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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욕심인지, 거기에 부딪치는 한계인지. 아무튼 일단 해본다. 소설은 다 써봐야 아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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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좀 써진다. 다행이다. 체증이 내려간다. 이 앞 부분만 여섯 번이나 새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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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래의 한강은 사건 위주이다. 더 구체적인 묘사에 대한 기대는 무리였다.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이랑 사랑 그 녀석, 일단 두 권. 어렵게 써보려고 했지만, 생각해보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더라. 에둘러 갈 필요 없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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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를 쓰며 종래의 서사에 대해 반성해보고자 한다. 물론 이번에 쓰려는 이야기는 반성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 어느정도 기존의 서사의 맥과 같이 흐른다. 하지만 벗어나려는 시도 또한 보일 것이다.

 

 적어도 내게 한국문학은 지나친 관념적 서사, 그로인한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테마의 부재가 문제였다. 물론 개인적인 서사 서술은 대단히 치밀하고 섬세하여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미학을 이루어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현실, 글을 쓰는 사람이고 문학 작가라면, 자기 이야기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문학을 요구한다. 형식의 파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써 공통된 감정을 느끼며, '현재'를 배경으로 호소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문학에서 '새로움'이란, 근본적으로 배경의 문제이다. 배경의 문제가 과거에는 없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런 조짐이 보인다. 배경에 관해서는 나중에 적기로 하자. 현 세대는 현재 내가 쓸 글이 아니다. 아마 쓴다면 내년 즈음에 쓰겠지.

 

 과거의 서사들이 전부 인물군상을 그려낸 것은 아니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많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한국 문학 안에서 말이다. 하지만 앞서 쓰자니, 아직은 내가 많이 부족하다. 다른 작가에게 기댈 수조차 없는 노릇이다. 모두들 사소설류의 관념서사나, 세카이계를 쓰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스승님은 했을지도 모른다.

 

 90125는 그에 대한 시도이다. 이는 같이 일하는 고감독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며, 동시에 극을 이끌어나가는 힘을 고민에 대한 작은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시대나 그랬지만 한 시대의 답은 이후 한 시대의 물음이다. 우선은, 내가 대답을 해볼 차례이다.

 

 주인공1의 핵심 흐름은 떠나간 환상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긴 서사를 이끌 수 없다. 우선 캐릭터 성격의 양감을 살려보고자 한다. 현실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캐릭터이다. 친구들도 마찬가지. 기존의 서사와 자주 보이는 세카이계는, 그저 다른 성격의 인물 뿐이었다. 어떤 세대나 집단을 아우르지는 않았다. 이를 극복해보고자 한다. 사실 극복이라고 말하지만, 과거의 서사에서 보였던 방식이므로, 답습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과거와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문장이다. 단순한 묘사로 그치지 않는다. 모든 문장은 감정을 담아야 한다. 이것은 담론이 외면되는 감정 과잉의 시대인 현재에 필수이다. 그리고 이 방법이 현재와 과거의 서사의 타협이다.

 

 '바람의 그림자'를 염두했지만, 바람의 그림자만큼 치밀하고 빽빽한 플롯은 힘들 것이다. 과거처럼 문장으로 이끌어나가는 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쪽으로 미뤄둔 '기나긴 이별'이 그 해답이 될수도 있다. 기나긴 이별은 추리소설이지만 바람의 그림자보다 플롯이 쉽다. 우연과 감정이 도사린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대안이 될 수 있으나, 플롯으로써는 좋지 않다. 주인공 둘의 교차서사는 이 부분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뿐, 플롯은 대단찮고, 문체는 한계가 있다.

 

 하루키에 대한 얘기를 더 해보자면, 개인적인 확고한 감성이 있으나 그 뿐이다. 방향을 알려주지 않는다. 나는 문학이 세상을 바꾸리라 생각하지는 않으나, 개인을 변화시킬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개인을 위해서, 문학은, 작가는 처음에 단순히 자신을 표현할 뿐이지만, 자신과 자신의 세계관의 성장에 따라 개인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1의 문장 및 인물은, 과거의 가치 호소의 과잉과, 관념적인 현재 문학에 대한 나의 대답 중 한 가지이다. 1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무가치하고 개인적인 서사라는 점에서 현재 관념 문학의 모습을 보인다(포기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테마에서는 가치 있다). 하지만 그 서술 방식은 과거의 이야기 볼륨을 따른다. 자신의 이야기 이외에 주인공 이외의 인물들을 비중있게 그릴 수도 있다. 즉 가치는 관념 서사의 가치이나, 서술은 관념과 과거 방식의 혼합이라는 이야기다.

 

 주인공 2는 다르다. 목적이 과거 문학에서 두었던 가치이며, 서사는 다분히 현재 내면적인 읊조림이다. 이런 방식을 노렸던 건 아니지만, 생각해보니 괜찮을 것도 같다. 안 좋을 이유가 없다.

 

 90125는 주인공1 때문에 사실 많은 자료조사가 필요하다. 그 때 가치란 구체적이며 손에 잡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주인공3은 미뤄졌는데, 상황에 맞춰 빠질지도 모르겠다.

 

 글이 어떻게 나올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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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간은 90~95년도.


 예스의 90125 앨범과 얼만큼 연계될지 모르겠다.


 생각했던 주인공3은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르겠다. 1과 2는 유기적으로 연계된다. 내용이 아닌 문장으로 연결시켜볼까 한다.


 핵심이 되는 사건 몇 가지가 있다.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94년도 더위, 김일성 사망


 93년도 지존파 사건, 그리고 대전 엑스포, 청주 우암상가 아파트 붕괴, 김영삼 대통령 취임


 91년도에는 냉전이 끝났다.


 다미선교회 휴거와 여러가지. 



 일상생활이 중요하다. 당시 대전의 스케치도 중요하고. 둔산은 개발이 안 된 상태. 송촌도 마찬가지이다. 은행동을 중심으로, 대전역은 만남의 광장이었다. 대단히 규모가 컸다.


 몇 가지 소재를 더 생각해보자면, 당시 악보 뒤에 적힌 펜팔 주소를 통한 인연, 천막 나이트, 홍명상가 등이 있다. 펜팔 인연은 비중있게 다루어질 듯하다. 어떤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모래시계 등의 드라마도 얘깃거리이다. 당시 문화상을 살펴봐야 하겠지만. 아이돌 세대 이전의 서태지 등의 다양한 음악문화. 오락실. 서커스나 올림픽 등의 게임들이 있었다고 하며, 당시 50원짜리를 썼다고 한다.


 듣던 음악들. 듀란듀란, 신디 로퍼 등. 흥행하던 영화는 홍콩 느와르이다. 주윤발과 장국영 등등. 시립도서관은 옥계동에 있었다고 한다. 대전천 위인가? 이건 조사해야 할 문제.


 대흥동은 지금처럼 예술의 거리까지는 아니었다. 은행동은 나이대가 어린 사람들이 갔고, 대흥동은 술 자금이 되는 20대가 갔다고 한다. 중구청의 역할이 한 몫 했을 수도 있다. 지금 예로 들자면 은행동과 둔산의 차이가 아닐까. 당시 음악다방이 유행했다. 까페에 디제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디스크 플레이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홍명상가 나이트는 꽤 유명했다고 하며, 당시 작은 극장들이 많았다. 중앙극장, 서라벌 극장, 동아극장, 아카데미 극장 등등. 아카데미 극장은 아직도 남았다. 당시 유행하던 아르바이트가, 각 극장마다 필름을 전해주는 아르바이트였다고 한다. 홍명극장에서 서라벌로, 서라벌에서 동아로. 자전거를 타고 전해줬다고 하며, 각 극장마다 알바가 있었다고 한다. 동시상영은 힘든 이야기.


 대전 연극계는 대전 인사들로 새로운 지평을 맞이한다. 대전 연극인 모임을 중심으로, 서라벌 예대 등의 사람이 아닌 충남대나 한남대 등의 지역 연극인들로 꾸려나가게 되는 것이다. 청춘예찬 등의 연극도 이 때. 신의 아그네스도 이 때 했나? 아무튼, 카톨릭문화회관도 제 기능을 했다.


 순수를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웰즈의 벽문이 대답이다. 물론 좌절을 겪는다. 끝내 좌절이 승리할지 모르지만, 써봐야 안다. 주인공1의 안티테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문체의 힘으로 끌고나갈 수도 있다.


 창녀의 경우에는 관점을 다르게 해볼 생각이다. 미시적인 관점이 아닌 거시적인 관점의 목소리이다. 그리고 창녀의 안티는 기둥서방이다. 성애묘사는 '인생의 베일'을 참고할 것. 느낌의 문제이며, 성애 이후의 문제이기도 하다. 주인공 근처의 여자의 경우, 주위 여자들을 참고할 생각이다. 작은 희망에 기대를 걸고, 자해하며, 남 탓을 하는, 그리고 자책과 실수를 반복하는 삶.



 왜 쓰는가? 에 대한 대답은, 대전의 재구성이다. 바람의 그림자가 바르셀로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듯, 나 역시 그러고자 하는 의도이다. 환상적인 리얼리즘이라고 했듯, 비현실풍으로 적을 가능성도 꽤 된다. 문체의 전범은 챈들러와 사폰이 될까? 모르겠다. 아예 고딕풍으로 갈 지 모른다.



 대전의 재구성, 순수, 환상, 목소리, 의지, 이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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