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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평점 :
[상냥한 폭력의 시대]
[★★★]
[당신의 선택은?]
[2017. 6. 21 ~ 2017. 6. 25 완독]
※ 인용구로 인해서 모바일로 보기에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모바일 상에서는 인용구 테두리가 보이지 않는군요. 어떻게 해결한다?)
※ 스포일러 일부 포함.
나는 그럭저럭 살아간다.
p10
사랑하는 딸의 아이지만, 사랑스럽기보다는 딸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10대 부모'라는 딱지라는 현실의 벽을 통감(痛感) 하는 엄마는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의 수술 동의를 미루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습.
2년마다 끊임없이 올라가는 전세 계약금에 치를 떨며 이사 갈 집을 알아보는 와중에 찾은 '좋은 매물'의 집은, 안락한 보금자리를 위해 20년 담보대출까지 해서 무리를 한 '우리 집'은, 사실은 정신이 나간 어떤 사람이 쓰레기 장으로 만들어 놓고 그 집에서 자살까지 한 흉흉한 집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결국 집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삶의 소용돌이를 잘 표현한 모습.
등등.
사실 아무런 접점이 없는 여러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주는 것은 <상냥한 폭력의 시대>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대놓고 '타인의 상실'이라는 공통점을 얘기하는 작가는 '뜨거운 이상과 차가운 현실이라는 온도차'에 대해 나에게 툭하고 던져준다.
작중의 인물들은 모두 어떤 선택의 기로(岐路)에 놓인다. 이러한 선택이 자의/타의가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상황은 꼭 지나쳐야 하는 하나의 관문처럼 등장인물을 괴롭힌다.
'그냥 이야기를 읽는다.'라는 측면에서 보면 다양한 삶의 면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작중 인물의 상황이 된다면 '나는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면 이야기는 한층 심각해진다.
선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분명 이야기 속의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다.'라는 이름 아래 범법을 저지르고 비윤리적인 선택을 한 경우도 있다. 당연히 이에 따른 비난과 책임은 온전히 내 몫으로 돌아오겠지만... 과연 당신이라면 어떠한 선택을 내릴까?
내가 지고 가야 할 책임이 없는 남의 일에 훈수는 참으로 쉽다. 오로지 이상론을 펼치며 '잘 될 거야!', '뭐든 할 수 있어!'라고 얘기하기에는 당신도 알다시피 현실은 가혹하다. 나라면 '10대 부모'가 겪어야 할 막중한 책임감과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이 진행되는 '삶의 무게'라는 트랙에 올라서려는 딸을 위해 기꺼이 아이를 포기하겠다는 선택을 할 것이다. 태어난 아이가 가지는 생명의 고귀함을 입에 담을 수는 있겠지만, 원망을 받더라도 딸의 미래를 선택하겠다. 당연히 욕먹을 일이고 비윤리적인 일이다.
그리고 거의 반쯤은 사기를 당해 자살을 한 집으로 들어가는 부부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과감히 내린 선택이 '누군가 자살한 쓰레기 집'이라는 불러오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심정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런 집이라도 살아가야만 한다면 또 살아가야지 어찌하겠는가?
이래서 나는 어지간하면 말을 아끼는 편이다. (말주변도 없지만)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지만, 나는 겪어도 봐도 모르는 게 사람인 것 같다. 물론 나도 '나'라는 편견에 비추어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평범한 삶'의 그림자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드라마틱한 인생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믿는다. 또한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태도와 극한의 상황에서의 태도는 분명 다를 것이기 때문에 쉽사리 타인을 판단하기도 어렵다고 믿는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라는 제목처럼 모두가 말하는 상냥한 이상 뒤에 현실이라는 폭력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서글프다.
자,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이것은 커다란 도미노 게임이며, 자신들은 멋모르고 중간에 끼어 서 있는 도미노 칩 같았다.
p179
벽에 붙은 하트 모양의 수면 등을 끄자 세상이 꽉 닫힌 어둠에 잠겼다.
p227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아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죄가 또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절망했다.
p97