐기는 관객에게는 의미 있게 다가오지 못했다. 

 영화를 사이에 두고 감독과 관객이 서로소(relatively prime)이면 그 작품은 망한다. 그리고 작품이 관객의 몸속으로 상쾌하게 스며들지 못할 때 극장에서 유일한 볼거리는 출구로 빠져나가는 관객과 그 맞은편 화장실에서 꼬여드는 쇠파리(평론가/촌지 받고 감탄사나 끼적이는 일간지 문화담당기자)들 뿐이다.

 

 3.<400번의 구타> http://www.youtube.com/watch?v=I5hilXRG8Tc

 <400번의 구타>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느꼈던 감동과 충격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시작되었다. 윗부분만 겨우 보인 에펠탑의 중심으로 흑백의 빠리(Paris)는 물결처럼 흐른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나는, 카메라가 에펠탑이 주변으로 뱅뱅 돌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달아나려고 수 없이 시도하지만 운명의 사슬이 내 목을 움켜쥐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 14살 소년이 바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는 울고 있었다. 학교 폭력과 가정 불화를 피해 달아났지만 소년의 눈앞에 펼쳐진 그 넓은 바다는 갈 곳 없는 소년을 따뜻하게 껴안아줄 엄마의 품이 아니었다. 바다는 소년의 앞을 가로막는 장벽일 뿐이고 소년은 도망쳐 왔던 길로 다시 몸을 되돌린다. 관객이 소 목에 걸린 멍애처럼 결코 벗을 수없는 소년의 불우한 운명을 확인하는 그 순간 소년은 카메라를 정면에서 노려본다. 그리고 프리즈 프레임.  FIN(팽/끝)!

 세상의 무관심에 절망하는 14세 소년 앙뜨완의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익스트림 클로우즈 쇼트로 영화가 끝났을 때 세계 영화사는 깜짝 놀라며 고함 질렀다. 누벨바그가 나타났다!

 

 내가 <400번의 구타>를 보면서 울었던 이유는 영화 속의 앙뜨완과 유년의 내 일부가 유사한 사이즈로 포개졌기 때문이었다. 열 몇 살 때 나는 가정문제로 일주일간 가출했었다. 가출 첫날부터 이후 3일간 나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도시의 이곳저곳을 먼지바람에 휩쓸린 검은 비닐봉지처럼 떠돌았다. 아무도 나에게 손내밀지 않았다. 그누구도 내게 관심 주지 않았다. 나를 유령보듯 외면한 체 모두 제 갈 길만 찾아 걷는 사람과 아스팔트 위로 무심히 흐르는 자동차는 나와 무관한 세상이었다. 어린 그때 나는 이 무심한 세계에 극심한 두려움과 증오를 느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공포는 지금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았다. 내 심장 깊은 곳에 상흔으로 남아 때로는 악몽의 형태로 잠든 나를 덮친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부모에게 매를 맞고 유기되어 빠리 시내를 떠돌던 앙뜨완은 프랑수와 트리포 감독의 유년의 에피소드이고 14세 소년 앙트완을 연기한 장 피엘 레오는 트뤼포의 페르소나이면서 동시에 유년의 내 초상이기도 하였다.

 

 트뤼포의 전기작가는 <400번의 구타> 탄생과정을 이렇게 썼다.

“그는....자신의 유년기 특정 시점을 다룬 <앙투완의 가출>을 손질하기로 결정했다. 밀통가의 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는 실수로 수제를 못해 벌을 받게 되자 수업에 빠졌다. 그의 핑계(“어미니가 돌아가셨어요.”)는 다음날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가 수업 주에 찾아와 그의 따귀를 심하게 때렸던 것이다. 6월 초에 트뤼포는 이 에피소드에 어린 시절의 다른 기억, 라슈네와 함께 무단결석, 영화 관람, 장터에서 탔던 회전 놀이기구, 부모와의 생활모습, 클리시 광장에서 연인의 품에 안기던 어머니가 그를 발견하고 놀라던 일을 덧붙였다. 장인에게 보여준 뒤 자금을 얻기 위해 그는 이 기억에 몇몇 다른 아이디어를 연결해 시나리오 앞부분을 채웠다.’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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