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199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하드커버와 감각적인 표지디자인으로 둘러싸인 책에 익숙한 요즘이다. 출판사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책 만들기에 열중이고, 독자들도 종이 한 장 한 장에 쓰 여진 내용보다 종이를 둘러싼 커버에 더 이끌려 책을 선택하기도 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책에도 해당되는 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각설하고, 이 책은 예전에 나온 책이기도 하나 요즘의 유행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 다소 촌스런 색상과 디자인의 겉모습이다. 진한 회색 표지 위에는 전우익 선생의 흑백사진이만이 덩그러니 있고, 활자는 큼지막한 게 초등학교 문집이 생각날 정도로 두께가 얇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고. 비록 겉모습은 다홍치마는 아니지만 짙은 주름과 굳게 다문 입술의 선생의 표지사진을 보면 선생의 인생이 어땠을지, 선생의 철학이 어떤 색깔과 향기를 가지고 있을지 사뭇 짐작이 되면서 책 속에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 지 궁금해진다. 투박한 겉표지와는 다르게 책 속에는 거대한 우주 속 진리가 있지는 않을까라고 생각되기도 하며,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란 정겨운 제목에 미소한번 지으며, 고집쟁이 농사꾼의 세상사는 이야기는 과연 어떤 걸까 기대하며, 책장을 넘겨본다.

 

책은 선생이 소중한 친구와 9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가 담겨져 있다. 담박하게 시작하는 안부와 계절인사. 자연의 변화와 선생의 소소한 일상 속에서 찾아낸 인생의 지혜와 세상의 진리가 소박한 시골밥상처럼 우리를 따뜻하게 데워준다. 정겨운 목소리에 진한 흙내음이 느껴지고, 바라보는 진중한 눈빛은 사람에 대한 희망을 머금고 있다. ‘씨의 공통점은 작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고 묻기 쉬우며 땅에도 별 부담감을 주지 않습니다. 나무도 어린 묘목을 심어야 많이 심고 살기도 잘 삽니다. 큰 나무는 옮기기도 심기도 힘들고 살리기도 힘듭니다. 옮겨 심은 큰 나무는 몇 해 몸살을 앓다가 겨우 살아나거나 말라 죽기 일쑤입니다.’(p.65)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심어 기르고 키울 수 있을 만큼 작고 작은 교리와 이론이어야 사람 사이에 씨로 뿌려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씨가 땅에 묻혀 싹을 틔우듯, 사람의 인격과 삶의 일부도 딴 사람에게 묻혀야 한다고 여깁니다.‘(p.66) 작은 씨 하나로 작금 지식인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면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선생의 혜안을 느낄 수 있다.

 

책 속에는, 중국 근대화시기의 지식인 노신을 통해 전해주는 개인주의와 민족에 대한 생각들. 권력에 취해 사람을 보지 못하는 무슨 자리깨나 앉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엄중한 비판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편을 들어온, 그래서 진짜 민중으로 이 땅에서 두발로 일어서지 못했던 우리들에게 보내는 당부들. 도시화와 개방화로 절박해진 농촌의 문제들. 노동의 문제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의 문제에 대한 선생의 철학들이 오랜 세월 비바람속에서 영근 단단한 열매가 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계절에 따라 자연이 변하듯이 세월에 따라 우리네 삶도 변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계절이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 ‘사람이란 미우나 고우나 어차피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p.126) 전우익 선생이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잔잔하면서 깊은 울림이 있는 한마디가 있다.

 

법정스님은 진짜 양서(良書)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고 했다. 책 내용이 어려워서 자꾸 덮인다는 게 아니라 한 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언뜻 보기에 쉽게 읽힐 것처럼 보인다. 큼지막한 활자와 낯익은 단어, 친근한 문체. 하지만 읽다보면 한 장을 쉽게 넘겨 버리기가 어렵게 된다. 자꾸 생각이 많아지게 된다.

‘누에를 쳐보니 다섯 번 잠을 자고, 다섯 번 허물을 벗은 다음 고치를 짓습니다. 탈피 탈각이 없이는 생명의 성장과 성취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탈피 탈각을 하지 못하면 주검이겠지요.’(p.21) 자꾸 책을 덮이게 만드는 구절들. 그 구절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양서는 거울과 같은 것이며, 그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 준다. 온갖 치장으로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사람보다 ’맑은 시선과 조용한 미소와 따뜻한 손과 그리고 말이 없는 행동‘을 가진 사람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듯이, 비록 겉은 투박하고 촌스럽지만 속은 맑고, 조용하고, 따뜻한 이 책은 조용히 우리를 감동시킨다.

 

옛사람들이 말하는 다독(多讀)은 이 책 저 책 많이 읽는 다독이 아니라, 한번 읽은 책을 읽고 또 읽는 다독이었다고 한다. 소가 되새김질하여 여물을 완전히 소화시키듯(牛嚼) 다시 차근차근 음미하며 읽어나가고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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