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은 제가 혼자 영화관에서 봤던 영화입니다. 옛 사랑의 기억을 달래주던 김동률의 노래 때문에, 그 이유 하나만으로 영화관에 갔었죠. 영화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밤에 티비로 다시 봐도 영화가 주던 그 감정이 올라오더군요.
특히 이 영화에서 주목할 몇 부분이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빛의 활용입니다. 모름지기 빛(혹은 조명)은 극의 분위기를 결정하죠. 특히 로맨스는 그 빛을 따라 인물의 심리는 물론이고,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인물들의 모습도 아름답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유명한 감독은 '조금만 더 가까이'의 연출을 맡은 김종관 감독인데요, 그의 데뷔작이라고 볼 수 있는 '폴라로이드 작동법'에서 제대로 드러나죠. 창을 뚫고 들어오는 줄기빛으로 만화책에서 볼 법한 연출처럼 설렘의 음영을 드러내죠. 빛을 잘만 활용하면 어떤 못난 인물도 감동적일만큼 아름답게 찍을 수 있는데, 여기 건축학개론은 화사하고 눈부신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줍니다. 특히 주인공들의 젊었을 때 모습을 봄처럼 찍었습니다. 초반에는 화사하다 못해 아주 눈이 부셔요. 강의실에 들어오는 빛이나, 그 사이로 들어오는 수지의 모습. 빛을 통해 설레이게 하죠.
그리고 편집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이 영화의 영상은 한 시간축을 이루는 시퀀스가 따로 덩어리로 떨어져서 관객들에게 보여지죠. 예를 들면 이제훈이 수지랑 철길 위를 걸은 다음에 나오는 영상인데, 바로 밤으로 넘어가죠. 납득이가 나오는 부분도 극의 흐름과는 좀 동떨어집니다. 현재와 과거를 나타내는 부분도, 초반이 지나면 연출상의 설명 없이 넘어갑니다. 대부분 이런 편집을 하기 위해서는, 화면을 넘길 때 최대한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연출상의 기법을 씁니다. 납득이가 처음 나오는 장면이 그런데요, 이제훈과 수지가 같이 걷다가 수지가 가니 옆에서 납득이가 나타나죠.대부분 이런식으로 편집을 위한 기름칠을 합니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은 그런 부분에서 휙휙 넘어가죠.
어떻게 보면 관객들에게 불친절하다고 할 수도 있는데요,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듣지 않는 이유는 이 시퀀스들이 한데 뭉쳐 한 이야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연기, 이야기, 여러 연출들의 힘이지요. 오히려 자연스러운 화면넘김을 위한 연출에 신경썼다면 마지막에 주는 감동이 줄어들지도 모르니, 오히려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그런 연출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주는 감정이 첫사랑의 설렘 보다는 이미 세월이 주는 회한이기 때문입니다. 첫사랑은 첫사랑일 뿐이었습니다. 음대에 다니던 아리따운 아가씨는, 돈 많은 의사랑 결혼하고, 위자료를 더 받기 위해 이혼하기를 미룹니다. 하나뿐이며 지긋지긋해하던 피아노 재주로 다른 피아노 학원이 있음에도 또다시 학원을 차립니다. 썅년 맞지? 라고 묻는데, 썅년 맞죠. 그리고 이 썅년은 아버지를 수발들며,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를 위해 제주도에 집을 사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현실적인 썅년에게 설레지 않아요. 혹 설렌다 하더라도 그건 풋풋함을 상실한 이혼녀와 약혼남의 위태한 사랑입니다. 청춘의 로맨스는 현실에 부대끼며 속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도 어린 마음에 어머니에게 철없는 짓을 많이 하고, 또 그 철없음을 나중에 깨닫죠. 게스 티를 보여주는 장면이 그런 의도 때문입니다. 단순히 멜로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근본적인 심상, 이문열이 선집의 소제목으로 말했던 '시간의 파괴력과 돌아보는 쓸쓸함'을 보여주기 위해 넣어야 했어요.
그리고 이 효과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으로 완성됩니다. <무엇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 택시 기사가 보았다시피 한겨울 새벽 거리를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심야 택시의 묵시록적인 관통 속에서 휙 지나가듯 내 첫사랑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완성된 순간 비스듬히 금이 가버렸다.> 권여선의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서 적은 것처럼 빈 집에 놓인 CD플레이어와 전람회의 음반, 그리고 다시 한가인에게 도착한 기억의 습작은, 스케치가 끝내고 완성한 기억과, 그리고 완성된 순간 금이 가버린 쓸쓸한 기억을 관객들에게 보여줍니다. 마지막, 카메라가 공중에서 바다를 보여주는 장면은, 이제 첫사랑이라는 제목의 습작을 마치고 현실로 눈을 돌릴 때의 회한의 심상, 그 울림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좋은 영화는 많지만, 좋으면서 재밌는 영화는 많지 않습니다. 좋은 영화를 추천하면 사람들이 그 좋음을 인정하면서도, 좋음에 대한 무게에 고개를 갸웃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웃음이 끼면 그 좋음이 가볍고 쉽게 다가옵니다. 이 영화는 그 부분을 납득이가 책임지고 있습니다. 아마 납득이가 없었다면 관객수 100만은 줄어들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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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집중해서 써보는 감상글이다. 나만 권여선을 떠올린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