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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아침에 읽기 시작해서 저녁에 다 읽었다. 허삼관의 모습에서 피땀 흘려 일하고도 그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 땅의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03.12.14”
책 첫 장에 10년 전 책을 읽고, 끄적인 글이 눈에 들어온다. 무엇보다 이책은 10년 전 읽었을 때도 재미있었다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10년 전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의 얼굴이란 말에서 느껴지듯이 그 당시 내가 ‘허삼관매혈기’를 읽고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시공간을 떠나서 가난한 약자들의 삶은 기득권자가 만들어낸 구조 속에서 변하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대학생이던 나는 정치를 비롯한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다. 맑스를 읽었고, 진보적 인사의 글을 탐독했다. 내 눈은 언제나 밖을 향해 있었다. 허삼관과 비슷한 삶을 살았던 가난한 농민이었던 아버지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하려하기 보다는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사회를 비판하고, 부정하려고 했었다.
10년 후 세 번째로 읽은 ‘허삼관매혈기’ 안에서 발견한 것은 그전과는 사뭇 다르다. 허삼관의 가족을 위한 희생의 여정 속에서 ‘아버지’의 삶을 동정했고,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믿음과 웃음을 잃지 않는 허삼관 일가를 통해서 우리 ‘가족’을 떠올렸다. 처음 허삼관매혈기를 읽은 10년 전에서 지금까지의 시간동안 나는 아버지를 잃었고,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가슴으로 느꼈었다. “일락아, 오늘 내가 한 말을 꼭 기억해 두거라.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난 나중에 네가 나에게 뭘 해 줄 거란 기대 안 한다. 다만 나중에 나에게, 내가 내 넷째 삼촌에게 느꼈던 감정만큼만 가져 줬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내가 늙어서 죽을 때, 그저 내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좀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 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p.199)" 친아들이 아닌 첫째 일락에게 허삼관이 한 말이다. 아버지의 사랑과 인간애가 담담하게 다가온다. 아버지가 되보지 않고 아버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평범한 공장노동자인 허삼관이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매혈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회의 비극이 이야기를 이루는 밑바탕이다. 하지만 그 비극적 현실에 절망만 하지 않고, 가족애와 인간의 양심으로 웃으면서 건강하게 현실을 버텨내는 허삼관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위대한 '힘'을 느낄 수 있다. 미학적 표현을 지양하고 투박한 허삼관의 말과 행동을 담박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허삼관의 삶이 느껴졌다. 있는 그대로의 삶 자체가 어쩌면 가장 재미있고 가장 슬픈 이야기이며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