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나무야 -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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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회와 유리된 감옥이라는 공간속에서,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시대에 대한 고민과 마주했으며, 자유가 억압된 영어(囹圄)의 시간 속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유를 했던 신영복 선생님의 사람과 자연과 삶에 대한 성찰의 기록이다. 거짓과 폭압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진실과 화해의 흔적을 찾아내고 결국은 바다로 가고야마는 강물과 같은 역사의 진보를 믿었던 신영복 선생님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하는 간곡한 당부이다.

 

사람, 자연, 역사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지금은 “Time is gold" 한시라도 쉬면 안 되는 ‘시간이 금’인 시대라고 한다. 남보다 시간을 아껴 더 일하고, 더 공부해서 경쟁에서 승리하여 더 높은 곳으로 더 빨리 가야하는 그런 시대이다. 한번 쉬면 그만큼 남보다 뒤쳐진다는 게 상식이 되어버린 시대이다. 진솔한 내면의 성찰을 할 시간보다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간에만 몰두하는 시대이다. 자연 그대로의 것보다 인공적인 개발이 진보이며 발전이라고 믿는 시대이다. 질보다는 양을 취하고 사용가치를 버리고 교환가치를 취하는 가슴과 사랑이 사라져버린 그런 시대이다. 사람과 자연과 역사를 까맣게 잊은 채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화사한 언어의 요설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의 앞뒤좌우에 우리와 함께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으로써 깨닫고, 삶으로써 가르칠 뿐이라 믿습니다.’(p.18)

신영복 선생님은 경쟁을 통해 누군가를 짓밟고 이기는 게 진리가 아닌 사회를 꿈꾼다. 나와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를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면서, 사람들과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란다. 인간은 인간(人間) 사이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소나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소비하면서도 무엇하나 변변히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소광리의 솔숲은 마치 회초리를 들고 기다리는 엄한 스승 같았습니다.’(p.24) 신영복 선생님은 자연은 우리의 삶이 영위되고 있는 토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자연을 오로지 생산의 요소로 규정하는 경제학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산위에 올라가서는 자연의 위대함에 감탄하지만, 산에서 내려와서는 인공의 확장이 발전이라고 믿는 우리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름다운 봄꽃 한송이를 기뻐할 수 있기 위해서도 우리는 아름다운 꽃의 추억을 가져야 합니다. 하물며 비뚤어진 오늘의 그릇들을 먼저 바로잡는 일 없이 세상의 진정한 봄을 맞이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p.116) 잘못된 역사로 인해 20여 년간의 감옥생활을 했음에도 선생님의 글속에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애정이 넘쳐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증오와 불신 속에서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을 것인데 선생님의 글은 단정하고 따뜻하다. 역사는 우리가 맡기지 않더라도 어김없이 모든 것을 심판한다는 믿음 때문일까? 옳든 그르든 과거는 덮어두고 앞만 보며 달려가야 한다는 외침이 공허할 수밖에 없음을 또 한번 되새긴다.

 

20여년의 영어의 몸에서 독보(獨步)의 자유를 얻은 후 역사를 보듬고 있는 국토의 곳곳에서 보내는 그의 편지에는 우리 시대에 대한 날선 비판보다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사람에 대한 믿음과 자연에 대한 애정, 그리고 사회에 대한 겸손한 비판은 속도와 높이경쟁의 사다리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는 우리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표를 마련해준다. 가슴과 사랑이 사라져버린 시대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시선이 천천히 머무는 낮은 곳에는 여전히 사람과 자연과 역사에 대한 믿음이 굳건히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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