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김화영의 알제리 기행> 111쪽에서 119쪽까지의 단상
“중계자: 카뮈 미망인
이 책을 결코 읽지 못할 당신에게”
-알베르 까뮈 <최초의 인간>. 11쪽. 열린책들. 김화영 옮김
<최초의 인간>은 까뮈가 쓴 죽기 전까지 쓰고 있던 소설이다. 사람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무의식이 죽음을 예감한 탓일까? 부사와 관형사를 뚝 잘라 없애 버리고, 단문에 독립절로 직조된 데뷔작 <이방인>과는 달리, 이 작품의 두 번째 문장은 읽다보면 주어를 놓칠 만큼 아주 긴 묘사문으로 쓰였다. <최초의 인간>은 작품 자체보다는 1960년 1월 4일 교통사고로 사망한 까뮈의 마지막 소설 원고라는 운명적 상황 때문에, 까뮈의 독자에게는 매우 감정적 느낌으로 다가온다. 물론 까뮈는 이 소설을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내가 <최초의 인간>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건 작가가 어머니에게 바친 짧은 헌사였다. 처음엔 시큰둥했다. 까뮈의 모친은 글을 읽을 줄 모른다. 따라서 노벨상 문학상씩이나 탄 유명작가의 스테레오 타입의 가지기만적 입발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화영의 알제리 기행>을 읽고 난 뒤, 저 토막문을 다시 읽었다. 내 생각이 짧았다. ‘석탄이 떨어진 싸늘한 봄철’에 라디에이터를 껴안은 느낌이 왔다.
알제 리용가 93번지
알제리는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알제는 알제리의 수도다. 알제의 리용가 93번지(현제는 124번지)에는 부조리의 철학자이자, 세계적 소설가 알베르 까뮈의 유년을 담은 집이 있다. <김화영의 알제리 기행>에 표현된 것에 따르면, 그곳은 빈민가라고 한다. 그러니 까뮈가 살았던 100년 전에는 말할 것도 없다.
남루한 2층 건물로 나선형 계단은 폭이 좁고 경사는 가파르며, 한낮에도 동굴 속 같은데 철이 벗겨진 난간 위엔 바퀴벌레가 다녔다고 까뮈는 말했다. 그가 이 집에 세 든 시기는 아버지가 전사한 후였다. 까뮈의 아버지는 1914년 1차 대전에 프랑스군으로 징병되어 그해 10월에 부상으로 죽었다. 그는 29살이었고, 그의 둘째인 아들 알베르 까뮈는 만 한 살이 되던 해였다. 죽은 아버지보다 세 살 연상이었던 까뮈의 어머니(까트린 카뮈)는 서른셋에 과부가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카뮈 유족에게 보훈연금을 지급했으나 알량했다. 카트린은 그 돈을 믿고 알베르와 뤼시앵 두 어린 카뮈를 건사할 수 없었다. 카트린은 두 아이를 앞세우고 친정어머니가 세 들어 사는 알제 리용가 93번지로 이사했다. 방 둘에 부엌이 하나 딸린 가난한 2층 집인데, 그 집엔 까뮈의 외조모와 벙어리인 외삼촌이 살고 있었다.
출발이 고단했던 인생의 <안과 겉>에서 본 <긍정과 부정사이>
<안과 겉>은 알베르 카뮈가 1935년(22살)에 쓰기 시작한, 상징과 은유로 정치하게 직조된 철학에세이다. 스승인 장 그르니에게 이 작품을 헌사했다. 카뮈는 서문에서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고 이 작품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 작품 속에는 표제작인 <안과 겉> 외에도 <아이러니> <긍정과 부정사이><영혼 속의 죽음> <삶에의 사랑> 등 4편의 에세이가 더 실려 있다.
다섯 편이 한데 묶인 이 에세이에서 카뮈의 머릿속에 부조리의 바람을 일으킨 작품이 <부정과 긍정사이>다. 그의 유년에 일어난 일들, 그중에서 큰 충격과 트라우마를 입힌 사건이 3인 화자의 담담한 어조로 손으로 벽을 쓸 듯이 독자에게 증언한다.
“어머니가 가엽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증거일까? 어머니는 그를 쓰다듬어 준 일이 한 번도 없다. 그럴 줄을 모르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우두커니 서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남이라는 것을 느끼며 그는 어머니의 괴로운 마음을 의식한다.”
-알베르 까뮈 <안과 겉 : 긍정과 부정사이>.알베르 까뮈 전집 특별판 제1권 237쪽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서 더부살이하는 세상 모든 엄마는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비슷한 모양을 그린다. 까뮈의 엄마는 친정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느라 제 아이를 드러내 놓고 사랑해주지 못한다. 회초리를 들고 설치대는 ‘거칠고 독선적인’ 외조모에 서슬에 까뮈의 엄마는 침묵 속에서 그저 깊고 따뜻한 눈길로 까뮈를 바라보기만 한다.
완전히 연소되지 않아 폐를 쑤시는 매캐한 연기가 남은 집에 사는 것처럼, 아무런 희망도 기대할 수 없고 오로지 고단한 세월만 기다리는 삶이 귀신처럼 끊임없이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아무리 찾아도 생의 기쁨이 있을 리 없지만, 그나마 전셋집의 손바닥 만한 발코니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는 것, 오직 그것만이 까뮈의 어머니를 마음을 위로했다.
“어머니는 해가 질 무렵이면 발코니에 나가 앉는 습관이 있었다. 의자를 하나 갖다 놓고 앉아서 발코니의 차갑고 소금기가 밴 쇠에다 입을 댄다. 그러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등 뒤에서 차츰차츰 밤이 깊어가고 앞에서는 갑자기 상점들의 불이 켜진다. 거리가 사람들과 불빛으로 부풀어 오른다. 거기서 어머니는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며 앉아 있었다.”
-알베르 까뮈 <긍정과 부정사이>.알베르 까뮈 전집 특별판 제1권 238쪽
인간이 삶속에서 이 세계에서 부조리를 느끼는 것은 특별한 학습과정이 필요 없다. 예기치 못한 상황, 가령 아버지의 죽음이나 방금 전에 나와 통화하면서 나와 데이트할 레스토랑으로 오던 여자 친구가 통화하던 도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순간 그때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빈틈없이 신뢰로 꽉 찬 이 세계는 산산이 무너져 대지에 흉측한 잔해로 흩어진다.
발코니에서 거리를 바라보는 게 삶에서 유익한 낙이었던 까뮈의 어머니에게 잔혹한 운명이 스며든다. 어른이라고는 외조모와 엄마뿐이었던 까뮈 가족의 셋집에 동네 불량배가 난입하여 까뮈 어머니를 덮쳤다.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그대로 기절한다.
“그런데 문제의 저녁에 어떤 사나이가 불쑥 등 뒤에 나타나서 그 여자를 끌어당겨 난폭한 짓을 하고는, 인기척이 들리자 도망쳐버렸던 것이다. 그 여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기절했었다. 아들이 왔을 때 어머니는 누워 있었다. 아들은 의사의 지시대로 어머니 곁에서 밤을 지내기로 했다. 그는 침대 위에서 어머니와 나란히 그냥 이불 위에 누웠다. 여름이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소동의 공포가 무더운 방 안에 서려 있었다.”
-알베르 까뮈 <긍정과 부정사이>.알베르 까뮈 전집 특별판 제1권 239쪽에서
인용한 지문에서 ‘그 여자’는 까뮈의 어머니이고, ‘아들’과 대명사 ‘그’로 표현된 사람은 까뮈 자신이다. 바로 이 순간에 독자는 작가가 그때까지 끌고 왔던 서술화자 ‘나’란 1인칭 대신에 느닷없이 3인칭 내레이터인 ‘그’를 채택한 이유가 이해하게 된다. 이미 십 수 년이 흐른 과거의 사건이었으나, 에세이를 쓰면서 유년의 그 장면을 회상하는 순간, 의식 속에서 먹구름에 가려진 그날의 폭력의 재연되고 그의 심장에 새겨진 외상에서 붉은 등이 켜진다. 상처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졌다고 믿었던 성인이 됐어도 고통을 내 몸속에 잠복해 있었을 뿐, 삭제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까뮈는 자신을 타자화 하지 않고서는 그날을 그려낼 수 없었던 것이고, 그날에 생긴 트라우마는 어머니의 시신이 안치된 관 앞에서 까페오레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의 또 다시 재연된다.
여자나 남자나, 인생을 살면 살수록 기쁨은 휘발되고, 마음에는 상처만 기록된다. 남편의 애정 어린 눈길과 달콤한 손길은 신혼의 몇 년 침대 위에서 뿐이고, 시간이 갈수록 남편의 관심은 아내 몸 너머로 향한다. 아내가 그걸 눈치 채면서 선택한 방어기제로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로 애정을 쏟아 붓기 시작하지만 그러나 ‘진짜 다 필요 없고, 내가 너 하나 때문에 산다’고 믿었던 그 자식새끼들마저, 집 밖으로 나갈 때 ‘다녀오겠습니다’하던 이 코멘트가 ‘나 갈게요’로 바뀌는 순간(아마도 그녀의 허리둘레는 남편과 동일한 치수의 50대 중후반 쯤 일거다)에 교통사교를 당하듯 느낀다. “인생이란 게 참...” 그리고 부엌에서 남편이 먹다 남긴 양주를 한 잔 따라 마시면서 ‘내가 살아온 얘기를 쓰면 스무 권짜리 대하소설로도 모자랄 것’이라고 한탄한다.
“무거운 공기 속엔 환자의 의식을 회복시키느라고 썼던 식초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한편 그의 옆에서 어머니는 몸을 뒤틀며 신음하다가 이따금 갑작스럽게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들은 잠시 들락 말락 하던 잠에서 깨어나, 벌써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혀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일으키곤 했다.(...) 남은 것은 오직 환자의 겁먹은 신음 소리만이 가끔 솟아올라 자라는, 저 커다란 침묵의 정원뿐이었다. 그는 여태껏 그처럼 낯선 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세계는 완전히 해체되어버렸고, 그와 동시에 삶이 매일매일 다시 시작된다는 환상도 사라져버렸다.”
-알베르 까뮈 <긍정과 부정사이>.알베르 까뮈 전집 특별판 제1권 239~240쪽 사이 발췌
고통의 크기로 따진다면, 서른셋에 과부가 되어 파출부 생계를 꾸리며 사내 아이 둘을 키우며 살다가, 노벨상 문학상을 받은 아들을 앞세우고도 오욕의 삶을 더 살았던 카트린 생테스(알베르 카뮈 엄마의 결혼 전 이름)만큼 기구할 수 없다. 부모는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중계자: 카뮈 미망인
이 책을 결코 읽지 못할 당신에게”
당대에 문명을 떨친 철학자이자 세계적 스타 작가의 모친이, 아니 그 남자의 근원이 이성의 대표적 표지인 글을 못 읽지 못한다는 건 아이러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문자를 읽고 그 기호의 의미를 해독하는 것만이 이성의 중심이라고 강조하는 외려 인간을 모독한다. 아마도 이 부조리의 철학자는 그걸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가 어머니를 가리켜 “이 책을 결코 읽지 못한 당신”이라고 수식한 한 건 결코 연민만은 아닌 것 같다. 언어가 있고 사물이 있는 게 아니라, 사물이 있지만 그걸 서술하고 묘사할 언어가 우리에게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니까, 카뮈가 어머니에게 헌정한 저 말을 나는 이쯤으로 해석한다. “저를 무에서 형태를 만들어 유로 이끌어낸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